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1668862&cpage=2&mbsW=search&select=sct&opt=1&keyword=%BC%BA%B0%E8
-이성계와 북방기병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복식. 당시 북방군은 유목민의 복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무려 임진왜란까지 이어져서 북관대첩 기록도를 보면, 함경도군은 몽골, 여진족 같은 유목민 모자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성계의 젊은 시절 전공은 한민족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굉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승리한 전투 대부분이 회전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한반도 역사상 중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대부분 수성전이나 청야전술을 기반으로한 게릴라전, 수비전 등입니다. 때문에 회전에서 중국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귀주대첩이 특이한 것이고, 회전에서 계속해서 승리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근데 이성계는 항상 적들보다 병력수가 열세인 상태, 수성전이나 수비로 일관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회전으로 맞붙어 모두 승리를 거둡니다. 그것도 기병을 써서.
동북아의 당시 내노라 하는 세력을 모두 개박살 내버린 것입니다. 원나라 몽골기병, 중국 홍건적 10만명, 여진기병, 북부 반란군, 왜국 군벌, (나중엔 고려 정규군까지-;)
어쩌면 우리민족 역사상 기병 전술을 가장 잘 활용한 이는 이성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계와 그의 친위대인 북방기병 2천은
당시 동북아에서 명성이 대단하였으며, 그들은 돌격하기전에 특유의 소라고동피리를 불었다 합니다.
뿌우~~ 하는 소리가 들리면, 적들은 '이성계다! 이성계의 북방기병이 온다' 하며 매우 두려워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성계의 북방군은 초강병으로 수많은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특수부대와도 같았습니다. 일단 기병들과 돌격하면 현대전에서 스나이퍼가 1순위로 적 지휘관(중대장,소대장)을 쏘고 두번째로 통신병, 세번째로 기관총 사수등을 노리던 것과 같이 공격했습니다.
보병들이 적들을 막아내는 동안
이성계와 이지란이 서로를 엄호하면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의 총사령관을 활로 쏴죽이거나,
이지란이 엄호하는 사이 이성계가 근접하여 칼로 적장을 베고
뿌우~~~ 하는 소라고둥 소리와 함께 2천의 북방 기병들이 일제히 돌격하면서 적의 전령을 쏴죽여, 소통을 단절시키고 말을 타거나 하급 장교들을 보는대로 족족 저격하거나 때려죽였습니다. 이성계의 북방군은 항상 적보다 적은 군사였지만, 모든 전투에서 상대방 총사령관과 지휘관, 장교들을 잡아내는 통에 적군은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북방군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일단 이성계의 젊은 시절을 논하려면 그의 가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이후부터는 빠른 속도를 위해 임체로..
이가(李家) 계보 이안사 - 이행리 - 이춘- 이자춘 - 이성계
이안사- 전주 호족 출신. 20대 초반 시절 이안사의 여자를 고을 별감이 건드림. 빡친 이안사는 별감과 다투다 결국 싸움박질까지함. 이 사실을 안 고을 현감은 도지사급 안렴사에게 고발.
안렴사는 이안사를 투옥시키려는데 당시 몽골대항기로 이안사는 가병과 가신단을 거느리고 있었음. 쫄린 그는 조정에 구원병 요청. 조정이 미적대는 사이에 이안사는 재산을 들고 가신단과 함께 강원도 삼척으로 튐.
이때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안사를 따라간 가구가 무려 170가(家).
170가는 나중에 이씨가문이 사정상 여러 곳으로 내쫒기는 와중에도 끝가지 같이 이동한 충성심 가득한 집단. 미래에 이성계 북방군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전력이 됨.
삼척에서 이안사 집단은 오랫동안 농사도 지으면서 세력을 키우고 왜구를 대비하기 위해 배 15척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음.
