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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02 20:29
[한국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실패한 이유는 해상보급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5,718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패배한 것은..
이순신 함대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막힌게 가장 큰 패인이 맞습니다.

******************************

※전근대 시대 쌀 수송 능력 요약

-사람 1명 23.62kg~31.5kg
-말 1마리 64.2kg~141.23kg
-수레 1대 465.68kg
-표준형 조선 1척 6만8975kg (68.975톤)
-최대형 전선 1척 13만7950kg (137.95톤)

조선시대 표준형 해상 수송선박(1000석급 조선) 1척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사람 2189명 or 말 488마리 or 수레 148대 필요.

http://lyuen.egloos.com/5533955
출처: 번동아제님 블로그
**********************************************

일본의 도량형은 조선에 대략 2를  곱해주면 됩니다.
보통 현대의 밥 한공기를 100그램으로 잡으면 
하루 3끼 x 365 일 잡아도 대략 100kg 수준의 쌀이 필요합니다.(109.5kg)
(10만명 x 110kg = 11000톤)

하지만, 이 쌀이란게 일종의 화폐개념으로 물물교환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특히 반찬 구매를 위해 화폐로 쓰이기도 하기에, 
병사들에게 있어선 이 쌀이 단순히 먹거리로 끝나는게 아니었죠.

게다가, 
군대에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곡물을 먹어치우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보급수요는 상당히 늘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보통 밥한공기가 100그램(372칼로리) 정도인데..
이걸 3끼 먹으면 대략 1년에 100kg의 쌀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반찬보다 쌀에 대한 의존이 강했던 옛날에는 
야외활동을 병행하면서 성인남성 2천칼로리 수준의 식량을
제공하려면 매끼니 쌀 200그램 정도를 먹어줘야 되기에.. 
거의 1년에 1.5~2석 정도의 식량을 보급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1만석당 250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사실상 그 영지의 세율을 50%로 잡으면 5000석으로 250명의 병력을 고용한 것이고, 
평균으로 잡으면 대략 1인당 20석의 비용이 발생됩니다. 
물론, 높은 직위의 사람이 받는 연봉과 말단 병사가 받는 녹봉은 엄청난 차이가 나긴 합니다만..

최소한 생존을 위해선, 일본군에게 대략 1~2석의 식량을 제공해야 되고..
한양의 일본군 10만대군에게 보급하기 위해선 대략 10~20만석의 쌀이 필요한데..

이걸 실어나르려면, 육로수송으로는 
조선시대 표준형 해상 수송선박(1000석급 조선) 1척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사람 2189명 혹은 말 488마리 혹은 수레 148대 필요.

사람 4400명 x 100~200, 
말 1000마리x 100~200배, 
혹은 수레 300대 x 100~200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즉, 인력은 44만~88만명 or 말 10~20만 마리 or 혹은 수레 3만~6만대..

이걸 1년에 1번 꼴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달에 1번씩 12번에 나뉘어 올려보내려면, 
  36666명~73333명 or 말 8333~16666마리 or 수레 2500~500대가 필요)

그런데, 배에 실어서 보내면.. 
당시 일본의 수송선이 1천석을 실어나르는 대형 선박들도 있었기에..
200척만 올려보내면 끝이 납니다.

일본의 선박은 전쟁 초기 1천척에서 전쟁후기까지 포함하면 3천척을 건조한 것으로 나오는데..
앞의 인력과 말, 수레를 동원하는 것보다 이게 유지비용도 아주 싸게 먹히고, 대량수송이 가능하죠..

그런데 이 모든걸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막아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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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군은 제승방략을 기준으로 하루 3되의 보급을 받았다. 

즉 하루의 쌀 보급량이 1.8리터라는 

기병은 전마에 따로 죽미 1대승을 보급. 
인 복마는 콩 3되를 보급받았다. 

짐꾼은 보병기준 1명, 
기병기준 2명이 동반되었고 
종은 기병기준으로 2명이 쌀 4되, 콩 3되를 소모했다. 

(조선의 1승(=1되)는 0.58리터) 

1곡(=석) = 10(=두) =100 승(되) = 1000 합(홉) 

중국은 1석이 10인데. 조선은 1석이 15 

방량식= 조선시대 식량 소모율을 미리 적어둔 문헌 
http://blog.daum.net/koreanmarinecorps/14580 

물 1.8리터(무게=1.8kg) 
쌀 1.8리터(무게=1.6Kg) 
콩 1.8리터(무게=1.4Kg) 

물 : 쌀 : 콩=1 : 0.88  : 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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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26일(임자) 2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군에 소요될 군량을 계산하여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중국군은 모두 합쳐 4만 8천 5백 85명인데 
장령(將領)·중군(中軍)·천파총(千把� �)은 이 숫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일 양식이 1명당 1승(升) 5홉입니다. 

은 2만 6천 7백 필인데 
장령 등의 은 이 숫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필당 1일에 콩 3승(1.8리터)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4만 8천 5백 85명의 군량이 
하루에 대략 쌀 7백 20석이 들어 
2개월이면 쌀 4만 3천 7백 30석이 들고 

 2만 6천 7백 필의 먹이는 
하루에 대략 콩 8백 1석이 들어 
2개월에 콩 4만 8천 60석이 듭니다. 

본국과 중국의 되··석(石)은 크고 작은 많고 적은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10승을 1두(斗)로 치고 
10두를 1석으로 치지만 
본국에서는 15두를 1석으로 칩니다. 

중국의 쌀 1승 5홉은 본국의 2승 7홉에(1.56리터)  준하고 
콩 3승은 대략 5승 4홉(3.13리터)에 준합니다. 

의주에서 평양까지 직로로 
열 고을과 삼현(三縣) 등지의 여섯 고을에 받아들여 쌓아둔 곡식의 숫자를 조사해보니 

쌀과 좁쌀이 모두 5만 1천 4백 88석이고 콩은 3만 3천 1백 27석이었습니다. 

각 고을에 쌓아둔 것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리저리 맞추면 군량은 50여 일을 지탱해낼 수 있겠으나 
먹이 콩은 한층 부족할 것 같습니다. 

