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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03 00:16
[펌]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2)
 글쓴이 : 알kelly
조회 : 1,565  

15. 훗날 2차례 남북정상회담의 기반을 닦은 남북적십자회담, 7.4남북공동성명 등의 대북정책


-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 국방 이외에도 조국통일,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청사진을 구상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흔히 북한과의 평화적인 시기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를 꼽지만, 그 시기에 행해진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들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반을 닦아놓은 대북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도 남북한의 선의의 경쟁을 촉구한 1970년의 8.15평화통일구상선언, 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찾기 운동,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이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그리고 1973년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과 6.23선언, 1974년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뿐만이 아니라,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제의, 1977년 대북한식량원조 제의, 1978년 남북경제협력협의기구 설치 제의, 1979년 무조건적인 대화재개 제의 등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준비도 착실하게 추진하였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된 남북한간의 체제 경쟁을 승리로 이끌고, 또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통일에 대비한 착실한 준비가 오늘날 우리가 통일을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주목할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인데,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분단 27년만에 처음으로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이 성명에서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공식 천명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1991년에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에도, 그리고 90년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에도 적용되어 그 이후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큰 의의가 있겠다.
1971년의 7.4남북공동성명은 무력통일에서 평화통일로 통일 방식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러니까 서로 끊임없이 다투던 그 시기에도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고자 노력했고, 또 이 노력의 성과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2000년 김대중 정권의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용으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관계 정립에 필수 요건임을 확신하고 밀어붙였는데, 일본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3년 말부터 야당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6월 3일에는 서울의 18개 대학생과 시민 등이 시위를 벌였다. 이는 6.3 사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한일회담 막후 주역으로 공화당 의장을 맡고 있던 김종필이 사표를 내고 외유를 떠날 정도로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에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타결되었다. 이로 인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 따라 무상 공여 3억 달러, 유상 재정 2억 달러를 각각 10년에 걸쳐 분할해서 제공받기로 했으며,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한일협정은 경제 회생을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6년간 '일제 식민통치의 한'까지 팔아먹은 전형적인 매국 외교라며 격렬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156권, 총 3만 5354쪽의 한일회담 전 과정이 담긴 외교 문서를 모두 공개했는데, 당시 민간위원으로 문서 공개에 참여해 샅샅이 문서를 살피고 정리한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2005년 8월 26일에 다음과 같이 문서공개관련 회견을 가졌다.
"나도 한때는 한일협정이 굴욕 회담이라고 생각했는데, 3만 6000장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우리 정부가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비교적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굴욕적인 36년 식민 지배를 통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손해에 상당하는 보상은 부족하지만,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당초 8000만~1억 5000만 달러만 주려 했는데 우리 대표단이 최대한 액수를 끌어올렸다. 과거 청산이나 국익 유지와 옹호를 위해 당시 대표단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은 1951년 8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해 일본을 상대로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때, 일본의 이러한 행태들을 본다면 한일협정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간을 더 끌어 시일이 지난 뒤에 협정을 가졌다면 아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도 지적을 했듯이 말이다.
분명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경이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끈 견인차였다. 당시 한국의 총 외환 보유고가 2억~3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 유입될 자본은 엄청난 금액이었고, 덕분에 수교 이듬해인 1966년에 무려 12.4%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제1차 5개'년 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17. 경제적 자립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 기반을 다짐


-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어 1973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 경제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근간을 이루며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로 발전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이전, 우리의 철강 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의 육성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고, KISA도 차관도입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철강업체를 만드는 데에 기반을 닦았다. 이 세계적인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에 불러 포항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박태준도 부담이 되서 여러 차례 거부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원래 KISA가 한국에 조강 능력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까지 완공하며 3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또한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금은 바로 한일협정 청구비용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포항제철 건설은 국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드디어 포항종합제철의 1기 용광로 공사가 완공되어 점화로에 불을 붙였다. 쇳물이 나오기까지 21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반도 포항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이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의 전적인 지원과 격려, 그리고 박태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포항제철은 선진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준공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후 포항제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는 국가의 중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조강 생산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등 국가 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이라는 포항제철을 건설한 CEO의 위대한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결단력과 포항제철 창업단의 불도저와 같은 리더십, 포항제철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 이제는 세계 굴지의 제철공장이 되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단순하게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항제철은 국내의 철강산업을 선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선두에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18. 2001년~2012년까지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대표적인 조선산업의 기반을 다짐


