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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1 11:28
[한국사] 경국술치 이전 일본과 전쟁했다면
 글쓴이 : 꼬꼬동아리
조회 : 4,007  

저번에 어느분이 조선 총기부터 선진화된 무기배치한거  올린적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의외로 육군은 제법 잘되어 있었던걸로 봤는데 그자료를 지금 어느분이 올리셨는지 찾을수가 없네요 그상태로 이완용 같은 찌끄레기들이 나라 팔아먹지 않았으면 일본과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었겠지만 지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많이 드는데 유저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미국이 쳐들어온지 단 2년만에 군기가 그렇게 빠져버렸다는건 압잡이 찌끄레기들 로비받았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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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창 16-07-01 11:57
   
경술국치
     
꼬꼬동아리 16-07-01 17:42
   
아 실수 했네요 ㅎㅎ
꼬마러브 16-07-01 12:00
   
의미 없겠지만.. 경술국치 이전에 대한제국이 일본과 전쟁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뒤를 노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텐데.. 당시 신식화된 대한제국의 군대가 26000명..
제가 알기로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사상자가 2배가량 더 많은 것으로 압니다. 아마 여기에 신식군대 26000명이 합세한다면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갔을듯?
그렇다면 피의 일요일 같은 사건은 안 일어났겠네요.. 일본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폭망했을 것이고 한반도는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듯 하다 이후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는 사이의 혁명들..(2월혁명, 10월혁명같은)로 인해 아마 대한제국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고 소설이 떠오르네요
뿡뿡 16-07-01 12:19
   
경술국치 무장해제때 군사들이 일본군과 붙었었죠. 일본군 피해도 컸고 뭐 군인들은 잃을것도 없었을테니 무서운게 없었겠죠.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당시 대한제국군 맥심기관총 위력이 상당했다고 하네요. 대한계측사에 아마 당시 상황이 나와있을겁니다. 일본군과 전면적 했다면 뭐 그리 일방적이지 않았을듯 하네요. 역사적으로 봐도 근대 전면전에서 일본군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왜구답게 뒷치기나 민간인한테나 강하죠.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패한전쟁이고요...세계 최강이라는 소리를 듣던 발틱함대가 당한것이 서방세계에서는 센세이션 했겠지만 뭐 1년동안 동해까지 배타고 오자마자 전쟁했으니 정상일리 없죠. 러시아는 일본은 미국 영국 믿고 보상금 타령하고 2차 전쟁 각오하라고 까불거리다가 러시아가 전면전 의향 비추자 꼬리내리고 오히려 전쟁보상금까지 탈탈 털릴뻔했죠.
내가리 16-07-01 12:45
   
실제로 일본과 전면전 했다면 뭐 패배할 확률은 높겠지만 일본에 큰 타격을 줬을거라 생각함.
G스마트SM 16-07-01 12:59
   
당시  주둔군이  아닌  원정군을  상정하면.
해전을  논외로  제외시켜도.  육전은.  개인화기의 질과 양  탄약보급률을  떠나서  야포  포병대의 존재가 변수로  크게 작용되지  않을까요?
총격전과 총검돌격  한정이라면  모를까.  야포의 부족 포병대의 부재는...
오래전에  읽었던 한 말 군 근대화 연구라는  당시  군사적 활동을 정리한  책속에도 군의 포병육성은  타국가들로 인해 상당히  제한적이였던  환경인걸로  기억되기도  하고요.
     
꼬마러브 16-07-01 13:33
   
당시 대한제국군에서 독일제크루프식야포와 암스트롱포를 도입했던 것으로 압니다. 포병대도 존재했었고요. 여기 자세히 나오네요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docId=210902836&qb=67OE6riw6rWwIOustOq4s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S3Ux8woRR1hssa34daosssssss0-002189&sid=12DXQojs8xIQPol3P8SD5g%3D%3D
          
G스마트SM 16-07-01 17:14
   
음.  그 본문의  내용 상에도 몇몇종류의 신식화포  도입과
시범부대 성격의 작은 규모정도의 포병대 존재는 설명
하여도.
가장 무장이 정예화된  중앙의시위군이나.  주력이라 할수 있는  지방군이 보유한  포병대 규모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한것은.중대.대대 규모등 정규 편제의
정식 포병대로  성장 과 보유는 이루지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촐라롱콘 16-07-01 18:20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의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정세변화에 따라
청국-일본-러시아-미국 등 여러 열강 출신의 교관들에 의한 훈련과 편제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정책으로 인해 전투력향상을 위한 분위기와 일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었고.....

장비 또한 소화기 위주로 하여 약간의 근대식 기관총과 야포를 보유하기는 했지만
지휘관들의 근대전술에 대한 이해부족, 조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인 편제로 인하여 그나마
보유한 근대식 무기들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보유한 무기들 또한 편제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의
전시장에 가까웠고,
주력화기인 소화기는 러일전쟁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일본군 상당수가 그 당시 세계적으로 최신식인
탄창식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대한제국군은 그보다 한 세대 수십 년 이전의 소총이라 할
단발식소총이 주력 화기였습니다.

조선말기~대한제국시기 조선군-대한제국군이 일본군과 치른 여러 전투들을 보더라도
(운양호사건,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을미사변, 군대해산 당시의 서울시가전의 경우)
일본군에게 거의 경미한 피해만 입혔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일본군 전상자의 10배에서 최대 수 십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꼬꼬동아리 16-07-01 18:34
   
운요호 사건이후 일본 간섭이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경술국치 이후 청산리 봉오동 전투만 보더라도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별거 아니였을거라 봅니다 님이 말한 전투는 정봉준이 이끈 군대 이야기인데 삽들고 곡괭이들고 싸운 전투인데 당연한 말을 왜하는지
          
촐라롱콘 16-07-01 20:13
   
적어도 당시 아시아국가들 입장에서 청나라를 간단하게 발라버리고,
비록 고전하기는 했지만 당시 세계최강의 육군국가인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한 일본이
별거 아니었다니.....
적어도 조선-대한제국 수준에서 그런 표현을 할 입장은 아니라 봅니다.

조선군-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간단히 발라버리는 청나라군조차도....
조선군시절에는 임오군란 당시에 청나라군에게 간단히 진압당했고,
대한제국군은 비록 지방군인 진위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함경도-간도 국경분쟁에서
청나라정규군도 아닌 간도지역의 지방 민병대와 비적들을 상대해서도 고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관련해서 언급한 부분에서 동학농민군이나
구한말 의병들과 같은 비정규군을 제외한... 오직 조선-대한제국 정규군들과 일본군과의
교전만 언급한 것입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은 너무 처참하여 일본군에게 전투에서 직접적으로
사살당한  동학농민군만 적게 잡아도 만 단위는 훌쩍 넘기는데 반하여,
동학농민군 활동기간 동안 죽은 일본군은 수 십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10명 미만이고 나머지는 전염병 등으로 인한 병사자가 더욱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 년간 지속된 구한말 의병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의병은 2만에 달하지만
일본군경은 1/100인 20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전력차가 넘사벽이었습니다.

그리고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언급해셨는데... 설마 아직까지도 봉오동 수 백명
청산리 1,300~3,300명의 일본군 전사자 숫자를 그대로 믿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이거 일본애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부분이니 앞으로는 더 이상 언급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딱 위의 숫자에서 1/100로 줄이면 정확한 일본군 전사자 숫자
되겠습니다.

당시 일본 후생성자료에서 남만주 일대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일본군에 대한
보상금-연금지급명부, 전사자-부상자들을 운송하기 위한 관과 야전침대 등을 비롯한
보급물자 관련 숫자, 그리고 일본신사에 합장된 당시 전사자들 숫자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비교분석한 결과 정확한 일본군 전사자는 10여명 수준에
부상자들은 수 십명 수준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애들에게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털린 부분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시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독립군의 빈약한 장비와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그만한 전과라도 올린 것이
높이 평가할 부분입니다.
               
꼬꼬동아리 16-07-01 23:22
   
이사람 말귀 더럽게 못알아먹네 동학농민운동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였고 곡괭이들고 싸운 전투는 왜 계속 들먹거리는지 일본군 장교들이 얼마나 교전에 무식하면 압도적인 화력으로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쳐 개발렸고 앞서서 안중근 의사한테도 개쳐발려서 하나 살려줬더만 밀고해서 깨진건데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좀 하쇼 솔직히 해군은 상대도 안되는건 맞는데  니뽕이 국민들 등골 쳐 후려서 해군 몰빵한덕에 일본여성 팔아서 탄약사고 한것도 들켰지
개쓰레기짓 해서 해군 늘인건 아는데 육군쪽은 만연 자위위대인건 알도못하네  이인간이 운요호이후 일본 간섭만 없었어도 압잡이들만 없었어도 쉽게 넘어갈 나라가 아니였어  니가 예전부터 일뽕인건 알겠는데 좀 바로 보고살거라 일뽕너무 많이 맞으면 니몸에도 안좋단다
                    
촐라롱콘 16-07-01 23:52
   
이 사람은 자기가 주도적으로 올린 글의 답글에다 대고도 무례하기가
여전하십니다그려~~~

아무리 국뽕을 자처하더라도 나와 상대방의 실력과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나서
국뽕짓거리를 해도 국뽕짓거리지~~~

당시 일본육군이 만년 자위대라......
일개 자위대 수준을 상대해서도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열 배~백 배의 병력수로 맞붙어,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열 배~ 백 배의 피해를 봐야했던 우리는 당신표현대로라면
ㅅㅂㅅ 중의 ㅅㅂㅅ이라는 논리밖에 더 되겠는가....!!!

그나마 아시아국가 가운데서는 최고 덩치의 청나라와 명실상부 세계5위안에 거뜬히
드는 러시아육해군을 패배시킨 나라의 육군을 만년 자위대 수준이라 폄하한다면...

당시 적어도 영국,독일,미국,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군대는 자위대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ㅅㅂㅅ 들에
해당한다는 논리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겟네요~~~
                         
꼬꼬동아리 16-07-02 00:08
   
당신글 다 읽어봤어요 링크걸어 드릴까요?  일뽕이 어디 가시나?  그만 쳐묵게 다쓰러져  가는 헬니뽕진 똥구중 빨아 주니 행복해 하시나?  자기가 논리적인지 아는 덜떨어진 왜구 똥찌꺼기 같은기 주제파악을 좀 하고 살아라
          
G스마트SM 16-07-02 13:33
   
전봉준.  입니다.  그리고  1903년 4월 15일 인천항에  입항한  조선 최초의 근대 군함.  군함명은.  양무호. 라고  알고 있습니다.
NightEast 16-07-01 19:17
   
정규군 승패를 떠나서 싸움을 했냐 안했냐의 의미가 여러방면으로 컸을꺼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식, 최신 무기가 한국땅에 풀리냐마냐(유입되냐)의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비정규군의 저항에도 상당히 영향을 줬을꺼라는 예상도 해봅니다
Centurion 16-07-01 23:10
   
경술국치가 1910년..

군대해산 이전
대한제국군 규모가 수도에 1개 연대, 각 도에 1개 대대(나중에 연대급으로 확장?) 수준인데..

편제상으로 보면 친위대가 1700명 정도,
진위대가 편제상으론 2만쯤 된다는데 실제론 5천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하더군요.

반면,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대략 50만명 잡는 모양입니다.(러시아군은 120만명)

(러일전쟁은 일본이 기습적으로 승부를 걸어서 승리하긴 했으나,
 러시아가 서쪽의 주력군을 아시아로 옮기면 일본이 승리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죠.)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9D%BC_%EC%A0%84%EC%9F%81

당시 고종과 민비가 30만 동학혁명군한테 사형당하고,
그 동학혁명군이 신식무기 도입해서 훈련받지 않는 이상은 일본을 꺽긴 힘들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당시 대한제국 예산 자체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고,
아무래도 나라가 막장화되어 여기저기서 세금이 탐관오리들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간 듯 싶고,
그나마도 왕실 예산을 쓰잘데기 없는데 많이 낭비하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배상금이 2억냥. 이게 청나라 3년치 예산이라고 하는데..
일본돈으로는 3억6천만엔이었다고 하며, 일본의 4년치 예산에 해당했다고 하는데.

조선의 경우 원/엔 환율이 2:1이었다고 하며..
대략 예산이 1896년 6백만원~ 1905년 2천만원까지 올라가는데..
이걸로 보면 일본돈 3백만엔~ 1천만엔 정도로 볼 수 있고.

1906년 원에서 환으로 바뀌면서, (2원=1환)
다시 2800만 환까지 올라가는데,
환 : 엔 환율을 1:1로 보면, 일본의 1/4, 1/3까지 올라가는 셈이네요.


참고자료
http://www.betulo.co.kr/1688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istory&no=17320

1달러 = 2엔 = 2환 = 4원

요렇게 보면 될듯 싶네요.

일본 1년 예산 8천만엔
대한제국 1년 예산 600~2800만 환

결론적으로 보면..

고종이랑 민비가 참 문제였다는거..

고종 재위기간 동안 꾸준히 무기 도입을 하면...
저 정도 예산으로  몇만명이 아니라,
몇십만명한테 신식총기를 쥐어주고,
제대로 된 군함도 몇척 충분히 뽑을 정도는 되는 듯 한데...

나라가 막장으로 돌아가긴 했네요.
     
