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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7 01:58
[기타] 이정기 후손들이 산동반도에 세운나라 제(齊)나라 대해서인데요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5,731  

제(齊)나라를 우리역사로 볼수 있나요?
 
제나라가 발해처럼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걸로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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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 15-03-17 02:03
   
흔히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정기는 고구려유민이지만 백제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를 세운 거에요...
     
두부국 15-03-17 02:09
   
그렇게 되면 한국사에 포함이 되나요?
          
디노 15-03-17 02:36
   
피지배 계층은 중국인들이 대다수인데 한국사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죠.
               
뚜리뚜바 15-03-17 09:19
   
그렇게 보면 요,금,원,청 전부 중국사로 인정하는게 맞는거네요?
                    
두부국 15-03-17 09:41
   
요나라 금나라는 몰라도
원나라 청나라는중국사긴 하죠.
일제 식민지사가 우리역사의 한 부분인거처럼요.
다만, 중국은 종놈이 주인행세 하듯..
좀 이상하게 해석해서 문제지요
그노스 15-03-17 07:51
   
고구려가 산동 지역을 차지하고 새로 제나라라는 분국을 세웠다면 모를까,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인이 당나라 안에 분국을 세웠다고 한국 역사로 가정하기는 힘들거 같아요.

한국땅에 받아들인 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느 지역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그 역사가 그 외국인들의 본국 역사에 속할수는 없지 않나요.

그냥 우리 조상분 중에 이렇게 뛰어난 분도 계셨다고 생각하시는게 옳을것 같습니다.
     
디노 15-03-17 08:38
   
고구려인이 당에 흡수되었다니요...
안동도호부에 있다가 이진충의 반란으로 모두 고구려의 옛 땅으로 탈출해 발해를 세웠잖아요.

고구려 유민은 구당서 기록으로는 2만 8천 2백호,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20만여구인데,
이들은 강회 이남이나 산남, 병주, 양주 등 산간오지에 분산 배치됩니다. 그러다 평양의 안동도호부의 저항으로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옮겨가면서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여 분산 배치해 놓았던 고구려 유민들을 그곳으로 옮겨가서 살게 했어요. 그들이 다시 발해를 건국하게 된 것이고요...
          
그노스 15-03-17 09:05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인이 당나라 안에 분국을 세웠다고...'

라는 말은 이정기를 지칭하지 않나요.
이정기가 분국을 세웠으니까요.
고구려 전체 인구가 당에 흡수되었던게 아님을 알고 그런 뜻도 아닙니다^^
               
디노 15-03-17 09:35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인...'

이 말은 누가 봐도 오해를 살만한 문구이지요...한 개인을 두고 흡수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요...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니 더 따질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그노스 15-03-17 10:36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 도 아니고,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인들...' 도 아니고,

'당에 의해 멸망해 흡수되버린 고구려인이 당나라 안에 분국을 세웠다고...' 문맥상 이정기를 지칭하는건데 앞뒤 잘라서 그렇게 오해하시면...ㅜㅜ
오해푸세요~
요동 15-03-17 08:57
   
우리 역사 맞음. 과정보다 결과가 보여주는 것이 역사임
꿈꾸는자 15-03-17 10:12
   
제왕 이정기...그가 세운 제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인들은 당나라완 전혀 다른 풍습과 전통에 완전히 당황했다고 하죠...
불과 50여년만에 점령지를 철저히 고구려화 시켰다는 거죠...고구려인의 전통과 풍습대로...
거기다 요서에 집단이주되있던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세운게 제나라죠...
그리고 중국동부해안 산동지역포함해서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도 제가 배울때는 나왔죠..고대부터 동이족의 집단 거주지라고....백제도 있었고...당시와 현재의 산동반도인들의 민족(동족)의식은 뭔가가 달랐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노스 15-03-17 11:13
   
전 제나라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에 회의적이나 님 말씀대로 그 당시 산동인들의 민족의식과 풍습을 생각하면, 저도 뭐라 확실히 단언할수는 없겠습니다. 유민들도 고구려 계통이구요.

