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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10 20:28
사실 박정희도 박정희지만......
 글쓴이 : 바쁜남자
조회 : 708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운 이승만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 사람이 비록 말년에 노욕에 찬 정치인이라는 오명으로 하야하고 외국에서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대한민국에 미친 긍정적인 면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름의 업적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광복전의 외교 노선에 대한 평가는 제하고 대한 민국의 건국과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씨 앗을 심고 반공을 국시로 삼아 냉전시대에 이기는 쪽에 우리나라가 설 수 있게 하여 지금의 발전된 나라를 얻게 한것.  일본과의 외교에서 독도를 가져온것.  미국의 육이오 참전을 이글어낸 것과 미국과의 조약 체결등등....
 
  나이 들어 그 사람에 대한 일화나 글들을 읽어 보니 인물은 인물이구나 하는생각이 듭니다.  장단점 공과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의 과만을 이야기하고 공에 대해 너무 인색하거나 무지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첫째, 이대통령은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박사의 투철한 자주독립정신과 소련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반공이념에 힘입어 이룩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관심도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로 설립된 유엔을 통해 소련과 협력하여 평화의 시대를 구축하려 했기 때문에 소련과 타협하여 한국을 신탁통치를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한반도에 공산위성국가를 세우려 했다. 국가건설의 전략전술 면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공산세력은 이념으로 무장된 지하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기존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선전 및 투쟁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적 국가건설은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주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 국가건설은 적극적, 조직적, 전투적이었지만 민주적 국가건설은 소극적, 비계획적, 평화적인 것이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강조하기만 했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대책을 갖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소련의 팽창정책을 우려한 처칠수상은 이미 1946년 초 “동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내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정식 교수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고 밝히고 있다. 소련군은 북한 점령 즉시 공산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1946년 2월에 설립한「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북한지역의 사실상의 정부였다. 김일성 주도하의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반대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조선공산당과 기타 추종세력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했으며 노동당의 각종 전위조직도 구축하여 북측지역을 완전 장악했다.
        그들은 강력한 공안기구를 설치하여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했으며 모든 은행과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들은 또한「북조선 중앙은행」창설, 토지개혁 등, 남북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1947년 2월에 이르러 그들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바꾸어 정부수립 절차를 사실상 완료했다. 인민위원회는 그해 말부터 군사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는 조선인민군을 공식 발족시켰다.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비밀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을 때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이미 결정했으며 남북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했고 김구 일행은 그들의 술책에 속아 평양으로 갔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란코프는 “남북협상이 있기 1주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평양에서 열릴 남북협상 문제를 논의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남한의 선거를 반대하고 선거 결과를 부정하며, 외국군 철수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구 일행이 아직도 평양에서 협상중인데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전체회의를 열고 북한의 헌법초안을 승인했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소집 등 정권 수립에 필요한 절차와 일정을 일일이 결정하여 김일성에게 지시했다.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정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과 김일성집단은 북측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를 거부함으로서 분단을 고착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북한에 공산기지를 건설하고 그 다음 남한을 공산화하려 했다. 따라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단독정권을 먼저 세운 것은 소련과 북한이었다.
        이승만박사의 민주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신탁통치가 되었거나 김구의 주장처럼 김일성과 타협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소위 진보세력들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며 김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는 반대했지만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했다면 신탁통치를 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 분명하다.
        2차대전 후 동유럽 국가에서 소련의 지령 하에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했지만 모두 공산화되고 말았다. 소련군이 점령한 나라치고 공산국가가 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소련은 한반도에 공산정부가 아닌 어떤 정부도 거부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밝혀지고 있다. 소련은 미국을 설득하여 한반도에 좌우익 연립정부를 세운 후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세력이 연립정부를 완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사는 가능한 한 빨리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부이었지 어떤 정부라도 세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으로 추진했던 신탁통치하의 좌우익 연립정부 수립계획에 대해 이승만 박사의 단호하고 끈질긴 반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둘째, 이 대통령은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건국의 사명을 완수했다. 