요사이 준비한 쌀과 콩의 숫자가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가가(假家)·시초(柴草)·도로·교량 등의 일에 대해 본사 낭청들을 보내어 아울러 검칙하고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http://egloos.zum.com/hyukjunseo/v/299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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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해서 보병 1명은 
하루에 쌀 0.8Kg~1.6Kg 가량 주면 끝인데 비해서, 

기병은 기병 녹봉 (최소 보병이랑 동급 이상 쌀 1.6kg) 
 먹일 풀 + 콩  (콩만 최소 3~4 Kg + 건초 한무더기 혹은 길가의 풀) 
+ 짐꾼 먹여 살릴 식량(쌀 2Kg + 콩 1.4Kg 을 따로 지급해야 되서 보급소요가 훨씬 증가한다는 소리입니다. 
(대략 인원 식량 5KG + 콩 3KG + 건초 ? 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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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위에서 최소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1일 쌀 소비량 300그램~600그램으로 계산했지만.. 
실제로 명나라군이나 조선군이 받는 녹봉 개념에서 이해하자면, 
쌀의 지급량은 1일 800그램에서 많게는 1.6kg를 받아야 해서. 실제로는 거의 3배로 늘어납니다.

즉, 인력은 44만~88만명 or 말 10~20만 마리 or 혹은 수레 3만~6만대.. x 3
=> 인력 132만~ 264만명 or 말 30~60만 마리 or 수레 9~18만대. (연인원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이걸 부산에서 서울까지 보름정도 기간 동안 운송하고 다시 내려왔다 치면.. 30일이 걸리는데..

1년에 12번을 날랐다고 하면, 
대략 11만~22만명의 인부, or 말 2만5천마리~5만마리 or 수레 7500~15000대가 필요합니다.

이런 육로수송을 대신하려면, 
일본수군은 한양의 10만 일본군을 먹여살리기 위해, 
1년에 1번은 반드시 600척의 대형 수송선에다 
곡물을 가득 실어 보내야 되는 상황인데.. 그게 안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내려와서, 
왜성을 쌓고 틀어박혀 보급 잘되는 경남지방에서 머물게 된것입니다.

본래는 점령지에서 세금을 걷으려고 했었지만,
조선식 세금(대략 20%~25%)에 비해서, 
일본식 세금은 너무나도 가혹했고(50~60%)..

세금을 내지않으면 가차없이 목을 쳐버리는 관계로,
조선백성들이 봉기하여 의병활동을 벌이게 되자.. 
식량조달은 물론, 소부대로 쪼개져서 움직이면, 툭하면 매복한 의병한테 죽어나가는터라..

식량수송을 위해서 수십리마다 방어거점을 마련하고, 
여기에 수비군을 두고, 식량수송을 담당하는 병력들을 최소 300인~500인 단위 이상으로,
주고 받고 하면서 보급수송을 계속해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담당한 일본군 병력들은 
보급수송에 바빠서 전쟁 와중에도 거의 꼼짝도 못했던 것이고..
사실상 활약이 잘 안보입니다. 아니면 의병들에게 시달리는 역사 기록에 등장하던가요.

이런 일본으로써도 지옥같은 보급난이 일어난 게...
이순신 함대에 해상보급로가 막혔기 때문이었고..

일본 역시 전국시대 때엔 애시당초 바로 옆동네랑 싸우거나,
원거리 전쟁은 해로수송에 의존하던 나라라서,
이런 엄청난 대규모 육로수송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 삼국시대 때에도 수나라, 당나라가 대규모 수군을 편성했던 이유가 이 것 때문이고,
수군이 작살나고 난뒤로 보급난을 겪다가 패배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죠.


결론:

1.이순신 함대 때문에 일본군이 물러난게 맞습니다.
2.사실상 육로수송은 그 당시로서는 미친 짓이었고.. 해상수송은 불가능했습니다.

*주의..

저기 위에서 인력, 말, 수레로 표시된건... 
각 운송수단 저만큼 필요하다는 소리지.. 인원 + 말 + 수레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즉, 육로수송에선 수레.. 즉, 달구지를 대량 활용하는게 그나마 수월한 보급수송이 가능하다는 소리지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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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로리 16-05-02 20:40
   
일본 뿐만이 아니라 명나라도 조선에서 보급 때문에 고생
보급체계가 다른 것도 이유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당시 조선은 보급과 관련된 인력이나 인프라 구성마저 형편 없었죠
     
Centurion 16-05-02 20:57
   
네. 글킨하죠..
그래도 조명연합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서..
그나마 명나라군 참전 초기를 제외하곤,
그래도 보급에 큰 곤란을 겪지 않았는데..
(해상수송 + 육로 보급수송을 위한 인력동원)

일본은.. 한양에서 철수하지 않는 이상..
해상보급 두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죠.
     
국산아몬드 16-05-02 21:39
   
전쟁통 보급이 원할히 되리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젤리팝 16-05-02 21:15
   
맞습니다. 이게 다이묘들이 자기재정으로 전쟁을 치르느라...

세키가하라때 재정적으로 곤란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도 조운수송을 배로했죠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초기 전국에 조창은 한양의 경창을 제외하면 충주의 가흥창,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 배천의 금곡포창, 강음의 조읍포창, 아산의 공진창, 용안의 덕성창, 영광의 법성창, 나주의 영산창 등 9개 조창이 있었고, 조선 후기 영조 때 진주의 가산창, 밀양의 삼랑창, 창원의 마산창 등 3개 조창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임진왜란 이래로 조창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사선에 의한 세곡의 임운이 행해지기 시작했고, 운송은 경강상인의 경강선과 훈련도감의 도감선이 주로 담당하였다

그니깐 해로에서 막히면 보급은 조선땅 육지로는 개노답이죠...

특히 일본군은 기병이 아닌 조총 창병 위주였기에...

더 개노답...

