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어느분이 조선 총기부터 선진화된 무기배치한거 올린적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의외로 육군은 제법 잘되어 있었던걸로 봤는데 그자료를 지금 어느분이 올리셨는지 찾을수가 없네요 그상태로 이완용 같은 찌끄레기들이 나라 팔아먹지 않았으면 일본과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었겠지만 지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많이 드는데 유저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미국이 쳐들어온지 단 2년만에 군기가 그렇게 빠져버렸다는건 압잡이 찌끄레기들 로비받았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의미 없겠지만.. 경술국치 이전에 대한제국이 일본과 전쟁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뒤를 노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텐데.. 당시 신식화된 대한제국의 군대가 26000명..
제가 알기로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사상자가 2배가량 더 많은 것으로 압니다. 아마 여기에 신식군대 26000명이 합세한다면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갔을듯?
그렇다면 피의 일요일 같은 사건은 안 일어났겠네요.. 일본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폭망했을 것이고 한반도는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듯 하다 이후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는 사이의 혁명들..(2월혁명, 10월혁명같은)로 인해 아마 대한제국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고 소설이 떠오르네요
경술국치 무장해제때 군사들이 일본군과 붙었었죠. 일본군 피해도 컸고 뭐 군인들은 잃을것도 없었을테니 무서운게 없었겠죠.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당시 대한제국군 맥심기관총 위력이 상당했다고 하네요. 대한계측사에 아마 당시 상황이 나와있을겁니다. 일본군과 전면적 했다면 뭐 그리 일방적이지 않았을듯 하네요. 역사적으로 봐도 근대 전면전에서 일본군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왜구답게 뒷치기나 민간인한테나 강하죠.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패한전쟁이고요...세계 최강이라는 소리를 듣던 발틱함대가 당한것이 서방세계에서는 센세이션 했겠지만 뭐 1년동안 동해까지 배타고 오자마자 전쟁했으니 정상일리 없죠. 러시아는 일본은 미국 영국 믿고 보상금 타령하고 2차 전쟁 각오하라고 까불거리다가 러시아가 전면전 의향 비추자 꼬리내리고 오히려 전쟁보상금까지 탈탈 털릴뻔했죠.
당시 주둔군이 아닌 원정군을 상정하면.
해전을 논외로 제외시켜도. 육전은. 개인화기의 질과 양 탄약보급률을 떠나서 야포 포병대의 존재가 변수로 크게 작용되지 않을까요?
총격전과 총검돌격 한정이라면 모를까. 야포의 부족 포병대의 부재는...
오래전에 읽었던 한 말 군 근대화 연구라는 당시 군사적 활동을 정리한 책속에도 군의 포병육성은 타국가들로 인해 상당히 제한적이였던 환경인걸로 기억되기도 하고요.
음. 그 본문의 내용 상에도 몇몇종류의 신식화포 도입과
시범부대 성격의 작은 규모정도의 포병대 존재는 설명
하여도.
가장 무장이 정예화된 중앙의시위군이나. 주력이라 할수 있는 지방군이 보유한 포병대 규모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한것은.중대.대대 규모등 정규 편제의
정식 포병대로 성장 과 보유는 이루지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의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정세변화에 따라
청국-일본-러시아-미국 등 여러 열강 출신의 교관들에 의한 훈련과 편제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정책으로 인해 전투력향상을 위한 분위기와 일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었고.....
장비 또한 소화기 위주로 하여 약간의 근대식 기관총과 야포를 보유하기는 했지만
지휘관들의 근대전술에 대한 이해부족, 조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인 편제로 인하여 그나마
보유한 근대식 무기들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보유한 무기들 또한 편제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의
전시장에 가까웠고,
주력화기인 소화기는 러일전쟁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일본군 상당수가 그 당시 세계적으로 최신식인
탄창식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대한제국군은 그보다 한 세대 수십 년 이전의 소총이라 할
단발식소총이 주력 화기였습니다.
조선말기~대한제국시기 조선군-대한제국군이 일본군과 치른 여러 전투들을 보더라도
(운양호사건,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을미사변, 군대해산 당시의 서울시가전의 경우)
일본군에게 거의 경미한 피해만 입혔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일본군 전상자의 10배에서 최대 수 십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아시아국가들 입장에서 청나라를 간단하게 발라버리고,
비록 고전하기는 했지만 당시 세계최강의 육군국가인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한 일본이
별거 아니었다니.....
적어도 조선-대한제국 수준에서 그런 표현을 할 입장은 아니라 봅니다.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간단히 발라버리는 청나라군조차도....
조선군시절에는 임오군란 당시에 청나라군에게 간단히 진압당했고,
대한제국군은 비록 지방군인 진위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함경도-간도 국경분쟁에서
청나라정규군도 아닌 간도지역의 지방 민병대와 비적들을 상대해서도 고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관련해서 언급한 부분에서 동학농민군이나
구한말 의병들과 같은 비정규군을 제외한... 오직 조선-대한제국 정규군들과 일본군과의
교전만 언급한 것입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은 너무 처참하여 일본군에게 전투에서 직접적으로
사살당한 동학농민군만 적게 잡아도 만 단위는 훌쩍 넘기는데 반하여,
동학농민군 활동기간 동안 죽은 일본군은 수 십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10명 미만이고 나머지는 전염병 등으로 인한 병사자가 더욱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 년간 지속된 구한말 의병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의병은 2만에 달하지만
일본군경은 1/100인 20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전력차가 넘사벽이었습니다.
그리고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언급해셨는데... 설마 아직까지도 봉오동 수 백명
청산리 1,300~3,300명의 일본군 전사자 숫자를 그대로 믿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이거 일본애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부분이니 앞으로는 더 이상 언급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딱 위의 숫자에서 1/100로 줄이면 정확한 일본군 전사자 숫자
되겠습니다.
당시 일본 후생성자료에서 남만주 일대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일본군에 대한
보상금-연금지급명부, 전사자-부상자들을 운송하기 위한 관과 야전침대 등을 비롯한
보급물자 관련 숫자, 그리고 일본신사에 합장된 당시 전사자들 숫자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비교분석한 결과 정확한 일본군 전사자는 10여명 수준에
부상자들은 수 십명 수준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애들에게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털린 부분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시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독립군의 빈약한 장비와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그만한 전과라도 올린 것이
높이 평가할 부분입니다.