70대 중반의 망명객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이처럼 어려운 나라를 이어받았다. 건국 당시 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정치․행정적, 경제적 바탕은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고는 나라의 기초를 잡기 어려웠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서구 국가들의 식민통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잔인했다. 프랑스는 한반도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인도지나에 3천명의 공무원으로 통치했지만 일본은 한반도에 2개 사단의 주둔군 외에 5만 2천명의 공무원들을 두어 철저히 장악했고 한국인에게는 최소한의 자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70여만 명이나 와 살면서 금융과 산업의 90% 이상을 독점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8년 동안이나 일본제국의 대동아전쟁을 위해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했기 때문에 해방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파산상태였다.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자원과 공업시설은 대부분 북쪽에 있었다. 당시 북한은 전력의 96%를 생산했기 때문에 북에서 송전이 중단되면서 남한은 암흑천지가 되었고 몇 개 안되는 공장도 모두 멈추었다. 남한에는 인구의 3분의 2가 있었고 해외에서 3백만, 북쪽에서 백 50만 이상이 몰려오면서 인구는 갑자기 20%나 늘어나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입을 것조차 크게 부족했다.
        그리고 식민통치 기간 중 일본에 종속되었던 경제는 해방 후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경제는 완전붕괴 상태에 빠져 정부는 세금을 걷어 들일 것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재정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 정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건국당시 정부는 형식뿐이었고 경험을 가진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신생국가들의 국가건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지만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등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시련은 다른 어느 신생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이 대통령은 불굴의 정신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본으로 하는 현대국가의 제도를 구축하여 오늘의 한국이 있게 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식 모델을 받아들여 북한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민족의 3분의 1을 파멸과 절망에 빠뜨려 놓고 말았다. 중국에서만 지낸 김 구 선생은 서방세계와 현대국가를 잘 몰랐으며 당시 대부분의 지도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아닌 다른 지도자가 건국을 주도했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셋째, 이승만대통령은 단호한 반공정책으로 나라를 지켰다.
반공지도자로서 처칠과 장개석이 잘 알려져 있지만 처칠은 철의 장막을 경고했을 뿐 한국전쟁 당시 전쟁이 확대될까 우려하여 조속히 휴전하도록 트루먼에서 압력을 가했던 장본인이고 장개석은 국공합작으로 중국본토를 빼앗긴 역사의 죄인일 뿐이다. 한국은 분단되고 나라의 기초도 허약하여 공산주의를 막아내기가 더욱 어려운 처지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반공지도력으로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패망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공산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40년간 일본의 노예로서 고통 받아 온 우리민족이 또 다시 공산세력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공산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고집불통이며 비타협적이고 비민주적인 지도자라고 국제적으로 비난받았지만 이대통령의 예측대로 공산체제는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이승만박사는「독립정신」에서 러시아를 청나라와 다름없는 야만적인 후진국이지만 한반도에 대해 일본에 뒤지지 않은 야욕을 가진 위험한 나라로 경계했다. 러시아에 대한 그의 경각심은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반공사상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소련의 팽창야욕에 대한 그의 우려가 되살아났다.
        특히 1945년 여름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하여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이 박사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같은 정책을 쓰리라고 예견하고 절대로 소련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 관리들에게 역설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 스탈린 치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소련국민은 자유를 잃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며 고통 받고 있었고 2천만 이상이 처형되는 비참한 현실을 생생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시까지 1년 반 동안 공산세력의 공산화 책동으로 남한은 내전상태에 있어서 오늘의 이라크상황을 방불케 했다. 많은 지역이 낮에는 대한민국이었지만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공산세력은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제주 4.3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여수반란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당시 국민들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몰라 그들의 기만적인 선전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갔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긴박한 실정을 간과한 채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길이라는 막연한 주장을 했던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김일성정권에 대대적인 군사 경제적 지원을 했다. 더구나 미국은 이승만 정부도 장개석 정부처럼 공산세력에 패망하고 말 것으로 판단했으며 이 대통령을 “작은 장개석”이라 조롱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1948년과 1949년에 걸친 공산세력의 총공세를 국가보안법 제정, 토지개혁 등, 효과적인 반공정책으로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당시 동유럽에서 공산세력이 연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거대한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동남아지역에서 공산세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한국은 공산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았다. 그래서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기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넷째,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서적을 보면 6.25전쟁 중 대통령과 정부가 무었을 했는지 제대로 연구되고 기록된 것이 별로 없다. 미국 자료들을 보면 더욱 한심할 뿐이다. 이것은 미국의 전쟁이었을 뿐이고 한국의 역할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름이 한두 번 거론되고 있지만 휴전반대 등, 부정적인 시각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6.25전쟁은 민족사에서 최대의 비극이었다. 미국은 3만 여명이 전사했지만 한국군은 그 열배 이상인 32만 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민간인도 남한에서만 백 50만이상이 죽었으며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했다. 또한 전쟁 당시 전선의 3분의 2는 한국군이 담당했을 만큼 한국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정부는 무었을 했으며 국군은 어떻게 싸웠는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 하에서 뛰어난 전쟁지도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은 전혀 평가되지 않고 있다. 그는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미국인들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뛰어난 외교전략가였기 때문에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을 위시하여 미국 지도자들과 전쟁수행 문제를 긴밀히 협의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70대 중반의 고령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나이였다. 오늘날 고속도로가 발달되어 있고 대통령 전용 비행기와 헬리콥터도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활동은 여의치 못했습니다.