금, 청사를 보면 지배층은 확실히 자기들의 뿌리를 한반도에서 찾으나 여진족을 우리 민족이라 치기에는 무리인듯 싶구요.
금, 청에 비하면 이정기의 제나라가 우리 민족에게 더 가까울듯도 하나 개인적으로 뭐라 단정짓기 아직 힘드네요.

그런데 요즘 국사 교과서에선 중국 동부해안을 가리켜 동이족의 집단 거주지, 백제등을 언급하나 보지요?
많은 발전이네요. 제가 배울때를 더듬어보면 신라방에 대한 언급만 있었던거로 기억됩니다.
     
디노 15-03-17 13:50
   
고구려 유민은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 백제유민들입니다. 이정기는 백제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를 세웠어요.
          
이쉬타르 15-03-17 14:24
   
제 나라 국호도  잠시만 사용하고는 버렸다고 합니다..당나라 후반기부터는 당나라는 내적으로  다 반독립상태로  분열이 극심하고 한 시기이죠
치청 번진 세력은 요서 거주 지역을 탈출한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 였다더군요
그리고 당나라 중기 정도래도 산동성 주민들이 백제후손이 아니고 한족인데 이들을 고작 40년 동안 예맥족으로 유전자 전환이 될수가 없죠
               
디노 15-03-17 14:50
   
산동성 주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정기가 지휘한 평로군을 말하는 거에요. 평로군에 고구려인은 아주 소수였고 대부분 백제유민들이었어요.
안동도호부는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714년에 신성에서 평주로 쫓겨옵니다. 이 즈음 원래 이 부근에 있던 웅진도독부는 소멸되죠. 이때까지 안동도호부에 고구려 유민이 있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고구려 유민은 발해의 건국과 함께 대거 옛 고구려 땅으로 넘어간 상태였어요. 웅진도독부가 소멸되면서 그곳의 백제유민들은 안동도호부에 합쳐졌습니다. 743년 요서고군성에 옮겨진 안동도호부의 부민은 대부분 백제 유민들이었어요..
727년부터 안동도호가 고구려 왕족으로 임명되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743년에 안동도호부가 옮겨간 곳도 발해 부근인데 고구려 유민이라면 이같은 위험한 조치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노스 15-03-17 18:55
   
디노님께서 이정기가 제나라를 세울때 고구려 유민들은 소수이고 대부분 백제 유민들과 나라를 세웠다고 하시는데요.
평로군에 고구려인들은 아주 소수였고 대부분 백제 유민들이었다고 주장하시며 그 근거로 안동도호부를 드시는것 같습니다.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인들을 관장한 안동도호부와는 별개로 대규모의 고구려인들과 돌궐인들이 자력으로 당으로 이주한 기록도 있습니다.
'구당서' 에 의하면 수만명을 이끌고 당에 이주해온 고구려 막리지 고문간에게 좌위원외대장군과 요서군왕이라는 관직과 작위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네요.
이 무리들이 평로군으로도 이주했다고만은 할수 없지만 위의 예처럼 안동도호부가 당나라 세력권 아래의 모든 고구려인들을 관장한것이 아닌데 굳이 안동도호부에 관한 기록에만 의지할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더욱이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 에 의하면 이정기가 태어날 무렵엔 평로군이 안동도호부까지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합니다. 안동도호부보다 상위개념이라는 거지요.