꼬꼬동아리 16-07-01 23:26
   
맞아요 근데 제가 초점을 맞춘건 운요호 사건 이후에요  광무함도입시 국민단결이 엄청난걸 알 수있죠 흥선대원군 명성왕후 고중중 누구라도 단 한사람이라도 정신차렸다면 역사를 바꿀수 있었을듯
          
Centurion 16-07-02 00:29
   
그런데.. 안타깝게도 광무함은 아주 사기를 톡톡히 당한 케이스였습니다..

*********************
원래 이 배는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러스(Pallas)호를
일본 미쓰이 물산이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였는데,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55만엔(당시 대한제국 돈으로는 그 두 배인 110만원에 해당)에 구입하였다.

출시당시 25만엔이었던 9년된 중고화물선을 가지고,
값을 깎긴 커녕 두배가 넘는 가격으로 인수하였으니.

************************
그런데 정작 무기의 운용에는 무지하여
상선에 대포 몇 개를 달았을 뿐인 배(양무호)를 군함이라고 사오기도 했다.[2]

연안포함이나 정규프리깃도 아니고 상선에 대포만 얹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으로,
이와 같은 것은 서양에서 19세기 초중반 군사기술이 미개한 미개척지에서
강제로 물건을 팔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3]이었지
정규해군을 상대로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문제는 이 무장상선을 구입하는데에도 국방예산의 1/4 이상이 들어갔고,
이렇게 무리해서 구입한 군함(?)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수송선으로 쓰이다가 침몰했다.

**********************************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55만엔이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1/4 좀 넘는 금액이라는 것인데..

대한제국 국방예산은 대략 200만엔 정도로 추정됩니다.

***************

근데 당시 일본의 1907년 해군예산이 1097만엔이라고 하는데..

당시 일본 엔화 환율 영국 1파운드 = 9.76 파운드로.. 거의 1:10이었는데.

영국에 의뢰해 만든 일본해군의 전함 아사히의 가격이
영국 돈으로 120만 파운드.. 대략 1200만엔이네요.

러일전쟁 앞두고 당시 일본이 영국에 수주한 군함 가격이 5851만엔이라고 합니다.
(일본 사극 드라마: '언덕위의 구름' 참고)

러일전쟁 앞두고 일본은행이 갖고 있던 돈이 1억 1700만엔이었구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이 일본에 빌린 차관이 대략 1300만원.. 일본돈으로 치면 650만 엔 정도 되겠네요.

뭐.. 어쨌든.. 참담한 일이지만..
일본은 군사력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던 시기였고..
반대로 대한제국은 국가가 막장인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이 국방예산 200만엔 중 1/4 정도인 55만엔으로 광무호를 눈탱이 맞고 살 때..
일본은 5851만엔의 예산을 기울여 영국에 배를 주문한 상태였다는 소리죠.
(중고상선을 신규건조 가격의 2배 이상 가격으로 사기를 당할만큼 국제감각이 둔하다는..)

그만큼 대한제국의 나라꼴이 개판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눈이 뻘개져서 전쟁준비로 달리던 시기였구요.
               
꼬꼬동아리 16-07-02 00:43
   
이거 보시면 아시겠지만 광무함 산 당시 일본 방해공작 엄청 심했었고 광무함 이기에 살 수가 있었죠 제대로된 군함이였으면 일본  때문에 사지를 못했겠죠 그시기는 거의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인 시기였으니 제가말하고 싶은건 광무함 도입처럼 국민이 단결하게끔 좀 더 빨리 정부에서 손을 썼으면 쉽게 나라가 안넘어 갔을거란거죠  일본에의한 내정간섭이 약한 시기에 했더라면 더좋았을거란거죠 광무함 도입시 국민들이 담배값 부터 한푼 한푼 모아 샀던 군함이 광무함이였죠
                    
Centurion 16-07-02 01:03
   
*************

광무개혁 - 나무위키

더욱이 문제는 이 무장상선을 구입하는데에도 국방예산의 1/4 이상이 들어갔고,
이렇게 무리해서 구입한 군함(?)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수송선으로 쓰이다가 침몰했다.

https://namu.wiki/w/%EA%B4%91%EB%AC%B4%EA%B0%9C%ED%98%81

***************

아무래도 착오를 하신듯 한데..
담배값 모아서 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었고..
광무함은 그냥 국방예산으로 산거라네요.

******
이러한 호소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퍼져나간다.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어 국채를 갚자!"라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윤웅렬[7], 유길준, 양기탁, 이상재 등 조정의 주요 관료들도 운동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8년 쯤에 이르면 약 80만원 정도의 거액이 모이기에 이른다. 아직 갈 길이 한 참 멀기는 하지만....

https://namu.wiki/w/%EA%B5%AD%EC%B1%84%EB%B3%B4%EC%83%81%EC%9A%B4%EB%8F%99
*************

그리고, 제가 볼 땐 자기 왕권과 민씨일족 및 양반층 기득권을 위해서 때문에..
백성들이 일으킨 동학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외국군대를 불러들인 당시 고종과 민비의 정신 상태로 봤을 땐...
정신 차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사료됩니다..

광무함은 일본의 방해공작을 뚫고 산게 아니라..
일본 미쓰이 물산이란 기업한테서 바가지를 쓰고 산 배구요.

어쨋든 고종과 민비가 정신차리는 걸 바랄바에..
차라리 전봉준이 고종과 민비를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처럼 사형시키고,
조선의 로베스피에르가 되던가.. 그 뒤에 나폴레옹 몫까지 해내지 않는 이상은..
조선을 구할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 싶네요..

흥선대원군이 그나마 좀 국방 문제에 있어선 나름 괜찮은 인물이긴 합니다만..
신식무기를 수용할만큼의 융통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권력을 뺏기고 퇴장하구요..

개화파들은 너무 민주적 기반이 약하고,
일본에 의존적이어서.. 훗날 친일파로 대거 넘어갔죠.

고종과 민비가 동학농민군에 총질한 시점부터...
사실상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론이 위아래로 뭉치기 어려웠졌죠.

물론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뭉치려는 움직임은 국민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만...
고종, 민비, 김홍집, 이완용 등 이런 조정 수뇌부들 자체가
친일파, 친러파, 친중파로 외세의존적인 집단들이라..
국민들을 잘 이끌고 다독거려서 뭐해볼 생각이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양이 이끄는 사자 무리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에게도 진다고 하죠.
                         
꼬꼬동아리 16-07-02 09:39
   
다른말은 안할게요 찾아서 링크걸기도 귀찮고  나무위키  백과 이런건 거의 못 믿는수준입니다 가생이 다른분들도 이런말 많이하죠
                         
Centurion 16-07-02 15:30
   
제가 저런 위키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게 거짓말인 건 아닙니다.
사실상 학계에서 나온 자료나 논문, 당사국 자료, 영문 자료 이런 것도 대부분 거기서 거깁니다.

제가 굳이 책 같은걸 언급안하는건..
인터넷상에서 자료 링크를 하기 어렵기 때문인건지..

제가 저 자료를 들먹이는 것은 저 혼자 지어낸 소리가 아니라는 뜻에서입니다.
보통 저런 위키 쓰는 사람들이 역사덕후들이 많죠.
그 사람들이 혼자 판타지를 지어내서 적는 경우도 잘없습니다.

이미 정규군 규모로 봐도 적게는 1:20 많게는 1:100 정도의 열세를 보이는 상태에서

님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은 불가능했죠.

물론, 의병들이 10만 이상 단위로 봉기하고,
동학군이 과거 병력이 30만 이상, 동학 지지기반이 150만 정도 됐다고 하는데..
이들을 모두 고종이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급 리더쉽을 발휘해 신식군대로 만들어서 일본의 50만 대군을 격퇴하지 않는 이상 어렵습니다.

(이미 일본엔 20개 사단 병력이 존재했는데, 조선은 수도에 1개 연대, 8도에 각 1개 대대 병력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말기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 상황이었고, 민씨일가의 세도정치와 부정부패, 민비의 낭비 또한 유명했죠.

이길만 했으면 나라를 뺏겼겠습니까?
님이 말한 비슷한 상황이 13도 창의군과 남한대토벌, 동학농민운동라는 실제역사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그 인원들을 신식소총 쥐어주고 근대식 훈련해서 군대로 만들지 않는 이상 일본이랑 전쟁해서 이길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건 일본군과 조선군의 싸움이 아니라..
메이지유신 수뇌부 vs 조선 고종, 민비, 그리고 김홍집, 이완용 등 조선 수뇌부의 리더쉽 싸움인데..

실제 역사상 나라는 멸망하고,
왕가와 대신들은 모든걸 포기하고 일본에 붙어서 호의호식하고 살았던게 역사적 사실이죠.
                         
버섹 16-07-03 20:40
   
광무함이 아니라 양무호이고 다음으로 도입한게 광제호죠..
Centurion 16-07-02 00:48
   
결론적으로 보면...

조선은 대략 1년 예산에서
많게는 일본의 1/3~1/4 정도 수준에서, 적게는 1/13 수준이었고..

(물론, 1910년대 일본이 5천만 인구로
 조선 인구 1300만의 4배 수준인데다,
 근대화와 전쟁준비한다고 국민들 엄청 쥐어짜던 시절)

조선은 세도정치로 행정체계가 막장화된 시절이었긴 합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재력과 인구에 비해 많이 후달리고,
지도층 자체도 너무 안일하고, 무능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합니다.

일본이 죽기살기로 수십척의 군함과 수십만의 대군을 준비할 때..
대한제국은 한척의 수송선과 다합쳐서 수천명 수준의 군대를 가졌을 뿐이니까요.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의외로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로..
일본 우익 드라마나 만화에서조차 '조선의 마지막 걸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흥선대원군 물러나고 2년만에.. 운요호 사건이 터졌는데..
사실 흥선대원군이 물리친 프랑스 함대, 미군 함대 규모와 병력에 비하면..
운요호는 아주 쬐그만 배에 병력도 얼마 안됩니다.
미국, 프랑스함대와 비교도 안되는 그런 운요호 때문에..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죠.
그만큼 고종과 민비, 민씨일가가 장악한 조선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보여준달까요.

비록 인구과 예산이 일본의 1/4 수준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계몽군주가 이끌었다면 조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겠죠.
     
촐라롱콘 16-07-02 08:39
   
운양호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특히 운양호 사건에서 불과 4년 전에 벌어졌던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전투와 비교해서

정말 180도 달라진 조선군의 모습이라......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이 비록 미군에게 무참히 패하기는 했지만....

전투 내용으로 보자면 600명 규모의 조선군 수비병력이 450명 규모의 미육전대 병력을

맞이하여 백병전에서 창칼이 부러지자 돌과 흙덩이를 던지면서까지 극렬하게 저항하여

조선군도 350명의 전사자를 내긴 했지만, 미군 또한 3명의 전사자와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반면에.......

운양호 사건 당시의 영종진 전투에서는 조선군 병력이 첨사 이민덕 이하 450명 규모임에 비해

일본군은 운양호 자체의 승선 인원이 수 십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육지에 상륙해서

조선군과 맞붙은 일본군 육전대는 20명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이 패주 분산하여 조선군은 35명 전사에 16명 포로를 낸 반면에

일본군은 불과 2명의 부상자에 불과한 전투랄 것도 없는 전투를 보여주었지요~~~

아무리 무기와 훈련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병력수가 월등하기 때문에

만약 450명 병력의 대다수가 도주하지 않고 저항했다면 불과 20명의 적군에게 영종도

전체를 장악당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꼬꼬동아리 16-07-02 09:41
   
많이 아프나?
               
촐라롱콘 16-07-02 10:00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인지.....

내 주관은 거의 없이, 그냥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위주로 언급해도
시비를 거니 이거야 원~~~

만약 내용중에 오류가 있다면 그걸 가지고 반박하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나~~

이건 그냥 대놓고 뜬금없이 시비부터 거니, 님은 평소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도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꼬꼬동아리 16-07-02 11:19
   
니글이나 읽어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무뇌충인건 알겠는데 니 댓글 쭉읽어봐라
동학농민운동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곡괭이들고 싸운게 무슨 싸움이냐?  몇번을 쳐말해도 못알아 쳐먹고 또 적고 또적고 무뇌충한텐 스펙이고 뭐고 다필요없단다 니같은 진정한 일뽕님들에겐 반박할 기분도 못느낀다  아베똥구중 싹싹 핥아 빨아주니 기분이 아주 찢어지지?
          
G스마트SM 16-07-02 13:21
   
혹시
광성보 전투 당시의 수비병력과  운양호 사건  당시  주둔 수비병력.  개개인 구성원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기론  광성보  수비대  주요  구성원은.  과거 착호인이라 불리던.  산행포수.  즉 호랑이 사냥꾼 출신으로  구식의 화승총임에도  화기  운용에 익숙하며  기본적으로 전투의지가 높아 미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임했을테지만.
경군. 혹은  향군 이였다면  다소  차이가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가물가물  하지만  고종도  경연  자리에서.  경군보다는  향군.  향군  보다는 산척이  뛰어나다.  라는  내용을  언급한것  같은데. 그만큼 개인기량이 뛰어난 산척. 산행포수가.

광성보  전투 이후  보충된  병력이  산행포수가  아니였거나.

