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로 보는 고구려의 최대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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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건무(建武)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8 (건무) 23
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 대승(戴升) 등 1만여구가 낙랑에 들어와 내속(內屬)하였다.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모두 다시 관새(款塞, 관문을 찾아와 복종)하였다.
이 기록에서 태원(太原)의 위치를 주류사학의 주장대로 본다면, 당시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인근 어딘가의 지명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을 보면 그냥 산서성 태원맞다고 적혀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지명이 하북성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한과 화해하다 ( 49년 (음) )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
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 註 048
- 《후한서》 권85 고구려전에는 ‘右北平’이라고 하였다. 본문은 《후한서》에서 끌어 온 것이므로 《후한서》에
- 따라 ‘右北平’이 옳다고 하겠다. 右北平(우북평)은 현재의 중국 하북성 豊潤縣(풍윤현)이다.
- 註 049
- 현재의 중국 북경시 密雲縣(밀운현)이다.
- 註 050
- 현재의 중국 하북성 懷來縣(회래현) 남쪽이다.
- 註 051
- 현재의 중국 山西省 太原市(산서성 태원시)이다.
- 註 052
- 중종 임신간본에서는 ‘祭’으로 되어 있으나 《후한서》 권20 祭傳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후한 광무제 건무
- 17년(41)에 요동태수로 임명된 이래 30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요동 방면에서 명성을 떨쳤다. 《후한서》 권20
- 祭傳 참조.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14r_0040_004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사기,모본왕)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재야사학과 주류사학이 서로간에 틀린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죠. 그리고,
49년에 고구려가 하북성을 넘어서 산서성 태원까지 공격했다는 것이 후한서, 삼국사기 두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그로부터 6년뒤인 태조대왕시절 요서군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주류사학은 갑자기 맘을 바꿉니다 ;;;;;;
요서에 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하다 ( 55년 02월(음) )
3년(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註 005
- 요하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 칭하는 데, 중국 후한대에는 이곳에 요서군이 두어져 있었다. 이 시기에
- 고구려가 중간에 있는 요동군을 넘어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 곳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 어떤 착오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15r_0020_0020(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태조왕)
-
왜나하면 한반도 한사군을 설명하려면, 절대로 한반도인근을 넘어가면 안된다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석으로 갑자기 딴소리를 합니다.
후한서에 요서군이 있기때문에 절대로 고구려가 그 근방으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
게다가 근거라고는 어떤 착오가 있을 것이다 ........
그런데 , 이 주석의 내용은 후한서지리지의 기록과 전혀 다릅니다.
후한서지리지에서는 요서군에 본래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다고 했으며, 그들이 산서성 태원까지 공격했다고
적은 것일 뿐이죠.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⑪ 요동속국(遼東屬國)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以為屬國都尉, 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
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1]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
慮山. 險瀆,[2] 房
료동속국(遼東屬國), 옛 감향(邯鄉)이며,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안제
(安帝) 때에 속국(屬國)으로 도위(都尉)를 삼았으며 별도로 6개의 성을 다스린다.
락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1)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1]
2) 빈도현(賔徒, 빈종), 옛 요서(遼西)에 속했다.
3) 도하현(徒河), 옛 요서에 속했다.
4) 무려현(無慮),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5) 험독현(險瀆),[2]
6) 방현(房)
[1]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
[2]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왕험(王險)인데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305 ( 후한서군국지, 유주, 11번 요동속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