지배선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고구려가 멸망한 뒤 안동도호부를 영주로 옮겨 오면서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끌고 온 것과 상관없이 평로군에는 이미 많은 고구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나라 멸망시에 기주의 백성들이 학살당한것은 제나라의 주축은 고구려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의 미움을 샀던 것이라 합니다.
물론 제나라에 백제나 신라 유민들도 포함되어 있지만요.
제나라의 중심 세력이 고구려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멸망전까지 제나라가 고구려의 고유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왕샤이즈 산동성 사회과학원장' 에 따르면 변방지역에서 한족병사들은 3분의 2를 넘을 수 없었는데 이정기가 궐기할시의 평로군의 경우 3분의 1이 고구려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이정기의 제나라 건국에 백제 유민들이 참여한것은 알고 있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 주도세력이었다는건 님께 처음 듣네요.
혹시 님께서 이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학자분들의 논문이 있으신가요 아님 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가요?
참고 사료가 있으시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디노 15-03-18 07:29
   
님의 글 중에 신라유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신라유민은 없고, 패망 후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신라인이라 불렸던 겁니다.

님의 글은 대부분 지배선교수님의 ‘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라는 논문에 나오는 내용들이네요. 하지만 그 분 또한 백제유민들은 간과한 것 같아요.

자치통감 당기 38에 후희일이 거느린 평로군 2만 명이 요서지역에서 산동 쪽으로 남하한 기록이 있는데, 평로군의 주력이 고구려인이었다면 연의 수도 범양을 지키는 이회선의군사들과 일전을 펼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산동으로 남하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요서에서 바로 고구려인이 세운 나라 발해가 있는 안전한 요동으로 가도 되는데 말이죠. 후희일의 모계가 고구려인이고, 이정기가 고구려이 후예이니 당연히 안전한 요동을 선택했을 겁니다.
한데도 백제 유민들의 연고가 있는(북제로부터 백제 위덕왕이 동청주자사로 임명될 정도로 연고가 있음) 산동을 택한 것 등을 봐서 백제유민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들은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간과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노스 15-03-18 18:55
   
디노님, 답변 감사합니다.
멀쩡히 잘있는 신라의 백성들을 '유민' 이라 적은건 실수했네요^^

지배선 교수님의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자료들을 들춰봐도 이정기가 다수의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나라를 세웠다라고 했을뿐 정확한 수치를 찾기 힘들다는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다보니 님께서 백제유민들을 언급하시는것 같은데요. 그러나 님의 견해를 읽어보아도 기존 '고구려 유민 다수설' 을 뒤집기에는 미흡해 보입니다.

761년때의 일로 보여지는 후희일, 이정기의 남하기록을 들어주셨는데요.
님께서는 만약 평로군의 다수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면 발해가 있는 안전한 요동으로 가지 않았겠느냐 의문을 제기하시는데요.
고대 사회에서 2만여명의 군대는 절대 소수의 군이 아닙니다. 또 그 시대의 특성상 군대의 이동은 경유지에서의 약탈을 야기시킵니다.
아무리 고구려 유민 출신의 군대라 하더라도 이미 고구려에서 발해라는 국가가 건설된 요동에 진입하는건 가는쪽도 받아들이는 쪽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발해가 건국된지 이미 63년이 흘러 나라의 기틀이 착실히 잡혔을때 입니다.

더욱이 이정기가 당으로부터 자립하기 전이고, 이회선과의 일전을 피하겠다고 당에게 받은 관직인 평로절도사를 버리고 후희일, 이정기가 발해에 의탁한다고 상상하기도 어려운것 같네요.
오히려 당군의 절도사로서 발해가 아니라 당의 영역이자 고구려인 거주지인 산동으로 가는게 최선책이자 당연한 결과라 봅니다.

님께서 산동을 가리켜 백제 위덕왕이 동청주자사로 임명된것을 이유로 백제 유민들의 연고지라 말씀하시는데요.
산동에 백제 유민들이 있었음은 부정치 않으나 이정기 시대에서 위덕왕 시대 사이에는 무려 163년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산이 바뀌어도 16번은 바뀌었고, 이정기의 제나라가 존속한 58년이란 시간의 두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걸 연고라 할수 있을까요.

