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전두환이 하도 지럴을 떨어놔서 미국에서 돈 안빌려준다고
김대중 사면하라고 압박을 했겠습니까.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져야하는데 (북한에 맞서도록)
박정희 죽자마자 전대갈이 권력 차지하려고 독재를 해버리니 미국이 환장할 수밖에요.
|
‘아산중국포럼’ 미·중관계 세션에서 미·중관계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토론자들. 왼쪽부터 보니 글레이저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윌리엄 오버홀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애시센터 선임연구원, 판전창 중국개혁포럼 고급자문위원, 데이비드 샴보 조지워싱턴대 중국정책연구소장. 김연수 선임기자 |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여하셨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그건 아주 오래전, 30대 때의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전혀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그는 3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은 탓인지 말을 잠시 멈추며 생각에 잠겼다. 청년 시절 겪었던 미공개 일화를 언론에 공개하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해 판단을 하는 듯했는데 이내 말문을 다시 열었다. 이후부터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마치 구술을 하듯이 술술 얘기를 털어놨다.“1980년대초 나는 뉴욕 뱅커스 트러스트에서 개별국가 위기 대응팀을 운영했는데, 당시 우리 은행은 한국의 모든 은행들에 차관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리스크 분석팀장이었는데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 방한해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의 측근인사들과 한국의 재야 기독교인사들을 만나 광주의 상황 전반에 대한 보고서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군부집권세력은 한국은행측 인사를 보내 뉴욕의 은행들에서 차관을 빌리려 했고 뱅커스 트러스트 측에서는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결정을 유보했습니다. 뱅커스 트러스트의 내 보스인 데이비드 사이스는 한국이 불안정해지면 차관을 빌려주더라도 회수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90일간 한국에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한국 측에서는 김경원(1936∼2012·전 주미대사), 김세진(1933∼1984·전 뉴욕총영사) 등으로 구성된 협상팀을 파견하며 재차 차관 공여를 압박했습니다. 이들과 마지막 회의 때 나는 두 사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 은행과 뉴욕의 다른 은행들은 김대중이 사형선고인 상태에서는 차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이 사형선고 상태에 있는 한 한국에서는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될 것이고 이 경우 우리의 차관을 갚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세진은 청와대 안보팀 소속이었는데 편지를 번역해 전두환에게 직보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잘못될 경우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정면돌파를 시도한 셈이었고, 전두환은 곧바로 김세진을 몇 단계 승진시켜 뉴욕총영사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뉴욕 도착 후 우리 은행에 와서 “전두환이 김대중 사면을 개인적으로 약속했지만 한국정부는 아직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어렵다”면서 “김대중은 사형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후 그는 전두환의 개인적 특사로서 활동하면서 한·미 정상회담을 비공식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뉴욕의 은행들은 한국에 대한 차관을 결정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김대중의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김대중의 사면은 뉴욕은행들의 차관거부에서부터 실마리가 풀린 셈입니다.”오버홀트가 털어놓은 김대중 사면 비화는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