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6-04-07 14:46
[한국사] 패수관련.jpg 아래 정리~!!
 글쓴이 : 젤리팝
조회 : 3,509  

패수 관련.jpg

여튼 환빠 아니고 사실관련해서만 적어봤으니깐
 
태클 걸지 마시길~!!
 
패수 근처에 갈석산이 있다고 아래 기사에 나와서
 
사진 첨부함 갈석산위치~!!
 
ps. 그리고 고조선 강역에 설치한 한사군을 고구려가 다시 먹었기 때문에
 
고조선 강역을 가지고 온거임~!!
 
여튼 우리모두 현자타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doradora 16-04-07 15:39
   
환빠 아니면 식민지빠...
촐라롱콘 16-04-07 15:54
   
현 중국 하북성지역으로 비정하는 낙랑군 수성현 위치 관련 학설을 반박하자면....

중국 한~수당 시기의 중국의 지방행정구역 존폐에 관한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보아....
한반도서북부에 위치한 낙랑군을 고구려가 멸망시켜 낙랑의 실체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낙랑이라는
행정구역명칭을 완전히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명칭은 중국내지로 옮겨 이치시켰다는 것이
주류학계의 유력한 학설입니다.

현 중국 하북성 갈석산 일대가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것은 실제 낙랑이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뒤
중국 내지에 이치된 낙랑행정구역 명칭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낙랑이 현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비정한다면
현재까지 연구되고 발굴된 한국-중국-북방민족 관련 수많은 역사학적-고고학적 발굴성과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랑이 중국 하북성에 위치했다면 멀고먼 한반도내의 고구려-옥저-동예-삼한지역에 대해
비교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의 논리적인 설명자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더구나 변한은 물론 바다건너 일본지역과의 교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낙랑이 한반도서북부에 위치했다면 어느 정도 납득가능했던 사항들이 말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3~5세기 당시 고구려와 아웅다웅했던 모용선비족의 근거지인
요서일대에서 발굴된 모용 선비족관련 유물유적에 대한 연구성과가 모두 엉터리가 됩니다.

모용선비족은 사서에서 모두 고구려국경 서쪽 또는 서북쪽 방면에서 고구려와 티격태격한 집단인데
고구려영역이 중국 하북성일대까지 이르렀다면 하북성보다 휠씬 동쪽인 요서지역이 근거지였던 모용선비족의 존재는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요?

더욱 자세히 따지면 고구려 영역안에 전연-후연 등의 5호16국 시기의 모용선비족이 세운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젤리팝 16-04-07 16:18
   
모용 선비족에 대해 말하자면 원래 있던

고구려땅에서 아웅다웅한게 맞아여

나중에 광개토왕 장수왕때에 찌그러지지만

영토가 고정된게 아니고

축소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니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함~!!

그리고 난 정설 지지자임~!!

여러 설에대해서 생각해보자는거지요~!!

그리고 요서일대 모용선비족이

부여족과 연관된 일족이란 이야기도 얼핏 들은거 같기도 하고~!!
          
촐라롱콘 16-04-07 17:13
   
모용선비와 부여관련 부분은.....

모용선비족에 의해 부여가 오랜기간에 걸쳐 침탈을 받아
이전의 고구려와 읍루 등 주변집단들을 압도했던 영화는 사라지고
(최종적으로 이후 동부여를 비롯한 부여잔존세력은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지만..)

부여왕과 왕족을 포함한 수많은 부여인들이 모용선비의 포로가 되어
전연 등 모용선비족이 세운 국가 내에서 요서일대 등지로 끌려가 집단을 이루어
정착합니다.

개중에 부여왕족들은 모용선비에게 중용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들 가운데 지도자가 나타나 부여출신집단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모용선비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할 정도의 큰 변란이었습니다.
뭐 조선시대로 치자면 이괄의 난과 버금갈 정도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는......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기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 또한 대외적으로는 [부여]라는 칭호를 널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백제의 요서진출설입니다.

본거지가 원래 송화강유역의 만주였던 부여출신들이 요서지역을 전란에 휩싸이게 만든 커다란 반란이
특히 요서나 북중국일대와 거리가 먼 양자강 근처의 남조(정확히는 양나라)의
역사가들에게.....