이사람 말귀 더럽게 못알아먹네 동학농민운동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였고 곡괭이들고 싸운 전투는 왜 계속 들먹거리는지 일본군 장교들이 얼마나 교전에 무식하면 압도적인 화력으로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쳐 개발렸고 앞서서 안중근 의사한테도 개쳐발려서 하나 살려줬더만 밀고해서 깨진건데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좀 하쇼 솔직히 해군은 상대도 안되는건 맞는데 니뽕이 국민들 등골 쳐 후려서 해군 몰빵한덕에 일본여성 팔아서 탄약사고 한것도 들켰지
개쓰레기짓 해서 해군 늘인건 아는데 육군쪽은 만연 자위위대인건 알도못하네 이인간이 운요호이후 일본 간섭만 없었어도 압잡이들만 없었어도 쉽게 넘어갈 나라가 아니였어 니가 예전부터 일뽕인건 알겠는데 좀 바로 보고살거라 일뽕너무 많이 맞으면 니몸에도 안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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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배는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러스(Pallas)호를
일본 미쓰이 물산이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였는데,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55만엔(당시 대한제국 돈으로는 그 두 배인 110만원에 해당)에 구입하였다.
출시당시 25만엔이었던 9년된 중고화물선을 가지고,
값을 깎긴 커녕 두배가 넘는 가격으로 인수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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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무기의 운용에는 무지하여
상선에 대포 몇 개를 달았을 뿐인 배(양무호)를 군함이라고 사오기도 했다.[2]
연안포함이나 정규프리깃도 아니고 상선에 대포만 얹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으로,
이와 같은 것은 서양에서 19세기 초중반 군사기술이 미개한 미개척지에서
강제로 물건을 팔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3]이었지
정규해군을 상대로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문제는 이 무장상선을 구입하는데에도 국방예산의 1/4 이상이 들어갔고,
이렇게 무리해서 구입한 군함(?)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수송선으로 쓰이다가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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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55만엔이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1/4 좀 넘는 금액이라는 것인데..
대한제국 국방예산은 대략 200만엔 정도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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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당시 일본의 1907년 해군예산이 1097만엔이라고 하는데..
당시 일본 엔화 환율 영국 1파운드 = 9.76 파운드로.. 거의 1:10이었는데.
영국에 의뢰해 만든 일본해군의 전함 아사히의 가격이
영국 돈으로 120만 파운드.. 대략 1200만엔이네요.
러일전쟁 앞두고 당시 일본이 영국에 수주한 군함 가격이 5851만엔이라고 합니다.
(일본 사극 드라마: '언덕위의 구름' 참고)
러일전쟁 앞두고 일본은행이 갖고 있던 돈이 1억 1700만엔이었구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이 일본에 빌린 차관이 대략 1300만원.. 일본돈으로 치면 650만 엔 정도 되겠네요.
뭐.. 어쨌든.. 참담한 일이지만..
일본은 군사력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던 시기였고..
반대로 대한제국은 국가가 막장인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이 국방예산 200만엔 중 1/4 정도인 55만엔으로 광무호를 눈탱이 맞고 살 때..
일본은 5851만엔의 예산을 기울여 영국에 배를 주문한 상태였다는 소리죠.
(중고상선을 신규건조 가격의 2배 이상 가격으로 사기를 당할만큼 국제감각이 둔하다는..)
그만큼 대한제국의 나라꼴이 개판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눈이 뻘개져서 전쟁준비로 달리던 시기였구요.
이거 보시면 아시겠지만 광무함 산 당시 일본 방해공작 엄청 심했었고 광무함 이기에 살 수가 있었죠 제대로된 군함이였으면 일본 때문에 사지를 못했겠죠 그시기는 거의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인 시기였으니 제가말하고 싶은건 광무함 도입처럼 국민이 단결하게끔 좀 더 빨리 정부에서 손을 썼으면 쉽게 나라가 안넘어 갔을거란거죠 일본에의한 내정간섭이 약한 시기에 했더라면 더좋았을거란거죠 광무함 도입시 국민들이 담배값 부터 한푼 한푼 모아 샀던 군함이 광무함이였죠
아무래도 착오를 하신듯 한데..
담배값 모아서 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었고..
광무함은 그냥 국방예산으로 산거라네요.
******
이러한 호소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퍼져나간다.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어 국채를 갚자!"라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윤웅렬[7], 유길준, 양기탁, 이상재 등 조정의 주요 관료들도 운동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8년 쯤에 이르면 약 80만원 정도의 거액이 모이기에 이른다. 아직 갈 길이 한 참 멀기는 하지만....
조선은 대략 1년 예산에서
많게는 일본의 1/3~1/4 정도 수준에서, 적게는 1/13 수준이었고..
(물론, 1910년대 일본이 5천만 인구로
조선 인구 1300만의 4배 수준인데다,
근대화와 전쟁준비한다고 국민들 엄청 쥐어짜던 시절)
조선은 세도정치로 행정체계가 막장화된 시절이었긴 합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재력과 인구에 비해 많이 후달리고,
지도층 자체도 너무 안일하고, 무능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합니다.
일본이 죽기살기로 수십척의 군함과 수십만의 대군을 준비할 때..
대한제국은 한척의 수송선과 다합쳐서 수천명 수준의 군대를 가졌을 뿐이니까요.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의외로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로..
일본 우익 드라마나 만화에서조차 '조선의 마지막 걸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흥선대원군 물러나고 2년만에.. 운요호 사건이 터졌는데..
사실 흥선대원군이 물리친 프랑스 함대, 미군 함대 규모와 병력에 비하면..
운요호는 아주 쬐그만 배에 병력도 얼마 안됩니다.
미국, 프랑스함대와 비교도 안되는 그런 운요호 때문에..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죠.
그만큼 고종과 민비, 민씨일가가 장악한 조선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보여준달까요.
비록 인구과 예산이 일본의 1/4 수준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계몽군주가 이끌었다면 조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겠죠.
니글이나 읽어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무뇌충인건 알겠는데 니 댓글 쭉읽어봐라
동학농민운동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곡괭이들고 싸운게 무슨 싸움이냐? 몇번을 쳐말해도 못알아 쳐먹고 또 적고 또적고 무뇌충한텐 스펙이고 뭐고 다필요없단다 니같은 진정한 일뽕님들에겐 반박할 기분도 못느낀다 아베똥구중 싹싹 핥아 빨아주니 기분이 아주 찢어지지?
혹시
광성보 전투 당시의 수비병력과 운양호 사건 당시 주둔 수비병력. 개개인 구성원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기론 광성보 수비대 주요 구성원은. 과거 착호인이라 불리던. 산행포수. 즉 호랑이 사냥꾼 출신으로 구식의 화승총임에도 화기 운용에 익숙하며 기본적으로 전투의지가 높아 미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임했을테지만.