-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 조선소 건설이었다. 조선소 건설은 돈도 기술도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외국에 나가 손을 벌리니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없었고, 정주영을 박정희가 거의 강제적으로 해외로 보냈다. 그 이후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과 의논을 한 뒤 조선사업은 시작되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군사강국인데다가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해양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울산 단지가 들어서고 일자리와 국민 총소득은 조금씩 늘어났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거지는 넘쳐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조선산업을 결심했다. 그는 이 산업만 성공한다면 자주국방도, 일자리 창출도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조선산업을 통해 자연히 기계와 자연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대규모 산업은 정부 관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경제기획원 장관인 김학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주영을 추천했다.
정주영은 조선산업을 위해 해외로 나가 기술 제휴와 차관 도입에 나섰으나 미국, 일본, 캐나다 등의 회사는 냉담하게 그를 돌려보냈고, 이에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한다면 국가사업에 있어 현대건설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치게 하여 정주영은 계속 시도하였고, 드디어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왔다.
4,30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 한국으로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조선산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조선소를 완공했고 리바노스가 발주한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했다. 한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대형 유조선을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1위 조선국이 된 것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정주영의 추진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즉,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1년을 대한민국이 조선산업에서 세계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 '공업입국' 신호탄인 공업단지를 조성, 경공업·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 1962년 2월 3일, 울산에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이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울산공업단지를 혁명공약(경제개발)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이 울산공업단지의 조성은 박정희에게는 경제개발의 거의 최초의 시도이자 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을 가지기 이전에 이미 1962년 1월 27일에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하여 공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울산에는 여러 화학, 석유와 관련된 중화학공업이 실제로 시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고작 생사 270만 달러를 수출했던 데 비해, 1970년에는 섬유류 수출이 3억 4,110만 달러나 되었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수출이 섬유류, 합판, 가발 등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었다. 그 이후 1965년 3월 12일에는 구로공업단지의 기공식이 있었다. 또한 1967년 4월 20일에는 요소비료를 연간 33만 톤 규모로 생산하는 한국비료가 준공되었고, 1964년 5월 7일에는 울산정유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울산공업단지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산업화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이 울산공업단지에는 중화학공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1968년부터 가동에 들어갔고, 1972년에는 현대미포조선소가 준공됐다. 울산이 공업단지로 선정되면서 변변한 항만시설도 없는 곳에 기계와 시설자재를 실은 대형선박들의 왕래가 부쩍 잦아졌다.
당시 울산은 인구 8만 5000명 정도의 전형적인 농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2년 1월 15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울산이라는 농어촌을 대한민국 최초의 공업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 석유화학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카바이드법에 의하여 폴리염화비닐(PVC)을 생산해 낸 것을 그 효시로 한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석유화학공업이 시작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1964년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 가동으로 원료인 나프타의 국내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중 섬유·플라스틱·타이어·세제 등 석유화학산업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는 산업들이 개발됨에 따라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업스트림 부문은 대한석유공사를, 다운스트림 부문은 충주비료를 주축으로 하여 1968년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1970년에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 내에 석유화학의 방향족계 원료인 BTX(벤젠·톨루엔·크실렌)공장을 건설·가동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 10월에는 에틸렌 기준 연간 10만 톤 생산규모의 나프타 분해공장 및 9개 계열공장이 완전 가동되었다.
이로써 국내 석유화학공업은 대량생산으로 본격적인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기초 유분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공업단지의 신호탄으로 경공업을 하던 공업단지에서 이제는 더 나아가 중화학공업이라는 한층 성장된 공업단지가 되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20. 서민들의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 1968년에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전차가 폐지되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온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대량 수송이 가능한 대중교통이 하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결국 대한민국 철도청이 지하철에 대해 연구하였으나 다른 과제로 인해 묻혀버렸고, 당시 서울특별시장 윤치영과 김현옥에 의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철도청장을 지냈었던 양택식이 김현옥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재임중에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으나 김학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양택식의 편을 들어주었고,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지하철은 1호선이 1971년 4월 12일 착공해 3년 4개월 만인 1974년 광복절에 개통했다. 거리는 서울역~청량리로 7.8km 길이였다. 당시에는 서울역이 서울역앞역으로, 시청역은 시청앞역으로 불렸으며, 동묘앞역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1971년에 일본에서 들여온 외자 94억원과 국내자금 240억원을 투입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지만 일본의 기술협력과 엔 차관이 결합하여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지하철 개통은 새로운 주거지역이 개발되고, 또 대단위 주택단지가 건설되고, 또 도시기능이 분산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21. 세계에서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효자산업인 반도체 전자공업의 기반을 다짐

