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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08 21:47
[한국사] '임진왜란, 일본의 패인'를 보는 다른 각도
 글쓴이 : 전략설계
조회 : 4,619  

보급이 나빠서 잘 싸울 군대는 없고,

나폴레옹, 히틀러의 러시아(소련) 원정이나, 이 땅에서 벌어진 살수, 귀주대첩 모두

보급문제에서 상당부분 기인한 것이라,

임란때 해상수송이 불가한 점이 일본의 패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상수송의 불가 = 패인' 이렇게만 볼 수 있는 가에 대한 다른 시각입니다.


소서행장이 1592년 6월 평양성에 입성하면서, 평양성에 10만석이 있었습니다.

의병 때문에 보급로가 차단돼 보급이 어려워서? 이건 해당이 안 된다 그겁니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식량을 보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보급때문에 전진 못했다.. 이건 말이 아닙니다.

의주에 있는 조선 조정을 개전초 할 수 있었음에도 무력화 시키지 않은 것이 패인입니다.

분조가 있다 하더라도 독려의 차원이지, 세수나 보급같은 나라 전체 돌아가는 상황은

의주에서 선조와 신하들이 결정할 사안이라.


평양성 공격할 때 조선군 병력을 보면, 의주의 조선군 병력은 1만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 3배수 정도 왜군이라면 의주를 점령해서 선조를 명으로 망명시킬 수 있고.

함경도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잡히는 마당에 분조가 의주조정처럼 전쟁을 총 지휘할

인력과 공간이 없습니다.

의주조정은 조선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베이스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막상 왕이 중신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면, 조선에 남은 의병이나 저항세력이

힘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전쟁 초기에 의주 외에 점령못한 전라도지역, 저항이 있던 함경도지역 외에

보급로에서 기다리다 왜군을 치는 의병은 있지만,

왜군과 정면 대적할 군대라는 것이 조선에 없는 상황이라..


한 3만 정도 의주로 보내서 조선조정을 압록강 밖으로 내보냈어야 했습니다.

상인출신으로 온건파이자 협상파인 소서행장이 평양 선에서 대충 전쟁을 수습하자는 입장이어서,

북진에 열의가 없었는 지..

아니면 아는건 섬안의 전국시대 전쟁이라.

한성 찍어놓고 평안도, 함경도 찍었으니.. 조선 왕은 알아서 찌그러 질거고,

시간이 흐르면 백성은 왜군을 따를 것이다..

이런 오판을 해서 평양에 식량이 10만석이나 있었음에도 의주에 조선 왕을 방치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이거는 보급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해보지 못하고,

섬 안에서 영주들끼리 땅따먹기 하던 왜군 자체의 판단미스로

왜군의 실책이자 대외전쟁 경험부족 탓입니다.


4월에 전쟁 시작해서 5월에 한성 점령하고 6월에 평양까지 점령했으면.

좀 있음 추수기입니다.

왜군이 각 고을까지 세수를 확보할 지방관을 보낼 처지는 아니었으나,

마을별로 할당하는 식으로 얼마 식량 내라는 식으로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개전 초기에는 주민들을 그렇게 학살하거나 막 대하지 않았기에,

피난을 떠나서 식량을 징발할 방법이 없다거나..

이것도 적당히 운영의 묘를 발휘하면 굳이 모든 식량을 일본서 보내 부산에서부터 육상수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다가 이순신에 막히고 육상보급이 의병이 막혀도,

적당히 타협해서 추수기인 9월 현지 징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조선군대가 의주에 있고, 함경도가 시끄러웠긴 했지만 거기가 곡창지도 아니고.

주둔한 지역에서 적당히 징발해서 추수기가 곧 돌아오기에 유지할만 했습니다.


왕까지 망명한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가기도 참 버겁고.

3만 동원에서 의주 치고, 3-4만 군세로 충청에서 전라쪽으로 천천히 들어간다면.

추수기까지 아니면 겨울이 오기까지 전라도 상당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고바야카와 1개 군만 전라도로 보내니 깨지지..

지속적으로 3-4만 군세면 전라도를 점점 점령해나갈 수 있죠.

그럼 여수의 전라좌수영도 갈 곳이 없습니다. 남서해안 섬으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수군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순신함대가 떠난 그 만큼 왜군의 해상보급로도 같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강력한 적과 마주하면서 보급의 문제가 있었고,

나폴레옹은 광활한 땅에 추위와 상대했고.

임란때 일본은 6월에 평양에 입성하고 최전방에 10만석이라는 덤까지 없는 행운이 있었음에도,

섬에서 하듯 적의 수도와 영지만 지키고 버티면 백성은 알아서 따른다는 생각으로,

가장 유리한 시기를 날려버렸습니다.


대외 국가대 국가 전쟁에 무지했고,

전국시대 일본 영지에서처럼 강압적이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현지징발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임란을 자세히 보면, 왜군의 패인을 무조건 보급로가 막혔다고만 볼 것이 아닌 것 같네요.