엉뚱하게도 [부여]라는 같은 명칭을 공유하는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와 혼동을 일으켜,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내용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구체적인 인물명과 국가명은 많은 부분에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합니다)
               
꼬마러브 16-04-07 17:46
   
송서와 양서에서 백제의 요서진출에 관한 근거가 서로 일치합니다. 둘 다 중국의 정사로 인정받는 책입니다. 이 두책 모두 다 오류가 있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것의 근거가 있습니까? 역사는 추리게임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사서의 한글자라도 꼼꼼히 검증하고 실증해야합니다. 증거를 대십시오.
아니면 그쪽은 실증사학이 아닌 소설사학을 하시나요??
                    
촐라롱콘 16-04-07 18:28
   
송서와 양서는 요서지역과는 동떨어진 양자강 유역의 남조계통 국가들의 정사서이고....
당연히 요서지역의 변동상황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들은 부분을 기록한 것일 것이며...
송서와 양서의 근거가 일치하는 것은 그 내용에 관해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이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며.......

송서-양서가 정말로 일체의 오류가 없는 중국의 정사서로 인정받는다고 주장하시신다면

삼국사기, 일본서기, 비슷한 시기의 중국의 여타 역사서들 또한 일체의 오류가 없다고 인정하신다는 건지~

아니면 한민족 관련 국가들의 영역확장측면에서 가장 넓게 서술된 역사서만을 취사선택해서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건지~~~

예를 들어 이 글 아래 부분에 꼬마러브님이 답글로 주장하신 바로는 한반도서북부의 낙랑유민들이 육로로나 해로로나 요서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셨는데..

낙랑유민들의 한반도서북부에서 요서지역으로의 이동은 어렵다 하시면서,
낙랑보다 남쪽인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백제의 요서진출설은 별 비판없이 받아들이시는군요!
낙랑-요서 구간보다 백제-요서 구간이 거리상 휠씬 먼 구간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낙랑 당시의 고구려는 수군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낙랑유민들의 요서지역 이동을 어렵다고 하셨는데

낙랑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인 백제의 요서진출설과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는 이미 일정정도 수군력도 지니고 있어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함에 있어 반드시 고구려연안을 지나게 되어 있는데 고구려수군의 제지는 어떻게 극복하고 요서로 진출했을까요???
                         
꼬마러브 16-04-08 00:42
   
송서와 양서를 제대로 보신 것이 맞으신지요? 송서와 양서에는 공통적으로 이런 구절이 들어갑니다.
고구려와 백제 모두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여 다스렸다.. (한자 원문은 직접 찾아보시길 ^^)
저는 이것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연합을 해 요동과 요서를 나눠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한사군을 요서로 비정했을 때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또한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관계였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댓글로 쓰기에는 양이 많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을 쓰겠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요서진출이 가능합니다.
또한 중국 기록에 나오는 백제가 실제 백제가 아니라 부여라고 주장하시는데?
자치통감의 기록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거주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한자 원문은 직접 찾아보길 부탁드립니다 ^^ 아니면 나중에 글쓸 때 추가해서 쓰도록하죠)

이 기록 역시 백제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내용의 기록인데요. 특히 이는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으므로 님 말대로 부여를 백제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말 역시 말이 안되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실건가요??
또한 백제 대륙진출의 근거로 사용되는 사서기록은 송서와 양제뿐만이 아닐텐데요?
                    
촐라롱콘 16-04-08 09:39
   
이제는 백제가 아예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을 하시는군요!^^

한강 유역을 비롯하여 충청 호남지역인 공주,부여, 익산에서 발굴된
왕릉을 비롯한 유적과 수많은 유물들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그리고 요서를 비롯한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활약한, 또한 님의 말씀대로 사서에
표현한대로 북위의 수 십만 기병을 물리칠만큼 당시 중국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넘사벽으로 강력했을 백제가.......

어찌 고구려 장수왕의 고작 3만대군에게 탈탈 털려 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고
수도를 빼앗기고 영토는 절반으로 축소되는 등 왕조 전체의 존립이 무너질만큼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던 것일까요????
                         
꼬마러브 16-04-08 15:47
   
저는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을 한적이 없습니다만...;;;;;
아 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칠 수 있겠네요; 허..어이가 없어서
백제가 한반도에만 짱박혀있었다면 불가능한 기록이라는 뜻이였습니다
당신과는 사료 내용을 주고받을 정도의 토론을 할 가치가 없어보이는군요.
말꼬리잡는게 그대가 말하는 역사학의 모습인지요?
     