- 역사적으로 농경시대에는 농사를 짓는 기술이, 산업사회에서는 기계기술과 전자기술이 생존 수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바로 우리나라가 최초로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의 기간산업을 정부 주도형으로 기획하고 육성하였다.
중화학공업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육성되던 시기인 1974년 1월에 한국반도체는 설립되었다. 국내 유수의 오퍼상인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 생산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회사가 바로 이건희 눈에 띄었다. 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닥쳐 큰 폭풍에 휩싸였는데, 이건희는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에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30대 초반이었던 이건희는 아버지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건의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희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병철도 반도체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77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는데, 언젠가는 반도체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전자산업이 앞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니 국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전자산업의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정책을 육성할 때 반도체는 당시에 최초로 국내에 도입되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시제품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제품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지만, 연구개발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과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기업체에서 시작되었다. 메모리형 반도체 산업육성정책을 연탄을 찍어내는 일, 또는 쌀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1980년~1990년대 반도체, 휴대전화기로 옮겨가게 된 것은 바로 1960~197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수출지향산업화 전략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수출을 확대했고, 이후 중공업, 선박, 화학, 자동차, 반도체, 소비재 전자제품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여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동시에 이룬 것이었다.

그 결과, 현재 삼성그룹 전자계열사 제품을 국내 외 유통, 국내 반도체 유통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1위의 공급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반도체 분야 1위는 1992년에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르고 나서 지속되고 있다.
22.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국방을 통한 철통같은 국가안보를 계획하여 실현시킴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에 대한 뜻은 1968년 2월 7일 경남 하동에서 열린 경전선 개통식장에서 처음 직접적으로 강조되었다.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 대미외교를 강화하여 월남전 파병을 결단하고 국군현대화 지원을 얻어내면서 방위산업을 육성했다. 박정희 정부의 자주국방 노력은 중화학공업화 추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1971년 말 구상되어 1973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이 계획은 한국의 산업구조를 고도화시키려는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당시 한국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때 이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데에는 정치, 군사적 동기, 즉 한편으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닉슨 정부의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적이 더 컸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자주국방을 달성해 북한의 위협과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주국방 추진의 관건은 국방비 확보였다. 그 당시까지 한국의 국방비는 대개 경상비를 충당할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한국군의 전력강화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주로 의존했다.
그런데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3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줄기 시작해 1977년경에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 대가로 1971년부터 5년 동안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제공하기로 한 15억 달러의 군사원주와 1975년부터 걷기 시작한 방위세를 재원으로 하여 강력한 자주국방 노력을 전개했다.
국방부에서는 1974년에 '전력 증강 8개'년 계획'을 입안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율곡계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율곡계획은 남북 간의 전력 비교가 50대 100이라는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차, 야포, 함정, 잠수함, 전투기 등의 국산화와 외부 조달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력증강 8개'년 계획으로 소총, 미사일, 전차 등이 국산화 되었고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 정부는 1976년 예산부터 국방비를 배증하기 시작해 이후 3년 동안 해마다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1979년 국방비는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 면에서는 북한보다 작지만 액수로는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한국은 이러한 국방비를 가지고 미국으로부터 현대식 무기, 예컨대 미사일과 전투기, 군함 등을 사들이는 한편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육성된 방위산업을 토대로 하여 무기의 국산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 프로젝트에서 가장 야심에 찬 것은 핵무기 개발 시도였다. 1971년 닉슨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의 안보에 대한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그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남한이 홀로 북한과 대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그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에 대한 유혹을 느끼게 했다.
그에게 있어 군사적 자립은 핵무기 자립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고, 남한 내에 수 백 개의 미국 핵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핵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했고, 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밀기관도 두었다.
그는 우선 프랑스와 접촉하여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용 재처리 시설 확보에 주력했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핵과학자들을 은밀히 포섭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장비와 소재들을 몰래 구입하기 시작했다. 1971년 주한미군 철수 이후 박정희는 핵개발을 포함하여 적극적인 자주국방정책을 추진했는데, 이 역시 미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6.25전쟁 이후로 북한군 전차보다 뛰어난 성능을 지닌 전차의 보유는 우리 육군의 숙원이었다. 1976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국산 전차 개발’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것을 계기로 현대중공업이 미제 M-48A1 전차 개량사업에 착수했고, 이후 현대로템(당시 현대정공)이 1987년 7월부터 K-1 전차(88전차)를 본격 생산하게 된다. 이어 1996년 미국과 기술협력을 통해 120mm 활강포를 장착하고 특수장갑을 채용한 K-1A1 전차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K-1A1 전차 개발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독자모델의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함께 현대로템은 독일의 레오파드, 프랑스의 르끌레르, 미국의 에이브람스 전차와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K-2 전차 개발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1974년 12월, 1단 무유도(無誘導)로켓 '홍릉1호'가 창공을 갈랐다. 1978년 9월 26일엔 '백곰'이 충남 서산군 안흥 앞바다 목표에 명중했다. '백곰'뿐 아니라 대전차로켓 6발, 다연장로켓 구룡 56발, 중거리 무유도로켓 황룡 4발 등도 이어 실험에 성공하고 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 및 항공기산업과 특수전차개발에 착수하여 자주국방의 효시를 놓는다.
23.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과학진흥계획을 수립, 세계적인 과학국가 기반을 조성
-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한 데 이어 4개월 뒤인 그해 5월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또 박 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육성 정책은 1966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1967년의 과학기술처 발족,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1971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KIST의 파격적인 인사제도는 고급 두뇌를 영입해 한국 과학기술사에 분기점이 되는 굵직굵직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수립, 시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경제개발 계획과 함께 시작된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개발 로드맵인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계획의 뿌리로서 기획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포병장교에 있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에 과학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는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입국에 열을 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해외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던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의 중요성을 일찍히 깨닫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덕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등도 없었다.
당시 KIST 박사들의 대우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을 정도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고 산업화가 필요하단 걸 절실히 느꼈었던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대우와 격려에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많은 박사들은 자신들을 희생했다. 3~4년 사이에 귀국한 18명 중 4명이 스트레스 때문에 암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이미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총 4회에 걸쳐 1981년까지 진행된 기술진흥 계획 속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많은 근간들이 탄생하고 꽃을 피웠다. 1945년 2차 대전 후에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 시행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확고한 리더십 원칙이 있었다. 첫째, 나라의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과학기술은 기능, 기술, 과학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둘째, 이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본과 시설이 마련되어야 함을 알았으며 셋째, 이들을 이끌고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1961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과 경제 개발이 초석이 돼 대한민국은 과학경쟁력 세계 3위, 기술경쟁력 세계 14위, 과학 인프라 세계 3위(2009년 기준)로 성장했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에 과학기술계 원로들은 박정희과학기술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박원훈 KIST 연우회장(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기념관 건립은 단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한 국가지도자의 정확한 인식이 얼마나 국가발전에 기여했는지,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 세태에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설립의도를 밝혔다.
24.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숭고한 기념사업을 정부주도로 추진