단지 쌀을 보급의미로만 볼께 아니고... 재정력관점에서도 보아야

하는데... 우습게 보는분들 많죠 ㅎㅎㅎ

일본다이묘 표현할때... 석고 몇만석으로

강대함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도쿠가와 막부때 쌀도 화폐기능 했다고

책에서 봤는데 말입죠...
푹찍 16-05-02 23:11
   
산넘고 물건너가 괜히 나온말이 아니죠. 한반도 3d 지형이라.
강산강산이 계속 반복됨.
오죽했으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탱크 장갑차도 죄다 자력도하가 가능하게 만들어서 장갑 약해졌다고 욕먹고
또 그 대답이 스스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반도 강산강산강산에 고립되면 자력으로 살아남는게 목적이라네요.
이런 지형이 또 외침보다 반란을 더 걱정했던 왕조 입장에서는 꽤 마음에 듬. 다리도 안놓고 길도 안뚫고 일부러 방치.
어차피 임금님 수랏상 반찬은 한양으로 배타고 들어오니...
대륙 한가운데 쳐박혀 있었으면 죽어라 길 뚫고 성쌓고 상비군 육성에 혈안이 되었겠죠.
그걸로 다른 국가도 좀 도모해 보고 흥망성쇄가 다이나믹 했을텐데...
한반도 3d 지형 화포성애자 조선 엘프족은 성쌓고 쳐박혀서 화살에 포탄날리는데는 도가 틈 ㅋ 물론 잘나갔을 때만...
판옥선도 딱 그런 개념이죠. 바다에 높다랗게 성쌓고 오지마 오지마 죽인다 가까이오지마 화살포탄 막 날림 ㅋㅋ
이순신 장군이 보시기에 이런 성들이 한군데 안쳐박혀 있고 이리저리 움직이네? 그래서 막 벌쳐=거북선, 시즈탱크=판옥선 메카닉 전술 구사하시고.
육지에서는 행주산성 언덕 입구 벙커링 시즈모드로 끔살... 드루와 드루와~ 아무튼 자리잡고 싸우는건 잘함 ㅋ
그게 또 베트남전때는 중대전술기지 벙커링 심시티로 베트콩 저글링들 바이오닉으로 다 녹여버리고
왜구들 한반도에서 해상 보급 막히는 순간 지는건 시간문제였죠. 한반도 3d헬지형에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활덕후 화포성애자들 잔뜩 몰려있었으니...
     
구름위하늘 16-05-03 11:21
   
ㅎㅎㅎ 글 정말 재미있게 잘쓰시네요.

조선 엘프족에서 물 뿜을 뻔 ...
전략설계 16-05-03 04:28
   
몽골기병이나 병란때 여진기병은 해상보급 없이도 한반도에서 기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죠.
약탈에 유리한 것이 기병의 장점입니다.

병란때 한강이북 조선백성 5명에 1명 꼴로 인신매매로 잡혀갈 정도니. 양반네 아녀자까지.
사람을 저렇게 털어갔으면 식량은.. 여진기병은 해상보급 필요없이
현지징발 제대로 했을겁니다.

왜군이 보병위주라 해상보급없이는,
부산-의주까지 1천킬로 가까이 되는 보급로를 따라 육상보급한다는 것은
그 시절 기술로는 거의 무리였겠지요.

유럽의 나폴레옹이 해상보급만으로 유럽을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약탈에 가까운 현지징발이었지만.
왜군은 전라도 공략 실패 등으로 이 현지징발도 실패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개전초기 평양까지 치고 올라갈 때 식량의 여유도 있었는데.
의주의 선조를 치러가지 않은게 좀 의문스럽네요.
한성의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의주로 북진했어야 하는데.

아마 임란이 전부가 아니고
전후 자기 영지를 지킬 전력을 살려서 일본에 돌아가야 하는 다이묘들이
대충 전쟁한 느낌이 듭니다.

히데요시가 채근하고 재촉하지 않으면,
임란이 자기 영지 뺏고 뺏기는 전쟁은 아니어서,
전반적으로 대충 싸운 느낌이 드네요.

전진한 만큼 자기 영지 확보하는 자기 전쟁이었다면,
무리해서라도 초반에 의주까지 치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명군 본군 오기 전에 의주의 선조를 중국으로 못 내친 점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고 봅니다.
그 담에는 명군이 5만 이상 버티고 있는데.
자기 전쟁이 아닌 히데요시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전쟁
일본의 영지를 생각한다면,
다이묘들이 명군하고 너죽고 나죽자식의 전투를 할 수 없는 것이죠.

바다에 성 짓고 시간 버리다 대충 싸우다 간 것입니다.

정유재란 승부처 직산전투에서 식량이 없어서 왜군이 후퇴한게 아니죠.
해상보급이 되었다 하더라도,
5만 이상 명군 군세와 조선군, 의병을 상대로 12만, 15만 병력으로는
조선 전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 아녔나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해상보급을 논하기 전에, 명 본군이 오기 전에 한성의 군대까지 총동원해서
조선조정을 중국으로 내보냈어야 했죠.
백제가 망한 것은 의자왕이 잡혀서 왕의 유고였죠.
선조가 조선에 없다고 해서 조선이 바로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왜군으로는 조선정복을 위해선 그 길이 최선인 것이죠.

그렇다고 왜군이 크지 않은 규모로도 기동과 집중을 해서
대군을 상대하고 적을 탈탈 털 수 있는 기병위주 군대도 아니었고.
당군처럼 30만 정도 일시에 투입할만한 군세도 아니었죠
     
mymiky 16-05-03 18:30
   
글쎄요

왜란 당시, 조선조정은 백제와 다르죠.
이미, 분조를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조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으로 넘어가더라도,
조선본진엔 여전히 아들인 광해군이 남아있음을 간과하신듯?
     
꼬꼬동아리 16-05-03 19:57
   
새로운 발상이긴한데 맞는말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전문티가 나네요
두부국 16-05-03 05:15
   
병자호란때는 농민군 조선초기의 기마병만 운영했어도 털리지 않았을겁니다 조선은 고려시대보다도 대비가 안됐습니다. 이괄의 1만3천 정예군도 내전으로 괴멸돼서 그냥 뻥 뚫린 길을 팔기병이 온거나 마찬가지입니다
wjs76 16-05-03 09:53
   
원래 쪽바리들의 원정보급 전략은 현지 조달입니다.

'일본인은 초식 동물이기 때문에 보급따위는 필요없다' 정신이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왔죠.
따라서 보급도 넉넉하게 준바하지 않고, 보급부대의 루트나 안전도 등한시 했죠.
제때 도착안하면 약탈해먹지 뭐.. 빨리 달려가서 깃발 꼽아야 돼는데 갸들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어딧어? 가 쪽바리 군인들의 기본 마인드에요.

중일전쟁때도 그랬고, 2차대전때도 그랬어요.
대충 원정길에 먹을만큼만 챙기고, 나머진 현지 약탈입니다.
어디 해적놈의 자/식들 아니랄까봐.

청일전쟁때는 중국측에서 후퇴하면서 태워먹고, 그나마 남은것도 쪽바리들이 적군에게 식량을 남기지 말라라면서 죄다 태워먹었죠. 지들 먹을것도 없는판에..

2차대전때 태평양 전선에서도 보급은 거의 없이 작전을 짜서 도중에 식량이 떨어지자 작전대로 수만명이 길가 풀 뜯어 쳐먹다 되새김질도 못하고 뒈진 전례가 있구요.

하긴 저런 병/신들한테 수십년을 짓밟힌 조상들도 쪽팔리긴 하지만..
     
동방불패 16-05-03 10:59
   
글 잘 읽었습니다
     
구름위하늘 16-05-03 11:26
   
다른 사례는 모르겠지만,
임란 전후의 일본군은 원정보급 전략이 현지 조달은 아닙니다.

