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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설전들이 오가는데..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건 뭐 인정해야한다고 봅니다. 솔직히 제 생각에는 이승만이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불문법 성문법 어쩌구 하는게 보이는데 그거는 상황상 성문법을 쓰기가 더 낫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그런것같구요.. 뭐 이문제 그만 종결시키는게..
미군정은 한 것이 없는데 무슨 건국의 아버지입니까;; 나참;;;
if를 가정하고 "미군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전화됐을거다"이신 것 같은데 역사에서 if는 아무 소용 없는 거 알죠? 미군정시기에 우리나라 정부가 생겼습니까, 미군정 이후에 우리나라 정부가 생겼습니까?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누가 정부를 세웠는지 뻔히 나오는데 무슨 미국이 건국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합니까.
그리고 대리인으로써 일을 잘 수행했다?? 미국이 이승만에게 "승만아, 너 한반도로 가서 한국 정부 만들어와라" "네, 미국님" 이랬으면 인정하겠습니다만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얼토당토 않는 대리인입니까?
혹여나 미국이 한국 정부를 만든 후에 그 정부를 우리에게 이양해줬다면 "미국이 건국의 아버지"라는 되도 않는 말을 인정하겠습니다만, 미국은 미군정이후 한국에서 손을 완전히 떼다시피 했고(애치슨라인) 이승만은 정당한 투표하에 초대 대통령이 된 뒤 내각을 꾸립니다. 부정선거는 6.25이후 사사오입 사건으로 터진 것이고, 한국 정부는 이승만에 의해서 건국된 게 맞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상황상 성문법이 쓰기가 더 적절했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성문법을 쓰게 된 이유로는 혼란스러웠던 나로 초기 운영상태의 한계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시스템을 베꼈다는 것이 한계의 중론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려고 하는데 미국은 손을 뗐지, 결국 가까이 있는 일본의 성문법을 바로 베꼈다는 겁니다. (일본은 독일에서 베꼈습니다.) 그래서 70년대까지는 일본의 법과 한국의 법이 거의 유사했습니다. 그대로 베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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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각각 점령하게 된 미국과 소련은 군정(軍政)을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판이하게 다른 통치양상을 보였다.
우선 남한에 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일체 부정하였다.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한 조선 인민 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미국은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열의 인사들은 정부단체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면, 미군정은 앞서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였던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여, 온갖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 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겪고 있는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에 불씨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전에 친일 인사들(친일 기업가, 지주 : 송진우, 김성수 등) 등으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을 지원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남한에는 우익세력 이었던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있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무시당하였다. 특히 조선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으로 개편되었다.
미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하였다(고는 하지만, 거의 식민통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직속기관인 ‘신한회사’를 만들어, 그동안 일본인에게 소유되었던 재산을 관리하였다.( * 참고 :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신한회사는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던 토지들을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1/3의 값싼 소작료에 지급하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과 소작료의 추가 인하, 그리고 금납제를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갈등은 겪었다.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 등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 시장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상인과 지주들에 의해 매점매석으로 인해 미곡과 물가가 폭등하였다. 후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여 쌀을 거둬들이려고 하였으나, 춘궁기에 생산비도 안떨어지는 허접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인다는 그들의 방침은 농민들과의 갈등을 커져만 갔다.
또한 실업자의 증가 등의 문제로 미군정의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9월 미군정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대구 등 여러 민중 봉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쌀 공출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 토지 개혁, 미군정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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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미군정이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할려나? ㅎ
미군정이 직접 수립하는건 보기 안좋으니 이승만 불러서 시킨거죠 뭐;; 자존심때문에 인정하기 싫은건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