더욱이 이 시기의 산동은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데에 학계 대부분 의견을 같이 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님의 견해는 기존 주장을 뒤집기에는 근거가 부족해 보이네요.

물론 님의 연구가 계속되는건 좋지만, 지금까지 님의 견해만 가지고는 제나라 건국에 참여한 백제 유민들이 고구려 유민들보다 다수였다고 '단정' 지으시기엔 부족한것 같습니다.
한번 더 여쭙겠습니다. 님의 견해를 뒷받침 해드릴 제가 모르는 학자분의 주장이 있는건가요 아님 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건가요?
                         
디노 15-03-18 21:32
   
산동이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니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리고 누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말인가요?

위덕왕의 경우 이미 백제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동청주자사가 된 것이고, 위덕왕 이후에 백제인들이 갑자기 없어질 연유가 없으며, 제나라 시기와 장보고 때에 많은 백제인들이 산동과 장회지역에 있었던 것을 보면 백제의 연고가 끊겼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로군 2만 명을 발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는 건 님의 짐작이고요...
이정기는 제나라를 세운 후에 발해와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그런 친연성을 지닌 인물이 제나라 성립 이전에 요동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산동으로 갈 생각을 했다는 게 오히려 더 의아한 일이죠.
당나라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던 때였고, 꼭 발해가 아니더라도 그 인근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는데 말이죠.
                         
그노스 15-03-19 04:44
   
디노님께서 산동이 고구려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누가 주장하는지 물으셔서 답해올립니다.

고금통의에서 이덕일 교수님이 고구려인들이 만주 서쪽의 영주, 현재의 조양시와 산동 반도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고 하십니다.

高句麗史 에서 신형식 교수님이 산동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고구려인들을 언급하시네요.

지배선 교수님도 제나라의 무대였던 하북과 산동지방에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십니다.

제나라가 망할 때 당이 고구려계 군인 1200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점, 제나라가 고구려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생각해도 제나라에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였다고 생각할수 있다고 봅니다.

산동의 백제인들에 대한 님의 '견해' 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위덕왕 이후에 163년이나 지났으니 산동의 백제인 연고 운운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흘렀고, 남은 백제인들도 현지화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가 망한지 대략 60여년만에 후희일 같은 혼혈도 나오지 않나요.
그런걸 가지고 연고 운운하시는건, 같은 고구려 계통이어도 발해가 버티고 있는 요동에 2만여명이나 되는 평로군이 진입하는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제 '짐작' 보다 더 큰 '짐작' 으로 보이네요.

더욱이 자치통감의 당고종 의봉(儀鳳)원년(676년)에 산동에 남아있는 백제인들에 관해 논하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676년이면 백제가 멸망한 지 1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서주(徐州), 연주(兗州)등지에 있는 백제의 호구(戶口)를 옮겼다.
모두 건안(현 복건성 복구(福甌), 복건성 절강성 등지) 에 두고 다스렸다'

서주는 강소성의 숙천(宿遷)지방을 중심으로 산동성의 서남부와 강소성의 서북부지역입니다.
또한 연주는 산동성의 제녕등 산동성의 남부지역입니다.
그 지역들에 남아있는 백제인들을 모두 복건성 지역으로 옮겼다는데 산동의 백제인들을 백제로부터 가능한 먼곳으로 떨어뜨리려하는 당의 의도가 보이지 않나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덕왕 이후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백제인들' 과 '백제 유민들' 이 모두 탈출해 산동으로 돌아가 이정기의 제나라 건국에 대다수로서 참여했을지 의문이네요.
님의 주장대로 평로군이 백제인들 위주였다면 산동이 아니라 복건으로 가야했을거란 생각이 나오지 않나요.

님께서 만약 후희일과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군을 이끌고 있었다면 이회선과의 일전을 피하기 위해 같은 고구려 계통인 발해로 갔어야 되는거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신 것이야말로 님의 '생각' 아니신가요? 정설이 아닙니다^^
님은 그런 '생각' 을 먼저 말씀하셔놓고, 제가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세웠다는 학계의 목소리에 기초해 말씀을 드린걸 제 '짐작' 뿐인것처럼 말씀하시면 옳지 않은것 같네요.