평양의 10만석을 이용해 조기에 의주 조정을 압박해 조선 왕을 명으로 망명시켜

조선 내 저항의 불씨를 끄고,

조선의 신분제 병패를 이용해서 현지를 수습해

현지 징발을 무난히 처리하고, (함경도에선 왜군에 협조자까지 나왔죠)

전라도 지역을 코바야키와 7군 15,000 정도가 아닌,

3-4만 정도 군세로 장기적으로 공략을 해서 좁혀갔다면..

딱히 부산서 서울 평양까지는 육상 보급로나, 해상보급에 사활을 걸 일은 없었을듯 합니다.


히틀러의 독, 소 전쟁처럼 전선을 따라 항시 위협하는 적 주력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운영의 묘'라는 부분에서 왜군이 패착을 많이 한 전쟁 같습니다.


분조가 있기는 했지만, 왕조 국가에서 왕이 있고 없고는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거나,

맥이 빠지거나 큰 차이가 있죠.


왜군이 전쟁경험이 많긴허나,

섬에서 다이묘간 땅따먹기에 익숙해, 임란처럼 밖에 나가서 국가대국가 전쟁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점도 패인이네요.

다이묘 영지 하나 따먹는 법은 알았지만,

개전초기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한 나라 전체를 어떻게 점령하는 지를 몰랐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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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6-05-08 22:11
   
1592년에는 일본군들이 봄부터 들어닥쳐 전국이 전장화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호남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을에 수확할 식량생산량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대외정세에 밝았던 1군의 고니시가 평양 점령 후에 더 이상 북상하지 않은 것은
명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가장 컸습니다.

심지어 호전적이었던 2군의 가토와 나베시마조차도 함경도 최북단은 물론 간도일부에까지 진출하여
시전부락의 여진족들과 교전까지 벌였지만.... 여진-명나라지역까지의 진출은 무리라 판단하고
오히려 2군의 주력은 함흥,안변지역의 함경도 남단지역으로 철수합니다.
레로리 16-05-08 22:12
   
백성들이 왕 때문에 의병을 일으키고 단합했을까요?
선조가 한양 버리고 도망갈 때 빡쳐서 불 지른 게 바로 백성인데..
     
전략설계 16-05-08 22:22
   
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궁궐에 불 지른 백성인데.
왕이 혼자 살려고 명으로 도망갔다면 백성들은 더 빡치겠죠.
왕이 도망치면 칠수록 민심은 왕조를 버리고 결국 왜군한테 유리하겠는대요.
     
사랑투 16-05-09 02:01
   
일본측 기록에  왜군이 한성에 입성 했을때 까지만해도 궁이 멀쩡하게 남아있었던 걸로 봐서는...
약탈을 해도 이미 왜군이 다 했을 것이고.. 방화를 했어도 왜군이 했겠지요.

백성이 왜의 점령상태 에서  궁을 불질렀다는게 좀 어패가 있어요.
왜의 점령 상태에서 백성이 그런 폭동에 가까운 집단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죠.

 그리고 1년후 다시 한성을 탈환 했을때 궁이 전소 된 것을 보았죠?  아마 진실은 왜가  철수 하며  방화 한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젤리팝 16-05-08 23:11
   
관백은 교토로 돌아가려는 의향을 즉시 표명하고 자신의 이름 아래 수행해야 할 읨무를 지시하도록 조선으로 네다섯 명의 최고위 무장을 보냈다.
주요 항구마다 감시병을 두게 하고, 특히 조선에 건너가 있는 병사들이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히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무장은 격노와 분개, 말할수 없는 초조감을 참으며 견디고 있었다.
읻른 그 낯선 왕국의 적들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번민과 비참함에 빠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심각한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병사가 병들어 그야말로 내버려진 상태로 죽어가고있었다.
더욱이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불행한 처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들은 마음이 무거우져 대부분은 불확실한 영광이나 승리 이전에 차라리 죽음원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조선 땅에서 죽더라도 자신의 유골이 아주 비참하게 끝이 날것은 너무나도분 명하고 명백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대군은 모두 조선으로 건너가고 나서 주요 최고 무장들 사이에 이뤄진 협의에 따라 조선의 여러 지역으로 분할 배치됐다.
조선군은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해 일본에게는 해결해야 할 아주 큰 문제와 어려움두 가지가 잇따라 발생하게 됐다.

첫째,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에 분산 배치돼 있었고 해안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보급 받으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 식량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시량을 수송하는 일본군 수는 적었으며, 자국의 지리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조선 병사들이
여러 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 이들 일본군을 모두 죽이고 식량을 모두 가져갔다.

