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 金玉均 ]
- 조선 후기의 정치가.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는데, 갑신정변(甲申政變)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김옥균 선생 유허지충남 공주시 정안면. 지방기념물 제13호.
- 출생-사망
1851 ~ 1894
- 본관
안동(安東)
- 자
백온(伯溫)
- 호
고균(古筠) ·고우(古愚)
- 시호
충달(忠達)
- 활동분야
정치
- 주요저서
《기화근사》《치도약론》《갑신일록》
조선 후기 정치가이며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1851년(철종 2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세도가(家) 였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김병태였으며 어머니는 은진(恩津) 송씨(宋氏)로 당대 문벌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여 작은 서당을 열어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김옥균이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집안에 알려지자 6세 때 5촌 당숙이자 당시 좌찬성을 지내고 있던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1861년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자 강릉에서 학업을 쌓으며 6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이율곡의 학통에 영향을 받았다.
1866년 다시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북촌 양반가에서 지내다 박영교의 소개로 1869년 박규수(朴珪壽)를 만났다. 김옥균은 그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게되었다. 특히 개화파였던 한의원 유대치(劉大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외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중국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역관 오경석(吳慶錫),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에게 영향을 받으며 그들과 교우가 두터웠다. 1872년(고종 9) 22세 때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해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외척세력이 득세하자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충의계(忠義契)라는 개화파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충의계에는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 명문가의 자재들이 가담하였다. 1881년(고종 18) 김옥균은 고종의 허락을 얻어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직접 시찰하였다. 다음해 다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때 김옥균은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치욕적이라고 비판하였고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하였다.
1883년 6월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고종의 위임장을 얻어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민씨일파의 방해공작과 개화파를 통해 조선을 진출하기 보다는 민씨 일파가 더욱 쉽다는 일본측의 정책변화 때문이었다. 차관도입에 실패한 김옥균은 친청파의 압력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칩거하였다.
당시 김옥균은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와 청나라 세력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청나라와 프랑스간 전쟁(1884~1885)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충의계 조직만으로는 거사를 성공하기 어렵자 결국 다시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계략에 속아 도움을 받게 된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등이 있다.
내가 네이버백과 퍼오는 거 별로 안좋아하는 데
김옥균이 친일파라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역사인지 모르는
천지분간을 못하는 쥬신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