근데 진짜 로또급으로 불운한게, 하필 도지사(안렴사)로 새로 부임되 온다는 사람이
예전에 여자때문에 치고 박았던 바로 그 별감. 이안사는 역시 모든 기반을 버리고 북방 의주로 이동함. 이때도 170가(家)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안사를 따라 의주로 고고.
이미 콘트롤을 벗어난 이안사에게 고려는 이렇게 된이상 몽골제국 막으라고 의주병마사를 임명함.(말뿐인 직책)
근데 당시 몽골제국의 장수 산길(散吉)이 두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
이안사는 원나라에 귀순. 이안사는 집안 사람을 산길과 혼인시켜 연줄을 만듬. 그리고 자신은 더욱 북쪽으로 이동해 개원로 남경 알동에 정착.
이안사는 집단 유지를 위해 사방 팔방 다니면서 왕래함. 이때부터 이가군은 순수 농민성격에서 몽골, 여진과 같은 북방 이민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변화함.
이안사 사망 후 아들 이행리가 가독을 물려받음.
이행리는 몽골 제국 소속으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에도 참가.
충렬왕에게 몽골에게 귀순할수 밖에 없었던 자기 가문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등 발 한쪽을 걸침.
이행리는 꽤 품성이 좋고 운영을 잘했는지 주변 유목민과 여진족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고깝게 본 여진 천호장 연합군에게 공격하기로 함.
이행리는 이 사실을 모르다가 우연히 들른 곳에서 유목민 노인 한명이 이 사실을 귀뜸해 주었고 이행리는 모든 기반을 버리고 도주함. 도주중 여진 천호장 부대 삼백명이 이행리의 목뒤까지 추격해왔으나 구사일생으로 탈출 성공.
이리 저리 피신하다, 의주로 와서 다시 세력을 키움,
이행리 사망후 아들 이춘이 가독 승계
이춘- 본거지를 함주로 옮김. 목축하기 편리해서 라고함. 이 무렵에는 이씨가문은 거의 유목민세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임.
이춘은 원나라 쌍성총관의 딸과 결혼함. 이를 볼때 해당지역에서 인정을 받은 세력이라는 것.
원나라에서는 북부 알동에서부터 이가(李家)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다시 살던곳으로 이동시키려 하나, 이춘이 직접 원나라 조정에 상소를 올려가면서 막아냄. 이를 볼때 이가군은 경제력 군사적으로 포기할수 없었던 듯.
이춘이 사망하고 가독 승계를 두고 다툼이 일어남. 이춘의 장남인 타사크 부케 (한자로는 탑사불화(塔思不花))가 후계자가 되었으
나 금방 죽음. 가독을 두고 교주(咬住), 완자불화(完者不花), 나해(那海) 누가 해먹을 것인가 내분.
이자춘은 개원로에 나가 원나라에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는 교주의 손을 들어줌. 그러면서 교주의 나이가 어리므로 청나라 도르곤처럼 이자춘이 섭정을 맡음.
이자춘은 나해를 비롯하여 다른 후계자들을 다 때려잡고 이가(李家)의 수장이 됨.
이자춘은 여러 부인을 두었는데. 여진족 부인에게서는 이화를 낳았고 다른 여자한테는 이원계를 낳고, 다른 한명한테는 이성계를 낳았음.
후일 전설이 될 이성계가 드디어 등장.
이자춘은 묘를 이장하던 중에 칼 한자루를 득템. 이를 아들 이성계에게 건네줌. 이것이 바로 전어도(傳御刀)
이춘 시절부터 이가군은 상당히 유목민화 되엇는데. 이자춘대에 이르러 이성계와 이씨가문의 170가는 몽골, 여진과 같이 기마민족화 됨.
이성계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무용이 남달라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날 초원으로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겪음.
이성계는 사슴을 겨누고 활을 당겼는데 거의 동시에 다른곳에서 화살이 날라다 두개의 화살이 사슴을 적중시킴.