구형 화포 36문  증강배치  후  운용을  위한  화포병 구성원이  주력이였던가 하는
 문제가 장비의 질적 열세를 떠나  병력의 숫적우위를  활용하지  못한채  패전으로  이어진게  아닐지. .
               
Centurion 16-07-02 15:36
   
그래도, 전투에서 일부 패배하여 수십명의 전사상자가 났다고 해도..
결국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라는 걸 받아들인 것은 고종과 대원군 실각 이후 실권을 장악한 민씨세력 아니겠습니까?

대원군이 버티고 있었다면...
아마도 님 말씀대로 강화도에 사냥꾼들을 파견해서 배치해둔다거나,
초전에 패배를 하더라도, 증원군 수천명을 보내서라도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처럼 계속 싸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강화도조약이란게 부랴부랴 체결된거 보면..
고종과 민비, 민씨일가들이 얼마나 대원군과 달리 무기력한 집단인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G스마트SM 16-07-02 17:01
   
쩝. 그렇긴 하죠.

친위병 양성을 위해.  중앙이건 지방이건 각 군영의 인력을 빼가고. 무위소를 영급으로 확대하고. 군비지원에 권한에. 몸집 부풀리기에 집중하는 사이.
타 군영은 재정부족에 사기저하. 질적저하로 이어져.

대원군 집권기와 고종 친정기 사이에. 군사적 양상이 너무 달라서 당혹스러움이.

마치. 구한말 배경의 대체역사소설 속 사건진행 처럼보일 정도네요.;;


저 개인적으로. 오히려.  상황이.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 받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생각되네요.

분명. 75년 9월 부터. 조약이 체결되는 76년 2월 사이. 수개월이란 시간이 존재 하지만.

단지 강화도 내 한정적인 지역에서만이 아닌.부산까지 포함된

지들 서구열강에 당한 수법.  포함외교로.공포심을 주었길래. 반격을 할수 없었던듯 하네요.

운양호 분만이 아닌.  맹춘호에. 제2 정묘호.고흥호 정식군함에.

교룡.함관.현무 같은 무장한 상선까지 동원하여. 부산항과 강화도에 배치함으로써.

한성 진입을 협박하는 통에. 별다른 군사적 대응이 어려웠을듯 싶어서 말이죠.
Centurion 16-07-02 16:58
   
그리고 누누이 신식무기와 신식군대의 중요성을 계속 언급했는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조선이 쓰던 화승총..
(상당수 의병들은 총알도 없고 화약도 없는 빈총을 들고 항쟁)은
사거리가 50미터 정도도 장담못하는 극악한 정확도를 가졌는데..

본래 이게 강선도 없는 활강식 총신에다,
오늘날의 뾰족한 탄두와 탄피가 결합된 금속카트리지 탄이 아니라..
둥그런 모양의 납탄에 흑색화약을 감으로 쑤셔넣고 쏘던 무기였습니다.

그마저도 전원 화승총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고, 일부였으며..
대부분은 죽창, 낫, 칼로 무장한 무장상태가 매우 부실한 군대였습니다.

반면, 일본군이 쓰던 30식 소총은 볼트액션소총으로..
사거리가 시력만 좋으면 유효사거리 370미터도 맞출수 있는 수준이었구요.

1907~1910년까지 일본군 2개연대와
수만명의 의병들이 싸운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이 벌어졌고,
이 때 죽은 의병이 1만7천명 가량이고, 반면 일본군은 130명 죽었습니다.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라, 신식무기의 위력이 그리도 차이가 나는것입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togdill&logNo=90136862177&parentCategoryNo=25&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군필이면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K-2 소총 기록사격할 때 250미터까지만 쏘죠.
500미터 정도 쏠려면, 대문짝만한 표적도 손톱보다 작게 보입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지요.

이런 신무기를 확보해야될 대한제국의 정부가..
예산을 오늘날 방산비리 뺨치는 스케일로 이리저리 해먹었으니..
국력차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이 애국심은 있으되, 죽창, 호미, 낫 들고 싸우는 군대였고.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기 기득권 때문에 국민한테 총질하고, 외국군 불러와서 진압 도와달라고 하고,
나라가 망하니 일본 공작, 후작, 백작, 남작, 자작 작위 받고 평생 잘먹고 잘살다 간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뭔 기대를 거는 것은 문제가 많죠.

문제는 이것도 전통인지..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직자들도 마인드가 큰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방산비리에
국가 예산으로 월급주는 보좌관들을 친인척 앉히고, 보좌관한테 후원금 상납받고,
이건 뭐.. 구한말 세도정치 매관매직 판박이.

심지어는 중국 눈치보느라,
중국은 한국인 맘껏 사형시키는데, 오원춘 같은 살인마도 살려두고,
불법어선 수만척이 드나들어도, 수백척도 나포 못하는 상황에..
미세먼지도 중국에서 날아온게 아니라고, 언론까지 떠들어대며 중국 쉴드쳐주는 나라.

뭐 이런데도, 나라 경제규모가 커지고, 국방력도 어느 정도 되다보니..
구한말과 다르게 버티긴 버티는데..

어쨌든 나라가 한번 망했으면 교훈을 거둬야 되는데..
1950년대에도 국민방위군 사건 터지고, 지금까지도 방산비리 판치고,
로스쿨이니 뭐니 억 소리 나는 현대판 음서제 나오고, 참 기가 찹니다.

그리고, 을미사변 때.. 민비 살해 당시.. 일본 낭인들만 쳐들어 온게 아니고,
훈련대라고 해서.. 조선군들도 일본인들과 행동을 함께 했죠.

어쨌든 저는 일본이 잘났다는 소리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조선 멸망의 교훈에서 배워야 하는 문제들은 부패한 지도층으로는 뭐든 답이 안나온다는 겁니다.

어쨌든 대한제국군이 제일 많을 때 편제상 2만5천쯤 되는데..
그걸로 청일전쟁, 러일전쟁까지 치룬 일본군 50만을 상대로 지지 않을거라고 상상하긴 어렵습니다.

사실 러시아 >>> 청나라 >>> 일본 >>> 조선 이런 판국에..
일본이 자국보다 국방예산이 많은 러시아, 청나라도 이긴 판국에 조선을 상대로 못이긴다는 것도
좀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다만, 아프간 무자헤딘처럼 ak-47 하나 들고, 소련군 물리치듯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조선에는 그 ak-47 노릇을 할 신식무기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꼬꼬동아리 16-07-02 18:14
   
더이상 댓글 다는것도 귀찮네요 님이 제글을 이해못하신거 같은데 청산리나 봉오동처럼 경술국치 이후 10년뒤에 일어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승리하게 되죠 강제병합된지 10년 뒤 일입니다 외교권박탈과 군대해산 하기  이전 그 10년동안 이라도 군대 양성에 힘썼다면 쉽게 빼앗길일이 아니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산리나 봉오동전투는 신식군대 양성해서 이겼나요?  그기간동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단 말이죠 너무 자기주장만 내세우시는데 나무위키도 정확하다 지식인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뉴라이트도 지식인들이고 문제가 되는 교과서도 지식인들이죠 교과서가 식민사관으로 도배됬다는 글들이 각 싸이트 유저들이나 지식인들에 의해서 파헤쳐질 필요도 없죠 님이 위키백과 완전 신뢰하시는거 같은데 뭔말을 해도 똑같겠네요 저는 그만합니다 댓글 더달고 싶음 마음껏 다세요
          
Centurion 16-07-02 18:35
   
발제자 본인이 이런 주제로 토론하자는 글을 올려놓고,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성과 어긋나는 내용이 댓글로 올라왔다고..

귀찮다?는 반응을 보이다니 참으로 의외군요..

청산리와 봉오동전투는 참고로 다합쳐서 2천명 내외의 독립군이 참여한 전투입니다.
거기서 쓰였던 무기는 대부분 독립운동단체들이 소련 연해주에서 사들인 무기들이었죠.

러시아제 모신나강 볼트액션 소총 아시는지?
고로, 일본과 대등한 수준의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http://m.blog.naver.com/kc6731/120208173874

즉, 화승총 들고 싸운 전투가 아니에요, 그 봉오동, 청산리 대첩은...

또한, 외교권박탈과 군대해산이라는 문제는..
이미 1894년 청일전쟁을 거쳐..
1905년 러일전쟁 쯤에서 이미 게임이 끝난 문제구요.

조선이 신식군대를 기르려 했으면 병인양요, 신미양요,
아니 강화도조약 이후라도, 청일전쟁 전까지 군대를 길렀어야 됩니다.

(막상 기른 군대는 청, 일 외국군대 불려들여서 연합해 동학농민군이라는 국민 진압에 씀)

일본은 자기들보다 국방비를 많이 쓰는 청나라도 제압했는데..
청나라군대는 신식소총으로 무장한데다, 일본군보다 병력수도 많았어요.

그리고, 이미 역사엔 "가정"이란게 없다는 말처럼..
조선에 그럴만한 리더쉽이나, 그럴한만 군사세력이 존재하지 않아,
동학농민군도 패퇴하고, 의병항쟁도 실패하고, 그러다 나라가 망한게 사실인데..

제가 따로 자기주장이고 뭐시고 내세울게 뭐랍니까?

있는 그대로 역사인데요. 고집은 발제자 본인이 피우는거죠.

좋은 개혁정책도 마인드가 올곧은 계몽군주한테서나 기대되는거지.
무슨 고종하고 민비, 민씨일가들이 장악한 조선에서 국방개혁을 기대합니까?

개항하고도 고종이 20~30년 세월을 허송세월하고 보냈으니 국방개혁을 못한건데.

식민사관이 왜 나와요? 고종이 무능하고, 민씨 일가가 매관매직하고, 요직 독차지하고,
민비가 외국인들한테 용돈삼아 거금 내놓고 허영심 부리던거 이런거는 죄다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고종과 민씨일가가 정신 차리고, 군대를 준비했으면 됐겠죠.

근데, 현실은 그것도 제대로 안하다가,
일본한테 국력이 눌려서 GG치고 나라 뺏긴거라구요.

그닥, 공격적이지 않게 자제하면서,
매너있게 님의 그 "설정"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건데, 식민사관이 왜 나옵니까?

*********
님 본문 글

"
저번에 어느분이 조선 총기부터
선진화된 무기배치한거  올린적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의외로 육군은 제법 잘되어 있었던걸로 봤는데
그자료를 지금 어느분이 올리셨는지 찾을수가 없네요

=>의외로 육군은 제법 잘되어 있는 거 같아도, 일본에 비해 너무 숫자가 적습니다.
    제가 지적한 내용은 이걸 지적한거구요. (예산, 무기, 병력 숫자)

그상태로 이완용 같은 찌끄레기들이 나라 팔아먹지 않았으면
일본과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었겠지만 지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많이 드는데
유저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일본과 전쟁했으면,
    조선군, 대한제국군 병력규모와 질과 양을 생각하면 이기기 어렵다고 적어둔겁니다.
   

미국이 쳐들어온지 단 2년만에 군기가 그렇게 빠져버렸다는건
압잡이 찌끄레기들 로비받았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일본과 전면전 떠도 지지 않을 나라가
    일부 앞잡이의 배신으로 망했다고 생각하시나본데,

    그 친일파 앞잡이들의 행위는 괘씸하다만..

    군대의 질과 양을 따져보면, 애시당초 전면전으로는 답도 안나오는 상태였고,
    고종 재위 몇십년  동안 그 국방개혁이란걸 제대로 이루지도 못해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던겁니다.

    해볼만한 군사력을 갖췄으면 기회주의자들이 배신도 잘 안해요.
    주판 두들겨보니 암만봐도 안되겠으니 쪽본에 붙은거죠.

    님이 잘 모르시나본데... 일본이 근처에 있으니 만만해보이지만..
    당시 세계적으로도.. 제국주의 열강 축에 들어가던 신흥강국입니다.

    조선보다 인구가 한 20배 이상 많은 아시아 최강대국 청나라도 이기는 나라를
    정규군 7천~2만5천명 수준으로 어떻게 지지 않는 싸움을 벌이겠습니까?

    물론 고종이 대단히 영특한 군주였다면,
    이순신 장군 or 세종급 리더쉽 발휘해서.. 군대 준비했겠다만..
    그걸 안한게 부동의 역사적 사실인데 어쩝니까?
버섹 16-07-03 20:52
   
꼬꼬동아리님의 의견이 다소 과정된 부분은 있다고 해도
Centurion님은 당시의 대한제국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시는 듯 하네요...

일본도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키워간 겁니다.
미국의 군사력에 놀라 강제 개항한 후,
미군의 어깨 너무로 근대식 군대 양성에 대해 조금씩 배워 군사력을 키운 것이죠...
 
그러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강화도를 침략해 조약을 맺고, 청일전쟁에 가까스로 이긴 후,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 군사력을 더욱 키워 러일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시 고종은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국을 꿈꾸었던 만큼 군사력 확장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죠.
2만 7천 명의 병력 외에도 군사력을 더욱 키우려 하고 있었으며, 영국교관을 데려와 해군도 만들었죠...그런 노력들이
일본의 침략만 아니었으면 어떠한 결실을 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결과만 보고 너무 일방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매도하시네요...
     
Centurion 16-07-03 23:00
   
제가 딱히 크게 부정적인 의견으로 매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저는 대한제국과 일본의 1년 예산과
군대규모, 국방비 규모 등을 객관적 팩트를 비교해서 판단한건데요.

