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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8 19:56
[기타] 3.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의 여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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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여직)16)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쓰여지던 시기는 발해왕실이 힘이 약해지고, 거란이 강해지던 903년 경이었다. 우선 사료상에 여진이 처음 나왔던 ꡔ요사ꡕ와 ꡔ구오대사ꡕ 등의 기록을 옮겨 본다.




C-1. 여진은 옛 숙신국으로 원래의 이름은 주리진인데 오랑캐말이 잘못 전해져서 여진으로 되었다. 원래 고구려 주몽의 유종인데 어떤 사람은 흑수말갈의 부로 발해와는 다른 종족으로 생각된다.


三韓辰韓其實東夷之小國也····三國志所謂挹婁 元魏所謂勿吉 隋謂之黑水部 唐謂之黑水靺鞨者 蓋其地也(ꡔ삼조북맹회편ꡕ권3)
2.
여진(女眞)은 곧 옛 숙신 국(肅愼)이다. 동한(東漢)시에는 읍루이며, 원위 때는 물길이고, 수당(隋 唐)때는 말갈이라 하였다


開皇遣使貢獻 文帝因宴勞之 使者及其徒起舞於前 曲折皆爲戰鬪之狀 上謂侍臣曰 ‘天地間乃有此物 常作用兵意’ 其屬分六部有黑水部卽今之女眞(ꡔ송막기문ꡕ권상)


3. (同光2年:924, 9月 庚戌) 有司自契丹至者言 ‘女眞回鶻黃頭室韋合勢侵契丹(ꡔ舊五代史ꡕ卷32, 莊宗本紀)

4. 唐天復元年(901) 歲辛酉 痕德菫可汗立 以太祖爲本部夷離菫 專菫討連破室韋·于厥及奚帥割刺哥 俘獲甚衆·····다음해 봄에 여직을 정벌해 물리치고 300호를 사로잡았다····11월에 편사를 보내 해를 토벌하고 습의 제부와 동북여직이 복종하지 않으니 남김없이 부셔 항복을 받았다(ꡔ요사ꡕ권1, <본기>1, 태조상)

5. 김함보는 말갈 출신이다. 말갈은 본래 물길이다. 물길은 예전 숙신 땅에 있었다. 북위 때 말갈은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속말부, 백돌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 수나라 때 말갈이라 칭하고 일곱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초, 흑수말갈, 속말말갈이 있었고 나머지 다섯은 전해지지 않는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속했으니 대씨였다. 이적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속말말갈이 동모산을 지켰다. 그 뒤에 발해라 불렸으며 왕이라 칭하고 십여명의 왕이 있었다. 문자가 있었고, 예약, 관부, 제도가 있었다. 행정구역은 5경1 부 62주로 나뉜다 흑수말갈은 숙신의 땅에 살았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했으며 고구려에 속했다 ···· 그 후에 발해가 강성할때 흑수말갈은 발해에 붙어 조공을 했다. 오대 시대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었다.남쪽에 있으며 거란에 적을 둔 것을 숙여직이라고 하였고, 북쪽에 있으며 거란에 적을 두지 않은 것(거란이라고 하지 않은것)을 생여직이라 하였다. 여진 땅에 살며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었는데 혼동강은 흑룡강이라 불리며 이른마 백산흑수가 그것이다. 김씨 시조의 휘는 함보이며 고(구)려출신이고 60살 정도 살았다. (그의) 형인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르려 하지 않으며 말하길 '후세 자손이 반드시 서로 모이게 할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갈 수가 없다. " 하였다. 홀로 아우 보활리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의 복간수 물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에서 살았다. 그후, 호십문이라는 부족이 갈소관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쳤는데 말하기를 그들은 시조와 같은 삼형제의 후손이며 그들은 아고내의 후손이고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후에 태조가 요의 군대를 국경에서 격퇴했는데 요의 장군 야율사십을 사로잡고 태조는 두명의 사절 양복 알답라를 보내서 발해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래 다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ꡔ금사ꡕ권1, 세기)

6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일가이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어 벌하려는데 급기야 그 허물이 함께 미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ꡔ금사ꡕ권2, <본기>2, 태조갑오10월조)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여진이라는 종족명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발해 말기(오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여진이 넓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발해가 멸망하고부터였다. 발해 말기의 여진이란 흑수말갈로 불리는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쓰여졌다고 하나, 여진이 그보다 넓은 범위에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였다.