경군. 혹은 향군 이였다면 다소 차이가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가물가물 하지만 고종도 경연 자리에서. 경군보다는 향군. 향군 보다는 산척이 뛰어나다. 라는 내용을 언급한것 같은데. 그만큼 개인기량이 뛰어난 산척. 산행포수가.
광성보 전투 이후 보충된 병력이 산행포수가 아니였거나.
구형 화포 36문 증강배치 후 운용을 위한 화포병 구성원이 주력이였던가 하는
문제가 장비의 질적 열세를 떠나 병력의 숫적우위를 활용하지 못한채 패전으로 이어진게 아닐지. .
군필이면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K-2 소총 기록사격할 때 250미터까지만 쏘죠.
500미터 정도 쏠려면, 대문짝만한 표적도 손톱보다 작게 보입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지요.
이런 신무기를 확보해야될 대한제국의 정부가..
예산을 오늘날 방산비리 뺨치는 스케일로 이리저리 해먹었으니..
국력차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이 애국심은 있으되, 죽창, 호미, 낫 들고 싸우는 군대였고.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기 기득권 때문에 국민한테 총질하고, 외국군 불러와서 진압 도와달라고 하고,
나라가 망하니 일본 공작, 후작, 백작, 남작, 자작 작위 받고 평생 잘먹고 잘살다 간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뭔 기대를 거는 것은 문제가 많죠.
문제는 이것도 전통인지..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직자들도 마인드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더이상 댓글 다는것도 귀찮네요 님이 제글을 이해못하신거 같은데 청산리나 봉오동처럼 경술국치 이후 10년뒤에 일어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승리하게 되죠 강제병합된지 10년 뒤 일입니다 외교권박탈과 군대해산 하기 이전 그 10년동안 이라도 군대 양성에 힘썼다면 쉽게 빼앗길일이 아니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산리나 봉오동전투는 신식군대 양성해서 이겼나요? 그기간동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단 말이죠 너무 자기주장만 내세우시는데 나무위키도 정확하다 지식인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뉴라이트도 지식인들이고 문제가 되는 교과서도 지식인들이죠 교과서가 식민사관으로 도배됬다는 글들이 각 싸이트 유저들이나 지식인들에 의해서 파헤쳐질 필요도 없죠 님이 위키백과 완전 신뢰하시는거 같은데 뭔말을 해도 똑같겠네요 저는 그만합니다 댓글 더달고 싶음 마음껏 다세요
꼬꼬동아리님의 의견이 다소 과정된 부분은 있다고 해도
Centurion님은 당시의 대한제국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시는 듯 하네요...
일본도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키워간 겁니다.
미국의 군사력에 놀라 강제 개항한 후,
미군의 어깨 너무로 근대식 군대 양성에 대해 조금씩 배워 군사력을 키운 것이죠...
그러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강화도를 침략해 조약을 맺고, 청일전쟁에 가까스로 이긴 후,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 군사력을 더욱 키워 러일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시 고종은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국을 꿈꾸었던 만큼 군사력 확장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죠.
2만 7천 명의 병력 외에도 군사력을 더욱 키우려 하고 있었으며, 영국교관을 데려와 해군도 만들었죠...그런 노력들이
일본의 침략만 아니었으면 어떠한 결실을 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대한제국과 일본의 1년 예산과
군대규모, 국방비 규모 등을 객관적 팩트를 비교해서 판단한건데요.
그리고 일본이 미국에 의해 1853년 강제개항은 했지만,
이후 1860년대에 남북전쟁이 일어나 일본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강제개항 된 뒤로, 영국, 프랑스 등이 접근해서 연거푸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이 당시 막부파와 막부반대파의 싸움에 무기를 팔았죠.
그런데, 그 내전에서 일개 지방군이
신식소총 수천정과 대포, 증기선 몇척씩 거느리는 상황이었고,
내전이 반 막부세력의 승리로 끝난 후. 그 지방군(죠슈, 사츠마)의 무사들이
일본육군과 일본해군을 만들어서,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를 평민 중심의 군대로 만들고,
규모를 대폭 늘려버립니다.
아편전쟁 때, 당대 세계최강이었던 영국군이
173척의 군함에 2만명의 병력을 태우고 청나라의 팔기군 20만을 이기고,
청나라에 굴욕을 줬습니다.
근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 시기에 이미 30~50만 대군의 신식군대를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게 5~7천명에서 많을 때는 2만5천명이었던 겁니다.
일본인구가 5천만이고, 조선인구가 1300만인데.. 거의 4배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예산이 1/4 많게는 1/13 밖에 안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하고, 전쟁해서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보존할 가능성은 얼마라고 보십니까?
저는 딱히 부정적인게 아니라,
대한제국이 살아남으려 했다면, 썩은 부패 권력층들을 싹 쳐내고,
훌륭한 군주나 혹은 나폴레옹 급 정치, 군사지도자가 나타나서,
국론을 단결시키고, 최소 군대를 10만~15만 이상 키워야 한다고 적은겁니다.
근데, 조선의 숨통이 사실상 끊어진건...
일단 명목상 상국인 청나라가 일본한테 절딴 나면서 사실상 끝이 난겁니다.
당시 청나라의 중핵이자 신식군대였던 북양군이 병력이 65만에,
일본보다도 강력한 근대식 함대를 갖고 있었는데.. 얘네들이 일본한테 졌거든요.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버리고..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에서 분리된 "독립국"으로 만듭니다. 그게 대한제국이구요.
근데 막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미 대세는 일본이다 싶어서 일본쪽에 붙은 친일파와
러시아에 붙어야 그나마 일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친러파가 대립합니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과 대립할 만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국인데..
그 러시아가 극동지역에 군대 파견하고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차지했죠.(청나라 강희제 때)
그런데 이 대단한 러시아를 상대로 일본이 또 전쟁을 벌여서 이겨 버렸던겁니다.
물론 러시아가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은것은 아니다만, 극동함대와 발틱함대가 전멸해버리고,
육지에선 물론 충분히 증원을 해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긴 하지만, 만주의 요지인 여순항을
잃어버리고 결국 똥줄타는 일본과 실리를 잃어버린 러시아를 미국이 중재해서 물러나버렸죠.