        전쟁당시 대통령의 전용비행기나 헬리콥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도로사정은 포장은커녕 차량이 다닐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 할 것 없이 모든 전선, 모든 부대들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기 때문에 장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은 부상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병원마다 찾아다녔고 피난민 천막촌, 고아원, 그리고 학생들의 배움의 현장을 찾아가 격려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전국의 철도, 항만, 공장, 학교, 마을을 일일이 돌아보고 격려했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전쟁 중 한국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석을 가진 야당은 전쟁 중인 1952년 헌법개정을 통해 이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인들은 강을 건너는 동안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2차대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4선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0년간 국회의원 선거도 중단하고 전쟁을 위해 국력을 결집했던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여 안보의 울타리를 튼튼히 했다.
한미방위조약의 쟁취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공산세력이 남한공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쉬웠을 것이다. 또한 과도한 국방비부담으로 국민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고 공산세력은 이를 부추겨 경제성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나라에 대해 미국은 원조조차 꺼려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조속히 휴전하겠다는 서방국가들의 조바심을 역이용하여 단독북진 주장과 반공포로석방 등으로 휴전회담을 반대하면서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방위조약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또는 소련과 정면충돌을 피하려 했으며 그래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수호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단코 한국과의 방위조약을 반대했다.
        이대통령의 휴전반대에 대해 트루먼, 아이젠하워, 처칠 등 서방 지도자들이 입을 모아 그를 비난했고 미국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려는 계획까지 수립했으며 세계 언론은 이 대통령을 정신이상자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결정적 국가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압력에 단호히 맞서 결국 방위조약을 쟁취했던 것이다. 그는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허약하고 어려운 지경에 처한 나라의 지도자였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전략과 정책까지 바꾸게 하면서 한미방위조약을 끝내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미 방위조약 서명이 끝난 후 이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우리 후손들은 대대로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이대통령의 예언대로 전개되었다. 이 조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안보는 언제나 위협받았을 것이며 월남처럼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과중한 안보부담으로 경제발전이 어려웠을 것이며 외국인들도 한국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미동맹이 있었기에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미국시장을 개방했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일수교도 불투명했고 일본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며 월남 참전으로 경제개발에 절실할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안보우산이 없이는 한국의 민주발전도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한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한국 안보와 번영과 자유의 초석이 되었다.
        휴전협정이 얼마나 위험하며 한미방위조약이 왜 중요했는가는 월남의 경우를 보면 분명한 것이다. 미국과 공산측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지 2년 만에 월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키신저는 평화조약을 맺은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미국은 이 조약을 빌미로 월남에서 철군했고 그래서 공산군은 마음 놓고 월남을 점령했던 것이다. 만약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없이 휴전협정이 채결되었더라면 한국은 월남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는 은둔의 왕국으로 국가안보를 중국에 의존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면서 주권을 지킬 수 없었다. 한반도는 세계 주요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곳으로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뛰어난 외교력 없이 나라의 안위와 이익을 수호할 수 어렵다. 따라서 외교적 역량은 한국의 대통령 자질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다행히 이 대통령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국제정세에 대한 남다른 혜안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건국과 6.25전쟁에서 놀라운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김구 선생을 위시한 당시 어떤 지도자도 결코 이 대통령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대통령은 ‘외교의 귀신’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가 그처럼 탁월한 외교전략가를 가졌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은 교육입국을 통해 국가발전의 핵심적 기초를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국민의 78%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이 대통령은 청년시절부터 나라가 쇠퇴하여 주권을 침탈당하게 된 것은 국민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스스로 신학문을 배웠으며 감옥에서도 글을 가르치고 신문에 논설을 쓰는 등 온갖 방법으로 국민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그의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철학은 하와이에서 한인계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하면서 씨를 뿌리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열악한 제반 여건에도 불구하고 6년제 의무교육을 채택하는 등 혁명적인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바닥난 국가재정에도 불구하고 수천 개의 교실을 새로 짓고 수만 명의 교사들을 양성해야 했으며 국사, 국어 등을 각급학교 교과서를 역사상 처음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교육예산이 국방치안비 다음으로 많았다는 것은 이 대통령이 교육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국민의 교육열은 불같이 타올라 전쟁 중 한 겨울에도 천막교실이나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했으며 군부대, 직장, 마을에서도 성인들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50년대 말에 이르러 국민 95%가 글을 읽게 되었고 신문을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았으며 그리하여 잘 교육된 국민은 급속한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혁명은 한국 민주화의 씨앗이었고 한강의 기적의 뿌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개발도상국과 한국의 차이는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분이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교육혁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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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지오 14-02-10 20:48
   