소설 상의 설정일 수도 있지만,
대망이라는 일본소설에서는 그런 방법을 미친 짓으로 비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고,
충실한 보급 부대를 운영하고
그 보급부대를 돌격대로 공격하거나 막아내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현지조달 방법은 1회 이내 또는 소수/단기 간에만 의미있는 비상수단 입니다.
예외는 적의 식량 보급 기지를 털었을 경우이지요.
우리나라는 이런 곳에 해당하는 곳이 대부분 바다와 접한 곳이고요.
Centurion 16-05-03 11:32
   
그런데, 제가 찾지는 못하겠지만, 예전 프로이스였던가.. 누가 남긴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몇십리마다 성을 쌓고, 최소 300인, 500인씩 이동했고,
마치 개미떼같이 그 거점을 연결하며, 수송을 했다.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왜군들도 처음엔 현지조달을 할려고 했었고, 조선 농민들에게 세금을 받으려고 했었으나,
일본에서처럼 가혹한 세율.. 대략 생산량의 50~70%정도 삥뜯었는데..
조선은 세율이 조용조를 다합쳐도 25%정도 수준이라.. 조선 농민들 입장에선 눈이 뒤집히는 수준이었죠.

임진왜란 일본군이 1번대에서 16번대까지 있는데.. 그 중 9번대까지 왔었고..
본래 이들은 각기 조선 8도를 하나씩 점령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혹한 통치와 세금으로 인해
오히려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 소부대만 보이며 활로 쏴죽이고,
심지어 일본군 보급수송대를 공격해 쌀을 탈취해 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진 거지요.

그리고, 사실 일본군 15~20만명 정도 먹여살리는것 자체는 일본의 쌀생산량 1850만석에 비해,
그렇게까지 빡센 일은 아닙니다. 단지, 그 쌀을 수송하는게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이죠.
(10만 대군의 1년 유지를 위해선 대략 40만석~60만석 정도만 보내면 됩니다.)
(15만 대군이면 60만석~80만석, 20만 대군이면 80~120만석 정도를 보내면 되겠군요)

비슷한 문제가 조명연합군에도 있엇는데, 명나라 황제가 조선 국경으로 쌀 백만석을 보냈는데..
이걸 수송하는게 늦어져서, 이여송의 명나라 원군이 보급난을 겪습니다.

그래서, 조선관료 유근이 배 50척에다 나무판자를 둘러,
쇄빙선마냥 얼음을 깨고, 강을 거슬러 보급을 했네..뭐 그런 내용도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armuse&logNo=220656754551

그리고 암만 기병대라고 해도, 기병은 오히려 상당한 보급부담을 가지는 병종이라..
현지조달로 쉽게 떼우기 어렵습니다. 그랬다간 말이 폐사하기 딱 좋고요.
수레를 장착하지 않은 말에다가 등짐을 실어서,
몇일 이상의 기간동안 말의 먹이를 준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말은 하루에 10kg 이상의 곡물과 건초를 먹어야 되는 동물이니까요.

의외로 조선이 신립의 병력에게 도성에서 징발한 말을 수천마리 태워보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은 역참제도와 군사목적으로 전국각지에 상당한 목장을 운영했습니다.

제주도만 말을 키우는게 아니고, 저도 말하고 별로 연관없는 지방 소도시에 사는데..
향토사 연구자료를 보면, 이 동네에 조선시대 말목장과 관련된 지명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범위도 상당히 넓고요. 이런게 전국적으로 상당히 분포되어 있었다고 봐도 될겁니다.

즉, 현지조달을 하려고 하면, 이런 목장에서 현지조달을 했으리라 짐작은 갑니다만..
만약 적군이 한번 털고 가버렸다.. 혹은 방화를 해서 없애버렸다.. 이러면 말 먹이가 없는거죠.
     
구름위하늘 16-05-03 12:52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조금 다르네요.
초기 일본군은 점령지의 위무를 중요시 해서 징발하거나 세금을 걷거나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음.
한성 점령 전까지만 해도 식량이나 보급이 괜찮은 상태(같이 이동)여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피했다고 하네요. 오히려 피난민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군 작전도 한성 점령으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해서 그 정도 수준의 보급은 준비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공을 위해서 백성을 죽이거나, 현지 조달이 심해지는 것은 같은 결말이고요
          
Centurion 16-05-03 13:41
   
님 말씀대로 점령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펼쳤던게 사실입니다.
조선 8도 각지를 각 군이 점령해서, 사실상 일본내 영지처럼 그렇게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허나, 얼마 안가서 일본 영지에서처럼
세금과 현지에서 곡물을 징발하면서 민심이반이 일어나게 되죠.
그게 임란 초기 의병의 등장시기와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일본사극에서도 묘사되지만, 식량부족과 질병, 추위 요런건..
한양에서 도착해서 일본군 지휘부회의를 할 때도 이미 말이 나오던 부분이었습니다.

벽제관에서 명나라군에 한방을 먹이긴 했는데.. 그 뒤로 철수를 하게 되지요.
아무리 대군이라고 하나, 일본군이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지닐 수 있는 식량이나 군수품도 한계가 있었고,
지속적인 보급수송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경상도, 충청도의 의병과 관군에 의해 탈취당하고,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충주성 전투나 경주성 전투 같은게 그 당시 벌어지고 있었죠.

일본군이 1592년 4월 침공하여, 5월달 무렵에 한양에 당도했는데.. 평양성 전투는 6월..
1592년 5월 곽재우의 의병 봉기를 시작으로..
조선 관군, 의병에 의한 청주성, 경주성 전투는 8월,(일본 본대의 후방보급로 위협)
벽제관 전투는 1593년 1월, 행주전투는 2월..  대대적 철수는 4월
즉.. 1592년 추수기를 한차례 거친 상태인데.. 의병이 대대적으로 봉기하고, 해상보급로는 막히고,
일부 육상보급루트는 차단당하기까지 하니..
조선에선 이미 이미 식량문제가 불거질 수 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건 정유재란에서도 마찬가지로..
직산전투에서도 일본육군은 종군승려인 케이넨의 일기에는
바다에서 보급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명량대첩 이후 보급계획이 불발나면서, 전면철수했다는 그런 정황이 보여지구요.

아무리 대군이라고 해도, 움직일 때 식량을 몇달치씩 들고 다니는건 쉽지 않은 일이라..
조금씩 조금씩 한정된 인력과 우마차 등을 동원해 옮겼을테고,
사실상 충청도와 경상도 쪽 일본군 병력들은 죄다 이런 수송활동에 동원되다시피 했을 것입니다.