-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에 대한 헌신을 했던 위인들을 기리고자 과거에 애국을 했던 분들과 관련된 많은 투자를 하여 사업을 진행시켰다. 아산시 백암리 일대는 이순신 장군의 옛집, 사당 등이 있는 곳인데,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이 행해졌다. 충무공 현충사 관리소는 성역화 작업이 진행 중이던 1968년 12월 31일 설립됐다.
소장 1명 아래에 서무과와 관리과를 두고 있으며, 이순신 묘계를 관할하기 위해 음봉분소를 두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에 이곳을 성역화하고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하여 오늘의 경관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충무공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광화문에 지금까지도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는데, 이순신 장군 성역화작업과 함께 추진되었다. 동상은 1968년 4월 27일에 착공 7개월만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건립된 20M에 달하는 국내 최대규모의 동상이다. 일본의 기운이 너비 100m나 되는 뻥 뚫린 길을 타고 밀려 들어올 것을 걱정한다는 여론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강감찬 장군도 역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애국조상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전국 각 시, 군마다 위인의 동상을 세워 정신을 본받도록 지시하면서 수원의 팔달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구 20만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부사의 사당도 만들었다.
또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70년에 만들어졌다. 특히나 재정이 어려워 기념관을 준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면서 정부 지원을 지시해 기념관을 준공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 의사를 위해 남산 주변을 성역화하라고 지시해 추진위까지 만들어졌는데, 갑자기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기념관'을 정부 지원으로 준공케 한 뒤 숭모회로 하여금 지난 79년 9월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안중근 기념관 정문 앞에 자신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란 친필 기념비를 세우게 했다. 1979년 당시 숭모회 회장으로 있던 이은상과 박정희는 "안중근 의사의 위격(位格)을 이 충무공과 동격으로 높이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었다.
이를 위해 청와대 정무수석 고건, 문공부장관 김성진, 서울시장 정상천 등으로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부와 숭모회는 성역화 장소를 두고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는 강남지역의 국유지 10만평에 성역화를 건설하기로 한 반면, 숭모회는 남산공원 부지 1만평에 성역화 건설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등 입장 차이를 보이다가 10.26 사태로 인해 성역화 추진이 무산됐다.
이외에도 미국에서 서거한 이승만 박사를 모셔다가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그를 기렸으며, 조선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서 고생하자 모셔다가 이방자 여사와 덕헤옹주와 함께 창덕궁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또한 독립유공자들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는데, 대표적으로 이봉창 의사가 있다. 1963년 10월 7일에는 동학혁명 기념탑 제막식도 가졌다.