여기 게시판에서 일하는사람? 몇달전부터 하루도 안쉬고 날마다 어글끄는거 보니까 이사람은 직업으로 하는거 같은데..
     
강력살충제 14-02-10 20:56
   
불쌍한 사람입니다. 따뜻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14-02-10 21:01
   
그냥 내비둬요 시간을 써도 자기 시간이요 돈을써도 자기 돈인대
생각이잇어서 하는거 안입니까  시위할려고 악을 쓰는 사람도 잇는대 대화로 주장을펴며 하는것이 참 조은거
같은대요
저도 맹일 하다시피 하지만  우리모두 매일 하다시피 하지안나요 여기만 오지 안을 뿐이지
저일하는것도 땀과 노력 공부가 만이 필요합니다
KingKong 14-02-10 21:09
   
그 상황에 따른 사업가적인 판단과 처세술 하나는 인정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을 보면 인정도 관심도 못받는 이유가 보입니다.
준아부이 14-02-10 21:29
   
우리부친의 업적 4.19 에 참여하심..
     
돌돌잉 14-02-10 22:23
   
진정 애국자심니다.
걍노는님 14-02-10 23:50
   
이승만이 잘한것중에 대마도라인를 주장했다는거는 인정하지 허나 과오가있다면 친일을 끌어들렸다는거야 그거때문에 문제가 너무많아 그리고 이승만 이사람이 독립운동시절에 임시정부대통령자리에서 박탈당한거는 왜 말안함? 그리고 뭐땀시 박탈당했는지도 알아야되는거 아님?
sariel 14-02-11 08:39
   
첫째 북한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막상 이승만이 결정적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에 기여하거나
말씀대로 건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네요.
아무리 북한이 이래왔고 소련이 이래왔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라면
남이 못했고 환경이 위험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해주셔야죠.

둘째 또한 해방직후 일제시대때 일했던 공무원이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죠.
북한에 비해 남한이 자원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악조건이었고 때문에 당시에는 한동안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못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 이승만이 무엇을 했다는건가요.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당연히 무언가 달라졌겠죠.
하물며 대통령 이름이라도 다를테죠.

셋째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합니다.
반공정책이라고 하셧지만 정상인이라면 해방직후 서로 사상적인 대립과 대외적 영향에 의해 분단이 되었는데
당연히 서로를 경계하겠죠. 그리고 성공적인 반공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성공적인 반공정책은 아니었네요.
만약 진짜 성공이었다면 전쟁 초반에 그러한 결과가 발생을 했을까요.
다시말하면 당시 남한의 상황은 매우 악조건이었고 때문에 6.25를 이승만의 과오나 잘못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없죠.
헌데 반대로 이를 공로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넷째 정말 이승만의 전쟁지휘능력이 탁월했다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순식간에 밀렸을까요.
미국이 개입한 후 한국이 활약을 했다면 그건 미국의 지휘관의 능력이 좋은거죠.
이미 작통권이 미국에게 있는데 이걸 어떻게 이승만의 업적으로 인정할 수 있나요.

왠만한 이승만의 업적에 대한 논문이나 관련 서적은 수차례 봤지만 이렇게 근거가 부실한 주장은 처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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