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히 따지면 침략한적이 없다고 봐야 됩니다..
지금 님들이 열거한 것들밖에 생각이 나질 않을만큼 전무하다싶이 합니다
그리고 님들이 말한건 거의다 방어적인 수단으로 이용한 국지전의 성격이 강할뿐
침략하고 노략질 하길 위한 전쟁은 거의 없다 보심 됩니다..
우리나라를 계속해서 노략질하고 영토를 넘버고 백성을 도륙하는것에
정당한 대응으로 행해진 전쟁을 침략이라 한다면,,
생각 바꾸시길 ..
우리가 평상시 아는 한민족의 전쟁사처럼 여진족이 우리민족에게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오로지 여진족의 영토와 재물이 탐나서 한 전쟁이라 생각하시면...
그건 침략입니다..
님이 아무짓도 안한 여진족을 우리가 침략했다 믿으신다면,,
침략이 맞습니다..
저는 그리 알고 있지 않습니다만,, 사실이 아니라면 님이 맞겠지요..
만약 우리가 왜구를 외침으로 정한다면 신라구의 일본공격도 일본입장에선
외침이라고 볼수 있겠지요. 왜구도 엄연히 말하면 일본 정부의 사병이라기 보다는
지방 다이묘의 약탈자 무리에 가까웠으니까요.
이성계의 요동정벌 당시 요동은 북원의 영토라서..
실상 이 공격이 한민족이 요동을 차지할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라고 하더군요.
《니혼산다이지로쿠(日本三代實錄)》권16, 죠간 11년(869년) 6월 15일부터 18년 3월 9일까지에 걸쳐 하카타를 약탈한 신라 해적의 약탈 상황 및 그 후의 대책을 의논한 기록이 나온다. 지난 달(869년 5월) 22일의 밤, 신라의 해적이 큰 배 두 척을 타고 하카타의 진에 와서 부젠(豊前)의 연공이었던 견면(絹綿)을 훔쳐 도망쳤는데,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뒤쫓았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다자이후의 보고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연해 여러 군의 경비를 굳히고, 이에 내응한 혐의로 신라의 상인 윤청(潤清) 등 30명을 붙들어 추방하기로 결정, 한편 역도들을 쏘아 맞힌 '해변 백성들 대여섯'을 칭찬했다. 그 뒤 신라에 붙들려 있던 쓰시마 출신의 사냥꾼 우라베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麻呂)가 현지 상황의 심각성을 전하자, 결국 다자이후 관내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을 모조리 내륙인 무츠 등지로 이주시키고 구분전을 주어 귀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이 때 신라는 큰 배를 만들고 나팔을 불며 군사 연습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묻자 "장차 쓰시마를 정벌하여 차지하고자 함이다"(870년 2월 12일조)라 대답했다는 것이다. 또한 현지의 사생이 "신라국첩(新羅國牒)"을 입수해서 이것을 가지고 당시의 다자이쇼니(大宰少貳) 후지와라노 겐리마로(藤原元利万侶)가 신라와 내응한 사실을 고발했다.
일본 조정측은 규슈에 사키모리(防人)와 노사 등을 강화 배치하고, 쓰시마노카미 오노노 하루카제(小野春風) 등의 유력한 무인들을 독려하며 현지를 경호하는 한편, 하치만ㆍ카시이 등의 신궁과 진구 고고(神功皇后)의 무덤에 봉폐 및 제문을 올려 "일본은 신국이라 적국의 배는 오기도 전에 가라앉으리라"라는 소를 올리면서 신국사상(神國思想)을 널리 퍼뜨렸다(870년 2월 15일).
간표 5년(893년) 5월 11일, 다자이후에서는 또다시 신라의 도적을 발견했다. 그들 신라의 도적은 히고 국(肥後国) 아키타 군(飽田郡)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히젠 국(肥前国) 마쓰우라 군(松浦郡)에서 멀리 도망쳐버렸다. 이듬해인 간표 6년(894년) 4월, 일본 조정은 신라의 해적들이 쓰시마 섬을 덮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다급히 연안 구니에 경고를 명하고 산기(參議) 후지와라노 구니쓰네(藤原國經)를 곤노소치(權帥)로 내려보냈지만, 도적은 이미 도망쳐버린 뒤였다. 이보다 앞서 견당사(遣唐使)가 정해진 것은 이 도적들의 배후에 당이 관여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엿보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9월 19일, 다자이후의 하야우마(飛驛)의 사신이 갑자기 정벌이 성공했다고 말해 견당사 파견도 중지되었다(다음 해 9월에도 이키 섬의 관사가 도적에게 전소되었음을 전하고 있지만, 이는 아마 금년도의 일로 여겨진다).
간표 7년(895년) 9월 5일의 아침,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는 군지(郡司)와 사졸을 격려해 신라 해적들의 배 45척를 쇠뇌로 무장한 수백의 군세로 맞아 싸웠다. 그는 앞서 간교 7년(883년)에 가즈사 국에서 있었던 부수들의 무장봉기(간교의 난)를 가즈사노다이죠로서 여러 군의 군사 1천 명을 동원해 진압한 경험이 있었다. 요시토모는 우선 전사(前司) 다무라 다카야스(田村高良)를 시켜 군사를 정돈하게 한 뒤, 쓰시마 섬 고쿠분지의 상좌승인 벤균(面均)과 가미아가타 군(上県郡)의 부대령(副大領) 이마누시(今主)를 압령사로서 1백 명의 병사를 각 5명씩 20개의 번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豊円春竹에게 40명의 약한 병졸들을 주어 미끼로 요시토모가 있는 곳까지 적을 유인한 뒤, 수많은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 속에서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한 도적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과 투구 및 갑옷, 자루를 은으로 만든 칼 및 태도(太刀) 50자루, 활 110장, 창 1천 자루, 야나구이(弓胡) 110장, 방패 312개에 달하는 막대한 병기를 빼앗고, 도적 한 명을 생포했다.