25.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리더십을 통해 자신감을 심어줌

-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슬로건은 3개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슬로건을 통해 경제적 리더십을 내세워 수천 년을 이어온 후진국의 사슬을 끊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룩해냈다.
사회, 경제적인 기반 없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과 업적은 역사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하면 된다'라는 슬로건이 지금까지도 한국군대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슬로건은 전체적인 영역, 즉 당시의 사회와 경제, 정치적인 측면 등 모든 측면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 일종의 윤활유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한국에서는 사업이라든가 프로젝트를 만들 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못한다'라는 부정적인 말이다. 한국인들은 빈말이라도 '할 수 있다', 혹은 '문제없다', 혹은 '괜찮다' 등 긍정적인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머리에 박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확실한 것이 아니면 '모르겠다'라거나 '잘 못할지도 모른다'라는 소극적인 대답을 하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창학 정신이 어떻게 보면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박혀있는 것이다.
50여 년 전 세계 최빈국에 희망이 없던 시절,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하였던 선진 조국의 비전을 가지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박정희라는 한 가난한 나라의 뜻있는 지도자가 대한민국에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의학 성분이 전혀 없는 약이라도 환자의 심리적인 믿음을 통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이 이미 증명된 바가 있다. 즉,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도 그렇다고 믿거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효과를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30~40년 이전에 알고 있었고, 그 효과를 국민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26. 현재 세계적인 강남스타일의 중심지인 한강이남 개발, 즉 강남일대를 개발하는 사업을 실시
-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역인 강남, 현재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비단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지역으로 우뚝 솟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사람들은 그곳을 강남보다는 '영동'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차츰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이렇게 강남은 급속도로 발전을 했으며, 이후에 '강남스타일' 노래로 인해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27. 전국에 있는 호국문화유산과 같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재들을 발굴하고 정비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에 신경을 썼는데, 1970년대 초에 사적 제502호인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도 복원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7월 정소영 경제 제1수석비서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주관광개발계획단을 구성였다.
이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도록 한 것이었고, 이 시기에 석굴암을 재보수하고 광화문을 재건했다. 1973년 7월 3일에 불국사 복원불사 회향식이 열렸는데, 이날 준공 행사에 참여하여 30여분간 새로 단장된 불이문, 대웅전, 회량, 무설전, 다보탑, 석가탑 등 경내를 둘러보았다.
또한 이외에도 화성을 복원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화성 복원 의지로 1975년부터 시작한 수원 화성복원 공사에 예산 32억원(현재가치 1조원)을 들여서 수원시와 경기도가 중심이 되어 5년이라는 긴 시간의 노력 끝에 화성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시켰다. 또한
이외에도 남대문 중수 공사를 준공했으며, 동대문 개축도 준공하였다.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며, 팔의사 창의탑을 준공했다.
또한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신축 및 보수를 했으며, 무형문화재와 기능 및 예능보유자 인정 전승사업을 시작했다. 석가탑 사리함에서 세계 최고 목판 인쇄 다라니경문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을 착공하고, 밀양 영남루를 보수, 서울 문묘 보수, 부여 정림사지 정비, 법주사 대웅전 보수, 종합민족문화센터를 기공했으며, 국립묘지정화사업 현충탄 건립과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공포하는 등 무수히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사실, 당시의 모든 구호와 정책의 초점은 식량증산에 맞추어져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문화는 정책 추진의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호국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 수원성이라 불렀던 우리 역사의 자랑을 완벽하게 복원시켰다. 이외에도 현재 존재하는 대다수의 문화재가 박정희 대통령 때 복원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모든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문화재 관리행정의 체계를 잡으라는 지시를 통해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유적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금 문화재관리청의 모든 관리행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전국 유적 총람(全國遺蹟總覽)'이다.
28. 야간중학 개설, 중학입시시험 폐지, 고교평준화와 같은 현대식 교육체계의 기반을 조성