그리고 일본이 미국에 의해 1853년 강제개항은 했지만,
이후 1860년대에 남북전쟁이 일어나 일본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강제개항 된 뒤로, 영국, 프랑스 등이 접근해서 연거푸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이 당시 막부파와 막부반대파의 싸움에 무기를 팔았죠.

그런데, 그 내전에서 일개 지방군이
신식소총 수천정과 대포, 증기선 몇척씩 거느리는 상황이었고,
내전이 반 막부세력의 승리로 끝난 후. 그 지방군(죠슈, 사츠마)의 무사들이
일본육군과 일본해군을 만들어서,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를 평민 중심의 군대로 만들고,
규모를 대폭 늘려버립니다.

아편전쟁 때, 당대 세계최강이었던 영국군이
173척의 군함에 2만명의 병력을 태우고 청나라의 팔기군 20만을 이기고,
청나라에 굴욕을 줬습니다.

근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 시기에 이미 30~50만 대군의 신식군대를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게 5~7천명에서 많을 때는 2만5천명이었던 겁니다.

일본인구가 5천만이고, 조선인구가 1300만인데.. 거의 4배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예산이 1/4 많게는 1/13 밖에 안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하고, 전쟁해서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보존할 가능성은 얼마라고 보십니까?

저는 딱히 부정적인게 아니라,
대한제국이 살아남으려 했다면, 썩은 부패 권력층들을 싹 쳐내고,
훌륭한 군주나 혹은 나폴레옹 급 정치, 군사지도자가 나타나서,
국론을 단결시키고, 최소 군대를 10만~15만 이상 키워야 한다고 적은겁니다.

근데, 조선의 숨통이 사실상 끊어진건...
일단 명목상 상국인 청나라가 일본한테 절딴 나면서 사실상 끝이 난겁니다.

당시 청나라의 중핵이자 신식군대였던 북양군이 병력이 65만에,
일본보다도 강력한 근대식 함대를 갖고 있었는데.. 얘네들이 일본한테 졌거든요.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버리고..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에서 분리된 "독립국"으로 만듭니다. 그게 대한제국이구요.

근데 막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미 대세는 일본이다 싶어서 일본쪽에 붙은 친일파와
러시아에 붙어야 그나마 일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친러파가 대립합니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과 대립할 만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국인데..
그 러시아가 극동지역에 군대 파견하고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차지했죠.(청나라 강희제 때)

그런데 이 대단한 러시아를 상대로 일본이 또 전쟁을 벌여서 이겨 버렸던겁니다.
물론 러시아가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은것은 아니다만, 극동함대와 발틱함대가 전멸해버리고,
육지에선 물론 충분히 증원을 해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긴 하지만, 만주의 요지인 여순항을
잃어버리고 결국 똥줄타는 일본과 실리를 잃어버린 러시아를 미국이 중재해서 물러나버렸죠.

대한제국군보다 한 20배~70배 이상 큰 북양군을 가진 청나라도 몰아내고,
세계에서 영,프, 터키, 독일과 맞짱을 뜨고, 영국을 긴장시키던 그 러시아도 물리쳤으니,
조선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게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조선이 최소한 10~15만 많으면 30만~40만 신식군대를 보유했어야 독립을 유지했죠.

전 그 팩트를 말하는겁니다. 조선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 고종이나 민비, 여흥민씨 일문이
매관매직하고, 뇌물주고받고, 사치와 낭비 부리는 걸 보면, 국가 지도층이 싹 갈려나가고..
나폴레옹급 리더가 딱!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답이 없었어요.

비슷한 걸 해낼 사람이 있긴 했는데.. 그게 대원군이었다는거고..
대원군이 쇄국만 하지 않고, 쇄국하다가 신식문물에 눈뜬 쵸슈, 사츠마번 같이 태도를 바꿔..
근대화에 매진했다면 조선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안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고종이 찔끔찔끔 외교한답시고,
영국에 총 몇정, 미국에 총 몇정, 러시아에 총 몇정, 일본에 총 몇정 이런씩으로 사와서,
보급체계도 개판인 상태로,

국민들이 '못살겠다~ 우리 말 좀 들어주쇼'하고 일으킨 30만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육성한 관군들이랑 청나라, 일본군 연합으로 보내서 토벌해서..
국론은 분열되고, 애국심은 다 사라지게 만들고..

나중에 10만 의병이 들고 일어나니, 이 사람들은 탄환도 없는 화승총 빈껍데기 들고..
사정거리 370미터짜리 볼트액션 소총에 학살당하듯 패배한게 현실입니다.

그 때 10만 의병들이 서양식 볼트액션 소총만 1인 1정씩 가지고 있었으면..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털려나가듯 독립은 유지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결국 고종은 자기 친위대 몇천명만 딱 유지하다가,,
나중에 이왕으로 격하되서.. 일본치하에서 살다 죽었죠.
고종이 나라 망했다고 명나라 숭정제마냥 목매달고 xx한 건 아니잖습니까?

고종이 정말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동학농민군도 진압하고 그랬던걸까요?
그냥 자기 권력과 자기 세상을 놓기 싫은 마음에서 외국군도 불러들이는 군주가.. 고종입니다.
그 배경에는 여흥 "민씨"성을 가졌으면 개나 소나 감투쓰고 세금 빼먹고, 매관매직하던 민씨외척이 있었고..

그런 나라가 비록 국가 내부의 혁명이 아닌 쪽바리 일본한테 나라가 망해서 안타깝긴 하다만...

나라가 지켜질 조건들을 허물고 망가뜨린 원인은..
자기 기득권이 외세의 침략보다 먼저였던... 조선 집권층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국민들은 그래도 할만큼 했어요.

세상에 총알도, 화약도 없는 화승총 껍데기, 호미, 낫, 죽창 들고 국민들이..
분당 7~8발 쏘는 명중률도 현대식 소총과 다를 바없는 그런 신식소총든 외국군에 맞서싸우다..
수만명이 죽어나갔는데.. 고종이랑 민비는 관군 보내서 외국군이랑 연합을 했죠.

이걸 딱히 제가 부정적으로 매도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상황만 딱 보면 그대로 보이는데요.
          
버섹 16-07-04 00:29
   
님이 위에 열거한 내용을 몰라서 댓글 단 게 아닙니다.
님은 계속 고종과 민비 및 그 일족의 부패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동학농민혁명을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하려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잘못이죠...

하지만 매관매직 같은 부패들은 민씨 일족의 문제만이라고 할 순 없죠...
대원군에 의해 제압된 안동김씨를 비롯해 그 이전의 세도정치를 낳은 조선 후기의 노론들이 가장 큰 원흉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의 대부분 친일파가 되기도 한 인물들이니 돌을 던지려면 그들에게 던져야지요...
고종의 잘못이라면 그들을 제압하지 못한 겁니다.
정치에 노련했던 대원군조차 그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노론에서 친일파로 이어지는 그 엄청난 세력들을 두고 고종만 탓하는 암군론이야말로 일본놈들이 자신들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왕조 무능론을 위해 퍼트린 것입니다.

고종을 유능했던 훌륭한 군주라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노론 친일파 놈들 대신 망국의 군주로 욕을 다 들어야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초기 독립운동을 했던 지사들은 대부분 고종의 근왕세력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독립운동의 씨를 뿌려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와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겁니다.

대한제국 13년, 그 가운데 러일전쟁 이전의 7년 동안 대한제국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팩트를 보시고 말씀하세요...

그 방향으로 성장을 계속했다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아 경제, 사회, 군사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었을 것은 명백했으리라 봅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만 완성했더라면 일본은 러시아에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무기, 군수 물자 등을 빠르게 수송할 계획이었죠...

영국과 조약을 맺고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일본이 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해 힘겨운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물론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 탓도 있었지요.
발틱함대는 먼거리를 돌아 온 탓에 패한 것이고요...

러일전쟁의 결과가 달랐더라면 대한제국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님이 말하는 당시의 대한제국과 일본이 처한 상황에 대한 팩트대로 대한제국이 당연히 일본에 패했을 것이라는 건 그런 국제정세나 시대적 상황, 대한제국의 발전 가능성 등을 간과한 단편적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에 결과만 보고 부정적인 면만 나열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아편전쟁 당시 영국의 병력은 초기 15척의 배에 4천 명 가량이었어요...나중에 1만명으로 늘어납니다.
               
Centurion 16-07-04 01:18
   
님이 언급한 히 노론을 두둔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굳이 따지면 상당히 과거의 얘기지요.

참고로, 저는 조상으로 따져봐도 노론이랑 거리가 먼 남인집안 출신이구요.
노론(서인) 별로 안좋아합니다.

세도정치의 원형은 나름 명군인 '정조' 시대 홍국영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정조 사후에 1800년대 순조시대부터 안동김씨 김조순으로부터
외척들 중심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는데..

이 김조순도 노론이였죠. (!!!)

자 그러니까, 고종 무렵까지,
순조부터 대략 60년 가량 이미 노론쪽 출신 가문
안동김씨 등에 의한 세도정치가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소위 서인 뿌리에서 시작된 친일파들이 망국 시기에도 권력을 잡고 있었고,
사실상 당파정치를 떠나서 거의 외척들 민씨 성 달고 한자리 안해먹은 사람이 없을만큼
잘나갔던 시대가 고종시기죠.

이런 말도 있더군요.
서인치고 친일 안한 사람없고,
남인치고 애국 안한 사람 없다..
뭐그런 말이 있던데.. 정말 그런지 저는 잘 모르겠고..
우리 문중도 일제 토지조사 사업 때 땅 좀 많이 뺏긴걸로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은 안했는지 몰라도, 경제적 손해는 많이 봤죠.

어쨌든, 그만큼 서인이 임진왜란 이후 거의 다해먹었죠.
숙종 때 장희빈 앞세운 남인이 반짝하다 밀려난 것 빼곤..

그리고, 고종암군론이라.. 제가 딱히 고종만 탓한게 아닐텐데요.
아니 실제적으로 고종, 민비, 민씨 외척세력, 기타 등등이 다해먹은 시대에 누가 책임을 져야겠습니까?

국정운영의 잘못은 최상위 집권세력이 지는게 맞죠.
힘없는 9급공무원이나 민간인이 질 수는 없잖습니까?

고종이 딱히 유능한 임금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외국 문물 조금씩 받아들이며,
전기회사 차리고, 경인선 개통하고, 신문사 만들고, 요런 소소한 개혁도 한 부분은 인정합니다.

지금 국민들한테 욕먹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도 듣기 좋은 연설, 국민 생각하는 척 하는 정책 많이 합니다.

단지, 복지정책이란게 강력하고 전국적인 범위가 아니라,
언발에 오줌싸는 것 수준도 안되는 쥐똥만한 수준이라서 문제지요.

예를 들어 청년 일자리 해결한다고, 창업 지원한다고 하는데.
제가 얼마전 청년일자리 문제 해법을 민원을 넣어 제안했었는데,
그 민원 답변들어보니 중소기업청에서 운용하는 청년 창업지원금이 1천억원대더군요.

대한민국 청년백수가 수백만명인데,
수십조원대 예산도 아니고, 1천억대 복지로 어찌 해보겠다는게 헛웃음이 나오지요.

그런데, 바다 건너 수십만 대군이 노리는 등 문제가 아주 거대한데..
당시 국가예산의 10~20% 가량을 제사지내는데 쓰고 그랬죠.

요즘 대한민국에 막사 침대 교체비용으로 6조원 가량을 썼다는데,
막상 교체도 다못해서 2~3조원을 더 달라고 합니다.

이거면 항공모함도 한척 내지는 이지스함 6~10척, F-35 수십대는 뽑을 돈이지요.
이런데서 비리로 돈이 줄줄 새어도, 그래도 한국은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을겁니다.

헌데, 당시 그 엄혹한 동아시아 국제환경에서...
세금 잘못 쓰고, 군비 증강 안하면 나라가 망하는 시국이었거든요.

지금 대한민국처럼 미국이 한미동맹 맺어놓고, 자동참전하는 그런 상황도 아니고요?
물론, 비슷한 역할을 청나라, 러시아가 할 뻔도 했으나, 다 일본한테 패전하고 물러났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진짜 명군주였다면.. 뭘 했을까요??

국론을 통합해서, 자기 기득권을 양보해서라도, 징병제 실시하고,
조병창 만들어서 신식 무기 카피를 하든해서 대량생산하고 그랬겠죠.

이게 대체역사소설이나 시나리오에서
대한제국 건국사니 하며, 그나마 생존하는 길이었습니다.

이걸로 빅토리아2, HOI-2 같은 게임마다 한제국 건국사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있죠.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안됐죠. 그래서 대체역사소설, 시나리오로 끝나는거구요.
 
그리고, 러일전쟁의 결과가 달라졌다고 가정(!)을 해봐야,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타임머신은 아직 개발이 안됐구요.

역사적으로 현실에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GG치고 물러섰는데..
청, 러가 gg치고 나간 뒤의 조선에는 일본을 견제할만한 군사력이 없었습니다.

님이 설정한 그 고종의 개혁과
러일전쟁 시기의 군사력 성장이라는게..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게 됐으면 일본이랑 전쟁했으면 나라 안망했겠죠.