나름 히데요시 수하의 대표적인 무장 중 하나인
시즈카타케 칠본창의 우두머리이자 다혈질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묘하게 임진왜란에선 활약이 잘안보이죠. 심지어 관할에서도 중심지인 청주성을 빼앗기기도 했구요.
전략설계 16-05-03 12:34
   
병란때,
풀 한포기 없는 겨울에 압록강을 도하한 여진기병이 보급에 애로를 겪었단 말이 없죠.
원래 기병이 기동성, 수송능력 때문에 약탈과 현지징발에 강합니다.

예전처럼 인구밀도가 희박한 땅에 배고픈 보병을 보내서 산 넘고 넘어 약탈해서 오라고 하면,
가다오다 꼬꾸라집니다. 얼마 들고 오지도 못하고요.
병란때 30만, 40만 조선백성을 여진이 끌고 갔는데. 안 끌려간 사람도 집 비우고 피난 갔겠죠.
한강이북 마을이란 마을은 산골짜기 아니고는 거의 다 털렸다고 봐야죠.

남한산성 포위하고 여진이 큰 소리치죠. "조선 땅이 전부 자기꺼라고"
기병이 많이 먹는다만 떠올리시는데.
기병의 약탈능력을 간과하는 것이죠.

몽골이 고려 전국을 휩쓸 때 몽골 본토에서 긴 거리를 보급수레가 와서  대준걸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죠.
     
구름위하늘 16-05-03 12:57
   
단기전에서만 가능한 내용.
     
전략설계 16-05-03 13:21
   
몽골기병의 원정을 단기전이라 할 수 없죠.
몽골만큼 긴거리를 이동해 그 나라를 정복하고 오는 기병전쟁을 단기전이라고 할 수 없죠.

무슨 보급선이 본토와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중앙아시아 가보신 분들 알겠지만, 사시사철 푸른 것도 아니고 사막도 있고 황무지도 많고..

현지징발 아니고는 보급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본토에서 보급선을 따라 제대로 된 보급을 한다는 것은
중세에 어떤 나라도 구현하지 못한 것이고.

20세기 전쟁, 21세기 전쟁도 수송부대가 전투부대를 못 따라가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
보급이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히틀러의 소련 침공 실패한 이유도 보급선의 문제인데.

하물며 중세 원정에서 현지징발 없이 지속적인 전쟁은 불가능한 것이죠.
말 많이 먹긴 하지만, 많이 먹는 이상으로 기병이 현지징발에 유용한 수단이었기에,
몽골의 세계정복이 가능했었죠.

병란때 여진기병 또한 추수가 끝난 겨울에 약탈이라 한수이북에
상당기간 눌러 앉아도 되는 상황이었죠.
한수이북에 여진의 약탈을 막을 조선측 병력도 전무하다시피 했고.
단기전에만 가능한 얘기가 아닙니다.
          
구름위하늘 16-05-03 14:26
   
반론 1:
중세 이전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해외원정은 항구나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보급했고 그 중간기지 역할을 한 보급기지(항구?) 때문에 가능했었음

반론 2:
몽골의 전쟁은 싸움을 오래한 것이 아니라,
전장까지 가는 이동 시간이 길었을 뿐 싸움 자체는 대부분 단기전임.
몽골부대가 공성전에 비교적 약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반론 3:
몽골의 기마부대가 보급이 비교적 쉬운 조건이 있는 경우는 많아도 보급 없이 약탈만으로 장기간 싸울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은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이전에도 이런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아서 더 이상의 댓글 놀이에는 참여하지 않고,
위키 글 (신빙성은 무척 낮지만) 인용하고 끝내겠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_%EC%A0%9C%EA%B5%AD

편성:
원군은 우익(바르운 갈)・중군(코르)・좌익(쥬운 갈)의 3군단으로 나뉘어 중군 가운데서도 각각의 우익과 좌익이 존재했다. 이는 몽골의 평소 유목 형태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중앙의 칸이 남쪽을 향한 상태에서 서부의 유목집단을 우익, 동부의 유목집단을 좌익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의 군단은 아르긴치(선봉대), 코르(중군), 아우루크(후방 보급대)의 세 부대로 나뉘었다.
선봉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 중심으로 편성되며 전선에서 조우한 적군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다. 중군은 선봉대가 전력을 무력화한 뒤 전투 지역에 들어가 거점의 제압과 잔존 세력의 소탕, 그리고 전리품 약탈을 맡았다. 전군의 끝에는 후방대가 가축 방목을 하면서 천천히 뒤를 이어 전선을 뒤에서 밀었다. 후방대는 사병들의 가족 등 비전투원을 거느리고 정복이 진행되면 제압이 완료된 지역 후방 거점에 대기하고 몽골 본토에 있던 때와 거의 변하지 않는 유목 생활을 보낸다. 전선의 부대는 일정한 군사 활동이 된다고 일단 후방대의 대기 후방에서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부대 사이에는 기마의 전령이 오가고 왕족, 귀족이라도 전령을 만나면 길을 양보하도록 규정됐다.
               
전략설계 16-05-03 16:06
   
반론 1)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치러갈 때, 점령한 페르시아 도시의 식량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그리스 본토에서 보내 해상에서 하역한 보금품만으로
            반도도 아닌 내륙이 깊숙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네요.
            페르시아가 조그만 땅땡이도 아닌데 현지정발이 없었던거 직접 보셨나요?

반론2) 그럼 어떤 전쟁이 죽이고 살리고를 장기간 하겠습니까?
          임란 7년이라고 7년을 싸웠다고 생각하시나요?
          중세에 몽골에서부터 우즈벡까지 3천여 킬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단기전이 아니죠?
          하루에 30킬로씩만 이동해도 오고가고가 200일입니다. 200일간 안 먹어요?

          단기전이란 말은 유럽에서 옆동네 영주들끼리 치고받고
          몇번의 전투 벌리고 승부를 보는 것을 얘기하지.
          호라즘, 금 같은 강성한 국가를 정복하는 전쟁에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네요.

          수천여 킬로의 보급을 자체 해결해야 하는 최악의 보급환경을 이겨낸 것이죠.
          현대 차량으로 보급선을 깐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를.. 몽골기병은 해냈죠.
          어떻게 몽골의 정복전쟁이 단기전입니까?

반론 3) 현지징발을 얘기하면서 보급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본토로부터 뻗어나온
          보급선을 따라 보급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몽골군이 언제 몽골 본토로부터 보급선을 따라 보급을 받았나요?
          현지에서 징발하여 자체해결했지.
         
위키에 몽골의 세계정복이 단기전이란 구절 한번 찾아보세요.
님 혼자 착각인 것 같습니다.
오고 가는 거리가 얼만데 단기전입니까?

그러고 호라즘, 러시아를 정복했는데.
모든 물자가 몽골 것인데 거기서 죽치고 있어도 돼요.

