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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3 20:44
[기타] 모용선비 치하에서 활동한 4세기 경 부여 유민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621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834914936



중국 요녕성 조양 원대자고분 중실 동벽 중단 수렵도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前燕)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 벽화이다.

들어가기 앞서
선비족의 일파 중 하나인 모용부, 즉 모용선비는 3~4세기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와 그의 후계자인 모용황(慕容皝)이라는 걸출한 군주들의 등장과 함께 일약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나이에 모용부의 선우(單于)가 된 모용외는 요서의 대극성(大棘城)으로 거점을 옮기고는 농업을 장려하고 한족의 법제를 배우는 등 일대 개혁을 꾀하였다. 또한 주변 지역이 전란에 휩싸여 하서·산동·하남 일대로부터 한족의 인구가 유입되어오자 이를 흡수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고, 능력있는 사대부들을 참모나 교육자로 기용하는 등 유목민적인 성격을 탈피하여 유교적인 통치조직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모용외가 사망한 후에 그의 뒤를 잇게 된 모용황은 일찍이 중국의 학문을 익혀서 박학하고 식견이 있었을 뿐 아니라 문무에 걸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용부의 지배자가 된 모용외는 전연(前燕)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직후에 형제들과의 내분으로 큰 곤경에 처했으나 곧 이를 극복하고는 본격적인 영토 확장에 돌입했다. 이후 338년에 후조(後趙)와 연합하여 또다른 선비족의 일파였던 단부(段部)를 격파하였고, 동쪽으로는 342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하였으며, 북쪽으로는 344년에 선비족 일파인 우문부(宇文部)를 멸망케하였다.

이처럼 왕성한 정복사업을 통해 세력권을 확장해나가던 모용황은 346년에 세자인 모용준(慕容儁)으로 하여금 모용군(慕容軍)·모용각(慕容恪)·모용근(慕輿根) 등 3명의 장군과 17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부여는 전연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멸망에 가까운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부여의 왕이었던 현(玄)을 포함한 5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다. 모용황은 붙잡아온 부여왕 현을 진동장군(鎭軍將軍)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당시에 모용씨들에 의하여 포로로 끌려간 부여의 왕족인 여씨(餘氏)들은 이후 모용선비에 의해 세워진 전연(前燕),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후연(後燕)·남연(南燕) 등의 나라에서 활동하였다. 예컨데 부여의 왕자로 알려진 여울은 처음에 전연에서 벼슬을 지내던 중에, 전진의 부견이 쳐들어오자 부여·고구려·상당 지역 등에서 온 인질들과 함께 도읍인 업성의 문을 열고 부견에게 항복하여 전연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부견의 휘하에 있던 모용수가 연나라를 복구하여 후연을 건국하자 다시 그의 휘하에 들어가 측근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부여 유민 출신으로서 모용선비의 치하에서 활동한 몇몇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① 여울(餘蔚) : 4세기 경 
앞서 언급하였듯이 부여는 346년에 있었던 전연의 공격을 받아 부여왕 현을 포함한 5만 명의 인구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전연에서는 여울(餘蔚)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자치통감』에 달린 호삼성(胡三省)의 세주에서는 여울을 "부여왕자(扶餘王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자치통감』 진기 해서공 下) 또한 그는 "옛 부여왕(故扶餘王)"이라고도 불렸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上之上) 아마도 그는 전연에 끌려간 부여왕 현의 아들이거나 혹은 옛 부여의 왕족에 준하는 신분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인 여씨(餘氏)는 부여씨(扶餘氏)의 약칭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부여의 왕족이 부여씨를 칭한 사례로는 처음으로 관찰되는 것이다. (다만 이전의 부여왕들도 부여씨를 칭했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부여씨를 성으로 사용했던 백제의 왕족들도 중국에서는 여씨(餘氏)를 칭했다. 예컨데 중국의 사서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기록된 백제의 왕인 근초고왕은 함안 2년(372) 정월에 중국 동진(東晉)과 통교하면서 백제왕(百濟王) 여구(餘句)라 칭하였다. (『진서』 제기 간문제)