대한제국군보다 한 20배~70배 이상 큰 북양군을 가진 청나라도 몰아내고,
세계에서 영,프, 터키, 독일과 맞짱을 뜨고, 영국을 긴장시키던 그 러시아도 물리쳤으니,
조선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게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조선이 최소한 10~15만 많으면 30만~40만 신식군대를 보유했어야 독립을 유지했죠.
전 그 팩트를 말하는겁니다. 조선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 고종이나 민비, 여흥민씨 일문이
매관매직하고, 뇌물주고받고, 사치와 낭비 부리는 걸 보면, 국가 지도층이 싹 갈려나가고..
나폴레옹급 리더가 딱!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답이 없었어요.
비슷한 걸 해낼 사람이 있긴 했는데.. 그게 대원군이었다는거고..
대원군이 쇄국만 하지 않고, 쇄국하다가 신식문물에 눈뜬 쵸슈, 사츠마번 같이 태도를 바꿔..
근대화에 매진했다면 조선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안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고종이 찔끔찔끔 외교한답시고,
영국에 총 몇정, 미국에 총 몇정, 러시아에 총 몇정, 일본에 총 몇정 이런씩으로 사와서,
보급체계도 개판인 상태로,
국민들이 '못살겠다~ 우리 말 좀 들어주쇼'하고 일으킨 30만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육성한 관군들이랑 청나라, 일본군 연합으로 보내서 토벌해서..
국론은 분열되고, 애국심은 다 사라지게 만들고..
나중에 10만 의병이 들고 일어나니, 이 사람들은 탄환도 없는 화승총 빈껍데기 들고..
사정거리 370미터짜리 볼트액션 소총에 학살당하듯 패배한게 현실입니다.
그 때 10만 의병들이 서양식 볼트액션 소총만 1인 1정씩 가지고 있었으면..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털려나가듯 독립은 유지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결국 고종은 자기 친위대 몇천명만 딱 유지하다가,,
나중에 이왕으로 격하되서.. 일본치하에서 살다 죽었죠.
고종이 나라 망했다고 명나라 숭정제마냥 목매달고 xx한 건 아니잖습니까?
고종이 정말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동학농민군도 진압하고 그랬던걸까요?
그냥 자기 권력과 자기 세상을 놓기 싫은 마음에서 외국군도 불러들이는 군주가.. 고종입니다.
그 배경에는 여흥 "민씨"성을 가졌으면 개나 소나 감투쓰고 세금 빼먹고, 매관매직하던 민씨외척이 있었고..
그런 나라가 비록 국가 내부의 혁명이 아닌 쪽바리 일본한테 나라가 망해서 안타깝긴 하다만...
나라가 지켜질 조건들을 허물고 망가뜨린 원인은..
자기 기득권이 외세의 침략보다 먼저였던... 조선 집권층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국민들은 그래도 할만큼 했어요.
세상에 총알도, 화약도 없는 화승총 껍데기, 호미, 낫, 죽창 들고 국민들이..
분당 7~8발 쏘는 명중률도 현대식 소총과 다를 바없는 그런 신식소총든 외국군에 맞서싸우다..
수만명이 죽어나갔는데.. 고종이랑 민비는 관군 보내서 외국군이랑 연합을 했죠.
님이 위에 열거한 내용을 몰라서 댓글 단 게 아닙니다.
님은 계속 고종과 민비 및 그 일족의 부패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동학농민혁명을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하려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잘못이죠...
하지만 매관매직 같은 부패들은 민씨 일족의 문제만이라고 할 순 없죠...
대원군에 의해 제압된 안동김씨를 비롯해 그 이전의 세도정치를 낳은 조선 후기의 노론들이 가장 큰 원흉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의 대부분 친일파가 되기도 한 인물들이니 돌을 던지려면 그들에게 던져야지요...
고종의 잘못이라면 그들을 제압하지 못한 겁니다.
정치에 노련했던 대원군조차 그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노론에서 친일파로 이어지는 그 엄청난 세력들을 두고 고종만 탓하는 암군론이야말로 일본놈들이 자신들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왕조 무능론을 위해 퍼트린 것입니다.
고종을 유능했던 훌륭한 군주라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노론 친일파 놈들 대신 망국의 군주로 욕을 다 들어야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초기 독립운동을 했던 지사들은 대부분 고종의 근왕세력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독립운동의 씨를 뿌려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와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겁니다.
대한제국 13년, 그 가운데 러일전쟁 이전의 7년 동안 대한제국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팩트를 보시고 말씀하세요...
그 방향으로 성장을 계속했다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아 경제, 사회, 군사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었을 것은 명백했으리라 봅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만 완성했더라면 일본은 러시아에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무기, 군수 물자 등을 빠르게 수송할 계획이었죠...
영국과 조약을 맺고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일본이 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해 힘겨운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물론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 탓도 있었지요.
발틱함대는 먼거리를 돌아 온 탓에 패한 것이고요...
러일전쟁의 결과가 달랐더라면 대한제국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님이 말하는 당시의 대한제국과 일본이 처한 상황에 대한 팩트대로 대한제국이 당연히 일본에 패했을 것이라는 건 그런 국제정세나 시대적 상황, 대한제국의 발전 가능성 등을 간과한 단편적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에 결과만 보고 부정적인 면만 나열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아편전쟁 당시 영국의 병력은 초기 15척의 배에 4천 명 가량이었어요...나중에 1만명으로 늘어납니다.
융희 2년(1908) 4월 4일
일본군 상주 수비 제 2중대 전투보고
3월 31일 해인사 서쪽 3리 조선 의병 70명 확인
우지 상등병 이하 4명 출동
의병 주둔 고지를 공격 20분간 교전
의병사살 8, 부상 도주 10, 화승총 3, 창 2 노획,
일본군 피해없음
4월 1일 적을 추격
풍석동에서 10분간 교전
의병 사살 3, 부상 도주 4~5
화승총 1, 창 1 노획
일본군 피해 없음.
**************
이런데 지금 대한제국에 싸울 애국자가 없어서 망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들이 들고 싸울 신식 소총이 없어서 망했죠.
그러면 이런 애국자들을 모으고, 군대로 키워서 나라를 지켜야 될 책임자는 누굽니까?
고종도 나라는 사랑했죠. 자기한테 대드는 백성들은 국민취급을 안했지만..
그래도, 이런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는 시기에 활동한 의병들이 왜 화승총과 창으로
일본군과 싸울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몇십년의 집권기 동안 고종과 그 외척, 집권세력들은
뭘 했는지 불만이 나오는거야 당연하죠.
