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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5 11:21
[한국사]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고조(高肇)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301  

북위로 건너간 고조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 나가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 틀리고 생활풍습도 달라서 특별한 능력이 있어도 예체능이나 과학분야에서만 겨우 성공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정치가로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외국에 가서 곧장 그 나라의 권력자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고구려 출신으로 북중국의 강국인 북위에 들어가서 북위 왕의 외삼촌이 되어 북위 최고의 권력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쉽게 말해 지금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20여 년 만에 일본국 총리가 된 것과 같은 일이 고구려 시대에 있었다.

장수왕 시절에 고조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고양은 고조를 비롯한 4남 3녀를 모두 고구려땅에서 낳았고, 그의 선조들 역시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고조는 아버지 고양을 모시고 동생 고승신, 고현, 문소왕후가 되는 여동생, 그리고 고구려에서 같은 고향에서 살던 한내, 기부와 함께 470년경 북위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재미교포들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기 위해 재산을 팔아 북위땅에 간 것일까?

고조가 북위에 건너갔을 때는 친족도 없고, 한족이나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도 아니었기 때문에 최상층 부류에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각국이 인구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타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 서로들 대접을 잘해 주었다.

고구려도 타국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기도 했다.

고조는 고구려에서 유력한 귀족이었다. 그래서 북위에서는 그에게 려위장군 벼슬을 주었다. 동생인 고승신도 명위장군 벼슬을 받았다. 또 노비와 소와 말, 비단을 북위에서 받았다.

고조는 처음 북위에 왔을 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이 북위의 왕 효문제와 결혼하여 문소왕후가 되었다. 게다가 문소왕후는 아들 원각을 낳았다.

왜 효문제가 문소왕후와 결혼을 했을까. 단지 문소왕후가 미녀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여자가 미녀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집안이 세력이 큰 귀족이 아니면 후궁이 될 뿐 왕후는 될 수 없었다. 효문제가 문소왕후와 결혼한 진짜 이유는 그녀가 고구려인이기 때문이었다.

북위의 효문제는 강대한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고구려 여인을 택해 결혼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강력한 힘이 고조를 북위 왕의 처남이 되게 했던 것이다.

북위 효문제는 491년 고구려 장수왕이 죽자, 장수왕을 위해 상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북위의 왕이 고구려 왕을 위해 이런 의식을 치른 것은 문소왕후의 부모나라 왕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위가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고조를 출세의 길로 인도했다.

북위의 권력을 장악한 고조

499년 효문제가 죽자 문소왕후가 낳은 원각이 북위 7대 왕인 선무제가 되었다.

선무제는 궁궐에서 자라나 왕이 될 때까지 외삼촌 고조를 만나지 못했다. 선무제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궁궐로 불렀다.

고조는 자신의 조카가 북위의 왕이 되어 자신을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고생하던 일이 어제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 분 삼촌께서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외롭습니다. 제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저희들을 잊지 않고 불러 주시니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외삼촌들을 믿고 의지하셔요. 조정의 신하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쫓으려고 합니다. 대왕께 힘이 될 사람들은 어미와 외삼촌들뿐이랍니다.”

문소태후는 자신의 형제인 고조와 고현을 아들인 선무제를 돕는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무제는 고조에게 평원군공, 고현에게는 징성군공이란 벼슬을 주었다. 고조는 하루아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선무제는 또 함양왕 희란 자가 죄를 범해 죽자, 그의 재물과 보화, 노비와 밭, 집을 모두 고조 형제에게 주었다. 얼마 후 고조는 상서좌복야라는 더 높은 벼슬을 받았다.

동생 고현은 고구려대중정이란 벼슬을 받았는데, 이는 고구려 출신의 인재들을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가도록 하는 자리였다. 당시 북위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왕의 외삼촌인 고조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선무제가 왕위에 있는 동안 북위에서는 중앙의 귀족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 함양왕 희, 북해왕 상, 고양왕 옹, 팽성왕 사, 그리고 고조가 가세하여 서로 싸웠다. 북위에는 북위 왕 밑에 작은 왕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왕의 친척들로 큰 힘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특히 함양왕 희가 선무제마저 제거하고 북위 왕이 되고자 했다.

선무제는 이를 먼저 알고 외삼촌 고조를 불러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했다. 고조는 점점 사람을 모아 하나의 당을 만든 다음,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북해왕 상을 죽이고, 선무제를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여러 왕들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정적을 제거한 고조는 이제 북위에서 최고 권력자로 등장했다.

그러자 고조의 반대자들도 세력을 모아 고조에 대항했다. 하지만 선무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514년 고조는 선무제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남쪽나라를 공격하는 일도 했다. 그런데 다음해 갑자기 선무제가 죽었다. 고조는 급히 군대를 돌려 북위의 수도로 돌아왔다.

고조의 죽음과 북위의 고구려인

선무제가 죽자 고조는 너무나 슬퍼 며칠을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자신이 북위에서 권력을 갖게 된 든든한 배경이 선무제였기 때문이다.

고조의 반대파인 고양왕 등은 이 기회에 고조를 죽이고자 했다.

고조는 궁궐로 들어가 선무제의 시신을 보고자 했다. 선무제의 시신은 궁궐 내의 태극전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인 고조가 선무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고조를 태극전으로 안내했다.

고조는 슬픔에 젖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태극전 주변에는 그를 죽일 암살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조가 태극전에 올라갈 순간이었다. 이때 반대파들이 서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힘센 장사들이 뛰쳐나와 고조의 목을 비틀어 끌어내어 죽여 버렸다. 고조의 15년간에 걸친 권세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삼실총 벽화

삼실총 벽화고구려 장사의 모습. 두툼한 팔뚝이 인상적이다.

고양왕 등은 고조가 나쁜 짓을 많이 했기에 죽였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고조와 함께 무리를 만든 다른 고구려 사람들은 죄를 묻지 못했다. 그저 벼슬만 낮추는 데 그쳤다. 그것은 북위 내의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경우 고구려와의 관계가 나빠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고조가 죽은 후인 519년 고구려 문자명왕이 죽었다. 북위에서 정권을 쥔 영태후는 동쪽 사당에 나아가 문자명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렇듯 북위는 고구려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그래서 고조가 죽은 후에도 북위에 건너간 고구려 사람들은 여전히 높은 벼슬을 하고 출세를 했다. 특히 고조의 아들인 고식은 청주자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죄인의 아들이 이렇게 지방장관이 된 예는 흔치 않다. 그것은 고조의 세력, 즉 고구려의 세력이 북위 내부 깊숙이 자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구려인 가운데 고잠은 북위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고숭은 낙양령의 벼슬을 받고 정치를 잘해 칭송을 받았다. 북위가 망한 후에 세워진 북주에서 출세한 고림은 북주의 군사령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북위에는 고구려의 힘을 빌어 출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활약은 당시 고구려와 북중국 나라들간의 충돌을 예방해 주고, 고구려의 평화를 가져온 요인이기도 했다. 이들의 성공은 곧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대단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위를 뒤흔든 고조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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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자 16-10-05 12:46
   
일단 북위는 군주의 칭호가 황제였죠...
고구려는 황제와 같은의미의 태왕이나 대왕이란 말을 썼구요...
고구려가 태왕이나 대왕이란 칭호를 썼다고 황제아래있는 제후국이 아닌거죠...
 고구려나 백제,부여등 우리민족의 고대국가들은 중국식 제도나 관직...군주의 칭호등을 사용하지 않았죠...
그 만큼 천손민족이라는 자주성이 강했고 독자적인 제도와 높은 수준의 문명국가들이었죠..
굳이 한족들것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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