여울은 전연에서 활동하며 그 벼슬이 산기시랑(散騎侍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370년 11월에 전진의 왕인 부견(苻堅)이 전연을 침공해오자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상당(上黨) 일대에서 끌려온 500여 명의 질자(質子)들과 함께 전연의 수도였던 업(鄴)의 북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전연의 멸망에 기여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해서공 下) 이후에는 전진에서 벼슬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진이 동진(東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일찍이 부견의 휘하에 들어갔던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384년에 독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모용수는 여울을 포섭하여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삼았으며, 곧 정동장군(征東將軍)  통부좌사마(統府左司馬)로 삼았고 부여왕(扶餘王)에 봉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上之上) 여울은 390년에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거쳐 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下) 이후 396년 5월에 부여왕 여울을 태부(太傅)로 삼았다는 기록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下) 이후로 그의 이름을 더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여울은 부여의 옛 왕족으로서 전연과 전진 뿐 아니라 후연에서 벼슬을 지내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후연을 세운 모용수로부터 우대를 받으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자치통감』에 따르면, 앞서 여울이 모용수의 휘하에 들어가서 형양태수가 되자 창려(昌黎)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선비족의 여러 수장들과 그 무리가 모용수에게 투항해왔다고 하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기 어려우나, 여울은 모용수의 휘하에 들어갈 당시에 창려 일대에 어느 정도의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부여의 질자들과 함께 업성 문을 열어주었다고 한 점을 보면, 부여로부터 끌려온 이주민들의 대표자 행세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용수는 여울을 받아들여 그를 우대함으로써 창려 일대의 선비족들과 부여 유민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② 여화(餘和) : 4세기 경
여화는 384년에 모용수가 독립하여 후연을 일으켰던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모용수가 후연을 일으켰을 당시에 그의 아들이었던 모용농(慕容農)은 열인(列人) 지역으로 가서 오환(烏桓) 출신의 세력가인 노리(魯利)와 장양(張驤) 등을 설득하여 연의 부흥을 위해 군사를 모으는데 동참하도록 하였다. 모용농은 두 사람의 도움으로 열인의 거주민들을 사졸(士卒)로 삼아 병력을 모으고 나무와 천으로 병기와 깃발을 만들 수 있었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上之上)

이 때에 모용농은 조추(趙秋)로 하여금 도각(屠各, 흉노의 일종) 무리의 수장 중 한 사람이었던 필총(畢聰) 또한 연의 부흥에 동참하도록 설득케 하였다. 이후 필총을 비롯하여 도각의 복승(卜勝)·장연(張延)·이백(李白)·곽초(郭超)·동이(東夷)의 여화(餘和)·칙륵(敕勃)·열양(易陽)의 오환 유대(劉大) 등이 각기 수천 명의 부중(部衆)을 거느리고 모용농에게 가담해왔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上之上)

여기서 등장하는 여화(餘和)는 성이 여씨이며 또한 그를 가르켜 동이(東夷)라 칭한 것으로 볼 때에 마찬가지로 부여계에 속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는 모용수가 열양 일대에서 병력을 모을 당시에 이에 호흥하여 주변의 여러 부락의 수장들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그 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그의 행보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③ 여암(餘巖) : ?~385
여암은 후연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으로, 『진서』에서는 그 이름이 서암(徐巖)이라 표기되었으나, 『자치통감』에서는 여암(餘巖)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호규와 강종훈 등의 경우에는 그의 이름에 여(餘)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를 여울과 마찬가지로 부여의 유민으로 보기도 했다. 

