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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9 20:21
[한국사] 우리 삼국의 초기역사를 부정한 식민사학자들 (4부)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401  

고구려는 태조왕 이후, 백제는 고이왕 이후, 신라는 내물왕 이후

                                                                       황순종 고대사 연구가


초기 고구려를 부족연맹 단계로 규정한 이병도는 고대국가로서의 실질적 건국이 6대 태조대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그러면 문제는 고구려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 즉 부족연맹에서 집권적, 통제적인 정치태세로 옮긴 때가 대개 어느 왕 때에 해당하느냐에 있다.


여러 모로 고찰해 본 결과 제6대 태조대왕 때로부터 비로소 고대식 국가정치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첫째 왕의 호가 대조왕 혹은 국조왕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그렇게 인정치 아니할 수 없고, 다음으로는 패자, 우태 등 고구려의 관직명이 이 왕 때로부터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주의해야 하겠다.”

 

고대 국가단계의 고구려가 태조대왕 때 건국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로 든 것이 도무지 타당성이 없다. 우선 태조 또는 국조라는 왕의 칭호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서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그 당시까지 중국의 왕조든 우리 민족의 왕조든 건국시조를 태조라고 부른 일이 없었으며, 후세에 와서 건국시조를 태조로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

 




다음으로 이병도는 패자, 우태 등의 관직명을 거론하였으나 태조대왕’ 20년조의 관나부 패자 달고’, 22년의 환나부 패자 설유’, 80년의 관나부 우태 미유환나부 우태 어지류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패자와 우태는 관나부, 환나부 등 지방(5)의 관직명이었다. 그에 비해 왕 71년 조에는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사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 두 관직이 왕의 대신들인 중앙관직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병도는 왜 중앙관직을 제쳐두고 지방관직을 예로 들었을까? 중앙은 물론 지방까지도 관제를 완비했다는 뜻일까? 그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태조왕의 전 3대무신왕’ 10년 조에는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사실이 이미 나와 있으므로 태조왕 때 좌보와 우보를 임명한 것이 최초라고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지적할 것은 대무신왕 전 2유리명왕’ 22년 조에는 대보(大輔)’인 협보가 왕에게 간하는 기록이 있는데, 대보는 좌보, 우보와 함께 왕을 보좌하는 최고의 관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건국 초기부터 관직명이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감추고 태조대왕 때 와서야 관직명이 보인다니 난감한 일이다.

 

병도는 태조대왕을 시조로 보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왕의 대에 비단 안으로 대소 2수 유역의 제부족사회를 완전 통합하였을 뿐아니라, 밖으로 대한(對漢) 공세를 개시하여 요동, 현도 양군을 자주 침공하여······ 또 앞서 동으로 옥저를 복속시키고 남으로 살수에까지 지경을 넓히는 등 정복국가로 서의 태세를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다.····그 이전 5대 간은 부족연맹체에서 집권국 가 체제에 이르는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조대왕이 정복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나아가 한나라에까지도 공세를 개시했다고 강조하는 한편, 그 이전 다섯 왕의 시대를 과도기로 그 의미를 격하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섯 왕들의 정복 활동과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감추고 태조왕의 업적만 거론하고 있으니 이것이 올바른 문헌고증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 식민사학 계보. 서울대 이병도와 고려대 신석호의 후학이 강단사학계 주류 ©

 

태조대왕 이전에 삼국사기에 보인 정복에 관한 기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시조 동명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말갈을 물리치고 다음 해에는 비류국을 항복받았으며, 6년에는 행인국을 정벌하고 10년에는 북옥저를 멸하였다.

 

2대 유리명왕은 11년 선비를 항복시켜 속국으로 삼았고 32년에는 침입한 부여군을 섬멸시켰으며, 33년에는 양맥을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현도군을 습격하였다. 고구려가 건국과 더불어 정복국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다물(고토회복)을 위해 중국에 공세를 개시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3대 대무신왕도 5년에 당시 우리 민족 최대의 강국이던 부여로 진격하여 비록 실패에 그쳤으나 부여 왕족인 갈사왕의 항복을 받았다. 9년에는 개마국을 군현으로 삼으니 구다국은 두려워 항복했다. 11년에는 요동태수의 침입을 회유로 물리치고, 20년에는 낙랑국을 멸했다.