이성계와 상대방은 서로 자기가 잡은 사슴이라며 다툼, 결국 서로에게 화살을 날리기까지 함. 격투 끝에 서로의 무용에 감명받은 둘은 마침내 결의형제를 맺기로함. 이자가 바로 완안씨 일가, 금패천호장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 티무르였음.
티무르의 풀네임은 쿠룬투란 티무르. 후에 고려로 귀순하여 이지란으로 개명함. 티무르는 용모가 매우 단정하고 피부가 고와 마치 여인과 같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굉장한 미남자였음.
초원의 의형제는 '안다' 라고 하여 서로의 손을 베어 피를 넣은 술을 마시고 평생을 배반하지 않음. 사극에서는 형니메~ 하면서 이성계가 형, 티무르가 동생으로 나오지만
초원의 의형제는 서로를 아꼇으나 우열을 나누지 않고 동등한 위치로, 실제로 둘이 형, 아우 쓸 일은 없었을 것.
이성계는 당시 북부 지방을 휘어잡는 이가(李家)의 가독 후계자였고, 티무르는 잘나가는 여진족 금패 천호장의 아들이었으므로 세력신분도 격이 맞았음.
당시 북방은 척박한 환경과 물자부족으로 워킹데드 같은 상황이었음. 부족한 물자와, 한정된 목초지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물품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함. 이런 환경에서 이씨가문 170가는 수없는 전투를 치루면서 당대에서 가장 실전경험이 풍부한 집단이 됨.
특히 이성계 휘하 2천명은 이가군중 고려인, 여진인 최정예를 추려낸 것으로, 말타기, 활쏘기, 검술등에 통달한 정예부대. 이성계의 무용은 몽골제국에도 인정을 받아,
젊은 나이에 원나라에서 만호장에 임명받음. 즉 만명의 군대를 통솔하는 직책을 받았는데, 만화 킹덤을 보신 분들이라면 만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것,
이가(李家)의 당시 수장이었던 이자춘은 정세를 정확히 판단해 원나라가 기우는 것을 느끼고, 전격적으로 고려로 방문, 직접 공민왕을 만남.
당시 반원 정책을 피려던 공민왕은 이자춘을 대환영했으나, 당시 몽골제국 군세를 염려하여 이자춘에게 기세를 드러내지 말고 대기하라 지시.
후일 밀지를 받은 이자춘은 원나라 쌍성총관부 공격에 동참함. 이때부터 이성계와 북방기병 2천의 무쌍전설이 시작됨.
쌍성부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당당히 고려로 귀순.
그리고 이어지는 세기말 고려를 향한 동북아의 미친러시에 대항함.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장,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임.
같은 해 10만 홍건적 침공.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 출동, 북방기병 2천을 이끌고 홍건적 10만에게 돌격.
이성계가 직접 말을 몰아 적진을 돌파해 홍건적 총사령관을 직접 죽임.
뒤를 이어 북방기병들이 돌격하며 홍건적 간부들, 장교를 활로 족족 쏴죽이거나 칼로 처죽이면서, 홍건적 붕괴
개경탈환에 성공하여 가장 먼저 입성함.
이때 홍건적으로 고려가 혼란한 상황을 틈타 원나라에서 쌍성총관부를 다시 빼앗고자 나하추를 보냄. 나하추는 수만의 병력으로 함경도를 침공.
고려군을 박살내며 진격. 이에 공민왕은 개성에 있던 이성계를 급파함.
이성계와 북방군 수천명은 쉴새없이 북부로 진격함. <고려사>, <실록> 에 따르면 나하추는 수만명을 너른 평원에 포진하기포다는 각 고개와 골짜기에 병력을 분산 배치했던 것으로 보임.
이성계와 나하추의 병력차는 10배가 넘었으므로 나하추는 이성계가 선제 공격하리라 예상 못했으나, 이성계는 바로 기병으로 기습 돌격
분산되 있는 나하추의 병력을 각개격파함, 이때 이성계는 신들린 기병 활용을 보여주는데, 기동력을 최고로 살려 적을 교란하고
유인하는 동안 별동대가 후방으로 우회해 적 수뇌부를 급습하는등, 신에 달한 컨트롤을 보여줌.