일본이 도둑놈이지만,
그 몇십년 세월 허비하고, 방범창, 세콤 안달고,
몽둥이 하나 안 장만한 가장은 뭘까요?
일반 가정집 가장들처럼 자기가 돈을 번것도 아니고,
국민들 세금거둬서, 정치를 하는 입장인데..
물론, 저도 일본 그 날강도들이 잘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조선의 집권세력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으면,
이런 애국자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총기를 쥐어줄 생각도 못했으며,
막상 나라 넘어갈 때에도 국민들이 목숨걸고 싸우는데..
그들이 손에 쥘 신식소총이 없었던게 문제입니다.
노론을 고종시대로부터 상당히 과거의 이야기라고 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제가 아편전쟁 규모에 대해 지적한 건 팩트 좋아하시는 님이 틀린 것을 지적한 겁니다.
위에 광무함이라고 한 것도 그렇고요...
고종이 도입한 군함은 양무호와 광제호거든요..
고종암군론이라고 한 것은 대한제국 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땐 민비는 없고, 민씨 일족들도 권력을 휘두르던 때가 아니니까요...
- 의병 70명을 진압하러 일본군 4명이 출동을...
동학때도 그랬습니다.
수만명의 동학군이 따발총 보유한 200명 일본군한테 패했더랬죠...
- 이런데 지금 대한제국에 싸울 애국자가 없어서 망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들이 들고 싸울 신식 소총이 없어서 망했죠.
싸우다 죽는 의병들도 많았지만 조정안에 친일파들도 쑤두룩 했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친일파 목 베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이 넘쳐났죠...러일전쟁 끝나자 거리에 나가 일본군 환영하던 일진회 회원이 수 만명이었어요...
아무리 임금이 신식총 들여와 봤자 조정안팍에서 나라를 좀 먹는 그들을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그리고 고종이 총 쥐어주고,
구식군대보다 녹봉에서도 우대해줬던 별기군이나 신식군대들 중에..
친일파들이 또 상당수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런 배신과 기회주의가
단지 그 사람들의 인성을 못보고 선발한게 문제겠습니까?
당시 일본 왕이었던 메이지일왕이랑 고종이 1852년 동갑내기랍니다.
고종 재위가 44년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4번이나 바뀔 기간을 재위를 했던겁니다.
제가 다른 댓글에서도 말했지만..
조선시대에 친일파 앞잡이 몇명이 일본 로비에 넘어가서,
일본과 한판 떠서 이기지도 못해도, 지지는 않을 정도의 멀쩡한 나라를 넘긴게 아닙니다.
조선시대..
그 대단한 그래도 유교사상의 세뇌급 교육을 받으며,
사서삼경 암기달달해서 과거시험 붙은 사람들이 운영하던 나라였고,
충,효,예,인,의 이런 가치덕목이 대접받던 시대였음에도..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 팔아넘기겠다는 배신자들일 조정에 발에 채일만큼 많았습니다...
반면,
현재의 한국에는 정재계에 그런 기회주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구한말이랑 비교도 안되게 나라가 빵빵한데도, 자신의 이익때문에 외국에 빌붙고,
팔 수만 있으면 나라를 팔아넘기고 싶어하는 쓰레기들이 더 많을껄요.
그런데. 왜??
21세기 한국이 아직 그런 매국노들이..
구한 말 때처럼 나라를 못팔아넘기겠습니까??
각군 참모총장이 외국방산기업에 국가 내부 기밀 흘리고,
부품값 떼먹어서 돈챙기는 나라에서요?
그게 나라에 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근데 구한말에는 그 힘이 없었던 거에요.
(기회주의자들은 자기한테 뭘 해주지 못하고,
자기 목숨과 재산을 못 지키고, 못 불려주는 리더는 안따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고종 따르다가 일본이라는 외세로 갈아탄겁니다.)
그러니 충효라는 유교적 도덕관념이 그나마 살아있던 그 시대에도.. 그러한 매국노들이 판을 친겁니다.
지금은 그런 충, 효 관념이 약한데도, 나라가 힘이 있고,
그래도 뭔가 그런 매국노들이 본격적으로 날뛰기엔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어서 배신안한 것 뿐입니다.
조정 안팎에서 나라를 좀먹는 인간들이
나라를 그 오랜시간동안 좀먹을 수 있었다면..
그거 뽑아주고 키워주고, 데리고 있던 사람이 누구죠?
고종은 전제군주정을 추구한 임금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의지대로 다 해먹는 걸 전제군주를 꿈꾼 왕이었고
실제로 독립협회가 내세우는 입헌군주제 반대하고, 황국협회 앞세워 전제군주처럼 존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전제군주 고종이 44년을 재위하면서.. 국정을 운영했는데...
재위기간 내내 외롭게 기회주의자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며,
나라를 좀먹는 친일파를 못쳐내고 죽은 비운의 왕이 됩니까?
이승만이 정치깡패,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이런 사람들을 키워준 사람인데...
마치 이승만이 그런 기생충 같은 인간들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났다는 소리랑 동급이지요.
그래서 일진회 회원 수만명 안생기려면..
나라가 안망할 정도의 자체적 힘이 있어야 했던겁니다.
국정운영을 수십년간 해오면서 그런 국력도 못길렀으니, 좋은 소리 못듣는거죠.
조선이 그렇다고 딱히 인구소국이라던가. 경제적으로 아주 빈곤한 나라도 아니었고,
누구 말대로 "예산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딱 그 상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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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가 팩트를 강조한 부분을 봅시다.
아편전쟁 쪽은 저도 2차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을 인용한 수준이라.
팩트 강조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위키백과에서 양 군 전력 도표를 보고 쓴거니.
저도 딱히 자신있게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구요.
(1)
저는 대한제국과 일본의 1년 예산과
~~~~~~~~~~~~~~~~~
군대규모, 국방비 규모 등을 객관적 팩트를 비교해서 판단한건데요.
~~~~~~~~~~~~~ ~~~~~~~
(2)
(일본군이)
대한제국군보다 한 20배~70배 이상 큰 북양군을 가진 청나라도 몰아내고,
세계에서
영,프, 터키, 독일과 맞짱을 뜨고, 영국을 긴장시키던 그 러시아도 물리쳤으니,
조선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게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조선이 최소한 10~15만
많으면 30만~40만 신식군대를 보유했어야 독립을 유지했죠.
~~~~~~~~~~~~~~~~~~~~~~~~~~~~~~~
전 그 팩트를 말하는겁니다.