여암의 생애와 내력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다만 385년에 후연에서 건절장군(建節將軍)의 지위에 있다가 돌연 그해 7월에 이르러 무읍(武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中之上) 그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여암이 난을 일으켰던 당시에 아직 후연이 건국된지 1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아서 내부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385년 6월에는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후연의 동쪽 변경을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 등의 2개 군을 빼앗는 등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회를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자립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반란을 일으킨 여암은 무읍에서 4천 명의 사람들을 붙잡아 북쪽의 유주(幽州)로 달아났다. 후연의 왕이었던 모용수는 휘하의 장수인 평규(平規)에게 굳게 지키며 싸우지 말고 자신이 올때까지 기다릴 것을 명령하였으나, 평규가 명을 어기고 여암과 싸웠다가 도리어 패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여암은 이윽고 계(薊)에 들어가 1천여 호의 인구를 붙잡았고, 지나는 곳마다 공격하며 곧 요서의 난하 하구에 위치한 영지(令支)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中之上)

그러나 여암의 난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모용수가 자신의 아들이자 용장이었던 모용농(慕容農)을 보내서 이를 진압하도록 한 것이다. 385년 11월에 모용농은 일부러 여암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사를 쉬게 하다가 보기(步騎) 3만을 거느리고 재빠르게 영지를 습격하였다. 이에 여암의 군사들이 크게 놀라서는 조금씩 성을 빠져나와 모용농에게 항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여암은 계략이 궁해지자 나와서 모용농에게 항복했고 모용농은 그의 목을 베었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中之上) 다른 기록에서는 여암 형제의 목을 베었다고도 하였다. (『진서』 모용수재기) 모용농은 그 직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5개월 전에 빼앗겼던 요동과 현도를 회복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中之上)

흥미롭게도 학계에서는 여암이 일으킨 반란을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연결시켜서 보는 견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여호규의 경우에는 여암의 성씨가 백제 왕실과 마찬가지로 부여씨였기 때문에, 훗날에 여암이 요서의 영지 일대를 점거한 것을 백제가 한 것으로 잘못 기술되어 그 것이 후대의 기록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강종훈의 경우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여암이 난을 일으켰던 385년 당시에 백제의 침류왕이 실제로 여암 등의 세력과 합작하여 요서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전사하였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된다.



④ 여숭(餘嵩) : ?~396
여숭은 후연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이 여(餘)씨라는 점 때문에 그를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 외의 내력은 알기 어렵다. 396년 2월, 평규(平規)가 전릉(博陵)·무읍(武邑)·장락(長樂) 등 3개 군의 병력으로 노구(魯口)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수가 진동장군(鎮東將軍) 여숭을 보내서 이를 공격하도록 했으나 싸움에서 패하고 죽었다. (『자치통감』 진기 열종효무황제 下)



⑤ 여숭(餘崇) : ?~398
그는 앞서 언급한 여숭(餘嵩)의 아들이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甲) 여숭은 후연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이 여(餘)씨라는 점 때문에 그를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397년 3월, 모용수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보(慕容寶)는 청하왕 모용회(慕容會)로부터 북위의 군사가 동쪽으로 침입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이를 막게 하였다. 모용회는 정남장군(征南將軍) 사욕관위(庫辱官偉)와 건위장군(建威將軍) 여숭으로 하여금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였는데, 사욕관위 등이 북위의 군사들을 정탐하니 그 기세가 굳세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여숭이 이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지금 큰 도적들이 우글거리고, 경도(京都)가 위급하여 필부들조차도 목숨을 던져서 군부(君父)를 구하고자 하는데, 제군(諸君)들은 나라의 총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목숨을 아끼려 하는가? 만일 사직이 기울고 신하들의 절개가 꺾인다면 죽어서도 욕됨이 남는다. 제군들이 이 곳에 편히 머물동안 이 숭(崇)은 마땅히 나아갈 것을 청한다."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자처했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甲)

사욕관위가 기뻐하며 급한데로 보기 500명을 내주자, 여숭은 이를 거느리고 진격하다가 어양(漁陽)에서 1천 명에 달하는 위의 기병들과 마주쳤다. 여숭은 부하들에게 "저 무리는 아군만 못하니, 치지 않는다면 득면(得免)치 못하리라"라고 외치며 사기를 드높이고는, 북을 치며 돌격하여 손수 10여 명을 죽였다. 결국 위의 기병들은 패하여 달아났고, 모용회는 여숭의 활약에 힘입어 계성(薊城)에 이르렀다. 이후 후연은 수도인 중산(中山)이 위군에게 포위당하는 등의 위기를 겪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4월에 여숭이 돌아오자 모용보는 그 충성스러움을 어여쁘게 여겨 중견장군(中堅將軍)에 봉하고 숙위(宿衛)를 담당케 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甲)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숭은 음영열공(潁陰烈公)에 봉해졌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乙)