젤리팝 16-04-07 16:44
   
후연(後燕, 384년 ~ 407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연(燕)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두 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 후연은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운(高雲)이 왕위를 찬탈하고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을 세우면서 멸망하였다.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수는 이를 기회로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나 하북의 업(鄴)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낙양(洛陽) 근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위해 출진하였다. 성을 나선 모용수는 감시를 위해 수행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았으며 적빈의 군대도 흡수하였다.
 
384년 정월에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苻丕)가 지키는 업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하북성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385년에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 6월에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후연의 모용수가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에 진주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고구려의 군대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1월에 후연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 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이렇게 서로 차지했다가 뺐었다 했던 모양이네요~!!
     
꼬마러브 16-04-07 17:37
   
1. 한반도서북부에 위치한 낙랑군을 중국내지로 이치시켰다는 내용의 사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최소한 주장을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됩니다. 근거가 없고 주장만 한다면 그저 소설이죠. 한사군이치설은 근거가 없는 소설입니다.  굳이 이치설과 비슷한 내용의 사서내용을 찾는다면 자치통감의 기록이 있습니다.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為之置樂浪郡, 以統為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리(미천태왕)와 서로 싸워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더니,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민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어떤 학자들은 장통과 왕준이 고구려를 피해 1000여가를 이끌고 모용선비의 모용외에게 귀부하였고 모용외가 낙랑군을 요서에 이치시켰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낙랑군이 있었다는 평양과 요서 사이에는 고구려가 있기 때문에 육로로 이동할 수 없으며 배로 이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이 기록에서 배로 이동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생략됐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0여가면 1가에 5인가족이라고 쳐도 5000명입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대가족단위였기 때문에 10인가족이라 하면 10000명이 됩니다.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5000~10000명을 태울 배와 식량을 들고 요서에 있는 모용외에게 투항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또한 애초에 낙랑이 있었다는 평양에서는 요서보다는 같은 한(漢)족이 살고있는 산동반도가 훨씬 더 가깝습니다. 뭐하러 서로 다른민족이면서 가기도 힘든 모용외에게 투항한단 말입니까?
이는 낙랑군이 모용외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육로로 가는 것은 말이 안되고 해로로 가는 것 또한 말이 안됩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연안항해였기 때문에 해로로 간다 쳐도 그 1000여가나 되는 대규모 선박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간다는 것 또한 말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간혹 가다가 낙랑과 중국 사이에는 서안평이 있어서 육로로 이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안평은 서기 311년에 고구려의 미천왕이 점령했습니다. 낙랑군이 망하기 2년 전이죠. 그러므로 낙랑의 유민들은 서안평을 거쳐서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쪽이 도대체 근거도 없는 한사군이치설을 주장하는지 모르겠고 가장 근거?라고 볼 수도 있는 근거 또한 말이 안됩니다.
무슨 근거로 한사군이치설을 주장하시나요????
          
촐라롱콘 16-04-07 18:36
   
고구려가 낙랑멸망 시키기 이전에 현재 압록강 대안인 안동 인근으로 추정되는
서안평을 장악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시기에는 아직 요동반도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만.......

요동반도 일대 전체를 아직 고구려가 장악하지 못했다면 낙랑의 잔존 유민들이
요서지역으로 탈출할 통로는 어느정도 존재할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리고 해로탈출을 가정할 시 1만명 정도 단위의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하셨는데,
물론 1만여 명이 일시적으로 탈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약간의 시차가
존재한다면 그리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봅니다.

백제 멸망 후 일본지역으로 망명한 백제유민도 수 만 정도로 추산되는 마당에(물론 수 만명이 일시적으로 망명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탈출할 당시야 팔자좋게 유람하는 상황이 아니니 비교적 적은 배에도 수 십명 단위로, 더욱 큰 배라면 100~200명 정도는 최대한 쑤셔서 구겨넣어 탈출했을 것이니....
대소 선박이 수십척~100척 정도 남아있었다면 1만명 정도는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옵니다!
               
카노 16-04-07 21:26
   
촐라롱톤// 서안평이 무슨 압록강 단동입니까?
최소한 요하부근입니다.
요사지리지는 요서 파림좌기 부근이라고도 하고요.
그리고 일찍이 양자강 부근의 오나라와도 사신을 주고받고 통교한 고구려가 그때까지도 요동반도는 고사하고 한반도 서해지역도 확보하지 못했다라? 역사가 아니라 소설을 쓰시는군요.
그리고 사서에도 안나오는 배로 탈출했다는 소설을 쓰시는데 상식적으로 평양의 낙랑군 유민이 미쳤다고 요서 지역의 이민족인 선비족 모용외한테 갑니까?
꼬마러브님말씀대로 산동반도가 훨씬 가깝고 같은 한족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단하나 낙랑군하고 요서지역의 모용외 모용선비가 가깝기 때문이죠, 지극히 상식적이고 간단한 문제아닙니까?
               