 

4대 민중왕은 5년만에 돌아가고 5대 모본왕도 즉위 6년만에 시해당하였으나 왕 2(서기 49)에 한나라 깊숙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이상 열거한 15건의 정복과 전쟁에 관한 일이 태조왕 이전 90년 동안에 있었는데, 부족국가에 불과한 고구려가 무엇을 믿고 천하의 강대국인 한에까지 도전할 수 있었겠는지 의아할 뿐이다.

 




고구려의 건국을 실제보다 90년이나 늦춘 이병도는 백제와 신라의 건국은 더욱 많이 늦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서 일제 강점기인 1934~37년 사이 진단학보에 게재한 3한문제의 신고찰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러한 잘못된 논의를 구체적으로 보기 전에 우선 그가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삼국시대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루지 않고 삼한문제의 고찰이라는 시각에서 다룬 것을 지적하겠다.

 

그는 삼국시대의 시작을 신라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내물왕(서기 356~402)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내물왕 이전 수백 년을 삼한시대로 다루었다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3국 중 백제의 흥기는 고구려보다 2세기를 뒤지고 신라의 그것은 백제보다도 1세기를 뒤졌으며······ 그러므로 3국 중 최후진인 신라의 흥기 이전이라든지 여제(麗濟) 멸망 이후 신라통일시대는 모두 삼국시대의 범주에서 제외 되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엄밀한 의미의 3국시대는 신라의 흥기(즉 내물왕 시 대;356~402)로부터 여제 2국의 멸망(660~668)에 이르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의 역사를 일본보다 빠르지 않게 하려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본 일본

 

이제 백제의 건국에 관한 이병도의 논의를 비판키로 하겠다. 이병도는 온조대왕의 건국사화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전설로 간주하고 백제의 시조가 8대 고이왕이라고 이렇게 주장했다  

백제국명이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기는 동진(東晋)시대의 기록으로부터였고 또 백제 에 관한 기전(記傳)이 중국 사서에 비로소 실리기는 유송(劉宋)시대의 기사인 송서로부터이거니와, 그렇다고 백제의 발흥이 동진대나 유송대에 시작되었다고는 물론 볼 수 없고 늦어도 3국말, 서진(西晉)초에는 일국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라고 인식된다.


3국말, 서진초는 이를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로부터 제 8대인 고이왕 조에 당하거니와 이 고이왕이야말로 이 나라의 국가적 체계를 이룬 건국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하여 나는 백제의 확실한 건국연대를 이 고이왕 27.8년 경(서기 260~261)으로 잡거니와 ····· 그런즉 주서(周書)의 소위 (백제 시조) 구태는 바로 이 고이에 당하는 인물로 간주함이 온당할 것이다.


고이와 구태는 자음상으로도 서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니 (ku)’(ko, ku)’는 물론이요 도 전혀 동음인 까닭이다.

 

백제에 관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동진 또는 유송시대부터 나타난다고 하면서도 이병도는 백제의 건국시기는 늦어도 그 이전인 3국말이나 서진초로 인식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고이왕 27,8(서기 260~26을 백제의 건국 시기로 보아 고이왕을 건국의 태조라고 했다. 그 근거로는 관제와 복색(服色) 및 법금(法禁)을 정비한 기록을 말하였으나 이는 자의적인 것일 뿐 객관성이 없다.

 




고이왕이 태조라면 그 즉위년부터 건국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정한 사안을 가지고 건국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고이왕을 시조로 만든 이병도는 그 이전의 삼국사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이() 이전의 제왕 기사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로서 고찰하면 그들은 대개 부락국가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임금들이거나 혹은 진 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것이거나 할 것이며, 따라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에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 다.

 

고이왕 이전의 기록은 후세에 윤색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누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 근거를 대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쓰다 소키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식민사가들은 8대 고이왕이 아니라 13대 근초고왕에 와서야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들의 주장이 틀렸고 이병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면 그 이유와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장보다 백제의 건국을 백 년이나 늦춰 본 일본인들의 입장을 모른 체하고 일체 비판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역시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을 신봉하고 있는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762&section=sc2&section2


  • 우리 삼국의 초기역사를 부정한 식민사학자들 (4부)
  •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전설로 보는 식민사학계 (3부)
  • 패수와 대수를 건너가 세운 백제 건국지를 찾아서 (2부)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어디인가? (1부)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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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러브 17-06-19 20:36
       
    간단합니다.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 남부에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가 있으면 안되지요.
    그래서 이병도의 스승 중 하나인 쏘다 쏘키치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뭐 고구려는 이미 요동에 진출했고 백제도 마한을 병합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걸 인정하면 임나일본부가 들어설 자리가 없거든요.
         