~~~~
조선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
고종이나 민비, 여흥민씨 일문이 매관매직하고, 뇌물주고받고,
사치와 낭비 부리는 걸 보면, 국가 지도층이 싹 갈려나가고..
나폴레옹급 리더가 딱!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답이 없었어요.
~~~~~~~~~~~~~~~~~~~~~~~~~~~~~~~~~~~
=>이 정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한다. 그리고 실제로 망했다! (FACT)
(3)
다만, 현실 역사에선 대한제국군은 2만5천까지 늘어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5~7천명 정도 수준으로 축소되어 일제에 의해 해산했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패한 후
친일파들이 조선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구요.
~~~~~~~~~~~~~~~~~~~~~~~~~~~
심지어 을미사변만 하더라도,
일본 교관한테 훈련받은 조선군인 '훈련대'가
일본 낭인들을 도와 궁궐을 침입했죠.
물론 군대해산에 맞서 봉기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들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들도 꽤 많았죠. 일본육사에 유학간 조선 유학생들도 지청천 장군 빼곤,
대부분 일본에 붙어서 일본군 장교를 했구요.
이게 REAL한 FACT 그대로의 역사인데...
~~~~ ~~~~ ~~~
제가 이런 조선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나름 대안은 제시하면서, 이렇게 했으면 생존할 수도 있었다라고 적었는데..
~~~~~~~~~~~~~~~~~~~~~~~~~~~~~~~~~~~
단지, 그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눈앞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집권세력을 싸잡아 깐것을 "고종 암군론"으로 축소를 하시는지 이해가 좀 안가네요.
=> 제가 팩트라고 강조한 내용은 죄다 상식 수준의 있는
그대로의 조선 멸망 과정에서의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겁니다.
이건 국사책만 읽어봐도 다 아는 얘기죠.
국사책은 역사학계에서 만드는데,
그 글 한 줄에 논문 몇십편에서 몇백편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나온게 학계의 정론, 정설입니다.
제가 아주 특별히 유별난 저만의 가설을 세워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억지 피우며 떠들고 있나요?
진짜 대부분의 국사책, 하다 못해 서점의 책들, 한민족 문화백과사전,
각 종 서적에도 제가 말한 친일파들 이야기, 군사력 부족 이야기,
고종과 민씨 외척집단의 매관매직, 부패, 상납, 이런건 다 나오는 얘깁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일본군 경복궁 침입, 갑오개혁,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을미개혁, 을미의병
1896년 아관파천, 열강의 이권침탈, 독립협회
1897년 광무개혁, (앞서 개혁과 달리 일본이 아닌 고종이 내세운 개혁)
1898년 만민공동회 헌의 6조
(자주 국권, 이권침탈 방지, 탁지부로 재정일원화,
재판공개 및 인권존중, 입헌군주제 강조, 법치행정 실시 등을 요청함)
1899년 독립협회 해산, 대한국 국제 9조(전제황권 강화)
1902년 1차 영일 동맹
(청에서의 영국 이권 승인, 조선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 승인)
1904년 러일전쟁,
한일의정서(일본의 내정간섭, 군사기지 확보),
제1차 한일협약(고문 정치)
1905년 헌정연구회,
가쓰라-테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국제승인)
을사늑약 체결(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을사의병
1906 이상설 만주 망명,
대한 자강회, 고종 퇴위반대운동
1907 국채보상운동, 헤이그 특사파견, 고종 퇴위,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군대해산, 행정권 박탈, 차관 정치
1908 의병연합부대 서울진공작전
1909 기유각서(사법권 포기),
1910 국권 강탈. 총독부 설치 및 식민통치 시작.
연표로 확인해본 결과..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이 주장한 신분제타파와 각종 사회적 악습은..
묘하게도 갑오개혁을 통해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네요.
근데 이게 하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이후 세워진
김홍집 내각에 의해 추진되엇다는점.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건지,
아니면 조선 내부 개혁파들의 구상인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고종의 의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신분제 타파, 노비제, 연좌제 폐지 등.. 아주 괄목할만한 내용들이 들어있긴 합니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들이 싫어할만한 내용이겠네요.
을미개혁..
이건 명성황후 시해사건 뒤 친일파들이 주도한 개혁이라는데...
단발령, 양력 사용, 종두법 사용, 근대식 학교설치가 눈에 띕니다.
광무개혁..
이건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본인 의지로 추진한 개혁입니다.
나름 상공업 지원정책이 많고, 그외 황실 재정수입 증대, 황제권 강화, 군사력 증강 등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주로 부국강병을 해보겠다, 황제권을 강화하겠다..
이런게 딱 눈에 들어오네요.
그러나 이게 시점이 1897년이고..
이후 입헌군주제나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밟아버리고,
본인의 전제왕권 강화로 달려가는게 보입니다.
이 때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위세에 기대어 일본을 견제하던 시국인데..
결국 영일동맹 맺고 일본이 러시아를 꺽으면서,
러시아라는 외세에 의존해온 조선이 사실상 낙동강 오리알 됩니다.
자, 그리고 그 고종의 그 대단한 개혁들(?)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가거나, 러시아는 몰라도, 영국의 지원을 받긴 글렀을 겁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크림 전쟁까지 터지고,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고,
영일동맹이 맺어진건데.. 영국이 조선을 도울리가 없죠.
그리고 결국 님도 가정(IF)을 하는건데..
역사는 일본이 러일전쟁 이기고 조선이 멸망하는 걸로 흘러갔습니다.(Real Fact)
(IF)이걸 막으려면, 조선은 자체 군사력이 최소 한 10~15만 정도,
많게는 조선 세종시절처럼 30~40만 군대를 갖고 있어야 되요.
그것도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말이죠.(대안)
제가 지금 왜 고종을 까고 있겠습니까?
한 5년 집권하다 죽거나 쫓겨난 왕이면 모르겠는데..
재위기간 44년동안 볼거 다보고, 겪을거 다 겪은 사람이...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위아래가 단합이 잘안됨)
왕이 국가 예산을 잘활용해서 나라 구하는 정치를 잘했던것도 아니라니까요.
돈이 아예없으면 모르겠는데..
제가 조사해보고 계산해보니.. 딱히 돈 문제가 아니네요.
지금 제가 주장하는 내용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성공률이 높은 방법입니다.
남의 힘 믿고, 남의 군대 끌여들여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러다 결국 최종 승자한테 나라 뺏긴 꼴인데..
그런 잔머리 굴릴 시간에 징병제 도입하고, 무기 착실히 사서 모으면..
