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친일행적==
김지태는 일제시대에도 그 상당한 재력을 유지한 부산토호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는데 어찌된 사연인지 20세인1927년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를
졸업하고 곧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김지태의 이런 동척 생활은 1932년 5년여 만에 끝났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폐결핵에 걸려 회사를 그만두자
일본인인 동양척식 부산지점장이 그를 얼마나 어여삐 여기고 신뢰하였는지
동경본사에까지 타협해가며 울산에 있는 2만 평의 농토를 아주 후한 조건에
불하해 주었다고 하였다.
김지태는 훗날 당시의 상황에서 조선인에 대한 이러한 조치는 전후무후한 큰 특혜였다고
회고하였고 3년의 농장운영 노력 끝에 1934년‘부산직물공장’을 인수하여
산업자본가로 변신하였다고 한다.
이런 동양척식 이라는 회사가 식민지시대에 조선민에 대하여 얼마나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김지태는 그런 시대에 어떤 흑막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점장이 동경본사와 상의까지 해가며 일본인도 받기 어려웠던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이 시기는 만주사변(1931~1932)이 발생한 시기였다.
병역을 기피할 목적이라면 몰라도 그 당시 폐병이라면 아직 치료약이 개발되기 전이라
전염성 불치병으로 여겨질 때다.
푹 쉬어야할 그런 중환자인 그에게 동척은 열심히 일해 치료비라도 마련하라는 듯
얼마나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는지 몰라도 2만평을 하사했던 기적이 있었고
그런 폐병을 앓았음에도 열심히 일하였더니 3년 만에 폐병을 완치하였고 거금을 벌어
사업가로서의 기반까지 닦았다고 하였으니 하늘은 김지태에게 두 번의 기적을 베푼 셈이
되었다.
일본에 성심으로 충성하니 하늘에서 이런 두 번의 큰 기적까지 내려주시고
세상이 이러하니 그 당시 조선사람 누군들 일본에 충성하지 않고 베길 수 있겠는가.
김지태는 그 후 35년 조선지기를 인수하여 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큰 돈을 벌었다지만
부동산투자(?)사업과 43년 군수공장인 조선주철 인수 등등으로 이미 해방 전에 부산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사업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객관적 사실만 가지고도 일제에 적극협조하거나 일제를 위해 큰 공을 세우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쯤은 모두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지태는 어떤 면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기반이 되었던 소위 진보개혁들이 가장 싫어하는
친일청산의 대상인 전형적인 일제협력사업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그들의 목적이 참된 친일청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좌파 세력 확장에 있다면 찬밥 더운밥을 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이런 부산의 거부사업가였던 김지태가 해방 후 전국적인 거부로 재탄생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에 축적한 재력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해방 후 혼란을 틈타 부산상공회까지 재빠르게 장악하여 일제가 철수하면서
남긴 적산기업인 귀속기업체의 관장권을 틀어쥐고부터였다.
김지태는 이렇게 구축한 힘들을 배경으로 1946년 조선견직을 관리하며 불하받았고
그 후에도 숱한 귀속기업체를 넘겨받아 대동산업(46년-한국생사), 삼화고무(52년) 등
문어발 식 기업확장을 꾀하였고 이런 배경에는 속칭 친일정권이라는 이승만 정부와의
상당한 친분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를 보면 그 밖에 46년 국제신문, 48년 부산일보, 50년 무소속 2대 민의원으로도
활동하여 이른바 언론가, 정치가, 사업가로 활동하는 불같은 야망을 선보였고 소위
진보개력세력들이 통칭 3대권력이라고 지칭하였던 경제권력과 언론권력과 정치권력까지
한 손에 틀어쥐려한 대단한 욕심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김지태는 권부에 연결된 정치권력과 자신을 대변해줄 언론권력으로 울타리를
엮어 자신의 일제협력이라는 과거사와 자신이 구축했던 경제적기반을 보호하려고 한
측면이 더 많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김지태가 이승만 정권과 틈이 생기게 되는 일은 51년에 있었던
조선방직낙면사건이었다. 김지태의 회고에 의하면 그동안 조선방직을 관리해온
자신이 당연히 조방을 불하받게 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51년2월, 나라의 미래가 불투명하던 부산 피난시절 이승만측의 3억원의 자유당
창당자금요청을 묵살하자 괘씸죄에 걸렸고 조방을 노린 사람들이 이승만에게 야당의
자금원이 될거라고 참소하여 조방낙면사건이 조작되었고 조방은 엉뚱하게도 이승만의
심복에게로 불하되었던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후에도 김지태는 54년에 이승만의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58년에는 자유당 공천에서 탈락하였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이때부터 자유당과는 완전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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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들들 중 법대-고려대법대를 나와서 내세우는듯)이 티비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나와
폐병을 고치려고 울산에 가서 고래고기와 개고기를 먹고 부친이 병이 나았다는데
부자라서 굳이 울산까지 안가도 고래고기와 개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 텐데도 설레발 치는 것이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이냐! 얼마나 좆선이 박근혜가 미우면 그런 개지랄 판을 벌였을까?
<왕에게 진상할 때 고래고기도 했을 것이거늘 서울에서도 고래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일제 때 울산 부산간에는 털털 거리며 갈 수 있는 길이라도 있었을 진데 울산 부산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울산에서 고래고기 먹을려고 뻗쳤다??????????? 부산 울산은 배로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부자라면 일도 아니지
울산이 얼마나 넓은가? 장생포 하고 언양이나 현 울산대학교 거리가 장난이 아니다. 질러가면 부산이나 울산의 장생포와 먼 데나 거기가 거기일 것... 김지태 아들이 국민(시청자)들을 등신 만들어도 박근혜가 미워서 목 빼고 믿어 버렸어 ^ ^
내가 정상인이냐 비정상인이냐? 상식인이냐 비상식인이냐는 거짓 언론에 희롱당해서 우민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듯>
황당한 것은 아들이 간도에 간 사람 아니면 조선 땅에 살았으면 다 친일파 아닌가라며 궤변을 편 것도 모자라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투전판을 기웃거렸다나? 물론 그런 사람들도 꽤 있었다.
농사도 안짓고 소작인을 부렸을 인간들이 수완 부린 것 가지고 친일파론을 펴는 것도 괘씸하지만
간도에 가면 다 독립운동가인가. 공산주의를 해서 김좌진 장군을 죽이고 독립군을 배신한 빨갱이들이 다수고
그들 중 다수(중공 팔로군 소속)가 6.25 남침에 앞장 서고, 일부 씨 중에는 오원춘의 조상이 있었느니라
말만 들어도 섬뜩한 인육 알간!!
6.25 남침에 김일성 편들어 참전한 자들의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와 있다 한들 대한민국 편이겠는가?
뻔하지, 중국과 북한편이지 ㅋ
인육 오원춘이를 무기로 감형시켜 줬다는데 인육을 수백 편으로 잘라서 고기로 만든 것이 자명하거늘
현대판 사대주의로서 중국의 눈치를 봐서인가/ 인육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해서 감형이라니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다 이 저질 판사 새끼들아.
이 개같은 판사 놈의 새끼들 혹시 중국 땅에 건너 가 살았으면 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줄 알고
동정 판결을 한 것은 아닌지 몰라 = 비탈로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