398년 3월, 모용보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위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을련(乙連)에 이르자 단석골(段速骨)이 반란을 일으켜 용성(龍城)에 입성하였다. 이 때에도 여숭은 장진(張眞)·이한(李旱)·조은(趙恩)등과 함께 모용보를 호위하며 경기(輕騎)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乙)

이후 본래 단석골과 더불어 은밀히 반역을 꾀했던 연나라 황실의 외척 돈구왕(頓丘王) 난한(蘭汗)이 단석골을 공격해서 그를 죽였다. 그러자 모용보 등은 다시 용성 근방까지 돌아왔고, 이에 난한이 밖으로 나아가 모용보를 맞이하며 용성으로 모셨다. 이 때에 여숭은 난한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이를 은밀히 모용보에게 말하였으나 모용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몇 리를 못가서 난한의 아우인 가난(加難)이 먼저 여숭을 붙잡았는데, 여숭이 가난을 크게 꾸짖으며 "너희의 집안은 요행히 폐부(肺附)에 연에 닿아 나라의 총영을 입었다. 그런데 도리어 이를 갚지 아니하고 지금 찬탈을 꾀하니, 이는 천지가 용납못할 일이로되 곧 아침 저녘을 헤아려 멸망하리라. 다만 내가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 손으로 너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라 말하였다. 이에 가난이 여숭을 죽였다. 모용보 또한 곧 용성에 입성했다가 살해당했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乙)



⑥ 여초(餘超) : ?~399
여초는 후연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이 여(餘)씨라는 점 때문에 그를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 외의 내력은 알기 어렵다. 399년 4월, 여초는 후연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내던 중에 좌장군(左將軍) 고화(高和) 등의 모반에 연루되어 주살당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丙)



⑦ 여울(餘鬱) : ?~406 
여울은 남연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이 여(餘)씨라는 점 때문에 그를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 외의 내력은 알기 어렵다. 406년 9월, 여치는 남연에서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을 지내고 있었는데, 남연에서 서중랑장(西中郎將)을 지내다가 배반하여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封融)이 석새성(石塞城)을 습격하면서 살해당하였다. (『자치통감』 진기 안황제 己)



⑧ 여치(餘熾) : 4세기 경
여치는 남연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이 여(餘)씨라는 점 때문에 그를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 외의 내력은 알기 어렵다. 

여치는 남연에서 그 지위가 수광공(壽光公)에 이르렀는데, 단풍(段豐)이라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참소를 당하여 죽게 되자 과부가 된 그의 아내 모용씨(慕容氏)를 장차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모용씨는 일찍이 14살에 단풍을 남편으로 맞이하였는데, 재주와 지혜가 있어 책을 좋아하고, 북과 거문고를 잘 다루었으며, 큰 덕이 있었다. (『진서』 열녀전) 모용씨는 남연을 세운 모용덕(慕容德)의 딸인 평원공주(平原公主)와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여치는 모용씨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였으나, 모용씨는 두 남편을 맞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일부러 병을 칭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모용씨는 여치에게 "내가 죽거든 단씨(段氏)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라는 글을 남기고는 스스로 목을 메어서 죽었다. 그 장례를 치르자 많은 사람들이 와서 탄식하였으며, 여치는 모용씨를 애도하는 노랫소리를 듣고는 오래도록 절통해했다. (『진서』 열녀전)



참고문헌
강종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30, 2003
김기섭, 「부여족의 분산과 그 이동」,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과 관련하여」, 『진단학보』 91, 2001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지식산업사, 2003
지배선, 『중세동북아사연구 : 모용왕국사』,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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