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쟁 당시의 왜곡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왜곡은 신군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5.18항쟁이 발생하자마자 신군부는 항쟁을 불순세력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간주했고,
심지어 전국의 간첩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시위현장에 잠입해 광주시민을 선동하여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언론과 담화문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다.
1980년 당시 권력찬탈에 앞장섰던 신군부 인사들은 아직도 5.18민주화운동의 원인이 불순분자의 왜곡된
유언비어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광주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라며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들은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게 된 것”이라고 회고 했다.
(한겨례. 2011.8.11.)
그렇지만
노태우는 신군부와 보안사가 만들어낸 진짜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5.18민주화운동의 원인이라는 신군부세력의 주장은 일부 진실을 담고 있다. 5.18항쟁이
최초 전남대 정문 앞의 시위에서 시민적 항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신군부가 유포했던 유언비어는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고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시민들의 유언비어가 문제가 아니라 신군부와 계엄군이 퍼트린 유언비어가 문제였던 것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학살의 진실을 왜곡하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신군부의 유언비어가
5.18항쟁의 확산에 진정한 책임이 있다. 신군부가 광주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유언비어를 언론과 성명서를
통해 유포할 수 있었던 원천은 광주에서의 보안사 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군부의 유언비어 유포>
- 국방부 과거사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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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유언비어 유포 및 불온유인물 배포 실태]
광주사태와 관련 계엄사령관이 5월21일 담화문을 통해 밝혔지만 5월18일 수백명의 대학생에 의해 재개된
광주시내의 평화적 시위가 목포 화순 장성 나주 등지로 급속히 확대되어 폭도화된 엄청난 사태로 발전된 것은
첫째, 타 지역 불순 인물들이 대거 잠입하여 선동한 때문입니다.
5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조종한 김대중을 연행하자 김대중을
추종한 전국의 깡패와 학생소요을 주동했던 일부 대학생들이 광주로 잠입했는데 서울에서는
무려 2000명이 광주로 내려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 불순인물들은 광주 일원의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경상도 계엄군이 전라도 주민을 때려잡는다는 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경상도 차량이나 경상도 사람들이 경영하는 상점 기업등을 때려 부수고자 선동하고
앞장섰으며 데모 진압차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군인들이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하여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빠졌다며 금남로 일대가 피바다가 되었고 군인들이
여학생을 부라쟈까지 찢었다는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키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시위에 가담토록
협박까지 했습니다.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2000명이 광주로 내려갔다는 거짓말이
그대로 받아드려지던 때였다.
둘째, 금번 광주 사태를 적화 혁명으로 유도하려는 전국의 간첩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거
체모 현장에 잠입하여 파괴방화는 물론 방위산업체의 장갑차를 비롯한 각종 차량을 탈취토록
선동하고 이에 난동으로 비화 되었습니다.
이들 공산분자들은 유혈사태를 야기시켰음은 물론 간첩등 사상범들이 대거 수용되어있는 교도소 습격에
앞장섰고 목포, 화순 나주 등지로 나동이 파급되도록 선동해 놓고 대다수가 잠적 했겠으나 시위에
가담한 일부 광주시민이 진정을 되찾았을 때 까지 남아서 파괴와 방화를 선동한 자는 시민들에게
체포되었고 계엄 당국에 인계되어 현재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셋째, 소요사태가 광주부근 지방으로 확대된 것은 간첩들의 선동도 있었지만 광주에 잠입했던
지방의 불순인사들이 시위대를 이끌고 본고장으로 돌아가 충동질을 한데 기인되고 있습니다.
현재 지역 주민들의 사태 수습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소요사태는 상당히 진정되어 가고 있으나
지역대책 위원들과 외부에서 잠입한 폭도들 간에 자중지란이 야기될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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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서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신군부와 보안사는 광주항쟁이 발발하자 그 원인을 타지역
불순 인물들의 잠입, 이들의 지역감정 조장 유언비어 유포, 경상도 차량을 불태웠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전파, 심지어 간첩이 개입했다는 등의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근거도 없는 말 그대로의
유언비어를 조성하여 언론을 통해 유포시켰다. 이러한 유언비어 유포를 통해 신군부는 계엄군의 살인적인
진압과 신군부의 권력찬탈 시도에 대한 저항이라는 5.18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1980. 5. 25
1980년 당시 5.18항쟁에 대한 왜곡은 방송과 신문등 기성 언론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사실 언론을 통한 왜곡의 반복 재생산은 5.18민주화운동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광주사태” 혹은 “광주폭동”으로
국민들에게 기억되도록 만들었다. 미디어의 수용자들은 미디어에 반복적으로 토출될 경우 미디어가
설정한 프레임 내에서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군부와 언론을 통해 설정된 광주사태라는 프레임의
반복 노출은 미디어의 수용자들인 국민들이 5.18항쟁을 광주사태 혹은 광주폭동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이러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배경에는 5.18항쟁에 대한 신군부와 언론의 왜곡이
항쟁 기간에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항쟁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군부와 언론은
항쟁 기간은 물론 항쟁이 끝난 후에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 혹은 ‘광주폭동’으로 끊임없이 호명했다.
특히 언론은 신군부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의 조정을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다. 언론이 5.18항쟁을 왜곡했던 사례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광주의 상황을 ‘폐허’로 지칭했고(조선일보, 1980.5.25.),
경향신문은 ‘난동’으로(경향신문, 1980.5.22.), 동아일보는 광주시민들에게 ‘이성’을 찾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80.5.26.). 언론을 통해 유포된 신군부의 유언비는 5.18항쟁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조작하는 효과를 유발했다.
경향신문의 전두환 찬양기사 1980년 8월 19일
물론 언론은 신군부의 이른바 ‘보도지침’에 따른 불가피한 보도였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언론사는 특별한 저항노력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5.18항쟁에 대한 신군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왜곡을 증폭하는데 앞장섰을 뿐만아니라 전두환에 대한 개인적 찬양에도 열을 올렸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80년 5.18항쟁 당시 언론의 왜곡보도를 제외한다면, 1990년 중반까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담론의 주요 생산자는 신군부 인사의 개인적 발언이나 일부 보수언론의 근거를
확인하기 힘든 왜곡 보도에 국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컴퓨터 통신의 발달과 인터넷 대량 보급으로 인해
왜곡 담론의 생산은 신군부 세력이나 기성 보수언론에 국한되지 않고,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주류 언론의 경우 법적,윤리적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보도 내용에
제약이 따르지만, pc통신이나 인터넷 매체는 그러한 법적, 윤리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상식을 뛰어넘는 왜곡내용이 생산, 유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