여진의 종족계통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이라는 일원론적 종족계통설이다. 즉, 중국사를 중심으로 선진대에 활약하던 숙신이 한대에는 읍루라고 하였으며, 후위(원위)에는 물길, 수·당대에는 말갈이라 하다가 이들이 오대 이후로는 여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위의 ꡔ삼조북맹회편ꡕ, ꡔ송막기문ꡕ, ꡔ금사ꡕ<세기> 서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이 습관적으로 동북방 주민의 여러 부락과 종족을 하나의 종족으로 ‘통칭’하였던17)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종족계통론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관념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범칭으로 사용되던 위의 종족들은 하나의 종족계통만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ꡔ금사ꡕ에 근거하여 여진이 흑수말갈에서 나왔다고 하는 견해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의 여진이란 상당한 부분을 발해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흑수말갈의 위치가 동류(제일)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으로부터의 동쪽이었다면,18) 이 지역에 있던 흑수말갈이 여진으로 불리게 된 처음이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하고부터의 여진이란 이곳보다 연해주를 비롯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보다 전형적인 여진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ꡔ고려사ꡕ 등에 나오는 동여진(동번), 서여진(서번) 등을 비롯한 삽십성여진 등이 바로 그러한 곳에서 주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견해는 대략 흑수말갈인의 남하로 보는 경우가 지배적이다.19) 그러나, 전통적으로 만주지역의 종족명이 범칭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민족 이동론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변화에 따른 종족명의 사용이 달라졌다고 함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종족 이동은 소수였다는 것이다.

만주 주민의 종족명이 범칭되었고 민족이동설이 한계가 있다면, 여진이란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의 복합민족 정도로 언급함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20) 말갈의 종족계통을 다원적으로 보고, 지역명에 의미를 두어 속말말갈의 발해 건국세력을 ‘송화강지역 고구려변방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21) 여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해시대에는 흑수말갈의 작은 범위의 주민들이 발해가 멸망하고서 갑자기 대거 남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계기성이 결여된 견해라는 것이다. 아무튼, 소수 흑수인의 남하를 인정할지라도,22) 이들이 번성하여 곧 여진이 되었으며, 금나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금나라 이전 주민들의 발해유민과 흑수인들의 역사적 변화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나라의 주민이 되었던 다수의 주민들은 발해유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대부터 있었던 발해유민의 고려망명이 차지하는 숫자는 전 만주를 흑수인들의 나라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진으로 불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발해유민이었다는 사실은 숙여진과 생여진의 분류기준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거란에 부속되었던 여진은 숙여진이었고, 그렇지 않았던 여진이 생여진이었다는 위의 ꡔ금사ꡕ 기록을 믿는다면(사료C-5), 발해유민들의 거란화 정도에 따른 생여진과 숙여진의 구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초기의 여진은 흑수말갈로부터 출발하였다 할지라도, 발해멸망 이후의 여진은 다수가 발해유민을 지칭하는 종족명이었다는 것이다.

여진의 종족계통과 관련하여 여진의 시조 함보의 출자를 언급하는 경우도 많다. 즉, 위의 ꡔ금사ꡕ에 의한다면(사료C-5), 함보는 고려인 또는 고구려 유예 등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23) 그러나, 함보가 어디 출신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여진의 종족계통론의 결정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여진의 힘을 결집하였던 한 통치자의 출신문제와 관련이 있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진의 종족계통에 관한 문제는 오히려, 지배 집단의 출신 문제보다 지역사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함보의 출자문제는 여진의 종족계통과 그 실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또한 여진과 발해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함보가 고려로부터 왔다는 위의 ꡔ금사ꡕ 기록은 여진의 고려 및 고구려적 계통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三上次男이 주장하였던 함보의 고구려 유예적 성격에 의미가 더 있지 않은가 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곧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다는 의미와도 통하고, 발해의 고구려적 성격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진의 실상과 관련하여 후발해와 정안국의 관련성도 생각해야 한다. 정안국이 압록강유역에 있었던 발해유민의 국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정안국이 있던 압록강유역은 ꡔ고려사ꡕ 속의 서여진이 살던 곳이다. 그리고, 정안국이 멸망하는 시점이 10세기 말엽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24) 그 이후의 압록강유역 여진은 곧 정안국 주민에 대한 이칭이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코, 이들은 흑룡강 중하류 또는 삼성 인의 흑수말갈인들이 남하한 사람들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금나라가 건국되기 직전까지 후발해가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여진의 실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해가 멸망한 직후인 929년경에 세워진 후발해는 줄곧 옛 발해의 한 지역에서 왕조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발해가 멸망하고도 송나라에 ‘발해’ 사신이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발해의 멸망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즉, 和田淸은 그 존속시기를 10여년이었던 것으로 보는데 반하여,25) 日野開三郞은 그 시점을 1007년(遼 統和25年) 경이었다고 하며,26) 박시형은 1114년 경으로 보고 있다.27) 특히, 올야의 역사를 후발해사의 일부로 생각하는 日野開三郞과 朴時亨의 견해는 후발해와 여진의 관계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즉, 日野開三郞은 후발해의 멸망을 오사경(오소도)이 요 통화22년(1004)에 ‘여진’에게 붙들려 거란에 ‘바쳐졌던’ 사건을 근거로28) 후발해의 멸망을 언급하며, 박시형은 오사성발해국(후발해)의 멸망을 ‘올야’가 여진에 ‘귀속’하는 1114년 즉, 거란(요) 말기인 천경 4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9) 이와 같은 두 견해의 공통점은 모두 후발해가 여진에게 붕괴되었으며, 그들은 철저히 거란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진은 후발해와 전혀 어떠한 역사적 유대관계도 없던 이민족간의 관계였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한다. 즉, (생)여진은 후발해의 변방 주민이었으며, 이들은 후발해와 반독립적인 상태로 그 관계를 유지하다가, 후발해 올야 정권의 쇠퇴와 함께 거란의 힘을 이용하여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금나라를 건국하였던 다수의 여진은 후발해의 변방주민들로써, 후발해와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던 주민들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발해유민의 다수가 여진이었다는 사실은 여진 제부를 통합하던 완안측에 있던 양복과 알답라가 거란에 있던 발해유민들에게 하였던 위의 ꡔ금사ꡕ(사료C-5,6)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다는 내용이다. 생각키로 이것은 단순히 완안 여진이 거란의 지배력 아래에 있던 발해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시말해, 이것은 여진이 통합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영강주 공격을 성공시키려는 목적에서 발해유민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이 말은 엄연히 역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위의 ‘여진발해본동일가’ 기록은 여진이 발해의 피지배층 유예이자 발해유민이었던 사람들이었다는 한 증거 자료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발해시대까지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진이 후발해의 피지배민이었다는 생각으로도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본동일가’였다는 표현은 후발해인으로써의 ‘일가’라는 의미보다 과거 발해시대의 ‘일가’로 봄이 더 타당할 듯 싶다.