몽골군대가 현지징발을 하지 않는다면 돌아올 때 첨에 싸간거 먹고 몽골로
돌아간답니까?
                    
꼬꼬동아리 16-05-03 20:08
   
이건 구름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전략설계 16-05-03 20:35
   
그 시대에 '해양보급'을 얘기하셔서 한번 지도를 봤습니다.
페르시아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는 지중해에서 직선으로 2,00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지중해에 하역한 보급품 최전방에 닿기도 전에
짐꾼이 다 먹어치울 거리네요.

부산->의주까지 임란 최대 전장의 2배 거리를,
어떻게 현지 징발 없이 해상에서 보급한 물품만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뻥'이죠.

지중해 가까운 곳에서 전투는 해상보급품을 전투를 치룰 수 있겠죠.
하지만, 페르시아는 제국입니다.

알렉산더가 정복한 박트리아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지중해에서 페르세폴리스까지 2,000킬로,
페르세폴리스에서 박트리아까지 1,500킬로,

지중해에서 장장 3,500킬로 떨어진 박트리아까지 해상보급품 받아먹고
전투가 가능하겠습니까?
현지에 널린 식량으로 전진하지.
해상보급품 대단히 좋아하시네요.
서아시아 깊숙이 들어간 알렉산더를 예로 들게..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은 결코 해상보급품 먹고 전진할만한 땅땡이가 아니었네요.
당연 현지징발입니다.
Centurion 16-05-0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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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말의 특징

세계적으로 여러 품종의 말이 있고 계량되고 있지만 몽골 말처럼 반야생 상태를 유지하고
 인간의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이용되는 순 품종의 말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몽골 말은 영하 45도에서 영상 45도의 더위와 추위를 견딜 수 있다.

겨울에 말굽으로 눈을 헤치고 풀, 나뭇잎, 마른 풀 등을 뜯어먹으며, 많은 먹이를 요구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말은 시속 50-60 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으며 서양 말 보다 비교적 멀리 달릴 수 있다.
말 한 마리에 200-400kg 짐을 실을 수 있으며 수명은 25년 이다. 몽골 산맥 지역에는 어두운 색깔의 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고비 사막 및 초원에는 밝은 색깔의 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자연과 기후에 잘 적응하고 있는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맥지역에는 겨울에 눈이 많고 춥지만 고비 사막과 초원에는 따뜻하고 풀이 짧고 땅이 넓기 때문이다.

(중략)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 몽골 말이 독일 베를린을 탈출하여 유럽, 러시아 초원, 시베리아 산맥을 건너서 몽골에 돌아왔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석했던 몽골 투우 아이막 지역 출신 말이 3 년 만에 교향에 돌아온 적이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전쟁의 (2차 세계대전) 어려운 상황에서 유럽 말을 위해서는 귀리 등 사료를 가지고 다녔지만
몽골 말은 눈을 헤치고 눈 속에 파묻힌 마른 풀을 뜯어먹고 살다 돌아갔다고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훗날 회상했다.

http://www.mglclub.com/forum7/1328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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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으로서 말은 개 이상의 서열을 갖고있으며 특히 경주마는 가축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한마디로 말은 가축으로서는 귀족에 해당된다.
그런데 서울 경마공원의 마사 및 경주시설은 건축한지 20년이 넘어 열악한 상태로,
마주와 관리자들의 원성이 점차 높아지는 중이다. 물론 농가에서 기르는 용도로는 잘 이용되지 않는다.

물자가 풍부한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곡물의 생산량이 부족했다.
이때문에 겨울에 건초만으로도 기를수있는 소나 식성은 인간과 경쟁하는 사이지만
야생성을 잃지 않아 숲에 풀어놔도 스스로 살아갈수 있는 돼지등과는 달리
말은 사료로 인간과 같이 곡물이 필요하고 풀어놓으면 도망치기 쉬웠다.

말은 하루에 몸무게의 2 ~ 2.5%의 사료가 필요하다.
이때 사료를 모두 건초로 준다면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공급할 수 없다.

말은 소와같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할수없어 건초에 있는 영양분을 흡수하는 효율이 낮고
위가 하나뿐이니 다량의 건초를 소화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부족한 열량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필요한것이 부피대비 열량이 높고 쉽게 소화하여 흡수할수 있게 정제된 영양소가 들어있는 곡물이다.

이때 필요한 곡물의 비율은 말의 운동량이 많을수록 높아져야한다. [24][25]
즉 말과 인간은 먹이경쟁자이기 때문에 같은 면적의 땅에서 말의 수가 늘어나면 부양할수있는 인구가 줄어들게된다.
이때문에 말은 농경사회에서 주요가축이 되지못하고 말의 특징을 필요한 군마나 마차용말, 짐말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물자가 풍부한 현대까지도 말고기에 어색한 문화가 이어져 내려와 말고기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끔 먹을 수 있는 별미정도의 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https://namu.wiki/w/%EB%A7%90(%EB%8F%99%EB%AC%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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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영목장 제도

조선은 군마의 품종을 보존하고 양성하기 위해 국영목장 제도를 시행했다.
전국에 60∼100개 정도의 목장을 설치하고, 2만∼4만 마리의 말을 사육했다. 전문 사육사와 수의사, 목동도 양성했다.
서울에 설치한 목장이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 다리 일대인 살곶이 목장이었다.
이곳은 왕실의 전용 목장으로 오랫동안 보존됐다.

지방의 목장은 주로 섬이나 해변의 곶에 위치했다.
이런 곳에 둔 이유는 농민들이 경작하지 않는 땅인데다 무엇보다 맹수나 도적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이다.
목장이 가장 많은 곳은 섬이 많은 전라도였다. 그러나 최대의 목장은 제주도였다.

조선시대 목장말의 절반이 제주도에서 사육됐다. 전성기에 조선에서 보유한 말은 2만∼4만 마리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 조금씩 줄어든다. 한말 고종 때도 5000여 마리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목장 운영의 전성기에도 군마의 조달은 골칫거리였다.

목장 제도에도 불구하고 말 값이 너무 비쌌다.
군마에도 장수들이 타고 전투를 벌이는 전투용 말과 수송용 말의 구분이 있었다.
물론 그 경계가 꼭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 무사들이 타는 전마는 군마 중에서도 최고의 말이어야 했다.

제일 좋은 말은 한 필 값이 쌀 30가마가 넘었다.
이것은 일반 자영농의 1.5∼2년 치 생산량, 또는 남자 종 6∼7명 값이었다.
그런데 기병은 전마 한 필에 수송용 말 한 두 필은 있어야 했고, 이 말을 돌보려면 최소한 종 한두 명은 거느려야 했다.