독립도 지켰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걸 못했으니 고종이 까여도 당연하거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막판에 내탕금을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려했네.. 망명하려했네..
뭐 그래봐야.. 그 전의 병크를 다 덮지를 못해요.
나라와 민족을 구할 44년의 재위기간을 그렇게 가장 큰 권력을 쥐고도...
알차게 못보냈으니까요. 그냥 방구석 백수 한량이면 자기 혼자 죽으면 장땡이지만
그 중요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한심하게 시간을 보내면 나라가 망해서..
온 국민이 피해를 봅니다.
결국 36년 일제지배, 끝나지도 않을 줄 알았던 그 식민지배가..
미국이 일본을 작살내줘서, 끝나긴 했다만..
이 나라는 아직도 마인드 썩은 정치인들이..너무 많다는게 문제라는거죠.
이러니, 100년 뒤 후손들이..
"그래도 그 고종이 말야.. 뭐 좀 해볼려고 시늉은 했었는데.. 까서 되겠어?" 이러는데..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하면서,
욕했던 전직대통령들도 어지간해선.. 다 그 정도 시늉은 했어요.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나라 멸망시킨 대통령은 아직 없죠.)
그게 하나마나인건지, 겉치레 시늉만 한거 수준이라..
국민들이 전혀 인생이 풀린다는 느낌을 못받는게 대부분이라 그렇지..
뭐, 그래도 재벌들한테는 팍팍팍 시원하게 잘 밀어줬죠.
다 그래도 "그 사람이 열심히 할려고 한거 같은디~~" 이런 마인드로는..
정치개혁도 없는거고, 우리나라 위기만 부채질하는 위험한 마인드라 이겁니다.
정치를 최선의 "지도자"에게 맡겨도 모자를 위험한 시국에...
무능한 사람이 시늉 좀 한다고, "봐주자" 하는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입니까?
배가 뒤집어질려는데,
S급 항해사 놔두고, C급 선장한테 계속 배를 맡기면 위험하죠.
그게 조선이 군주제 시절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옛날 일이니까 넘어가고 그러는 거데..
막상 이게 또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미-중 대립구도와
중국의 야망 앞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즘은 어찌보면 더 웃긴게..
아마 그 당시 언론조차도 나라 망하기 전엔...
그래도 일본 찬양을 그리 노골적으론 안했을텐데...
이 놈의 나라는 OECD 가입국에 세계 11번째 경제규모를 자랑한다면서..
친중 타령은 대통령부터 언론까지 참..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다는거.
마인드는 구한말보다 더 썩은 인간들이 많은데..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아 보이네요..
아무리 과거라도 현재와 연결해서, 옛 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될텐데 말입니다.
굳이 과거를 미화하고, 덮어주고 해봤자..
나중에 진짜로 그걸 믿고, 똑같은 실수 반복할꺼라면...
그건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는게 아니라, 똑같이 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일본은 강했고 우리는 약했다...
고로 전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되도록 나라를 말아먹은 건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일족이다...
이것이 님이 말한 핵심이었어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그런 일본의 방해로 근대화 과정에서 좌절된 대한제국의 상황은 도외시한 채 참 결과론만 잘 들먹이시네요...
그런 결과에 이른 것은 근대화에 늦은 조선의 잘못도 있지만, 일본 놈들이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고 현양사, 흑룡회 같은 낭인들을 보내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데요...
민비를 시해하고, 동학지도부를 회유하려 했으며, 위조주화를 대량으로 만들어 경제를 흔들어 댔어요. 일본 놈들의 돈에 매수된 관리들로 인해 제물포 일대가 놈들의 위조주화 소굴이었을 정도였지요.
그러니 근대화는 더욱 늦어지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걸 관리 못했으니 왕의 잘못 아니냐구요?
님의 말처럼 대한제국보다 엄청 국력이 강했던 일본이 돈과 군사력으로 관리들을 회유하며 흔들어대는데, 어떤 방책이 있겠습니까?
고종이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다고요?
30만 병력을 모병하려다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어요....
고종은 1899년 원수부를 창설하고 헌병,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을 창설해 완전한 신식 군대 편제를 갖췄어요.
그리고 1900년에는 지방 군사제도도 개편해 진위대와 지방대를 진위대로 통합하고 평양과 제주 일대에 특별부대도 배치했지요.
무관학교를 설립해 육, 해군을 양성했으며 영국에서 대포를 들여오고, 일본에서 군함도 들여왔죠...
그 모든 게 일본의 군대해산으로 좌절된 겁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1907년 7월 '모병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8월에 병적관리에 관한 규정인 '육군병적규칙'이 제정·공포되었는데, 이 규칙에는 병역의무의 연령과 역종의 구분, 복무 한계와 전·평시 병력충원 방안 등이 마련되어 근대적인 병역제도의 틀을 마련했지만 일제 때문에 무산되었지요...
그만큼 군사력을 키우는데 고종은 심혈을 기울였던 임금입니다.
고종이 이완용을 다시 불러들인 건 그가 무지해서가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의지할 나라가 미국밖에 없어 미 대사와 친분이 있었던 이완용을 불러들인 겁니다.
글 잘못 적은 것 가지고 그러느냐 하시는데,
잘못 된 걸 팩트라며 들이미는 게 곳곳에 보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사해 보니 돈이 없어서 못한 것도 아니라고요?
그렇게 군사력을 키울 수 있을 만큼 수입을 늘린 게 바로 대한제국 7년 동안 성장한 겁니다.
여기저기 자료 긁어와서 붙이지 마세요...
다 아는 내용인데 글만 길어져서 다시 읽기도 피곤하니까요...님의 의견만 말하세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우린 임진왜란 때 당시 첨단 무기라 할 수 있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말고 항복했어야 마땅했겠네요...그렇게 무기랑 병력, 전쟁 경험이 열세인데 어떻게 전쟁을 합니까.
게다가 병력 4천~1만은 1차 1840~1842년 아편전쟁 때 이야기고.
병력 2만은 2차 아편전쟁 1856~1860년 때 이야기임.
"영국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이 통솔하는 영국의 동방 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함, 증기 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병사 4천 명으로 구성됐다. "-1차아편전쟁
"1841년 8월, 영국군 1만 명은 청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양쯔강으로 진입했으나 입구 영파(寧波)를 지키는 장수 여보운(余步云)은 도망하고 말았다.