현춘(玄春)이라는 이름의 그 신라인 포로는, 신라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는 텅 비고 백성도 굶주리고 있으며 왕성 또한 예외가 아니라, '왕'은 곡식과 견면을 가져오라며 배 1백 척과 2,500명의 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증언했다. 자신들은 왕이 파견한 그 많은 부대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도망친 자들 가운데 뛰어난 장군이 세 명이나 더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강한 자는 한 명의 당인(唐人)이라고 증언했다. 당시는 일본에서 율령으로 운영되던 군제의 거의 최말기이며, 또 그 장비였던 '쇠뇌'가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싸움에서 사용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그건 춘추필법 이래 자기들한테 쪽팔리는 것은 기록에 남기지 않거나 왜곡하려는 치졸함 때문에 몰라서 언급을 못하는거지요...그리고...중국인? 중원을 장악한 만주족 후예가 중국인이에요 아니면 만주족의 노예로 살아온 자칭 한족이라는 떨거지들의 후예가 중국인이에요? 중국인이란 실체가 명확하지 않지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고 있는자가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둥그런 지구에서 중국이란 있을 수 없지요...우리 나라 지도에서는 우리가 중국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우리의 변방입니다...떼놈이 아니시라면 개념을 정확히 하셨으면 하네요
님이 뭔 의도로 이런 글을 올리신지는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우나..
침략이란 단어를 함부로 써서도 안되고..
일본의 임지왜란을 칠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으로 바라보고 출발해
본다면,, 자기가 그런 침략이란 단어를 자국에 함부로 쓰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겁니다
이런건 요즘 유행하는 국뽕의 개념을 떠나..
일제 잔제의 결과로 받아들이시고 다시 역사를 바라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님 말대로 우리 민족은 정말 형편 없군요.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사상자 뿐이 못 냈으니...
정말 일본애들 말대로 정말 형편없는 민족이고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본 게 없는 역사인데
이 때까지 살아남은 바퀴벌레같은 생존력은 평가할만 하군요.
일본애들 워딩대로라면
아! 4군 6진 때가 세종 때인데 당시 여진족 중에 세를 불리는 세력이 있어 통일되면 전쟁의 위협이 돼서 서북쪽으로 꽤 먼거리를 가서 이긴적이 있긴 합니다. 2차 침략 때는 이미 도망간 사례가 있습니다.
여진군의 세세한 피해(얼마를 보냈는데 얼마가 복귀했다 정도의 기록 빼고는 정확한 사상자 통계 따위가 불가능하지만)를 알 정도인데 이건 모르시네요. 이것도 뭐 별거 아닙니다.
먼 개소리; 싸워서 생존한적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거지;
100중에 10을 그렇게 했다고 10이 전부 인양 얘기하시네. 조공을 바쳐서 살려달라고 언제 그랬는지?병자, 정자 호란에 대한 치욕을 보고 말하는건가? 삼전도는 조공을 바쳐서 살려달라고 빈게 아니라 같은편 되달라는데 거부하고 따른편 들어서 난 전쟁에 대한 결과 인데 그 전엔 그런적이 없는데요? 조공에 대한 이해도 개 떡같은거 같은데; 좃 지식 가지고 사실인양 망상에 빠져 살지 맙시다. 아이디가 아깝네요
그냥 처음부터 글쓴거랑 대화 댓 단 내용 보면 오히려 역사 까고 싶어하는 여지가 충분히 보이는군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외침만 당하고 침략 한번 못해본 바보같은 민족이란걸 강조하고 싶은겁니까? 지금이라도 한번 붙어볼래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쪽바리 주제에...체력적으로도 당해내지도 못할걸. 우리 민족이 너희처럼 악독하고 모질었다면 니들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민족같으니라고.
댓글들을 보니... 솔직히 마지막 일본 총독이 저승에서 껄껄 웃겠네요..
남의 나라 침략.. 영토확장해서 대국을 이룬게 대단하긴 하지만,,
우리는 뭐 그런 시절이 없었나요?
대고조선과 대 고구려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렇지만,, 역사에 남아 있는 사실로 남을만큼 큰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 한것이 단한개도 없다는걸
뭘 그리 부끄러워 하는지... 당대 인류 역사상 가장 크나큰 적을 맞이해 세계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적을 몇번을 물리친 한민족에 대한 자존감은 없고 그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침략과 정벌의 대한 언어 개념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안타갑습니다
음 좀 애매하긴 한데
일본 열도 초기 국가들이 한반도 철기문명이 열도 원주민 신석기문명 점령한 거라 이것도 침략이라면 침략이군요.
고구려 같은 경우 말갈, 거란, 실위 등 복속한 것도 침략이겠군요.
외국인이세요? 침략이랄 게 윤관과 4군 6진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여진족 피해라는 건 뭘 근거로 말하는 건지? 상식적으로 여진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기는데 빼앗긴 땅 돌려달라며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보내는 게 이해가 안 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