둘째,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조선 병사들이 서로 단결하고 연합해 수많은 우수한 선박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 배들은 견고하고 장대했으며 화약과 탄약, 군수품이 대단히 잘 갖춰져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을 만나면 습격하고 약탈하면서 해적질을 하며 다녔다.
더욱이 조선군은 일본군보다 해전에서 우수해 일본군에게 계속해서 커다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양군이 부딪친 주요전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관백의 두 지휘관인 도라노스케와 아와국의 영주는 조선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주는 수많은 피해에 대해 보고 받고
자신들이 거느린 300척의 배로 구성된 대군을 보내기로 했다.
이 배들에 수많은 소총과 활, 화살등 해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적재하고 정예 병사들을 승선시킨 일본군은
자신들이 갖춘 우수한 군사력을 굳게 믿고 훨씬 적은 수의 배를 가지고있는 조선 해적들을 격파하기 위해 출격했다.

바로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은 함성을 지르고 기뻐했으며 배로 일본 함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ㄷ자.
그들의 배는 장대하고 튼튼했기 때문에 일본 배를 장악하며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은 화약으로 공격하면서 괴롭혀 일본군에게 대단히 애를 먹게 했다.
결국 일본 병사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다로 몸을 던져 조선군의 성가신 공격으로부터 벗었났다.
조선은 일본군이 노를 저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생긴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위에서 떨어뜨리면서 포위했다.

해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기력은 이미 많이 약해졌고 전황은 점점 일본군에게 불리해졌다.
이 해전에서 도라노스케 부대의 매우 용감한 장수한명이 전사했다.
그는 관백이 시코쿠라고 불리는 4개 영국을 획득 할수있도록 재간과 전략을 발휘하여 관백으로부터 대단히 총애를 받은 심복이었다.
아와국의 또 다른 장수는 패배하자 뽀족한 수가 없음을 깨닫고 조선군에게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군은 70척에 이른ㄴ 일본 함대를 물리쳤으며 일본 병사 거의를 죽였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목숨을 다해 도망쳤다.

이 밖에 수없이 많은는 경우가 있지만 더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일본군은 해전에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조선군을 공격하기 위한 화기가 부족했으므로 해전에서 앞으로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 프로이스(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선교사)의 일본사 중 ---
전략설계님이 제시한건

초기 3개월 상황이고...

나머지 7년간의 상황도 고려해야합니다...

일본군은 생각보다 군령이 준엄합니다...

이유는 병농분리 정책을 추구하여

사무라이의 신분화 직업화를 1588년 전쟁 4년전에 달성합니다...

또한 당시 초반에 투입된 인원은 대부분

히데요시의 정예입니다.... 대충 싸울리가 없죠...

또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임진왜란편에서

명량해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보듯이 감시역을 수시로 붙였죠...

구로다 간베에 같은 경우는 조선에

넘어와보기도 했고요...

루이스프로이스의 저서 내용을 읽어보시고...

다시생각해봅시다...

제가 전략설계님에게 나쁜 감정을 갖을필요는 없기에...

안쓰려다 썼는데...

이거만 쓰렵니다...
     
전략설계 16-05-08 23:36
   
개전초기 명군참전 이전 상황만 쓴거네요.
책에 없는 제 주관이고.
 
명군참전 이후에는 명군 주력을 깨기 전에는 전쟁을 이겼다 할 수 없기에 상황이 다르기에..
다 못 쓰겠네요. 정치계시판 댓글 달라..

명군참전 이후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써볼까 하는데..
핵심은,
보급을 떠나서,
히데요시는 늙고 히데요리는 어리고, 도쿠가와는 300만석으로 버티고 있고.
히데요시가 힘으로 누른 것도 아니고.

제1군 가토부터 히데요시 죽고 배신 때리는데.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
일본의 자기 영지 보존이 제1의 목표인 다이묘들이,
일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명군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주력대 주력으로 큰 쌈 벌일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봐집니다.

5만-8만 정도 명군 주력을 깨부쉬지 못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는데.
군대를 보존해서 돌아가야 하는 다이묘들이 그런 승부를 걸 수 있는 지,

일본의 군 조직이,
직업군인이 아니라 각자 돌아가 서로 다퉈야 하는 다이묘들이란 점에서,
보급문제가 해결되었다 해도,
맘이 딴 데(본토)가 있어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명군 참전 이후에는 승리가 어려웠다고 봐지네요.
그래서 개전초에 명군이 참전하기 전에 승부를 봤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국산아몬드 16-05-08 23:45
   
명군은 104회 전투중에 단독전투가 단 4회고 연합전투를 합해도 8회밖에 안됩니다.
명군이 전황을 변화시킨 전투는 거의 없습니다
               
전략설계 16-05-09 20:00
   
명군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고,
먼 발치에서 구경만하는 군대가 아니라,
평양성전투, 직산전투,
전쟁 말미에도 울산성 전투, 순천왜성 전투 공성까지 주도했습니다.

명군이 잘 싸우고 못 싸우고를 떠나,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선 조선땅에 주둔한 명군을 박살내 몰아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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