또한, 님처럼 가정을 한다면,
우리가 또 어쩌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어서
적백내전 이후 몽골처럼 소련의 힘에 의해 지탱되는 그런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고,
시베리아의 여러 공화국들처럼 러시아의 일부가 됐을지도 모르는겁니다.

외세에 의존해봐야 이래나 저래나 결과는 비슷한거죠.
결론은 내가 힘을 가져야 되는겁니다.
(이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죠. 외교력도 총칼에서 나오는것인데..)

그리고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군 규모는..
나무위키에선 2만이라 적혀있던데,
중국 위키엔 님 말대로 1만1천으로 적혀있군요.
근데 이건 저한테 태클걸어보셔야 별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영국군 1만+프랑스군6천에 팔기군이 패배했든..
영국군 2만+프랑스군6천에 팔기군이 패배했든..
제가 말하고자 하는건.. 신식군대와 신식소총, 대포 등의 근대화된 군대의 위력이니까요.

사실 1만에 패배했다고 하면, 그만큼 더 영국군이 쩐다는 소리겠죠.

반면, 영국같은 세계최강해군력을 갖춘 나라도
대외원정규모를 그렇게 밖에 못한다는 소리기도 하겠구요.
제 논지를 전개하거나, 그것이 뒤집힐만큼의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다만, 님이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대한제국군이 일본에 패하지 않을 방법은 좀 의문이긴 하군요.

(1)청나라, 러시아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일본을 몰아내주는 것?
(2)그런 다음에 고종이 정신차려서, 징병제 실시하고 10~30만 대군을 육성하는 것?

제가 (1)번은 몰라도 (2)의 경우엔 위쪽에 그런 말을 안써둔것은 아닐텐데요..

다만, 현실 역사에선 대한제국군은 2만5천까지 늘어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5~7천명 정도 수준으로 축소되어 일제에 의해 해산했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패한 후 친일파들이 조선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구요.
심지어 을미사변만 하더라도, 일본 교관한테 훈련받은 조선군인 '훈련대'가
일본 낭인들을 도와 궁궐을 침입했죠.

물론 군대해산에 맞서 봉기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들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들도 꽤 많았죠. 일본육사에 유학간 조선 유학생들도 지청천 장군 빼곤,
대부분 일본에 붙어서 일본군 장교를 했구요.

이게 REAL한 FACT 그대로의 역사인데...

제가 이런 조선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나름 대안은 제시하면서, 이렇게 했으면 생존할 수도 있었다라고 적었는데..

단지, 그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눈앞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집권세력을 싸잡아 깐것을 "고종 암군론"으로 축소를 하시는지 이해가 좀 안가네요.

저는 싹 다 깐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맥켄지라는 서양인이.. 당시 의병 항쟁을 벌인 사람들을 취재한 내용이 있죠..

다들 총알도 없는 화승총을 들고, 부상입고 죽을 거 뻔히 알고 싸웠고,
그러다 죽었습니다.

이런 영상도 있더군요. 방송국 다큐에서 나온 내용인데..

실제기록을 보면, 의병 70명을 진압하러 일본군 4명이 출동을 했답니다.

https://youtu.be/PU0ZPNisEO8?t=40s

영상 2분 40초부터 나오는 내용..

************

융희 2년(1908) 4월 4일
일본군 상주 수비 제 2중대 전투보고
3월 31일 해인사 서쪽 3리 조선 의병 70명 확인
우지 상등병 이하 4명 출동
의병 주둔 고지를 공격 20분간 교전
의병사살 8, 부상 도주 10, 화승총 3, 창 2 노획,
일본군 피해없음

4월 1일 적을 추격
풍석동에서 10분간 교전
의병 사살 3, 부상 도주 4~5
화승총 1, 창 1 노획
일본군 피해 없음.

**************

이런데 지금 대한제국에 싸울 애국자가 없어서 망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들이 들고 싸울 신식 소총이 없어서 망했죠.

그러면 이런 애국자들을 모으고, 군대로 키워서 나라를 지켜야 될 책임자는 누굽니까?

고종도 나라는 사랑했죠. 자기한테 대드는 백성들은 국민취급을 안했지만..
그래도, 이런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는 시기에 활동한 의병들이 왜 화승총과 창으로
일본군과 싸울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몇십년의 집권기 동안 고종과 그 외척, 집권세력들은
뭘 했는지 불만이 나오는거야 당연하죠.

일본이 도둑놈이지만,
그 몇십년 세월 허비하고, 방범창, 세콤 안달고,
몽둥이 하나 안 장만한 가장은 뭘까요?

일반 가정집 가장들처럼 자기가 돈을 번것도 아니고,
국민들 세금거둬서, 정치를 하는 입장인데..

물론, 저도 일본 그 날강도들이 잘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조선의 집권세력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으면,
이런 애국자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총기를 쥐어줄 생각도 못했으며,

막상 나라 넘어갈 때에도 국민들이 목숨걸고 싸우는데..
그들이 손에 쥘 신식소총이 없었던게 문제입니다.
                    
버섹 16-07-04 05:32
   
노론을 고종시대로부터 상당히 과거의 이야기라고 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제가 아편전쟁 규모에 대해 지적한 건 팩트 좋아하시는 님이 틀린 것을 지적한 겁니다.
위에 광무함이라고 한 것도 그렇고요...
고종이 도입한 군함은 양무호와 광제호거든요..
고종암군론이라고 한 것은 대한제국 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땐 민비는 없고, 민씨 일족들도 권력을 휘두르던 때가 아니니까요...

- 의병 70명을 진압하러 일본군 4명이 출동을...
동학때도 그랬습니다.
수만명의 동학군이 따발총 보유한 200명 일본군한테 패했더랬죠...

- 이런데 지금 대한제국에 싸울 애국자가 없어서 망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들이 들고 싸울 신식 소총이 없어서 망했죠.

싸우다 죽는 의병들도 많았지만 조정안에 친일파들도 쑤두룩 했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친일파 목 베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이 넘쳐났죠...러일전쟁 끝나자 거리에 나가 일본군 환영하던 일진회 회원이 수 만명이었어요...
아무리 임금이 신식총 들여와 봤자 조정안팍에서 나라를 좀 먹는 그들을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출근해야 하니 나머지 얘기는 밤에 달죠...
                         
Centurion 16-07-04 10:30
   
노론은 붕당정치 시절 개념이지요.

이미 노론도 영조 때 사도세자 문제로 시파, 벽파로 분열되었고,
안동김씨 김조순은 시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구한말에 득세한 세력들이
대부분 서인 노론이라는것은 저도 위에 충분히 적어뒀습니다.

근데 세도정치라는건..
붕당정치 개념이 아니라,
일부 권력자와 그 가문이 국정 전반, 조직 감투를 다 장악하는 개념입니다.
안동김씨면 개나 소나 이 자리 저 자리 앉아서 족벌정치를 벌이는 그런 개념인것이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956&cid=40942&categoryId=33383
(혹시 제 말이 아닌 거 같으면 위 링크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따발총은 보통 우리가 PPSH-41 이라는 기관단총을 말할 때 쓰는 말이고,
동학농민군 진압하던 관군이 가진 무기는 개틀링 기관총과 볼트액션 소총이죠.

제가 팩트를 말하는걸 좋아한다고 다소간의 숫자 오류를 지적하셨는데..
제가 위에 팩트를 강조할 때는.. "역사적 결과론",
즉, 실제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쓴겁니다.

학계가 그렇게 바라보는게 "정론"이고, "정설"이며,
실제로 그렇게 "가정"이 아니라 역사에 그렇게 흘러갔고,
그런 인간들이었다는게 딱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걸 어찌 부정하겠다는건지 모르겠네요.

동학농민군 진압하려고 외국군 파병 요청하고,
막상 군대도 제대로 못 갖춰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외교권 뺏기고, 군대 강제 해산당해서,
국민들이 의병일으켜서 도륙당했던게 역사인데요.

그 위키나 백과사전 별로도
수치가 몇천명, 몇십만명 단위로 오차가 벌어지는데(기준도 종종 다름)
그걸 제가 다 꿰고 있을 수도 없구요.

저한테 말꼬리 잡기로 다소간의 이런 숫자 오류로
전체적 맥락이 팩트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부분적인게 틀렸으니 전체적으로 전제와 결론이 '팩트에 어긋난다'
이런 공격을 하신다면 정말 잘못된 방법이라고 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그것을 제시한 것인데...

신식군대의 위력이 쎄다는걸 강조하고,
세계최강 영국도 해외파병을 몇만단위로 하기 힘들다는 제 주장에 대해서,
아편전쟁 영국군을 2만명을 1만명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저 제 주장을 반박은 커녕 오히려 더 강화하는 태클 아닌 태클 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사실 고종도 친일파는 싫어했죠.
앞서도 말했지만, 고종은 자기 기득권을 놓기 싫어한 사람입니다.
자기 밥상에 숟가락 얹는 사람은 그게 자국의 백성이건, 외국이건 싫어한 것이죠.

이걸 또 민족주의로 과대해석할 수 있나 의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친일파들이 개화론자기도 했고,
또한 고종의 측근과 신하이기도 했죠.

친일파를 골라내는 안목이 없었던걸까요?
하다못해 이완용이도 고종의 최측근이었죠.
친러에서 친일로 오락가락하며 갈아탔습니다만.

그리고 고종이 총 쥐어주고,
구식군대보다 녹봉에서도 우대해줬던 별기군이나 신식군대들 중에..
친일파들이 또 상당수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런 배신과 기회주의가
단지 그 사람들의 인성을 못보고 선발한게 문제겠습니까?

당시 일본 왕이었던 메이지일왕이랑 고종이 1852년 동갑내기랍니다.
고종 재위가 44년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4번이나 바뀔 기간을 재위를 했던겁니다.

제가 다른 댓글에서도 말했지만..
조선시대에 친일파 앞잡이 몇명이 일본 로비에 넘어가서,
일본과 한판 떠서 이기지도 못해도, 지지는 않을 정도의 멀쩡한 나라를 넘긴게 아닙니다.

조선시대..
그 대단한 그래도 유교사상의 세뇌급 교육을 받으며,
사서삼경 암기달달해서 과거시험 붙은 사람들이 운영하던 나라였고,
충,효,예,인,의 이런 가치덕목이 대접받던 시대였음에도..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 팔아넘기겠다는 배신자들일 조정에 발에 채일만큼 많았습니다...

반면,
현재의 한국에는 정재계에 그런 기회주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구한말이랑 비교도 안되게 나라가 빵빵한데도, 자신의 이익때문에 외국에 빌붙고,
팔 수만 있으면 나라를 팔아넘기고 싶어하는 쓰레기들이 더 많을껄요.

그런데. 왜??
21세기 한국이 아직 그런 매국노들이..
구한 말 때처럼 나라를 못팔아넘기겠습니까??

각군 참모총장이 외국방산기업에 국가 내부 기밀 흘리고,
부품값 떼먹어서 돈챙기는 나라에서요?

그게 나라에 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근데 구한말에는 그 힘이 없었던 거에요.

(기회주의자들은 자기한테 뭘 해주지 못하고,
 자기 목숨과 재산을 못 지키고, 못 불려주는 리더는 안따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고종 따르다가 일본이라는 외세로 갈아탄겁니다.)

그러니 충효라는 유교적 도덕관념이 그나마 살아있던 그 시대에도.. 그러한 매국노들이 판을 친겁니다.
지금은 그런 충, 효 관념이 약한데도, 나라가 힘이 있고,
그래도 뭔가 그런 매국노들이 본격적으로 날뛰기엔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어서 배신안한 것 뿐입니다.

조정 안팎에서 나라를 좀먹는 인간들이
나라를 그 오랜시간동안 좀먹을 수 있었다면..

그거 뽑아주고 키워주고, 데리고 있던 사람이 누구죠?

고종은 전제군주정을 추구한 임금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의지대로 다 해먹는 걸 전제군주를 꿈꾼 왕이었고
실제로 독립협회가 내세우는 입헌군주제 반대하고, 황국협회 앞세워 전제군주처럼 존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전제군주 고종이 44년을 재위하면서.. 국정을 운영했는데...
재위기간 내내 외롭게 기회주의자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며,
나라를 좀먹는 친일파를 못쳐내고 죽은 비운의 왕이 됩니까?

이승만이 정치깡패,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이런 사람들을 키워준 사람인데...
마치 이승만이 그런 기생충 같은 인간들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났다는 소리랑 동급이지요.

그래서 일진회 회원 수만명 안생기려면..
나라가 안망할 정도의 자체적  힘이 있어야 했던겁니다.
국정운영을 수십년간 해오면서 그런 국력도 못길렀으니, 좋은 소리 못듣는거죠.

조선이 그렇다고 딱히 인구소국이라던가. 경제적으로 아주 빈곤한 나라도 아니었고,
누구 말대로 "예산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딱 그 상황인데.

그 도둑놈들의 꼭대기에 누가 있었을까요?

고종이 딱히 힘이 없는 군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돈이 없는 군주도 아니었고,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721775

여길 보면,
국방예산이 전체예산의 38% 412만 달러,
고종 내탕금(용돈)이 81만 달러, 제사비용이 18만 달러로 대략 왕실이 차지하는 돈만 100만 달러쯤 됩니다.

이 때의 1달러는 요즘하고 가치가 다르죠.
그런데 모신나강 소총 1자루가 미국에서 대략 150 달러에 팔린다고 합니다.
이땐 달러가치가 높아서 훨씬 쌌을거에요. 그래도 150달러면 100만달러로 6666정을 살수가 있네요.

