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평양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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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평양부
평양부(平壤府)
윤(尹) 1인,【관찰사(觀察使)로 겸하게 한다.】 소윤(少尹) 1인,【중익 단련 부사(中翼團鍊副使)를 겸한다.】 판관(判官) 1인,【중익 단련 판관(中翼團鍊判官)을 겸한다.】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역학 교수관(譯學敎授官) 1인.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정미【유송(劉宋) 태종(太宗) 원가(元嘉) 4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으로 이도(移都)하였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총장(摠章) 원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장수 이적(李勣)을 보내어 왕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나라가 멸망되고 신라에 통합되었다. 고려 태조 원년 무인【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4년.】에 평양이 황폐되어 있으므로, 염주(鹽州)·배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그 땅을 실(實)하게 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삼았는데, 광종(光宗) 11년 경신【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에 서도(西都)로 고치고, 목종(穆宗) 원년 무술【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원년.】에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다가, 문종(文宗) 16년 임인【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고쳐서 경기(京畿)의 4도(道)를 두었고, 숙종(肅宗) 7년 임오【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에 문무반(文武班) 및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仁宗) 13년 을묘【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여,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岊嶺道)를 끊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모든 관료(官僚)를 두고, 그 군사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니,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 등을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평(討平)하고,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分司)·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또 경기(京畿)의 4도(道)를 삭제하였다. 원종(元宗) 10년 기사【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에 서북면 병마사 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亂)을 일으키어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을 가지고 몽고(蒙古)에 붙으니, 원(元)나라에서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관리를 두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원나라 지원(至元) 27년.】에 원나라에서 서경과 여러 성(城)을 도로 우리 나라에 돌려주었으므로, 다시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명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에 만호부(萬戶府)를 서경에 두고, 좌익(左翼)·우익(右翼)·전군(前軍)·후군(後軍)·정예(精銳)·정의(精毅)·충의(忠義)·충성(忠誠)·신첨(新僉)·신성(新成) 등 10군(軍)을 두어, 각기 상·부천호(上副千戶)를 두었다가,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인물(人物)은 영도첨의부사 평양군 정숙공(領都僉議府事平壤君貞肅公) 조인규(趙仁規)【고려 충렬왕 때 사람.】와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문충공(領議政府事平壤府院君文忠公) 조준(趙浚)이다.【인규(仁規)의 증손(曾孫)인데,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평양 조씨.
여기서 보면 분명히 한나라 무제가 평양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한 걸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