수송용 말을 전마의 반값으로 쳐도 이를 합하면
종이 최소 12명 이상은 있거나 3∼4년 치 수입 전액을 투자해야 출동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것도 개인 장비(무기와 갑옷)와 말 갑옷 비용(이 비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은 뺀 수치다.
조선 시대에는 군사가 말과 무장, 식량까지도 자비로 준비해야 했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전 국민의 10% 미만이었다.

군사가 말을 직접 키우면 이런 비용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을 번식시키면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명마라고 다 명마를 낳는 게 아니다. 일단 군마로 쓸 수 있는 좋은 말은 쉽게 얻기 힘들다.

군마는 기본 종자도 중요하지만 관리와 훈련도 철저히 해야 한다.
평소 쟁기를 끌다가 유사시에는 전쟁터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료도 비싼 곡물로 먹여야 한다. 여물은 먹이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즘 경주마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용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에서 목장 말을 무상으로 교부하거나 헐값에 교체해 주는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었다. 군대의 주력이 기병인데, 말이 부족하고 비싸니 말이 없는 군사도 많았다.
말이 없으면 훈련도 못하고, 군사들의 자질도 떨어진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무과에 합격해도 군사로 발령을 받으려면 말을 데리고 와서 말이 있다는 검증까지 받아야 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등록하는 속임수가 발생했다.

그래서 점고라고 해서 매년 군대를 소집해서 말과 장비 점검을 했다. 그러면 점검이 없는 다른 고을에서 빌려왔다.
화가 난 정부는 전국 고을에서 동시에 점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그날은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국적인 공휴일처럼 돼버린다는 점이다.
하여간 이렇게 돌고 도는 싸움은 끝이 없었다.

http://m.blog.daum.net/dandakhan/16586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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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말과 소의 경우엔 풀만 뜯어먹는게 가능했지만..
다른 나라의 품종은 꼭 그렇다는 법이 없습니다.

만주의 말이 몽골말과 같은 품종에, 같은 습성인지 알수가 없죠.

만주는 현재는 중국의 손꼽히는 곡창지대라는 말을 들을만큼,
식량생산량이 엄청난 지역이고, 여기는 고구려 시대에도 콩 농사가 상당히 성행한 곳이었습니다.

콩은.. 동아시아에서 말 먹이로 사용되는 곡물입니다.

암만 여진족이 편견때문에 미개하게 여겨져도,
막상 보면 동아시아 최강의 중장기병 집단이었고..
그만큼 철기 제조 기술이라던가, 그런게 다 발달되어 있던 족속들이란 것이죠.
북경을 수도로 삼기 전인 후금 시절에 지어진  심양의 궁궐도 우습게 볼 급이 아닙니다.

모든 말이 그렇게 길가다 풀 뜯어먹고 하는게 아니라, 몽골에서 나고 자란 말들이..
그런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풀뜯어먹고 살 수 있게 되었을 뿐,
명나라 말이나 일본 말이나.. 조선의 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한 몽골이야 키작고 덩치작은 몽골말을 타고 세계를 정복했지만,
만주 팔기군 같은 중장기병 집단이 몽골말처럼 덩치작은 말을 타고 다녔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죠.

그리고 임진왜란 일본군 보급문제를  이야기하는데.. 기병 타령은 또 왜 나오는지..
     
촐라롱콘 16-05-03 21:20
   
만주족와 몽골족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말과 목축에 관련된 어휘들에 한해서는 만주어가 몽골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말의 품종 역시 만주말이 몽골말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그들이 서식하는 주변자연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지라
탁트인 평원이 대부분인 몽골고원과는 달리, 평원지역보다는 오히려 삼림지역이 더욱 많이
분포된 만주지역의 자연환경에 인간 뿐만 아니라 말들도 적응이 되어....

평원에서는 천하무적이지만 산악-삼림지대에서는 비교적 맥을 추지 못하는
몽골족과 몽골말들과는 달리....
여진족과 여진말들은 산악지역의 전투에 상당히 능했습니다. 산기슭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산정상부를 향해 올라가기도 하고, 반대로 산등성이에서 산기슭방면으로의 하강에도 상당히
능했습니다.

또한 여진족들은 여차하면 하마하여 보병전투도 비교적 능숙하게 수행하여
마상에서는 비교적 천하무적이지만 말에서 내리면 전투력이 급감하던 몽골족들과
차별화되었습니다. 

윤관의 여진정벌 무대인 함경도지역과,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일대는 물론
조선군이 100배의 병력수를 가지고도 참패했던 쌍령전투가 벌어진 지역도 기본적으로는
산악지대에 해당하며... 이러한 산악지대에서도 여진족 추축의 기병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Centurion 16-05-03 22:34
   
여진족이 금나라 시절 기병전은 물론, 공성전, 수성전에 두루 능했던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여진족의 근거지였던 만주는 본래 고구려 땅으로써, 고구려군 자체가 산성을 쌓고, 기병을 출격시키는 등..
고구려군이 공성전, 수성전에 능하고, 중장기병 운용을 잘하는 면에서. 금나라와 청나라 기병의 원조격이었죠.

다만, 여진족 말 품종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도 부족한 편인듯 한데..
보통 삼국시대에서부터 쓰던 말 품종이 향마와 호마인데..
여기서 호마는 몽골고원 혹은 만주에서 들여온 북방계 말이고.
고구려가 주로 수입하던 말이 고구려의 서북쪽과 동북쪽에서 사들이던 말이었죠.
이런건 과하마로 알려진 작고 지구력이 강한 향마와 다르게 덩치가 큰 중형마였죠.
말이란게 품종이 좋으면 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라도, 멀리서 계속 개량되고, 수입되는 그런 품종이라..
그런 말 무역이 삼국시대에도 성행했을 정도였죠.

글고, 쌍령전투의 경우엔 청나라 기병이 300명이 앞장서서 뚫었다고 하는거지.
그 전투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패륵 급으로써.. 대략 7500명의 병력을 지휘하던 직책이었습니다.
그래서 300 vs 40000이 아니라 7500 중장기병 vs 40000 보병의 싸움으로 봐야 될겁니다.

그리고 고려도 여진족한테 애를 먹었지만,
몽골고원과 중국북부를 집어삼키고 위세를 떨쳤던 요나라 거란족도 그 여진족한테 망했습니다.

여진족의 말이 지구력이 좋고, 산악지형에 적응을 잘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쳐도..
얘네들이 몽고말처럼 곡물없이 풀만 뜯어먹고도 살아남는 애들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구요.