    꼬마러브 17-06-19 20:38
       
    그런데 웃긴 건 ㅋㅋ,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삼국사기불신론]이 아직까지 주류사학계의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더 나아가, 근초고왕 때까지도 백제는 전라남도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역개루나 부흥)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침미다례를 언급하면서..
              
    도배시러 17-06-19 20:42
       
    6세기까지 마한 유물이 발굴되는 까닭에
    백제가 한반도에서 제대로된 국가를 이뤘다고 보지 않습니다.
                   
    꼬마러브 17-06-19 20:43
       
    기록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니 고고학으로 끼워 맞추는 거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그리괴 도배시러님께서 잘 말씀해주셨네요.

    "백제가 한반도에서 제대로된 국가를 이뤘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게 임나일본부랑 이어지는 거죠.
                        
    도배시러 17-06-19 20:45
       
    그 문제는 시대가 맞지 않다고 하셨으니 언급할 필요가 있나요 ?
                             
    꼬마러브 17-06-19 20:46
       
    사실 언급할 이유조차도 없죠. 기록으로 보면 심부름꾼이든 뭐든 당시 일본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문명도 없었거니와
    백제는 이미 온조왕 시절에 마한을 병합했습니다.

    즉, 주류사학계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기록을 포기한 겁니다. 그들은 역사학자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거에요.

    사실, 한국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대부분 대학의 사학과들은 전부 [중국고고학과]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옳을 겁니다.
                             
    도배시러 17-06-19 20:48
       
    백제는 이미 온조왕 시절에 마한을 병합했습니다.
    ===> 문헌은 있지만 유물은 다른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위치의 또다른 마한을 병합했겠지요
                             
    꼬마러브 17-06-19 20:50
       
    사서기록을 제시해보세요.

    아니면 유물 중에 [마한 유물]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나요.

    주류사학의 논리를 계속 들어가다 보면

    미래에는 저희 집 앞에 있는 짜장면집을 발굴하고는 한반도가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도배시러 17-06-19 20:52
       
    사서는 필요없죠.
    유물이 백제 특성과 다르니 실효 지배를 못했다고 생각하는것이고요.
    게다가 중국 측에서 전라도까지 신경쓸 이유도 없는거죠.
                             
    꼬마러브 17-06-19 20:53
       
    사서가 필요 없다라..
                             
    도배시러 17-06-19 20:55
       
    중국 문헌에서 제주도를 언급하나요 ?
                             
    꼬마러브 17-06-19 20:58
       
    뭐 일단 수서를 보면..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 <수서> 백제전

    물론 일부에서는 여기에 나오는 탐모라국이 제주도가 아니라 류큐나 대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만 현재는, 제주도라는 것이 통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참고로 '제주'라는 명칭은 고려 후기때 되서야 나올 걸요?
                        
    도배시러 17-06-19 21:03
       
    언급을 해도 말이 안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거죠.
    동서 천리, 남북 백여리 라고 하면 말이되는거죠.

    그냥 흔적만 남긴거지 큰의미를 둘만큼 상세하게 기록하지는 않다는 의미로
    말씀드린겁니다.

    거리측정만 본다면 제주도 보다는 류큐 대만이 가깝네요
    대만...
                             
    꼬마러브 17-06-19 21:10
       
    그런데 이거 전체 해석이 이렇거든요.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창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 (중략) …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 만약 대만이었다면.. 현재의 지리상식으로 볼 때 굳이 백제를 경유해서 갈 이유가 없지요. 류큐가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는 당시 백제가 진출은 아니어도 류큐와 교류를 가지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겠지요.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덧붙여서 만약 여기에 나오는 탐모라국을 류큐로 본다면.. 당시 백제가 저 멀리 떨어져있는 류큐와도 교류를 가지었다는 말인데.. 바로 아래있는 전라남도지역에 진출을 하지 못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도배시러 17-06-19 21:34
       
    지도로 비교하면 대만이 거리측정값에 일치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백제 문제도 대안이 생기네요.
                             