근데 그 때 당시 기준으로 독일에서
권총 300정과 탄약 3만발을 수입했는데..
이게 비용이 500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권총 1정과 탄약 100발의 가격이 16원이라는 뜻이지요.

당시 환율이 1달러= 2엔 = 2원~ 4원 정도 되는 모양인데..
16원이면, 대략 4달러~8달러쯤 되겠군요.

그럼 8달러 기준이면 권총을 대략 100만달러의 황실예산으로..
무려 12만5천정을 살 수 있게되네요.

아마도, 소총가격도 여기서 큰 차이는 없었을 듯 싶습니다.

대한제국의 총기보유에 관한 글을 통해 집계해보면..

무라타 소총 200정

레밍턴 롤링블럭소총 3~4천정

베르덩 소총 3천정(무상공여) + 2~4천정 수입 = 5~7천정

개틀링기관포 20문

맥심기관총 6문

암스트롱포 10문 (패전한 청군에게서 인수인계받음)

크루프 75밀리 속사포 10문

각종 포- 48문

http://ilwar.com/history/105989

그러니 대충 적게 잡으면 8천정~ 많게는 1만1천정쯤 되네요.

당시 미국 공사관 직원 월급이 50달러였고,
조선의 금광에서 일하는 미국 광부의 월급이 33~50달러 수준이었다고 하니..
4달러~8달러의 권총가격이 당시 물가 기준에서도 싼것도 아닙니다만..

이걸로 짐작해 볼 때 총기가격이 넘사벽으로 비쌌던 것도 아니고,
사실 맘만 먹으면 충분한 량을 사고도 남았던 예산을 갖고 있었겠네요.

이런데 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정치를 좌지우지할 권력이라는 칼자루 쥐고도
수박 하나 썰어놓지 못하고 간 왕이 쉴드가 됩니까?

그걸로 온 민족이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민족말살계획 아래서
개고생하면서, 일본어 쓰고, 차별당하고, 강제징집 당하고,
태평양전쟁 끌려가서 일본을 위해서 성노리개, 총알받이, 중노동하다 죽어갔는데 말이죠.

무능하고, 자기 욕심 밖에 모른 권력자가 이래서 무서운 거 아닙니까?

암만 왕조말기 상황에서의 군주라지만, 참..
잘쳐주면 한 명나라 숭정제랑 좀 닮은 느낌??

나라가 망해가고, 최전방 병사들은 녹봉도 못받고,
백성들은 세금을 태어나지 않은 후손 몫까지 미리 앞당겨 내어도..
자기 재산만큼은 엄청났다는 그 숭정제랑 판박이 수준?
                         
Centurion 16-07-04 13:55
   
그리고 저와 님이 서로  "팩트"  타령한 부분을 보충하겠습니다.

*************************************************
일단 제가 팩트를 강조한 부분을 봅시다.
아편전쟁 쪽은 저도 2차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을 인용한 수준이라.
팩트 강조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위키백과에서 양 군 전력 도표를 보고 쓴거니.
저도 딱히 자신있게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구요.

(1)
저는 대한제국과 일본의 1년 예산과
      ~~~~~~~~~~~~~~~~~
군대규모, 국방비 규모 등을 객관적 팩트를 비교해서 판단한건데요.
~~~~~~~~~~~~~        ~~~~~~~

(2)
(일본군이)
대한제국군보다 한 20배~70배 이상 큰 북양군을 가진 청나라도 몰아내고,

세계에서
영,프, 터키, 독일과 맞짱을 뜨고, 영국을 긴장시키던 그 러시아도 물리쳤으니,
조선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게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조선이 최소한 10~15만
많으면 30만~40만 신식군대를 보유했어야 독립을 유지했죠.
          ~~~~~~~~~~~~~~~~~~~~~~~~~~~~~~~                           

전 그 팩트를 말하는겁니다.
      ~~~~

조선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
고종이나 민비, 여흥민씨 일문이 매관매직하고, 뇌물주고받고,
사치와 낭비 부리는 걸 보면, 국가 지도층이 싹 갈려나가고..
나폴레옹급 리더가 딱!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답이 없었어요.
~~~~~~~~~~~~~~~~~~~~~~~~~~~~~~~~~~~

=>이 정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한다. 그리고 실제로 망했다! (FACT)

(3)
다만, 현실 역사에선 대한제국군은 2만5천까지 늘어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5~7천명 정도 수준으로 축소되어 일제에 의해 해산했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패한 후
친일파들이 조선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구요.
~~~~~~~~~~~~~~~~~~~~~~~~~~~

심지어 을미사변만 하더라도,
일본 교관한테 훈련받은 조선군인 '훈련대'가
일본 낭인들을 도와 궁궐을 침입했죠.

물론 군대해산에 맞서 봉기해서 일본군과 싸운 사람들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들도 꽤 많았죠. 일본육사에 유학간 조선 유학생들도 지청천 장군 빼곤,
대부분 일본에 붙어서 일본군 장교를 했구요.

이게 REAL한 FACT 그대로의 역사인데...
      ~~~~  ~~~~            ~~~

제가 이런 조선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나름 대안은 제시하면서, 이렇게 했으면 생존할 수도 있었다라고 적었는데..
~~~~~~~~~~~~~~~~~~~~~~~~~~~~~~~~~~~

단지, 그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눈앞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집권세력을 싸잡아 깐것을 "고종 암군론"으로 축소를 하시는지 이해가 좀 안가네요.

=> 제가 팩트라고 강조한 내용은 죄다 상식 수준의 있는
그대로의 조선 멸망 과정에서의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겁니다.
이건 국사책만 읽어봐도 다 아는 얘기죠.

국사책은 역사학계에서 만드는데,
그 글 한 줄에 논문 몇십편에서 몇백편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나온게 학계의 정론, 정설입니다.

제가 아주 특별히 유별난 저만의 가설을 세워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억지 피우며 떠들고 있나요?

진짜 대부분의 국사책, 하다 못해 서점의 책들, 한민족 문화백과사전,
각 종 서적에도 제가 말한 친일파들 이야기, 군사력 부족 이야기,
고종과 민씨 외척집단의 매관매직, 부패, 상납, 이런건 다 나오는 얘깁니다.

제가 논지전개를 위한 보조적인 차원에서 언급한
아편전쟁에서 "팩트"를 강조한게 아니라,
 
대한제국 관련 내용에만 "팩트"를 강조했다는 거 똑바로 봐주시길..

***********************************************************


님 글..

(A)
대한제국 13년,
그 가운데 러일전쟁 이전의 7년 동안
대한제국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팩트를 보시고 말씀하세요...

=> 의문 (1) ???

그 방향으로 성장을 계속했다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아 경제, 사회, 군사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었을 것은 명백했으리라 봅니다.

=> 의문 (2) ???

님이 말하는 당시의 대한제국과 일본이 처한 상황에 대한 팩트대로 대한제국이 당연히 일본에 패했을 것이라는 건 그런 국제정세나 시대적 상황, 대한제국의 발전 가능성 등을 간과한 단편적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에 결과만 보고 부정적인 면만 나열했다고 본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단편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까?
    실제로 패배해서 망했는데요.
    (무기고, 탄약고조차 외국군한테 뺏겨서 제대로 사우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 차원의 저항, 전쟁도 없이 말이죠.(민간인들 저항제외)
   
***************************************************************


=> 님에게 묻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성장을 한겁니까? GDP요? 군사력이요?
      러일전쟁 7년전이라.. 청일전쟁 끝나고 2~3년 뒤인 1897년~1898년쯤 되겟네요.

일단 연표로 확인해 봤습니다.

http://blog.daum.net/009448/16143822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일본군 경복궁 침입, 갑오개혁,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을미개혁, 을미의병
1896년 아관파천, 열강의 이권침탈, 독립협회

1897년 광무개혁, (앞서 개혁과 달리 일본이 아닌 고종이 내세운 개혁)

1898년 만민공동회 헌의 6조
 (자주 국권, 이권침탈 방지, 탁지부로 재정일원화,
  재판공개 및 인권존중, 입헌군주제 강조, 법치행정 실시 등을 요청함)

1899년 독립협회 해산, 대한국 국제 9조(전제황권 강화)

1902년 1차 영일 동맹
 (청에서의 영국 이권 승인, 조선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 승인)

1904년 러일전쟁,
          한일의정서(일본의 내정간섭, 군사기지 확보),
          제1차 한일협약(고문 정치)

1905년 헌정연구회,
          가쓰라-테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국제승인)
          을사늑약 체결(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을사의병
1906 이상설 만주  망명,
        대한 자강회, 고종 퇴위반대운동
1907 국채보상운동, 헤이그 특사파견, 고종 퇴위,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군대해산, 행정권 박탈, 차관 정치

1908 의병연합부대 서울진공작전
1909 기유각서(사법권 포기),
1910 국권 강탈. 총독부 설치 및 식민통치 시작.

연표로 확인해본 결과..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이 주장한 신분제타파와 각종 사회적 악습은..
묘하게도 갑오개혁을 통해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네요.

근데 이게 하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이후 세워진
 김홍집 내각에 의해 추진되엇다는점.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건지,
아니면 조선 내부 개혁파들의 구상인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고종의 의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신분제 타파, 노비제, 연좌제 폐지 등.. 아주 괄목할만한 내용들이 들어있긴 합니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들이 싫어할만한 내용이겠네요.

을미개혁..
이건 명성황후 시해사건 뒤 친일파들이 주도한 개혁이라는데...
단발령, 양력 사용, 종두법 사용, 근대식 학교설치가 눈에 띕니다.

광무개혁..
이건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본인 의지로 추진한 개혁입니다.
나름 상공업 지원정책이 많고,  그외 황실 재정수입 증대, 황제권 강화, 군사력 증강 등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주로 부국강병을 해보겠다, 황제권을 강화하겠다..
이런게 딱 눈에 들어오네요.

그러나 이게 시점이 1897년이고..
이후 입헌군주제나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밟아버리고,
본인의 전제왕권 강화로 달려가는게 보입니다.

이 때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위세에 기대어 일본을 견제하던 시국인데..
결국 영일동맹 맺고 일본이 러시아를 꺽으면서,
러시아라는 외세에 의존해온 조선이 사실상 낙동강 오리알 됩니다.

자, 그리고 그 고종의 그 대단한 개혁들(?)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가거나, 러시아는 몰라도, 영국의 지원을 받긴 글렀을 겁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크림 전쟁까지 터지고,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고,
영일동맹이 맺어진건데.. 영국이 조선을 도울리가 없죠.

그리고 결국 님도 가정(IF)을 하는건데..
역사는 일본이 러일전쟁 이기고 조선이 멸망하는 걸로 흘러갔습니다.(Real Fact)

(IF)이걸 막으려면, 조선은 자체 군사력이 최소 한 10~15만 정도,
많게는 조선 세종시절처럼 30~40만 군대를 갖고 있어야 되요.
그것도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말이죠.(대안)

제가 지금 왜 고종을 까고 있겠습니까?

한 5년 집권하다 죽거나 쫓겨난 왕이면 모르겠는데..
재위기간 44년동안 볼거 다보고, 겪을거 다 겪은 사람이...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위아래가 단합이 잘안됨)
왕이 국가 예산을 잘활용해서 나라 구하는 정치를 잘했던것도 아니라니까요.

돈이 아예없으면 모르겠는데..
제가 조사해보고 계산해보니.. 딱히 돈 문제가 아니네요.

지금 제가 주장하는 내용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성공률이 높은 방법입니다.

남의 힘 믿고, 남의 군대 끌여들여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러다 결국 최종 승자한테 나라 뺏긴 꼴인데..
그런 잔머리 굴릴 시간에 징병제 도입하고, 무기 착실히 사서 모으면..
독립도 지켰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걸 못했으니 고종이 까여도 당연하거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막판에 내탕금을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려했네.. 망명하려했네..

뭐 그래봐야.. 그 전의 병크를 다 덮지를 못해요.

나라와 민족을 구할 44년의 재위기간을 그렇게 가장 큰 권력을 쥐고도...
알차게 못보냈으니까요. 그냥 방구석 백수 한량이면 자기 혼자 죽으면 장땡이지만
그 중요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한심하게 시간을 보내면 나라가 망해서..
온 국민이 피해를 봅니다.

결국 36년 일제지배, 끝나지도 않을 줄 알았던 그 식민지배가..
미국이 일본을 작살내줘서, 끝나긴 했다만..
이 나라는 아직도 마인드 썩은 정치인들이..너무 많다는게 문제라는거죠.

이러니, 100년 뒤 후손들이..
"그래도 그 고종이 말야.. 뭐 좀 해볼려고 시늉은 했었는데.. 까서 되겠어?" 이러는데..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하면서,
욕했던 전직대통령들도 어지간해선.. 다 그 정도 시늉은 했어요.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나라 멸망시킨 대통령은 아직 없죠.)

그게 하나마나인건지, 겉치레 시늉만 한거 수준이라..
국민들이 전혀 인생이 풀린다는 느낌을 못받는게 대부분이라 그렇지..
뭐, 그래도 재벌들한테는 팍팍팍 시원하게 잘 밀어줬죠.