-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 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19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이외에도 1969년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했고, 1971년 2월 19일에는 국민윤리도 교과로 신설되었다. 또한 종합교육센터도 기공되었으며, 교육용 한자 1,781자를 선정하여 발표했다. 체육고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으며, 고교평준화 작업과 산업체 근로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특별학급 설치를 기준령으로 의결했다.
29.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실리적으로 중동국가와 교류, '중동 특수'를 누림
- 1970년대에 접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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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선 14-04-03 00:19
   
검색해서 첫페이지만 봐도 누가 자꾸 가져오는지 보이는걸 좌파들이 자꾸 꺼집어 낸다면서
어제만 해도 지겹다고 박가 얘기 그만하자던 분 아니세요?

일베 유물설 설파하시더니 박가 유물설로 갈아타셨나 왜 유물을 꺼내 이리 장황한 연재를 하시나 모르겠네요.
레벨이 낮아 가늠이 안됩니다 ㅋㅋ
     
공지사항 14-04-03 00:33
   
가생이에서 말과 행동이 다르기로 유명하시죠.
     
허큘러스 14-04-03 00:38
   
달리  닉네임이 와따리 가따리 이겠습니까?ㅋㅋㅋ 점점 증세가 심해지고 있지요.
엘더스 14-04-03 09:14
   
이님은 오리를 너무 많이 자셔서 어제한말? 그런거 모름
생각? 그런건 저너머에
독립군후손 14-04-03 12:46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독립군후손 14-04-03 12:46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견마(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血書)

'혈서(血書)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기사에 따르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라는 혈서를 써 편지에 동봉.

"‘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임.
확실히 하겠음. 목숨을 다해 충성(忠誠)을 다할 각오임.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日本)을 위해 어떤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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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3) 가생이 08-20 252106
공지 정게 운영원칙 Ver.2018.03.27 (1) 객님 12-03 829360
47577 4월 7일 JTBC뉴스개편 / 뉴스프로그램 확대강화 (6) 동천신사 04-03 537
47576 학생을 보는데 .너나잘해. 야유 (6) 닭먹는쥐 04-03 755
47575 뒤바뀐 여야 후보 (4) 부마항쟁 04-03 737
47574 ◇4대강 후폭풍 (17) 카프 04-03 2250
47573 경인운하 입찰담합..13개 대형 건설社에 과징금 991억 (7) 닭먹는쥐 04-03 1053
47572 가생상조 또다시 패드립....., (16) 허큘러스 04-03 2271
47571 워~~~워~~~워 ... 가생 상조 가동 되었군요. (13) 싱싱탱탱촉… 04-03 731
47570 [펌]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 (24) 알kelly 04-03 3902
47569 [펌]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 (6) 알kelly 04-03 1566
47568 [펌]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 (10) 알kelly 04-03 4639
47567 제이슨 한이 누군지 아십니까? (12) Boysh 04-02 822
47566 낮에 의료보험민영화때문에 댓글다셨던분이 다시볼진모… 쿼티 04-02 962
47565 가생상조 (21) ronial 04-02 990
47564 박근혜대통령 정당공천제폐지 거짓말영상 (6) 닭먹는쥐 04-02 875
47563 새누리 최경환이 이런게 원내대표란다. (6) 동천신사 04-02 730
47562 몇몇분들 지속적으로 신고를 해보았습니다. (4) Horn 04-02 928
47561 정몽준, 박정희 가옥 방문.. (6) 닭먹는쥐 04-02 862
47560 민선 20년 대구시장 '경북고 독식 깨지나 (2) 닭먹는쥐 04-02 744
47559 "대통령 6년·국회 양원제" 개헌안 등장..논란 예고 (18) 선구자 04-02 1522
47558 유럽 언론들 "국정원, 잘못 드러날 때마다 관심 돌려" (4) 아웃사이더 04-02 946
47557 아들 3명이 모두 범죄자인 핵중이의 대한민국 성공 방정… (5) 삼성동2 04-02 760
47556 경제적 약자계층의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증오는 피해망… (36) 삼성동2 04-02 951
47555 좌경 종북 하층민들이 박정희 대통령님의 가치를 멀 안… (1) 삼성동2 04-02 494
47554 의료보험의 시작, 박정희 (10) 겨울 04-02 1055
47553 윤여준, "새정치 나도몰라" 겨울 04-02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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