제 '짐작'으론 초기에 당과 대립했던 발해의 영내에 당의 평로절도사가 이끄는 2만여명의 당군복색을 한 무장 병력이 고구려 혈통을 외치며 진입하는건 발해입장에선 속편한 상황은 아닐것 같습니다.

왕샤이즈 산동성 사회과학원장' 에 따르면 변방지역에서 한족병사들은 3분의 2를 넘을 수 없었는데 이정기가 궐기할시의 평로군의 경우 3분의 1이 고구려인들이었다고 하고 나머지는 한족이었다 하니 발해가 그들을 믿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정녕 제 '짐작' 일뿐인지 모르겠네요.

이 시기는 이정기가 고구려인들을 규합하여 자립의지를 공공연히 들어내기 전이고 군의 주체는 엄연히 평로절도사 후희일이었습니다.
발해의 신용을 얻기에는 아직 이른 상황이지요.
훗날에 이정기와 발해와의 사이가 좋았다는걸 저도 알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설' 도 부정치 않지만...
현재 한국과 조선족, 한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보면...글쎄요 혈통이 모든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제가 누차 여쭙지만 이정기와 백제 유민들에 대한 주장이 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지, 님의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학자분들의 주장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재차 여쭙는 제 말에는 답을 안주시고 님의 '짐작' 처럼 보이는 글만 계속 올려주시니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을 이끌고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을 님께서 '정설' 이라 단언하신다면, 그걸 뒷받침하는 다른 학자분들의 논문 소개 '부탁' 드립니다.
                         
디노 15-03-19 07:52
   
<구당서> 권 5 고종본기 총장 2년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의 호 2만 8천 2백, 수레 1천 8십 승, 소 3천 3백 두, 말 2천 9백 필, 낙타 6십두를 옮겨 내지로 들여 놓기 위하여 내주와 영주 2주에서 구불구불 차례로 출발시켜 보내어 강회 이남 및 산남, 병주, 양주 이서의 여러 주의 공한처에다 적절히 양을 나누어 안치시켰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강이남은 안휘성 남부에서 강서성 북부, 산남은 장강 상류의 사천성 서쪽과 운남성 접경지역, 병주는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서쪽 섬서성과의 접경지역, 양주는 감숙성 무위현 서쪽 청해성 과의 접경지역으로 모두 중국 내륙의 오지예요.

그리고
<자치통감> 당기 18 고종 의봉 2년 2월의 기록을 보면
“공부상서 고장(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도록 보내고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안심시켜 하나로 통합하게 하였다. 앞서 여러 주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인들이 모두 고장과 함께 보내어져 빠짐없이 돌아갔다.”

20여만 명에 달하는 유민들을 모두 안동도호부로 옮겼을 리는 없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죠.
하지만 구당서 <고구려전>에
“고장이 안동도호부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하려다 발각되어 소환되어 공주로 유배됨과 동시에 그의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도, 농우도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였다. 고장과 무관한 빈약자들만 안동성 곁에 머무르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남도 농우도는 중국 서쪽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지역이에요. 산동지역과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요동반도 이서지역에 강제로 이주되어 살던 고구려 유민도 696년 이진충의 반란 때 대조영과 함께 고구려의 옛 영토로 돌아가 발해 건국의 일원이 됩니다.

그 어디에도 고구려인이 산동반도로 갔거나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요.

님이 말한 자치통감의 기록도 제가 아는 기록은 빼고 말씀 하시는군요.
<자치통감> 당기 18 고종 의봉 2년 2월조의 기록

“공부상서 고장(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도록 보내고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안심시켜 하나로 통합하게 하였다. 앞서 여러 주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인들이 모두 고장과 함께 보내어져 빠짐없이 돌아갔다.”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대방왕으로 봉하여 역시 돌아가도록 보내고 백제의 남은 무리를 안심시켜 하나로 통합하게 하였다.”