이는 이성계가 몽골의 영향력안에서 유목민과 같이 성장한 배경이 있음. 오히려 본토 몽골장수보다 더 전성기 몽골의 기병 전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줌.
나하추는 어어? 하면서 군세가 와해될거 같자, 일단 회견을 벌여 시간을 벌고자 함. 일단 명목상으로 지휘관끼리 협상 테이블 가지자 해서 자군의 혼란을 멈추게 하면, 병력이 열배나 많은 자신의 군대가 종국에는 승리할 것이므로.
근데 극소수의 심복을 거느리고 나하추와 이성계가 만나는데, 시간을 벌려는 나하추의 의도와 다르게. 이성계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만나자 마자 한마디 함.
"항복해라."
이에 니하추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앞으로의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 했으나, 이성계는 곧바로 활을 쏘고, 칼을 뽑아들고
나하추에게 돌격함.
나하추는 아직 자기뒤에 가진 군세도 월등했는데 이성계가 단기 필마로 자신만 죽일려고 포위도 아랑곳 하지않고 돌진하자, 놀라서 후퇴함.
"너 미쳤나, 이야기좀 하자니까"
그러나 이성계의 대답은 하나
"항복해라."
활을 쏴서 나하추의 말을 죽임, 나하추는 황급히 옆에 있던 부하의 말을 타고 본대로 귀환, 뒤에 있던 나하추의 병사들은 총사령관이 막 자기쪽으로 후퇴하니까
'어어? 이거 뭐여, 우리가 병사 더 많은거 아님? 이거 뭐야'
그리고 이어지는 이성계 친위대의 소라고둥이 뿌우~~~~~하고 울려 퍼짐. 그리고 전원 돌격
이성계와 북방군은 마침내 열배에 이르는 열세를 이겨내고 몽골군대를 대격파함.
2년 뒤 1364년 원나라 황제는 덕흥군과 최유에게 1만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함.
이성계와 최영 출격-> 개박살
같은해 이성계의 외사촌이자 여진족 장군인 삼선 삼개가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킴. 함주를 함락.
여진 본토 기병 VS 이성계 북방기병
-> 이성계 대승, 여진족 개박살
1370년 우리 민족 마지막으로 요동 정벌에 나섬.
이때 레전설 활약을 펼침. 기병으로 상대방 적군을 개박살내고, 공성전에 돌입. 난공불락이라 기병도 어렵자 이성계가 단기로
말을 끌고 성 근처까지 돌격, 성벽에서 적군의 활을 피해내면서 애기살을 꺼내 무빙샷.
애기살로 적군 70명을 모두 헤드샷하는 경악스런 기록을 남김. 결국 질려버린 적군을 이기고 성을 함락.
몽골군과 맞다이 붙었을때는 상대편 장군 '채명'의 무용을 보고 영입욕구가 솟아올라
적군 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 활을 쏴 채명의 말을 죽이고, 무기를 날려버림. 항복을 권유하는데 채명이 말을 듣지 않자,
원거리에서 허벅지 부분 어디를 정확히 쏘겟다고 화살 예고를 날림. 채명이 '이거리에서 무리임 농담마셈' 하자
진짜 그 부분에 정확히 화살을 맞춤.
"항복해라."
결국 대경실색한 채명은 이성계에게 투항, 이 후에는 맹장으로서 티무르(이지란)과 함께 전선에서 큰공을 쌓음.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으로 만주 동녕부 점령.
1377년 우왕, 침입한 왜구가 전국을 휩쓸자 지리산으로 몰아넣고 대파함.
1378년 해적무리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왜군 군벌이 전국을 휩씀. 역사학자들은 남북조간 전쟁이 오래되자, 식량과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북조군의 군벌이 약탈로 충당하기 위해 고려로 침공했다고 보기도 함.