    도배시러 17-06-19 21:45
       
    제주도 유물을 확인하니
    백제 관련 유물은 없고, 마한과 신라 유물이 있다고 합니다.

    신라는 제주도를 탐라 라고 했었고
    백제는 탐라, 탐모라 두가지 명칭을 사용하네요.
                             
    밥밥c 17-06-19 21:59
       
    사서가 필요없다 ..........

     너무나 위험한 이야기인데요 ..............

     돌려 말한다면 사서 한장도 안보고 역사이야기 하시는 건데요 ......................
                             
    도배시러 17-06-19 22:01
       
    한반도 거주민의 역사서라면 몰라도
    중국 역사서는 의미가 없다는 의미이죠. 변두리까지 상세기록을 할 이유가 없으니...

    조선시대에 왜국의 상세지리를 묘사한 서적이 있을까요 ?
    대충 언급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세하게...
    밥밥c 17-06-19 20:38
       
    고이왕이 태조라면 그 즉위년부터 건국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정한 사안을 가지고 건국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고이왕을 시조로 만든 이병도는 그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이(왕) 이전의 제왕 기사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로서 고찰하면 그들은 대개 부락국가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임금들이거나 혹은 진 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것이거나 할 것이며, 따라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에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 다.


     고이왕이 태조?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들이죠.
    비좀와라 17-06-19 21:32
       
    마한은 기록으로나 유물로도 한반도 남쪽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항인데요.

    기록으로는 마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고요. 유물로도 마한이라는 명문이 적혀진 유물이 없을 뿐만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왕궁터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을 인용해서 침미다례라는 독립된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 발굴된 대가야 왕궁터 같은 것이 발굴되야 인정이 된단 말입니다.

    침미다례의 흔적은 커녕 기타 마한의 정치세력의 왕궁터가 발굴이 되지 않아요. 왕궁이 있어야 어떤 정치적인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 하지요? 더군다나 마한의 목지국은 초기 백제를 능가하는 강국 이었단 말입니다. 그런 국가의 왕궁이 없을리가 없죠.

    결론은 한반도 남부에 마한은 존재하지 않았단 것이 기록과 유물로 증명 한단 말입니다.
         
    꼬마러브 17-06-19 21:36
       
    이게 정답이지요.

    애초에 말도 안되는 주장을 늘여 놓고
    거기에 맞춰 고고학 유물들을 자기 꼴리는대로 해석하는 것이 주류사학계의 관습입니다.
    기록을 보면 더더욱 말이 안 되고요.

    다시 말해, 기록과 유물로 역사를 찾아내고 발굴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역사를 자기 맘대로 정해놓고 기록과 유물을 거기에 레고조각마냥 맞추어 꼴리는대로 해석하는 ㅋ

    그리고 반박을 하면..
    그냥 무시하거나
    환빠라고 딱지를 붙이거나
    아니면 사서기록 같은 팩트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1차 2차 가정을 덧붙여 온갖 추측으로 처음부터 글러먹은 주장을 합리화하지요.
         
    도배시러 17-06-19 21:59
       
    백제의 전라도, 제주도 실효지배 흔적이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유물로 증명이 됩니다.
              
    마그리트 17-06-19 22:00
       
    짱개나 쪽발이는
    무슨 주장할 때 근거가 있고요? ㅋ
    거참 필사적이네
                   
    도배시러 17-06-19 22:03
       
    저의 의도는 백제를 대륙으로 퇴출시키는거죠 ㅋ
    다른 의견은 왜를 한반도에서 퇴출시키는거구요.
                        
    밥밥c 17-06-19 22:04
       
    퇴출은 시킬려고 하더라도 사서는 보셔야죠 ;;;;;;;;;


     사서 안보면 누가 그 이야기 들어주지도 않아요 .

     주류사학이 공개토론에 나오지도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여.
                             
    도배시러 17-06-19 22:14
       
    사서가 있어야 보죠. 유물과 사서가 불일치하는 백지영역인데... ㅋ
                             
    밥밥c 17-06-19 22:19
       
    일단 왜를 한반도에서 퇴출시키는 가장 좋은방법은 ,

     주류사학을 학계에서 퇴출시키는 것이죠.

