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이후 요서 지역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쇠퇴하고 요서 지역의 문화가 [요하 동쪽 지역과 한반도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요서 지역의 많은 세력들이 요하 동쪽과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서도 제가 생각하기에 고고학이라는 건 본래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없으며..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명】 조선(朝鮮) 동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사기(史記)》 주(注)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
간이집 제1권 상량문(上梁文) 평양부(平壤府) 문묘(文廟)의 상량문
예나 이제나 어느 통존(通尊)을 막론하고, 난리를 당한 시대에 하루라도 편안했던 날이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옛 사당 건물을 새 건물로 바꿔 더욱 길이 모시려고 시작한 공사가 마무리되기까지 어언 십 년의 세월을 또 기다려야만 하였다. 이제 무지개 같은 들보를 올리게 되매 환호성이 연하(燕廈)를 진동시키고 있다.
삼가 생각건대, 거룩하신 우리 부자(夫子)께서는 상천(上天)의 성(誠)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분이시다. 충서(忠恕)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신 것을 증삼(曾參)이 듣고서 계합(契合)했고, 요순(堯舜)보다도 훨씬 훌륭하시다는 것을 재아(宰我)가 보고서 깨달았었다. 그 당시에 드높은 지위에 오르시지는 못하였으나,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위로 만승 천자(萬乘天子) 자신이 무릎을 꿇고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가 하면, 구주(九州) 어느 곳이나 묘궁(廟宮)을 세워서 제향을 모시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복(外服)에 속한 나라들도 모두 중화(中華)의 전범(典範)을 준행하게 되었는데, 인현(仁賢)께서 교화를 끼치신 우리나라를 능가하는 나라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우리 서경(西京)으로 말하면, 동쪽의 노(魯)나라 지역과 근접해 있어(而西京近東魯) 아무런 막힘이 없이 그곳의 산해(山海)가 그대로 바라다 보이는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일찍이 거이하루(居夷何陋)의 말씀을 하신 일이 있고 보면 이 역시 석전필합(釋奠必合)의 행사를 펼치기에 합당한 곳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本府)에서 문묘의 제향을 합당하게 거행하는 것을 본조(本朝)에서도 특히 중시하며 뜻 깊게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위의 기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의 저작인 간이집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조선의 평양부(平壤府) 문묘(文廟)의 상량문에 관한 기록인데 위의 기록에서 저자는 우리 서경(西京) 즉 조선의 서경 다시말해서 조선의 평양의 동쪽이 노(魯)나라 지역과 근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주 황당한 기록 입니다. 현재의 한반도 사관에서 보면 있을수 없는 기록 입니다. 현재의 평양의 동쪽이라면 함경도? 혹은 동해(東海)지역이 노(魯)나라 지역 입니까?
이를 다시 역으로 해서, 현재의 중공대륙 관점에서 고대 춘추열국 시대라는 현황에서 보면,노(魯)나라 지역의 서쪽은 주(周)나라 지역이며 주(周)는 호경(鎬京) 지역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평양의 별칭 중에 호경(鎬京)이 있으며 간이집에서는 조선의 서경 즉 평양의 동쪽이 노(魯)나라 지역이라 하므로 조선의 서경인 평양은 고대의 주(周)의 지명과 동일한 지명이며 동일한 강역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다음의 기록을 보면,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유관(柳寬)
○ 태조(太祖)가 서울을 옮길 때 유관이 서울을 설치하는 법을 상소하면서, “옛부터 제왕(帝王)의 서울은 형세가 넓어야 백성들을 안정시켜 거주하게 할 수 있고, 뱃길이 통하여야 조세를 운반하여 올 수 있고, 거리가 일정하여야 사방을 다스리기 쉽고, 땅이 높아야 광활하여 수재(水災)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좋은 곳이라 할 수 없습니다. 송도(松都)는 주(周) 나라의 호경(鎬京 주(周) 무왕(武王)이 처음으로 연 도읍)과 같으며, 한양(漢陽)은 주 나라의 낙양(洛陽)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서울로 삼을 만한 곳은 오직 송도와 한양이 가장 좋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한양(漢陽)으로 정하였다. 〈행장(行狀)〉
(我太祖將移都。柳寬上章論立都之法。自古帝王所都。形勢寬廣。可以奠民居。舟楫通達。可以運租粟。道里相均。可以御四方。土地高爽。可以避水災。四者不備。不可謂之善也。松都卽周之鎬京。漢都卽周之洛陽也。我國可都之地。惟松都與漢陽。善之善也。太祖遂定于漢陽)
위의 기록을 보면 "송도(松都)는 주(周) 나라의 호경(鎬京 주(周) 무왕(武王)이 처음으로 연 도읍)과 같으며, 한양(漢陽)은 주 나라의 낙양(洛陽)과 같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 해당되는 원문을 보면,"松都卽周之鎬京。漢都卽周之洛陽也。" 입니다. 이를 다시 번역해 보면 (송도는 곧 주의 호경이며 한도는 곧 주의 낙양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수도인 송도 즉 개경이 주의 호경지역이었으며 조선의 수도인 한도 즉 한양이 주의 낙양지역 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의 간이집의 기록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다음의 기록을 또 봅시다.
밑에 누가 세종대왕도 식민주의자느냐 라는 글을 올려서 그럼 조선시대의 평양이 어디인지의 기록을 적은 글을 펌 합니다.
누가 봐도 지금의 평양이 조선시대의 평양이 아님을 알 수 있죠. 대륙 조선설 다른게 아닙니다. 기록에 있는데로 하자는 것 이에요.
기록에 있는데로 하자고요. 이게 틀린 말 인가요? 이 대륙 조선설과 대륙 고려설에 따르면 지명의 위치가 완전히 변한단 말입니다. 현재의 지명은 구 한말 또는 일제시대 때 변한 지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논의대는 내용은 학설이 점차 진척 됨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된단 말입니다.
대륙조선설이 시작된 기점은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쳐박혀 있는 이유를 알고자 했던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 입니다. 북관대첩비는 누구라도 알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치고 세운 함경도에 세운 전승비 입니다. 이 전승비가 러일 전쟁시에 일본군 장교가 전리품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가져온 것이란 말이죠.
러일전쟁 때 러시아 군과 일본군이 싸운 곳은 대련 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관 대첩비는 대련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80%는 높죠. 그리고 북관대첩비는 함경도에 세워진 전승비 이고요. 바로 여기서 기록을 확인해 보자 해서 시작 된 것이 대륙 조선설이란 말입니다.
기자조선 = 상나라 출신 동이족계며 즉 도래계통 = 한국인 아님(진시황 이후 동이족은 다른개념)
부왕 = 기자조선왕
준왕 = 부왕의 아들 준왕은 위만에 밀려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로 남하합니다
이때 삼한의 왕이라고 자처 했는데 결국 삼한의 왕이 되지못하고 토착계 마한에 패하여 살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