꼬마러브 16-04-08 01:00
   
서안평을 점령하였는데 그것이 요동반도 전체를 장악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의 근거가 뭡니까?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0년(서기 236) 봄 2월,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네이버 지식백과] 동천왕 [東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만약 님의 말대로 고구려가 서해안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오나라와 사신은 어떻게 주고받았다는 겁니까?

그리고 저 또한 서안평의 위치가 단동이라는 것은 매우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서안평이 단동에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볼 수 있을련지요?
(애초에 당시 고구려가 오나라와 사신을 주고 받았다는 것으로 서안평의 위치가 압록강 일대가 아니라는 거 아닌가?)
아니 그리고 님아 한사군 이치설의 근거는 어디있습니까?
                    
촐라롱콘 16-04-08 09:28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그냥 폼으로 있는 모양이군요!^^

고구려가 오나라와 통교할때는 요동에 근거지를 둔 공손씨를 매개로 하여
오나라와 서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공손씨가 요동에 정착하고 나서 한때 한나라말기의 혼란으로 인해
중국본토의 통제가 느슨해졌던 낙랑을 비롯한 한반도북부지역을
공손씨정권이 들어서면서 위나라를 대신하여 일시적이나마 통제를
더욱 옥죄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공손씨가 위나라와 총돌하여 멸망당하고부터는 공손씨가 아닌 위나라가 직접
한반도북부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구요......
이러한 배경 때문에 동천왕시기 고구려가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 충돌하여
관구검이 쳐들어 온 것 아닌가요?
                         
호랭이해 16-04-08 10:19
   
공손씨와는 한창 사이 나빴을때 아닌가요?
공손씨가 뒤에서 반란 지원해주고 난리 났던걸로 기억하는데..
                         
꼬마러브 16-04-08 16:04
   
에휴 이제 무식한 것까지 티내시나요?? 당시 공손씨는 오나라의 사신의 목을 잘라서 위나라에 보낼만큼 오나라와는 사이가 안좋은 상황입니다. 설명들어가면

공손씨는 위나라가 점점 커짐을 두려워해 오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오나라 또한 위나라를 견제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 공손씨가 생각을 바꿔 오나라의 사신의 목을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공손씨에서 도망쳐 온 오나라 사신의 일부가 고구려에 도착하여 말하길
"오나라의 황제가 고구려의 대왕께 공물을 올렸는데 공손씨한테 뺏김 ㅠㅠ" (거짓말 ㅎ)

고구려의 동천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는다

이를 들은 위나라는 좀 압박감을 느꼈는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는다

그 후 오나라에서 고구려로 사신을 보냈으나 고구려에서 사신의 목을베어 위나라로 보냄

이 후 ---------------------------------------------
고구려와 위나라가 서로 공손씨를 협공하여 땅을 나눠먹기로 하였음
->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공손씨의 땅을 다 먹어버림

고구려 동천왕이 격분하여 서안평 점령
-> 위나라가 이에 대응에 유주자사 관구검 출동 ㄱㄱ

이런 상황에 공손씨로 하여금 오나라와 고구려가 소통하였다는건 무슨소리???
                         
카노 16-04-08 16:38
   
촐라롱콘// 공손씨가 고구려를 도와서 오나라와 통교시켜줬다는 근거는 뭡니까?
그리고 관구검이 쳐들어온 배경은 꼬마러브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줬는데 그게 팩트지 무슨 궤변입니까?
이분은 역사를 망상이나 소설로 생각하시는 듯
     
Marauder 16-04-07 19:04
   
영토야 늘었다 줄었다 할수도 있는것이고 그냥 증거보다 권위에 기대는 말을 하시네요. 그리고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그거야말로 고구려에 영향을 미치기에 이상한 위치 아닙니까?
밥밥c 16-04-07 17:49
   
본래 이전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낙랑을 요서지방으로 볼 수 있는 정사의 기록은 있지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  현재 하북성 북경근방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가지 밖에 주장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이치, 또는 교치라고 하죠.
     