“이에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고 이를 통할하였다.”

“당시 백제는 심하게 손상되어 부여융에게 고구려 경역에 거처하도록 명하였다.”


님이 말한 분들이 산동반도에 고구려인이 있다고 한 것은 제나라가 멸망할 때 고구려 병사 1200명을 죽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그러나 본데, 그 고구려 병사는 제나라 건국 후에 하남도와 농우도로 갔다가 다시 모여든 병사일 수 있고,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 후예이니 평로군의 백제병사를 그렇게 표기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님이 말하는 제나라가 고구려풍습이라는 것도 고구려 풍습이 아니라 제나라가 있던 산동지역에 동이의 풍습이 만연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 님이 말한 건안고성의 위치도 복건성이 아닙니다. 이는 김성호라는 분의 주장인데, 잘못알고 계신 겁니다.
이는 <자치통감> 당기 18 고종 의봉 2년 2월조의 기록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대방왕으로 봉하여 역시 돌아가도록 보내고 백제의 남은 무리를 안심시켜 하나로 통합하게 하였다.”
“당시 백제는 심하게 손상되어 부여융에게 고구려 경역에 거처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을 완전 무시하는 거예요.

구당서 백제국전 마지막 부분에
“백제의 땅은 그때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나뉘어졌다.”
한반도에 있던 백제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요서에 있던 땅은 발해가 차지했음을 말하는 겁니다.
이는 웅진도독부가 발해와 인접한 요서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흑치상지가 677년 웅진도독부 사마가 되었다가 나중에 연국공에 봉해지는데, 하북성에 있던 연국공에 봉해진 것만 봐도 웅진도독부가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서주와 연주도 산동성이 아니라 서주는 감숙성 정서시 북부, 연주는 섬서성 연안시이며,
건안고성이 복건성이라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그리고
제 '짐작'으론 초기에 당과 대립했던 발해의 영내에 당의 평로절도사가 이끄는 2만여명의 당군복색을 한 무장 병력이 고구려 혈통을 외치며 진입하는건 발해입장에선 속편한 상황은 아닐것 같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곳으로 갈 때 그냥 가나요? 당군 복색이든 어떻든 먼저 전령이나 사신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가는 게 기본이죠....
                         
그노스 15-03-19 18:15
   
많은 기록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노님.

고구려 멸망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게 된 기록들이네요.
고구려 멸망에 관심깊은 분들은 아마 한번쯤은 접해보셨을 이 구당서, 자치통감 기록들이 대부분 많은 학자분들에 의해 이미 연구되었음에도 한결같이 산동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이정기가 추대되었다고 하시는 주장들을 전 신뢰를 합니다.
심지어 TV 에서조차(역사스페셜-이정기편) 왕사이스 박사는 이정기 군대의 1/3 이 고구려인들 이었다고 단언하시네요.

저 분들이 어떤 사료를 토대로, 어떤 방식으로 연구하셨는지 저로서는 알길이 없고 님의 지적도 일리가 있어보이나 저도 지난글에서 언급하고 예를 들었듯이 안동도호부가 자력으로 이주한 모든 고구려인들을 관리했던것도 아닌데 안동도호부에 관한 기록만 가지고 모든 고구려 유민들을 논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이윤섭 교수님의 연구에 의하면, 당나라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에 가깝도록 학대를 당해서 많은 이들이 신라인 행세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온 이들 외에도 전쟁의 폐해로 기아를 피해 온 유민들, 군인, 유학생, 선원 등등 스스로 이주해온 이들도 많았고 이들도 모두 신라인이라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안의 고구려인들이 신라인들이라 칭해져 그 수가 축소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지요.