다 그래도 "그 사람이 열심히 할려고 한거 같은디~~" 이런 마인드로는..
정치개혁도 없는거고, 우리나라 위기만 부채질하는 위험한 마인드라 이겁니다.

정치를 최선의 "지도자"에게 맡겨도 모자를 위험한 시국에...
무능한 사람이 시늉 좀 한다고, "봐주자" 하는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입니까?

배가 뒤집어질려는데,
S급 항해사 놔두고, C급 선장한테 계속 배를 맡기면 위험하죠.

그게 조선이 군주제 시절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옛날 일이니까 넘어가고 그러는 거데..

막상 이게 또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미-중 대립구도와
중국의 야망 앞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즘은 어찌보면 더 웃긴게..
아마 그 당시 언론조차도 나라 망하기 전엔...
그래도 일본 찬양을 그리 노골적으론 안했을텐데...
이 놈의 나라는 OECD 가입국에 세계 11번째 경제규모를 자랑한다면서..
친중 타령은 대통령부터 언론까지 참..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다는거.

마인드는 구한말보다 더 썩은 인간들이 많은데..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아 보이네요..
아무리 과거라도 현재와 연결해서, 옛 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될텐데 말입니다.

굳이 과거를 미화하고, 덮어주고 해봤자..
나중에 진짜로 그걸 믿고, 똑같은 실수 반복할꺼라면...
그건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는게 아니라, 똑같이 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버섹 16-07-04 22:36
   
답변이 하도 길어서 뭐부터 대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일본은 강했고 우리는 약했다...
고로 전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되도록 나라를 말아먹은 건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일족이다...

이것이 님이 말한 핵심이었어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그런 일본의 방해로 근대화 과정에서 좌절된 대한제국의 상황은 도외시한 채 참 결과론만 잘 들먹이시네요...

그런 결과에 이른 것은 근대화에 늦은 조선의 잘못도 있지만, 일본 놈들이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고 현양사, 흑룡회 같은 낭인들을 보내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데요...
민비를 시해하고, 동학지도부를 회유하려 했으며, 위조주화를 대량으로 만들어 경제를 흔들어 댔어요. 일본 놈들의 돈에 매수된 관리들로 인해 제물포 일대가 놈들의 위조주화 소굴이었을 정도였지요.
그러니 근대화는 더욱 늦어지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걸 관리 못했으니 왕의 잘못 아니냐구요?

님의 말처럼 대한제국보다 엄청 국력이 강했던 일본이 돈과 군사력으로 관리들을 회유하며 흔들어대는데, 어떤 방책이 있겠습니까?

고종이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다고요?
30만 병력을 모병하려다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어요....

고종은 1899년 원수부를 창설하고 헌병,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을 창설해 완전한 신식 군대 편제를 갖췄어요.
그리고 1900년에는 지방 군사제도도 개편해 진위대와 지방대를 진위대로 통합하고 평양과 제주 일대에 특별부대도 배치했지요.
무관학교를 설립해 육, 해군을 양성했으며 영국에서 대포를 들여오고, 일본에서 군함도 들여왔죠...
그 모든 게 일본의 군대해산으로 좌절된 겁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1907년 7월 '모병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8월에 병적관리에 관한 규정인 '육군병적규칙'이 제정·공포되었는데, 이 규칙에는 병역의무의 연령과 역종의 구분, 복무 한계와 전·평시 병력충원 방안 등이 마련되어 근대적인 병역제도의 틀을 마련했지만 일제 때문에 무산되었지요...

그만큼 군사력을 키우는데 고종은 심혈을 기울였던 임금입니다.

고종이 이완용을 다시 불러들인 건 그가 무지해서가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의지할 나라가 미국밖에 없어 미 대사와 친분이 있었던 이완용을 불러들인 겁니다.

글 잘못 적은 것 가지고 그러느냐 하시는데,
잘못 된 걸 팩트라며 들이미는 게 곳곳에 보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사해 보니 돈이 없어서 못한 것도 아니라고요?
그렇게 군사력을 키울 수 있을 만큼 수입을 늘린 게 바로 대한제국 7년 동안 성장한 겁니다.

여기저기 자료 긁어와서 붙이지 마세요...
다 아는 내용인데 글만 길어져서 다시 읽기도 피곤하니까요...님의 의견만 말하세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우린 임진왜란 때 당시 첨단 무기라 할 수 있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말고 항복했어야 마땅했겠네요...그렇게 무기랑 병력, 전쟁 경험이 열세인데 어떻게 전쟁을 합니까.
                         
Centurion 16-07-04 23:30
   
거 뭐 혹시 나한테 평소 악감정 있으신 분인가?
왤케 공격적임? 닉 새로 파신 분이세요?

그리고 계속 결과론 타령하는데..
제가 그 결과론이야 말로  역사적 팩트라는건데

뭔 사소한 인용자료 오류를 갖고 팩트 소리를 하시는지?

게다가 병력 4천~1만은 1차 1840~1842년 아편전쟁 때 이야기고.
병력 2만은 2차 아편전쟁 1856~1860년 때 이야기임.

"영국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이 통솔하는 영국의 동방 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함, 증기 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병사 4천 명으로 구성됐다. "-1차아편전쟁

"1841년 8월, 영국군 1만 명은 청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양쯔강으로 진입했으나 입구 영파(寧波)를 지키는 장수 여보운(余步云)은 도망하고 말았다.

그 후 영국군은 닥치는 대로 강X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면서 양자강에 진입하였으며,
1842년 3월에 혁산이 이끄는 정규군 1만 2천 명과 민병대 3만 3천 명의 대군이 영국군 불과 천여 명에게 격파당하고 혁경은 단기필마로 겨우 도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월에는 상하이가 함락되고 7월에는 영국군은 청의 제2 도시인 난징(南京)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대운하의 핵심 기지인 진강(鎭江)을 공격하였고 수비병 1,400여 명은 전원 전사했으며 지휘관 해령(海齡)은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인 민중을 불신해 협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1차 아편전쟁

**********************

"아무튼 청과 영국, 프랑스의 갈등은 폭발해 1860년 2월에 예비 병력에 본국 증원 병력까지 추가하여 영국은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는 병력 6,300여명과 군함 33척을 동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바로 수도 베이징." -2차 아편전쟁


원참.. 알고 보니.. 본인도 잘못알고 태클 거셨구만. 내가 틀린게 아니라.

그리고 이미 님이 지적한 청일전쟁 1897년? 광무개혁 정도 시절?
이미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 집어삼키겠다고 청나라 외교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허울만 좋은 자주국 타령으로 타국 영향력을 벗겨내버린 시점입니다.

그래도, 님 말대로..
고종이 좀 정신 번쩍 들어서, 군사력 증강에 나설만한 시기긴 했죠..

일본군에게 이미 경복궁이 2 번인가 털렸던데.
갑오년, 을미사변, 암만 둔한 사람도 툭하면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왕 본인이 사는 궁궐 털어서, 근위병들 제압하고 협박하는데 안그러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사실상 거덜나기 전에..
여유넘칠 때 좀 하던가..해야 유능한 군주 소리 들을만 한거지..

대원군 실각과 강화도 조약이래 청일전쟁 전까지
1876~1894년이라는  근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결국 마누라 민비 척족이 맘껏 활개치게 만들고,
청국군 불러들이고 일본군을 한반도에 진출시키게 방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제 나라에 숨통 끊어져 가니, 30만 병력 증강 계획요?
암걸렸는데 돈은 없고, 있어도 사채꾼이 압류해서 내돈도 못꺼내쓰는 상황되서요?

그러게 자기 돈 맘 껏 쓸 수 있는 시대에 왜 그랬데요?
일본은 1853년 페리제독 이후 10년만에 지들끼리 신식무기 경쟁적으로 사들여
내전벌이고 메이지유신 성공하고, 뒤에 군제개혁 통과시켰는데,

조선은 개항 이후 20년 동안 병력 30만짜리 만드는
개혁을 왜 안하고, 나라 망해가는 시점에 했을까요?

이건 뭐.. 직무유기 20년짜리네요.
                         
Centurion 16-07-05 00:18
   
*********************************************

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일본은 강했고 우리는 약했다...
고로 전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되도록 나라를 말아먹은 건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일족이다...

이것이 님이 말한 핵심이었어요...

********************************

그리고 약한게 역사적으로 맞는데..
그거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게 아니고..
구한말에 경제력이 크게 딸려서 군사력을 증강을 못한게 아니란 이 말입니다.

그럼 돈을 제대로 써야 되는건데..

그나마 나라를 위해서 외세와 싸우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화승총 빈껍데기에 창 들고 싸울 때, 막대한 세금 거둬들여서..
국가를 보위할 지도층이 뭐했냔 말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가심?

세상에 그 막장사태의 와중에
제일 꼭대기에 가장 많은 권한과 그만한 책임을 가진 사람을 쏘옥 빼시겠다?

그게 말이 됩니까?

고종 내탕금이 1년에 81만원인데..

고종 때 수입한 독일 권총 300정 탄환 3만발이 5000원.. 즉 권총 1정이 16원,
 
청산리 대첩 때 쓰인 모신나강 소총 1정과 총알 100발이 30원

고종 1년 내탕금이면 권총이 50,625정, 모신나강 소총이 27,000정

자기 내탕금 3만원 투척해서
전기회사 차리던 그런 치적들로 근대화 계몽군주 고종이라고..여기고 쉴드 쳐봐야..
가장 중요한 군사부문에서 삽질한게 어디갑니까?

물론, 대한제국군 군비예산이
고종 내탕금 81만원보다 5배 수준인 410만원 수준인데도..
어디서 돈이 줄줄 샌건지.. 1만명 정도 군대도 간신히 유지하더라만..

고종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거란을 물리친 저 고려 현종이 아니라..
하다못해 암군의 상징이자 전국이 일본군에 넘어가다시피한
선조 때에도 이렇게 조선의 군사력이 이렇게 막장은 아니었슴..

하다못해 왕이 있으나 마나였어도,
지방관이라도 알아서 군비를 마련해 전쟁이라도 벌였는데..
워낙에 매관매직을 해두니.. 지방관 중에 쓸만한 사람도 없어서.. 죄다 의병..

이런데 고종의 책임을 안따질 수 있어요?

https://namu.wiki/w/%EA%B3%A0%EC%A2%85(%EC%A1%B0%EC%84%A0)

https://namu.wiki/w/%EB%AA%85%EC%84%B1%ED%99%A9%ED%9B%84%20%EB%AF%BC%EC%94%A8#s-7.1

따로 제가 적을 필요도 없이 이거 찬찬히 읽어보시길.
                         
버섹 16-07-05 00:24
   
님한테 감정있는 사람 아닙니다.
오히려 좋게 보던 사람이지요...
이번에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하시니 논쟁이 된 것이고요...

이번 댓글만 해도 그렇네요.
님이 고종에 대해 얼마나 나쁘게 생각하는지 절절이 보이네요...
그렇다고 해서 공은 무시한 채 과만 부풀려 매도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고종에 관한 책이라면 옹호하는 책과 욕하는 책 합해서 읽을만큼 읽었으니 님의 링크한 주소는 패스하겠습니다.

고종 내탕금 1년에 81만원은 언제적 금액인가요?
1905년에 내장원의 수입은 300만원이었고, 이는 전체 나라 수입의 5할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편 전쟁의 오류는

"아편전쟁 때, 당대 세계최강이었던 영국군이
173척의 군함에 2만명의 병력을 태우고 청나라의 팔기군 20만을 이기고,
청나라에 굴욕을 줬습니다.

근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 시기에 이미 30~50만 대군의 신식군대를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게 5~7천명에서 많을 때는 2만5천명이었던 겁니다.

일본인구가 5천만이고, 조선인구가 1300만인데.. 거의 4배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예산이 1/4 많게는 1/13 밖에 안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하고, 전쟁해서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보존할 가능성은 얼마라고 보십니까?"

라고 님이 말해서 오류라고 지적한 겁니다.

아편전쟁은 영국이 15척의 군함에 4천 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것이고

2차 아편 전쟁은 약 15년 후에 일어난 전쟁으로 흔히 애로호전쟁이라고 하는 것인데 영국 단독이 아니라 프랑스와 함께 싸운 겁니다. 미국과 러시아도 같은 편이었고요...
1차 전쟁으로 이미 패한 중국을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의 이득이 적으니 빌미를 만들어 다시 두들겨 팬 거에 불과하죠...이때 러시아도 사할린을 얻어 우리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던 것이고요...
님이 말하려던 전쟁은 1차 아닌가요?

참고로 부언하자면 그 6년 뒤에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의 병력이 7척의 군함에 해병 1000여명입니다. 중국을 박살낸 영국에 비해 군함은 절반, 병력은 1/4 차이 나네요..한데도 우리 조선은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죠...님의 비교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반증 아닌가요?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상비군은 20만 명, 동원한 병력은 총 108만 명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총 병력은 200만이었고요...

자료를 가져와 주장하시는 분으로서 오류가지고 그러느냐는 건 너무 무책임하신 말씀 같네요..
                         
Centurion 16-07-05 01:06
   
제 글 자체가.. 

"아편전쟁 때, 당대 세계최강이었던 영국군이
173척의 군함에 2만명의 병력을 태우고 청나라의 팔기군 20만을 이기고,
청나라에 굴욕을 줬습니다. "

님은 이걸 1차 아편전쟁으로 해석했는데..
병력 2만에 173척이라는 군함 척수가 딱 하고 나와있는데..

