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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5 21:41
[기타] 고구려, 돌궐, 유연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70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3731&cid=40942&categoryId=31642


돌궐족


튀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화한 말로, 처음에는 철륵(: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튀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유연(: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의 족장 토문(:만인의 이라는 뜻)이 유연·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이라 칭하였다(552).

이 무렵부터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켰다(563∼567).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동돌궐은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630년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682년 다시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 ·빌케가한[]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서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결탁하여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둘로 분열하였다. 당나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이주(:하미)와 서주(西:투르판) 등의 주현()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서돌궐은 한때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당은 657년 이를 토벌하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하였다. 7세기 말 돌기시()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돌궐은 멸망하였다.

돌궐의 국가는 일(il)이라 부르며 가한() 밑에 소가한()과 야부그[] ·샤드[] 등의 제후가 일종의 봉건영지를 소유하여 영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베크[]’라는 지배계층을 구성하였고, 일반 민중은 ‘부둔’이라고 하였다. 베크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기록, 즉 돌궐비문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샤머니즘을 믿고 있으나, 한때 불교가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 유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궐족 [突厥族] (두산백과)


고구려와 돌궐의 교류와 관계사

http://blog.naver.com/gnbone/220504094851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의 몰락은 초원제국 돌궐이 멸망했기 때문

http://blog.daum.net/0116010989/15888118



유연족(柔然族)

 

유연은 '예예(芮芮)' '여여(茹茹)' '연연(蠕蠕)'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오환, 선비와 마찬가지로 고대 동호 계통에 속하며 선비와 근원이 동일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3세기 말엽에 유연의 시조 목골각(木骨閣)은 선비 척발부의 노예였다. 4세기 초에 목골각의 아들 거록회(車鹿會)는 척발부가 세운 대국(代國)에 예속되어 매년 말과 담비 가죽 등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이때에도 유연은 여전히 씨족공동사회 말기에 처해 있었기에 수초를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거지에는 성이 없고, 몽고 파오와 유사한 파오에 살았다. 문자가 없어 처음에는 양의 똥 알갱이로써 병사들의 수를 기록하다가 후에는 나무에 새기는 방식으로 일을 기록하였다.

 

4세기 말에 거록회의 후손 사유(社嵛)는 군대를 일으켜 고비사막 북부 지역을 넘어 고차족(高車族)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였다. 후에 다시 흉노의 남은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그들의 통치 범위는 동으로 조선의 옛 영토, 남으로 음산(陰山)의 북쪽 기슭, 서로 지금의 신강(新疆) 언기현(焉耆縣) 이북, 북으로 바이칼호(貝加爾湖)에 이르렀다. 402년에 사유는 통일 정권을 건립하고 자칭 구두벌칸(丘豆伐可汗)이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유연은 흉노와 선비의 뒤를 이어 중국 북방 대초원을 지배한 또 하나의 강대한 고대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유연은 주로 유목생활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봄과 여름에 날씨가 따뜻할 때에는 고비사막 북부에 분산되어 유목생활을 하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다시 함께 무리를 지어 고비사막 남부 지역으로 내려와 방목을 하면서 기회를 틈타 그들이 필요한 양식과 다른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연과 남방의 인접국 북위 사이에는 전쟁이 자주 발생하곤 하였다. 6세기 초엽에 유연의 통치계급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칸 아나환(阿那環)은 북위로 도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의 지원을 받고 다시 무력으로 통치 지위를 회복하였다.

 

534년에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는데, 양자는 모두 강대한 유연과 연합하여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유연은 이 틈을 타고 남하하여 동으로는 동위의 역수(易水)까지 들어가고 서로는 서위의 원주(原州: 지금의 영하 寧夏 고원 固原)까지 다달았다. 그러나 유연의 세력이 남으로 확장되려고 할 때에는 원래 그들의 신하 부락이었던 돌궐(突厥)이 금산(金山: 지금의 알타이산)에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546년에 돌궐의 우두머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고차의 여러 부를 정복하고 유연에게 혼인을 강요하였으나, 유연의 귀족들은 그것을 크나큰 치욕으로 여기고 거절하였다. 돌궐은 이를 구실로 유연과의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군대를 일으켜 유연을 공격하였다.

 

555년 유연의 칸은 결국 돌궐에게 격퇴되어 천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위의 경내로 도망가고, 나머지 병사들도 여러 지역을 거쳐 서쪽으로 이주함으로써 유연의 칸국은 그와 함께 멸망하게 되었다. 유연의 칸국이 멸망한 후에 서쪽으로 이주한 유연인들은 대부분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하여 다년간의 융화 동화를 거쳐 새로운 민족 성원이 되었다. 고비사막 북부에 남아있던 유연인들은 돌궐족에 융화되었다.

 

유연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일찍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들은 역사상에서 무려 150여년간 중국의 북방 대초원을 지배함으로써 당시 중국의 형세와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그들의 흥망사는 중국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13&docId=415832&qb=7Jyg7Jew7KGx&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TgSLEdpVuEossuIyCJNsssssszs-039848&sid=Hzf/OL%2BvZVzNhDiC%2BKl7rA%3D%3D


<북위, 수, 당을 세웠던 선비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 공물, 양의 똥 부위는 악의적으로 기록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함.>


A.D. 479년 고구려와 유연의 '지두우(地豆于)분할계획'에 대하여 (1)

http://blog.naver.com/lord2345/220587566176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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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17-06-05 22:10
   
항상궁금한게 만리장성이... 저지도는 압록강에서 멈춰있는거같긴한데 왜 그렇게 뻗어나가있는건지 궁금. 심지어 지도는 진나라 지도인데
     
관심병자 17-06-05 22:30
   
추측해 보면
1. 식민사학자들의 한사군 한반도설을 참고
2. 중국의 동북공정
3. 고구려가 쌓은 천리장성의 오해
이런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꼬마러브 17-06-05 23:39
   
한사군이 만리장성 옆에 있거든요. 한사군을 한반도로 비정하려면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림 늘릴 수밖에 없지요. 유감스럽게도 만리장성을 처음으로 늘린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이병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 참고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9432

원래 이병도설에 따르면 황해도 수안까지가 만리장성인데 압록강까지라니.. 인심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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