     그러면 삼국사기 본기에 '임나'라는 단어가 한자도 나오지 않기에 가야와 임나는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임나'는 일본서기에 적혀 있으므로 자동으로 열도로 되돌아가죠.
    비좀와라 17-06-19 22:29
       
    저는 애시당초 기록에 따라서 백제가 한반도가 아니고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 했는데요?

    기록에 백제가 한반도로 진입한 것은 무령왕 때라고 나와 있고요. 그리고 무령왕릉은 지금 발굴되었습니다.

    기록과 유물은 일치하는 데요?

    신라국은 고려 동남쪽에 있으니 한나라 때는 이곳이 낙랑 땅이고 혹은 이것을 사라라고 한다.

      위나라 장수 무구검이 고려를 쳐서 깨치자 그들은 옥저로 달아났다가 그 뒤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가 되었다. 그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두 섞여 살아서 중국 사람도 있고, 고려와 백제 사람들도 있다.

      땅은 옥저, 불내, 한예의 땅을 모두 차지해 갖고 있었다. 그들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니 바다로부터 도망해서 신라로 들어가서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노릇을 하고, 왕위를 전해 나가서 진평에까지 이르렀다.

    -수서 동이전 신라 -

    이 기록에 따르면 전라도 지역을 선점하고 있던 세력은 신라죠. 이 신라를 백제가 무령왕 때 침탈하고 빼앗은 거라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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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기타] 동이에 대해 궁금한점 (7) Marauder 09-04 1505
    74 [기타] 흠정 만주원류고 (24) 관심병자 08-31 1956
    73 [기타] 상나라와 홍산문명.. (27) 막걸리한잔 08-29 1897
    72 [기타] 고구려 신대왕의 유주, 병주원정 (2) 관심병자 08-21 1677
    71 [중국] 원나라 시대 민족별 계층 (47) 고독한늑대 08-01 3996
    70 [한국사] 기록 관점으로 보는 낙랑(樂浪) 및 고조선(古朝鮮)의 … 현조 07-29 922
    69 [기타] 병자호란 포로 관련 (18) 관심병자 07-22 4134
    68 [한국사] 악이다사(鄂爾多斯 : 오르도스)이라고 불리우는 옛 … 현조 07-17 1293
    67 [기타] 조선(朝鮮)기생(妓生)의 원류(源流)는 달단(韃靼)? (2) 관심병자 07-16 1484
    66 [기타] 조선시대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 관심병자 07-16 1413
    65 [한국사] 제 견해로서 기록 관점으로 보는 삼만위(三萬衛 : 옛 … 현조 07-13 1250
    64 [한국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으로 보는 한주(桓州)의 위치. 현조 07-13 794
    63 [한국사] 중국의 입장으로 보는 서랄목륜하, 길림의 유수, 대… 현조 07-13 1082
    62 [한국사] 선비족은 고조선시절에는 우리랑 한집안이였지요 인류제국 07-03 1348
    61 [한국사] 동부여의 위치는 고구려의 북쪽 2 (5) 꼬마러브 07-02 1815
    60 [기타]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9) 관심병자 06-26 2980
    59 [기타] 선비(鮮卑)와 백제, 고구려의 전성기 (1) 관심병자 06-25 1999
    58 [한국사] 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1) 스리랑 06-21 2884
    57 [한국사] H.B.헐버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를 읽으면서 느끼는 … (4) 솔루나 06-20 1645
    56 [한국사] 우리 삼국의 초기역사를 부정한 식민사학자들 (4부) (28) 스리랑 06-19 1402
    55 [기타] 3.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의 여진 (4) 관심병자 06-18 1760
    54 [한국사] 대한제국 경제가 그리 만만한 경제가 아니었음. (11) 솔루나 06-16 2134
    53 [기타]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관심병자 06-15 1809
    52 [기타] 모용선비 치하에서 활동한 4세기 경 부여 유민들 관심병자 06-13 1621
    51 [기타]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10) 관심병자 06-12 2197
    50 [한국사] 낙랑 관련 삼국사기 기록 정리 (19) 감방친구 06-10 2169
    49 [기타] 백제의 중국 대륙진출1 - 요서지역 진출 관심병자 06-05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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