님께서도 이정기와 발해간에 고구려인으로서의 동질성을 언급하셨는데, 이정기가 급속도로 성장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백제인들이 아니라 당나라 안의 같은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지지가 있었다고 유추하는게 무리이기만 하진 않은것 같네요.

여담으로 지배선 교수님과 샤밍차이 청주박물관 부관장과의 대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에 고구려 유민들이 많았다고 주장하는 그 중국인 학자한테 근거 사료가 있느냐고 물어보셨답니다.
돌아온 답변이 '당연한 것에 사료가 어떻게 있느냐. 사서에는 당연한 사실들이 기술되지는 않는다' 였답니다.
고구려인인 이정기가 고구려인들에게 추대되었을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구,신당서에서 찾느라 오늘 2시간이나 허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물론 이건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하지만 님의 문제제기로 인해 깨달은 것이 있네요. 막연히 학자분들의 연구결과만 쫓다가, 제 스스로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아님 제가 부족해서 못찾는건지)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풍부하지는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백제 유민에 관한 제 자치통감 얘기는 제 오류인거 같습니다. 인정합니다.
마지막으로, 평로절도사가 군대를 이끌고 발해의 영내에 진입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님 말씀대로 제 짐작이기도 하고, 님의 짐작이기도 하니 이 얘긴 여기까지 하지요^^

님께서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과 나라를 세웠다고 단언하시는 건 님의 사례만 가지고는 여전히 납득할수 없으나 제가 생각했던거보다 제나라 안에 백제유민들이 많았다고 하시는 견해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님의 주장이 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지, 아님 님과 같은 주장을 하시는 분들의 학설이 있는지 끝까지(?) 말씀 안해주시지만, 만약 님의 개인적인 연구시라면 좋은 결과 나오시길 바라겠습니다.
                         
디노 15-03-19 22:53
   
이윤섭 교수님이
당나라군에 강제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에 가깝도록 학대를 당해서 고구려인이 신라인 행세를 했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나당전쟁 이후로 당나라와 신라의 사이도 국교가 단절되는 등 굉장히 좋지 않은 시점이어서 고구려인이나 신라인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입장인데, 굳이 신라인 행세를 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어요.
심층적인 연구의 결과보다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를 고려치 않은 막연한 추론인 것 같네요...
많은 분들이 고구려인이 산동에 있을 거란 전제 하에 자꾸 추론을 확대하는 것 같네요...
신라와 당나라가 사이가 괜찮아질 즈음엔 이정기의 제나라가 들어서 여전히 신라와는 사이가 안 좋은 상태가 됩니다. 그 분의 오류인 것 같네요...
이쉬타르 15-03-17 13:40
   
그 문제는 산뚱성 지역은 고래로 부터 우리 민족 하고는 무관한데 우리조상 거주지 지표 유물이 3가지가 있죠(고인돌,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토기)...산뚱반도는 고인돌이 조금 나오고한거만 있었습니다..이정기가 세운 거는 반독립 군벌 정도이고 국가체제나 세습 왕조를 세운것도 아니라서(이정기는 출신이 당나라 귀화한 절도사 내부 장수임)모호한 데다 현지주민 종족으로 보아선 그[제]를 우리조상 국가 범주에다 놓기에는 부족하죠..제 란 국명을 일시 사용했는데..그  제..라는 명칭부터가 한족국가 의민니다
     
스파게티 15-03-17 15:06
   
근대 이쉬님 한국인 맞아요?
          
이쉬타르 15-03-17 15:12
   
한국인이든 아니든 근거없는 주장은 하지를 말아야 하죠..동이족의 연원에서 많은 혼란을 주고 하는데...동이족은 오랜 기간 광대한 지역거주민을 지칭하고 해서 신중하게 사용되야할 명칭이죠
스파게티 15-03-17 15:29
   
아 오해하셧나본대 글내용가지고말한게 아닙니다    산뚱? 고래?  의민니다    < 이거보고 그냥 불어본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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