그 후 영국군은 닥치는 대로 강X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면서 양자강에 진입하였으며,
1842년 3월에 혁산이 이끄는 정규군 1만 2천 명과 민병대 3만 3천 명의 대군이 영국군 불과 천여 명에게 격파당하고 혁경은 단기필마로 겨우 도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월에는 상하이가 함락되고 7월에는 영국군은 청의 제2 도시인 난징(南京)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대운하의 핵심 기지인 진강(鎭江)을 공격하였고 수비병 1,400여 명은 전원 전사했으며 지휘관 해령(海齡)은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인 민중을 불신해 협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1차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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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청과 영국, 프랑스의 갈등은 폭발해 1860년 2월에 예비 병력에 본국 증원 병력까지 추가하여 영국은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병력 6,300여명과 군함 33척을 동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바로 수도 베이징." -2차 아편전쟁
원참.. 알고 보니.. 본인도 잘못알고 태클 거셨구만. 내가 틀린게 아니라.
그리고 이미 님이 지적한 청일전쟁 1897년? 광무개혁 정도 시절?
이미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 집어삼키겠다고 청나라 외교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허울만 좋은 자주국 타령으로 타국 영향력을 벗겨내버린 시점입니다.
그래도, 님 말대로..
고종이 좀 정신 번쩍 들어서, 군사력 증강에 나설만한 시기긴 했죠..
일본군에게 이미 경복궁이 2 번인가 털렸던데.
갑오년, 을미사변, 암만 둔한 사람도 툭하면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왕 본인이 사는 궁궐 털어서, 근위병들 제압하고 협박하는데 안그러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사실상 거덜나기 전에..
여유넘칠 때 좀 하던가..해야 유능한 군주 소리 들을만 한거지..
대원군 실각과 강화도 조약이래 청일전쟁 전까지
1876~1894년이라는 근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결국 마누라 민비 척족이 맘껏 활개치게 만들고,
청국군 불러들이고 일본군을 한반도에 진출시키게 방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제 나라에 숨통 끊어져 가니, 30만 병력 증강 계획요?
암걸렸는데 돈은 없고, 있어도 사채꾼이 압류해서 내돈도 못꺼내쓰는 상황되서요?
그러게 자기 돈 맘 껏 쓸 수 있는 시대에 왜 그랬데요?
일본은 1853년 페리제독 이후 10년만에 지들끼리 신식무기 경쟁적으로 사들여
내전벌이고 메이지유신 성공하고, 뒤에 군제개혁 통과시켰는데,
조선은 개항 이후 20년 동안 병력 30만짜리 만드는
개혁을 왜 안하고, 나라 망해가는 시점에 했을까요?
님한테 감정있는 사람 아닙니다.
오히려 좋게 보던 사람이지요...
이번에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하시니 논쟁이 된 것이고요...
이번 댓글만 해도 그렇네요.
님이 고종에 대해 얼마나 나쁘게 생각하는지 절절이 보이네요...
그렇다고 해서 공은 무시한 채 과만 부풀려 매도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고종에 관한 책이라면 옹호하는 책과 욕하는 책 합해서 읽을만큼 읽었으니 님의 링크한 주소는 패스하겠습니다.
고종 내탕금 1년에 81만원은 언제적 금액인가요?
1905년에 내장원의 수입은 300만원이었고, 이는 전체 나라 수입의 5할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편 전쟁의 오류는
"아편전쟁 때, 당대 세계최강이었던 영국군이
173척의 군함에 2만명의 병력을 태우고 청나라의 팔기군 20만을 이기고,
청나라에 굴욕을 줬습니다.
근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 시기에 이미 30~50만 대군의 신식군대를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게 5~7천명에서 많을 때는 2만5천명이었던 겁니다.
일본인구가 5천만이고, 조선인구가 1300만인데.. 거의 4배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예산이 1/4 많게는 1/13 밖에 안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하고, 전쟁해서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보존할 가능성은 얼마라고 보십니까?"
라고 님이 말해서 오류라고 지적한 겁니다.
아편전쟁은 영국이 15척의 군함에 4천 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것이고
2차 아편 전쟁은 약 15년 후에 일어난 전쟁으로 흔히 애로호전쟁이라고 하는 것인데 영국 단독이 아니라 프랑스와 함께 싸운 겁니다. 미국과 러시아도 같은 편이었고요...
1차 전쟁으로 이미 패한 중국을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의 이득이 적으니 빌미를 만들어 다시 두들겨 팬 거에 불과하죠...이때 러시아도 사할린을 얻어 우리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던 것이고요...
님이 말하려던 전쟁은 1차 아닌가요?
참고로 부언하자면 그 6년 뒤에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의 병력이 7척의 군함에 해병 1000여명입니다. 중국을 박살낸 영국에 비해 군함은 절반, 병력은 1/4 차이 나네요..한데도 우리 조선은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죠...님의 비교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반증 아닌가요?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상비군은 20만 명, 동원한 병력은 총 108만 명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총 병력은 200만이었고요...
자료를 가져와 주장하시는 분으로서 오류가지고 그러느냐는 건 너무 무책임하신 말씀 같네요..
그리고, 제가 딱히 역사학자도 아니고, 자료조사의 폭이 넓은것도 아니고,
직접 조사할 여건도 안되기 때문에, 저도 마음같아선.. 2차, 3차 자료가 아닌..
실제 1차 사료 보면서 연구하고 싶긴 하나.. 당연히 인터넷올라온 백과사전이나,
기타 신문기사, 블로그, 논쟁 이런거 보면서 정보를 얻는 일반인입니다.
무책임하기 싫지만, 저도 아마추어니 어쩌겠습니까.??
(제가 주장하는것도 거의 정설 수준,
기초적 상식, 익히 유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일반론급이죠..)
저도 여건만 더 좋으면 더 고급정보 갖고 토론하고 싶죠.
원하는 자료 쏙쏙 찾아주는 AI 인공지능 비서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님의 애초 아편전쟁을 인용한 취지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소수의 영국병력이 20만 중국 대군을 박살냈다...라는 것 아닌가요?
2차 아편전쟁은 영국 단독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연합해 싸운 겁니다.
그것도 이미 패하여 너덜너덜해진 중국에 이권을 더 얻어내기 위해 다시 두들겨 팬 것에 불과하지요...
이건 님이 주장하려던 취지와 맞지 않다고 보여지네요...
님이 주장하려던 건 당연히 1차 아편전쟁이라고 봅니다.
뭐 어쨌든 아편전쟁 얘기 계속해 봤자 의미 없는 것 같고...
고종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글 말고, 특히 이덕일씨가 아주 비판적이던데
좀더 포괄적으로 공부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