본인은 이걸 왜 제가 1차 아편전쟁이라고 올린거라 판단하셨죠?

당연히 수치만 딱 보면 2차 아편전쟁이라는게 파악이 안됩니까?
본인이 딱히 아편전쟁에 무지한 분은 아닌듯 한데..
참고로 제가 적은 수치는 그저 위키백과에 나와있는 수치를 적은것뿐이에요.

본인이 좀 더 디테일하게 알고 계신거는 알겠는데.
제가 인용했다고 해서, 직접 오류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이겁니다.

또한,
일본군 투입병력이 108만, 러시아군이 200만이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러일전쟁은..
총병력이나 연인원으로 승부를 낸 게 아니고.. 군사 편제된 병력으로 따지는거죠.

당연히 러시아가 정규군 총합으로 치면 세계 제 1의 육군대국 수준인데..
당시 만주에서 치고 박고 한 극동군, 극동함대, 발틱함대 이런 병력만 따지는거죠.

https://en.wikipedia.org/wiki/Russo-Japanese_War

https://ja.wikipedia.org/wiki/%E6%97%A5%E9%9C%B2%E6%88%A6%E4%BA%89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C%9D%BC_%EC%A0%84%EC%9F%81

이 역시 위키백과 인용일 뿐 제가 딱히 러일전쟁을 깊이 연구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영문위키, 일어 위키 등을 뒤져봐도 비슷한 수치가 나옵니다.

물론, 일본군 편제가.. 찾아보니..
훗날 전시 편제가 거의 평시 편제의 대략 2배정도로 확장되기도 하고.
인력소모, 보충인원, 교대 등등으로 투입 연인원이 그렇게 늘어날 수도 있죠.

대한민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부대 2개사단, 1개여단, 그외 여러 지원부대를 파견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교대인원까지 포함해서  총 32만 정도 파병한거랑 같은 맥락입니다.
(월남전 한국군은 편제상 인원이 한 4~5만명 쯤 되나, 파병 연인원은 32만명이죠)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A%B5%B0_%EB%B2%A0%ED%8A%B8%EB%82%A8%EC%A0%84_%EC%B0%B8%EC%A0%84#.EC.97.B0.EB.8F.84.EB.B3.84_.EC.B0.B8.EC.A0.84.EB.B3.91.EB.A0.A5_.ED.98.84.ED.99.A9

그리고 제가 자료 가져온게 틀렸다고 무책임하다고 하셨는데..
어쨌든, 결론적으로 님이 지적한게 틀렸구요. 제가 맞았네요.(2차 아편전쟁 참전규모)

https://namu.wiki/w/%EC%95%84%ED%8E%B8%EC%A0%84%EC%9F%81

그리고, 제가 딱히 역사학자도 아니고, 자료조사의 폭이 넓은것도 아니고,
직접 조사할 여건도 안되기 때문에, 저도 마음같아선.. 2차, 3차 자료가 아닌..
실제 1차 사료 보면서 연구하고 싶긴 하나.. 당연히 인터넷올라온 백과사전이나,
기타 신문기사, 블로그, 논쟁 이런거 보면서 정보를 얻는 일반인입니다.

무책임하기 싫지만, 저도 아마추어니 어쩌겠습니까.??

(제가 주장하는것도 거의 정설 수준, 
 기초적 상식, 익히 유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일반론급이죠..)

저도 여건만 더 좋으면 더 고급정보 갖고 토론하고 싶죠.
원하는 자료 쏙쏙 찾아주는 AI 인공지능 비서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버섹 16-07-05 01:22
   
2차 아편전쟁이라니...그럼 대체 무슨 주장을 하려고 아편전쟁을 인용하신 건가요?

님의 애초 아편전쟁을 인용한 취지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소수의 영국병력이 20만 중국 대군을 박살냈다...라는 것 아닌가요?

2차 아편전쟁은 영국 단독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연합해 싸운 겁니다.
그것도 이미 패하여 너덜너덜해진 중국에 이권을 더 얻어내기 위해 다시 두들겨 팬 것에 불과하지요...
이건 님이 주장하려던 취지와 맞지 않다고 보여지네요...
님이 주장하려던 건 당연히 1차 아편전쟁이라고 봅니다.

뭐 어쨌든 아편전쟁 얘기 계속해 봤자 의미 없는 것 같고...

고종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글 말고, 특히 이덕일씨가 아주 비판적이던데
좀더 포괄적으로 공부해보시길 바랍니다.
                         
Centurion 16-07-05 08:22
   
좀 어이가 없어지려 하네요.

본인이 남의 오류에는
그렇게 팩트가 어쩌니 물고 늘어지면서,
그 오류에 대해서 제게 "무책임" 타령까지 하던 사람이...

왜? 자기의 실수는 그냥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시려는건지?

게다가 저는 분명히 2차 아편전쟁을 염두에 두고
20만 대군을 격파한 2만 영국군 + 173척이라고 딱 못박아 둔 이야기를
왜 본인이 대신 계속 1차 아편전쟁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우깁니까?

이게 숫자만 봐도 2차에만 해당되는 내용인데..
왜 본인은 1차라고 빡빡 우겨놓고, 제가 틀렸다고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이젠 제가 1차를 언급하려했다고..
당사자인 제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님이 대신 의도했다고 판단해버리시네요?

혹시 제가 몽유병 걸려서,
자다 일어나.. 님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제가 본래 1차를 적으려 했다고 스스로 지적이라도 한겁니까?

어찌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제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의도했다고 확신을 하세요.

아무리 봐도 본인의 무례한 지적과
그런 오류를 반성하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뻔뻔한 태도로 밖에 안보이는데요?

게다가 공부요? 공부 좋죠..

전 또 님이 4천에서 1만1천으로 증강되었다고 하길레..
2차 아편전쟁이 위키 내용과 다르게 진행되었나 싶어서.. 혼란스러웠거든요.

'야~ 아편전쟁 관련 전문 연구자나 밀덕 본좌 블로거쯤 되는갑다.'

근데, 실은 위키에도 적혀있는 내용인
청군 20만을 격파한 영국군 2만 + 173척을 보고도.. 1차로 파악했단 소리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위키 수준만 좀 읽어도, 문외한도 얻을 지식도 못파악하고..
남한테 오류 타령, 인용의 무책임 타령하신 분이.. 본인이 아편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거 티를 내놓고,, 저한테 공부하라고 하시는겁니까?

자아성찰 좀 열심히 하셔야겠네요.
                         
촐라롱콘 16-07-05 09:44
   
본 주제와는 연관이 거의 없지만......

버섹님의 댓글 가운데 한 가지 오류를 언급하자면

애로우호사건으로 촉발된 2차아편전쟁을 교통정리한 북경조약에 의거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영토는 사할린이 아니라 연해주입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함으로써 조선과도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이지요~~

러시아가 사할린을 공식적으로 온전히 획득한 것은 그보다 이후인 1870년대

일본과의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에 의거해서였습니다.

일본과의 조약 직전의 사할린은 북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일본에 의해

세력권이 거의 양분되어 있었는데.... 러시아와 일본과의 조약으로

사할린은 온전히 러시아가 차지하는대신 쿠릴열도 대부분은 일본이

영유하기로 합의를 본 조약이지요~~~
                         
버섹 16-07-05 21:48
   
예. 연해주 맞습니다.
저 부분 관련 얘기가 나올 때면 늘 연해주라고 하는데,
급히 써다가 사할린이라 했나 봅니다.
사할린이 완전히 러시아 영토가 된 건 1875년도죠...
                         
버섹 16-07-05 22:06
   
Centurion 님...
그만 하려고 했는데 님이 계속하시니 2차 전쟁의 규모에 대해 말 해 볼게요...

“게다가 저는 분명히 2차 아편전쟁을 염두에 두고
20만 대군을 격파한 2만 영국군 + 173척이라고 딱 못박아 둔 이야기를
왜 본인이 대신 계속 1차 아편전쟁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우깁니까? “


2차 아편전쟁은 최초 영국군 2,000명과 프랑스군 1,000명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텐진 조약이 체결되어 마무리 된 듯 했으나

이듬해 영국이 1척의 전함과 3척의 프리깃함, 14척의 전투함을 이끌고 황제를 만나러 가던 중에 5만 여 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하이난강에서 포격을 해 영국이 패합니다.
 
4척의 전투함을 잃고 상륙했던 1,100명의 해병 중 절반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죠...
프랑스군도 피해를 입었고요...

이에 전쟁이 확대되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과 수송선 230척,
프랑스군은 6,000명, 영국군은 1개 기병여단과 포병부대를 포함한 10,000명이 투입됩니다.
그리고 하이난강의 청나라 병사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가서 2만 여명의 남은 병사들을 물리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긴 전쟁입니다.
                         
Centurion 16-07-05 23:52
   
그건 그거고,
제가 분명히 2차 아편전쟁 내용의 수치를 언급했는데..
왜 1차로 따지느냔 말입니다.

그래놓고, 오류 타령, 무책임 타령해놓고..
알고 보니, 본인이 1차로만 생각하고, 제게 무책임을 따진거잖아요.

게다가, 이걸 인정하지도 않고, 저한테만 공부하라구요?
님이 완전무결한 지식이 있었으면, 저한테 그런 트집을 걸었겠습니까?

그러니 본인이 내세운 잣대가 모두 자신을 자승자박을 한 케이스인데..
아직도 인정을 안하고, 별 의미도 없는 설명만 늘어놓으시네요.

당연히 제가 1차 말고 2차를 언급한거야 제 마음이죠.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시간순서로 봐도 2차가 훨씬 규모가 크고, 기술적으로도 발전했으며,
20만 청군 격파와 베이징 함락이라는 강렬한 임팩트도 있을 뿐더러,

서양열강국들이 비록 해군력이 강대하고, 세계를 경영하긴 했다만...
해로를 통한 장거리원정이란게 그리 병력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여러 이유가 있어서 2차를 언급한건데..

왜 글을 당사자인 제가 아닌 님이
제 의도를 1차를 언급하려다 2차를 언급한 것처럼 몰아갑니까? ㅋㅋ

참.. 이렇게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서.. 본인의 반성은 하나도 안보이네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동아게에서 일본 넷우익이 펼치는 주장들,
중국 사회과학원이 펼치는 동북공정급 망언급 주장들을 펼치지 않으면,
먼저 신경을 긁고,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비매너 인물들 빼면
사람들한테 매너를 지키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처음 말 섞는 사람이..
남한테 공격적인 태도 보이고 이런거..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일뽕, 중뽕급 어그로종자가 아닌 이상은 사람대접해주려는 제 원칙에서도 말이죠.

일단, 서로 감정 상할만큼 상해서, 서로 매너없는 막말 주고 받는건 이해가 갑니다만,
님은 저하고 그런 접점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님은 생면부지의 아무 접점없는 남한테 어디가서 이래라 저래라 갑질하고 그럽니까?
차라리, 부캐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솔직히.. 참.. 없어보이는 짓입니다.

막상 또, 전지전능 시점에서 제가 의도하지 않은걸 의도했다며,
남에겐 그렇게 칼 같이 무책임, 오류 타령하더니 남에게 들이댄 그 잣대에 적용되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없이 지나가려는 모습  참 보기가 좋지 않군요.

자기 자신의 명백한 실수도 반성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제게 인용 오류니 무책임이니 하며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니.. 기가 찹니다.
                         
버섹 16-07-06 01:36
   
제가 왜 2차 아편전쟁의 규모를 적었겠어요?

님이 말한 수치가 맞지 않으니 그런 거잖아요.

영국병사 2만이랑 청나라 병사 20만명이 어디에 나옵니까?

그렇게 맞지도 않는데 1차를 말한 건지 2차를 말한 건지 어떻게 알아요? 더구나 2차는 영국 혼자 싸운 전쟁도 아닌데 님은 영국이 혼자 청나라와 싸운 것처럼 말했으니 1차로 볼 수 밖에요.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갑질을 한 것이 아니라
님이 부정확한 근거로 고종을 신랄하게 비판을 하니 논쟁이 된 것이지요...

더 이상 했다간 인신공격만 계속 될 것 같아 그만하는 것이 좋겠네요...

논쟁이 오가는 중에 불쾌한 말들이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Centurion 16-07-06 22:22
   
님이 고종문제로 빡친거는 이해하겠는데요..
그와 별 관련성도 없는 아편전쟁 인용 문제로
인신공격을 위한 과도한 트집으로 밖에 안보여집니다.

(사실  이 부분은 촐라롱콘 씨 보라고 쓴것에 가깝기에..)

다만, 본인이 인정하고 사과를 하셨으니..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저도 상당히 이런 난잡하고 추한 형태의 싸움은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제대로 된 토론이나 논쟁의 흐름도 안보이구요.

어차피 서로 불쾌해져봤자 좋을거 없으니 그만 하기로 하죠.
아날로그 16-07-03 22:42
   
아무리 국력이 강하면 뭐합니까.....국가 지도부의 판단력이 문제지요.....

한 사례로 보국안민을 내세웠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물리쳤지만....

결국 그 동학군을 때려잡은 건...조선 관군이었자나요.

제발.....논리모순인 싸이클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지도층의 문제입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충분히 반복될거 같아 불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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