이들이 사용했던 배와 그 규모로 보면 수만명에 달함. 단순한 왜구 해적이 아니라, 다이묘 군벌 수준임.
왜군은 수도 개경까지 위협했고 왜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분전하다 위기에 처함.
이성계의 북방 기병 출동-> 적장 살해 격퇴
1380년 왜군의 대군이 내륙에 침범
-세기말 고려의 상황, 왜군의 침입 표시
이 시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한미한 정도라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공민왕의 재위기간 23년 동안, 왜구는 115번을 침공해 왔다.
그렇다면 공민왕과 바로 이어지는 우왕의 시기에는? 14년동안 278번을 공격.
연평균으로 따지자면 공민왕 시기에는 왜구가 대략 한 해에 5번은 쳐들어왔고 우왕의 시기에는 한 해 동안 대략 18~20번을 공격해온 것. 그만해 미X놈들아
고려 정규군은 각개격파 당하고 사근내역 전투에 이르러 엄청난 대패를 당함. 아홉 원수가 이끄는 고려군이 전멸.
이에 최종병기 이성계 출격. 당시 참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각종 전쟁을 경험한 이성계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아 며칠동안 밥을 먹지 못할 정도 였음. 하긴 고려군의 창자며 내장이 다 꺼내진 시체가 아무리 길을 걸어도 끝없이 펼쳐있다 기록되있으니..
이성계는 폭풍처럼 진격한다음
"오늘 쉬고 바로 내일 총공격한다."
"헉 님, 지금 엄청 달려오느라 모두 지쳤는데 좀 쉬어야 하지 않음?"
"걔소리 집어쳐, 당장 공격"
그리고 이어지는 황산 대첩. 엄청난 난전에 그야말로 치열한 대접전이 펼처짐. 위기에 빠질때마다 기병을 동원하여 충격력으로 모면,
이성계는 직접 전어도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적들을 베어냄.
"도망칠 사람은 도망쳐라,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돌격, 돌격"
총사령관이 이러고 혼자 미친듯이 앞으로 가는데, 병사들도 미친듯이 돌격함.
얼마나 난전이었는지 이성계 말이 활을 맞고 죽어 두마리나 갈아타고, 이성계가 칼로 적을 처죽이는 동안 뒤에서 적군이 공격하자
티무르가 활을 쏴 간발의 차이로 이성계를 살림.
심지어 요동정벌때 적들이 화살을 몸을 젖혀 피하면서 헤드샷 날렷던 이성계가 화살을 몸에 맞을 정도 였음.
왜군에는 아기발도(물론 고려쪽에서 지은 이름. 상당히 어린나이로 아기 + 몽골식 장수 이름인 바토르의 합성어)
란 16세 정도의 장수가 백마를 타고 창으로 고려군을 처죽였음.
일본에는 기병이 없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나 이는 중국, 한국처럼 대규모의 기마대가 존재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귀족들을 중심으로한 소수의 정예 기병은 존재했음. (몽골 장수를 죽인 쓰네나가 같은)
채명 때와 같이 인재욕구가 솟은 이성계였으나, 그럴려면 애들 다죽는다 하는 티무르의 조언에 따라
둘이 왜군 깊숙이 침투하여 이성계가 아기발도의 투구끈을 맞춰 벗기고, 티무르가 헤드샷함.
이윽고 엄청난 백병전 끝에 엄청난 대승을 거둠. 최소 수배에서 최고 열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왜군을 대파한 것.
얼마나 대승이었는지 이성계도 본인도 안하던 자화자찬을 남김.
무려 30년간 고려의 정규군을 학살하며 전국을 난도질하던 왜군에게 그야말로 대타격을 펼친 이성계 평생에서 가장 빛나는 전공임.
이렇듯 이성게 왕이 되기전 전공은 가히 한민족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 하네요. 그것도 육전... 게다가 회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