꼬마러브 16-04-07 17:52
   
맞습니다. 상식적으로
한사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 주장을 해야된다. 그러면 한사군이 요서에 있다는 기록으로 인해 오류가 생긴다
= 이치설
-(이치되었다는 기록 역시 없다)
그대들은 실증사학자라고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단지 소설가이지요~~
재판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증거 아닙니까?
증거를 대십시오 여러분들 증거를
밥밥c 16-04-07 18:14
   
게다가 낙랑군 수성현의 지명은 현재 한반도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명이 있는 지역지는 하북성 지역지입니다.

 하북성 지역지에 수성현은 현재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그에 대한 기사입니다.

 하북성 서수현에는 ‘낙랑군 수성현’과 동일한 이름의 수성진이 있고, 갈석산으로 이름이 변경된 것으로 보이는 백석산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여겨지는 연나라의 고장성 유적이 있다. ‘서수현지’에 “연나라 옛 장성이 수성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통일천하를 이룩한 다음 전국시대 7국의 장성들을 연결시켜 쌓은 것이다. 따라서 가장 동쪽에 있었던 연나라 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국시기에 편간된 ‘서수현지 고적’조항에도 “옛 장성이 서수현의 서북쪽 25리에 있다. 예로부터 진시황이 장수 몽념을 무수(武遂)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무수는 ‘수성’의 전국시대 지명이다.

  진나라 ‘태강지리지’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거기서 장성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군의 위치는 오늘날 북경 남쪽에 있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이다.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8998
 
 
Total 5,27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47 [한국사] 조선은 보호국, 속국!? (24) 득운 04-14 2378
146 [한국사] 조공무역은 조공이고 근대적 속국이 아닌 속국도 속… (73) 수학 04-13 1911
145 [한국사] 어그로가 풍년인데 (51) 카노 04-13 2323
144 [한국사] 중국은 과거 세계최강국이라니까 토다는 인간들에게 (40) 상식2 04-13 2769
143 [한국사] 제가 밑에글 요약한게 맞나좀 봐주세요 (24) Marauder 04-13 1559
142 [한국사] 조공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2 (114) 수학 04-13 2035
141 [한국사] 조공을 미화할 필요없습니다 (60) 수학 04-13 2480
140 [한국사] 단군조선, 러시아가 부활시키다 (5) 마음울림 04-13 3209
139 [한국사] 광개토태왕 비문 해석 而倭以辛卯年 (19) 양원장 04-12 2864
138 [한국사] 레알 진지합니다. 몰라서 질문하는 겁니다.. (84) 에치고의용 04-12 2714
137 [한국사] 사신도보면 왜국사신은 신발도 안신고있는데... (20) 이궁놀레라 04-12 3176
136 [한국사] 칠지도 연대 문제 (6) 룰루랄아 04-12 2566
135 [한국사] 칠지도,백제,일본 그리고 가야. (264) 득운 04-11 2901
134 [한국사] 한글의 기원, 춘추전국 연나라에 대한 질문 (14) 아스카라스 04-11 2839
133 [한국사] 낙랑국과 낙랑군, 그리고 한사군의 실체 (3) 스리랑 04-11 4135
132 [한국사] 실제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는 컸고 고려는 그리 작… (2) 보조도조도 04-11 2460
131 [한국사] 제 나이 22살, 주변을 둘러보면 국까만이 넘쳐납니다 (25) 아스카라스 04-11 2277
130 [한국사] 조선 화폐 질문요. (10) 솔루나 04-11 1898
129 [한국사] 조선이 신하국이었던 것 인정합니다. (14) 솔루나 04-10 2947
128 [한국사] 명 청에 대한 조공 (30) 룰루랄아 04-10 2512
127 [한국사] 고려와 조선인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증거 (13) 나치 04-10 4090
126 [한국사] 한국인들의 모순성 (9) 나치 04-10 2447
125 [한국사] 조선은 중국의 영원한 속국 (10) 나치 04-10 4371
124 [한국사] 한국은 중국의 속국 (5) 나치 04-10 4015
123 [한국사] 일본인 선조는 조몬인이고 (2) 보조도조도 04-10 2400
122 [한국사] 지도보다가 260년대에 평양까지 위진한에 점령된것을… (13) Marauder 04-08 3601
121 [한국사] 가생이 외에는 대부분 패수 요서설에 부정적이더군… (8) Marauder 04-07 2975
 <  191  192  193  194  195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