발해와 여진을 본동일가로 보는 위의 기록은 여진이 발해와 흑수말갈의 복합민족적 성격을 띈 종족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울러 이 기록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의 후손을 자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의 발해는 결코 말갈로써의 ‘발해말갈’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말갈이 그들 ‘일가’의 기준이었다면, ‘여진발해본동일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진말갈본동일가라고 했어야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또한 발해와 여진이 ‘본동일가’라는 위의 기록은 금나라에서 발해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던 사정과도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요나라에서는, 대연림의 흥료국(1129)과 고영창의 대발해국(1115)과 같은 발해부흥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전혀 이러한 사건이 없었다. 1115년 금나라가 서는 시기에도 발해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금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러한 부흥운동이 없었다. 요나 금을 막론하고, 조정에서 활약하거나 부흥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발해유민이란 모두가 지배층의 유민이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유민들은 두 왕조 모두에서 일정한 대우를 받던 부류였다. 그런데, 요나라에서의 발해유민들은 요나라가 멸망할 즈음에까지에도 부흥운동이 있었고, 금나라에서의 그들은 어떠한 부흥운동도 없었다.

금나라에서 발해부흥운동이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劉肅勇은 금나라가 발해유민을 다스리는 통치술이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0) 그러나, 요나라의 통치술이 결코 금나라보다 못했다고 단정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금나라에 맹안모극제가 있었던처럼 거란에도 남북원제가 있었다. 거란이 발해유민을 통제키 위해 실행했던 동단국의 요양 이동과 같은 강제 사민정책은 강력했다. 금나라에서도 발해인들에 대한 사민책이 있었다고는 하나,31)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란에서처럼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에 대한 대처였던 것은 아니다. 금초에 있었던 발해인에 대한 화북·산동으로 사치는 고영창의 대발해국이나 고욕의 난에 가담하였던 발해 세력, 또는 후발해 조정에 있던 무리가 아니었나 한다. 당시의 발해인이 고영창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대발해국 당시 고영창이 금나라와 협상하면서 ‘황제’를 고집하다가 금에 의해 참살되었던32)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올야 정권의 후발해 조정과 연결된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금나라를 건국한 세력과 올야 정권은 일정하게 같은 ‘일가’이면서도 금나라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견제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나라에서의 발해인 사치라는 의미는 거란초의 발해유민 사치와는 그 의미가 자못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란과 이민족의 입장에 있던 발해의 부흥운동에 대비한 것이 거란의 사치정책이었다면, 금나라에서의 그것은 ‘일가’안에서의 반대세력을 소개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 조정에서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인을 특별히 구별하였던 것은 거란내에 있었던 고영창 등의 발해유민 세력이거나 후발해 조정안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 여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발해와 여진의 역사적 관계에서 금나라에서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발해와 일정하게 ‘본동일가’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금나라는 한편으로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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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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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17-06-18 21:21
   
1번해석이 달라요 한자랑... 2번 한자가 위에있고 해석이 아래에있음... 당연하지만 2번 한자도 다르고...
     
호랭이해 17-06-18 21:28
   


     
관심병자 17-06-18 21:56
   

수정했습니다
도배시러 17-06-18 21:27
   
읍루, 물길, 흑수부, 흑수말갈, 黑水部 卽今之 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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