여진족의 말은 사실.. 조선도 많이 수입했고, 조선을 거쳐 명나라도 많이 수입했던 품목이라..
몽고말처럼 곡물없이 풀만 뜯어먹고도 생존할 수 있는 품종인지는 미지수라고 봅니다.

글고, 닉을 보니 무슨 내몽골 사람이신가?
만주족 이름은 아닌거 아닌데, 여진 말에 대해서 좀 아시나 봐요..?
               
촐라롱콘 16-05-03 23:56
   
쌍령전투에서의 청군지휘관이 청태종의 조카인 패륵 악탁이니
청군의 규모가 300명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청군의 규모를 3,000명~6,000명 정도로 파악하는 것 같더군요!

다만 Centurion님도 언급하셨듯이 최초 300기병의 청군에게 조선군의 대오가 돌파당한
것은 어느정도 맞다고 봅니다!
     
전략설계 16-05-04 02:24
   
<사료도 비싼 곡물로 먹여야 한다. 여물은 먹이면 안 된다.>

--> 여물의 의미가 "마소를 먹이기 위하여 말려서 썬 짚이나 마른풀"
--> 말여물 : [명사] 말을 먹이기 위하여 말려 썬 짚이나 풀 따위.

여물을 먹여선 안 되는 말도 있나요? 금시초문이라.
요즘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현대 말들도 전부 여물 먹입니다.
탄수화물 보충하는 사료랑 같이 줘요.
하루에 여물(건초)를 몇 단씩 먹이는데, 여물이 주식입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할 때,
말 먹일 건초(생초(生草)를 베어들여서 수분함량이 15% 이하가 될 때까지 건조시켜 만든 저장사료) 부족했다는 말 못 들어보셨나요?

그 건초가 여물입니다.

말이 초식동물인데 풀 못 먹는 말이 어딨답니까?

내부 기관이 몽골 말과 여타 말이 달라,
몽골 말은 풀만 뜯어먹고 살고,
여타 말은 마른 풀(여물)을 못 먹고 곡물만 먹는다고요?
아주 종을 분리를 시키네요.


<조선시대 목장말의 절반이 제주도에서 사육됐다.>

--> 이 말이 님이 풀만 뜯어 먹고 산다 한 몽골 말입니다.
          
Centurion 16-05-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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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가 풍부한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곡물의 생산량이 부족했다.
이때문에 겨울에 건초만으로도 기를수있는 소나 식성은 인간과 경쟁하는 사이지만
야생성을 잃지 않아 숲에 풀어놔도 스스로 살아갈수 있는 돼지등과는 달리
말은 사료로 인간과 같이 곡물이 필요하고 풀어놓으면 도망치기 쉬웠다.

말은 하루에 몸무게의 2 ~ 2.5%의 사료가 필요하다.
이때 사료를 모두 건초로 준다면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공급할 수 없다.

말은 소와같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할수없어 건초에 있는 영양분을 흡수하는 효율이 낮고
위가 하나뿐이니 다량의 건초를 소화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부족한 열량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필요한것이 부피대비 열량이 높고 쉽게 소화하여 흡수할수 있게 정제된 영양소가 들어있는 곡물이다.
**********************************************************

조선시대 조랑말.

영어로는 포니(pony).

보통 말중에서 체격이 작은 조그만 말로 대부분 각 지역의 재래종이다. 중국의 고문헌에는 한국 북부 산악지대의 조랑말을 과하마(果下馬)[1]라고 적은 기록이 있다. 몸집이 작고 귀엽기(?)때문에 현재는 어린이들이 승마할때 사용하며, 과거에는 덩치가 작지만 덩치에 비해 지구력이 좋고 먹이를 적게 먹어 짐말로 많이 사용하였다.[2]

생긴 것과 달리 성질이 엄청 더러워서(...) 편자를 갈때는 다리 넷을 묶어서 포박한 뒤에야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조선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봐도 사악하다는 둥, 악마같은 짐승 운운하는 내용이 있는 걸 봐서 성질이 참 더티한 모양.

대한민국에는 제주마가 있으며, 현재 제주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제주마는 조랑말이면서 중(中)형마에 속한다. 어?

너무 작기 때문에 군마로는 사용이 곤란하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서는 중국에서 좋은 말 품종을 들여와 어떻게 크게 개량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중국산 말도 그렇게 좋은 말이 아니었는데다[3] 3대가 넘어가면 도로 조랑말로 돌아가버려서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유전학의 부재가 뼈아프다 그래서 전국에 양마장을 설치하고 질좋은 여진족의 말을 수입해서 제법 효과를 보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본토의 양마장 대부분이 파괴되었다.[4][5]

그래도 임진왜란 이후에 여진(당시는 청나라)에서 덩치가 좀 되는 중마(中馬)를 대량 수입하였다.[6]

다만 무관들이 선비 따라한다고 너도나도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게 문제였다고(...). 자세한 것은 당나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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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주말은 물론 몽골말 혹은 그보다 작은 조랑말 수준이기 때문에 그렇다치지만,
군마로 사용되는 말은 덩치가 있는 최상급 군마입니다. 덩치가 최소 중형마라 이거죠.

고로, 기병용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 중대형 말들은 풀 뜯어먹는걸로 해결이 안되요.

위가 작은데다, 되새김질도 안되는 위 1개라서,
풀만 뜯어선 체력유지 안된다고 적혀있잖습니까?
덩치 작은 조랑말, 제주말 이런 작은 짐말들이나 가능한겁니다.

제주도에서도 나름 수입말로 품종개량을 시도했었지만,
3대만 넘어도 조랑말로 돌아갔다는게..풀만 뜯어먹는 방목을 시켜서겠죠.
          
전략설계 16-05-04 22:37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은 아라비아 말, 몽골 말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활동을 위해서 필요하죠.
야생의 말이 풀만 뜯어 먹고 사는건 아니죠.
쌀, 밀, 옥수수 원래부터 야생에 있었던 것이라.

<여물을 먹이면 안된다>가 아니고,
여물(건초)을 위주로 먹대 탄수화물을 보충하는 것이죠.
농경국가의 군용 말에 비해 몽골 말의 장점은 지가 알아서 해결한다 그거죠.
건초더미를 따로 챙기지 않고, 곡물을 따로 챙기지 않더라도.

지금 몽골 초원의 유목하는걸 보더라도,
초원의 그 사람들한테 콩 배달해주고 곡류 배달해줄 사람은 없는 것이죠.
몽골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초원도 고래로부터 말이 자체해결해야 할 성격 같네요.
누가 챙겨주겠습니까.

몽골 말의 더 큰 장점은,
다른 말에 비해 먹이를 1/3, 1/4 덜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막지역이나 풀 한 포기 없는 산맥을 통과할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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