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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11 14:15
[기타] 만약에 고려가 금나라를 정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쓴이 : 대은하제국
조회 : 4,916  

고려가 금나라를 정벌을 하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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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yoke 14-12-11 14:30
   
오히려 고려가 패 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는 보병위주고 금나라는 경기병이 아닌 고구려의 개마무사를 그대로 물러받은 중장기병 이였습니다. 넷에서 금나라 기병 검색해보시면 금중장기병 일러스트가 여럿 나옵니다. 아무리 고려가 군사강국이고 활을 잘 다룬다고 한들. 옛 고구려의 정신을 그대로 물러받은 금나라기병을 쉬이 이기기는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례로

금나라 일반 사신단 12명인가? 17명이

송나라 보병 2천을 모조리 격파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출하점대첩인가 잘은 생각 안나는데

그때 요나라 대군도 격파 했고요.

고려가 금나라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아뒤도업네 14-12-11 14:38
   
동북9성도 그 고생해가면서 얻어놓고 실속없다고 돌려주는 판에 금나라 정벌은 무리죠.
kiyoke 14-12-11 14:41
   
아무리 고려의 10만 ~30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한들.. 오히려 송나라 보병 꼴 날지도 모르네요. 고려가 아무리 강소국이라고는 하나 금나라의 대기병앞에서는 무기력하죠.

옛날에는 중장기병이 탱크 그 자체 였으니까요.

비유하자면 일반 보병이 소총들고 독일 티거탱크로 돌격해서 xx하는 셈이죠.
스마트MS 14-12-11 14:59
   
송나라와 금나라가 접전중. 무인정권 성립 직전 고려군의 전력을 바탕으로 전제조건이 붙는것인가요?
아니면. 척준경이. 금나라에 향해 칼을 겨눌수 있는 가상의 조건인가요?
     
대은하제국 14-12-11 15:11
   
척춘경이요
          
스마트MS 14-12-11 15:38
   
철저히 가상이긴 하지만.
척준경이 활약하던 시기에도. 여요전쟁 당시에도 비교적 유리한 판짜기도 힘들었던걸로 알고있습니다

어려운 싸움이 상당하였죠. 하물며. 그러한 요나라를 망국으로 만들고. 세워진 초기 금나라의 원정은. 흠.
난전에 고전의 양상을 그릴듯 해서. 실패할 확률이 개인적으로 높지 않를까 하네요.
남궁동자 14-12-11 14:59
   
고려와 금이 전쟁하면 누가이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고려가 송처럼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금 이전의 요도 거란족 즉 유목민족의 나라였고 기병이 강했지만 고려와 전쟁해서 패했죠. 중기병이 강한것은 맞지만 중기병을 상대할 방법이 없는것도 아니고요.
남아당자강 14-12-11 15:29
   
고려를 폄하 하는 것은 아나지만 고려가 요를 물리친 것도 고려땅에서의 전투라는 점이 크지요. 대규모 원정의 불리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듬니다. 금이 고려를 침공하였을시 고려가 물리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고려가 금의 땅으로 들어갔을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밀리터리의 금과옥조 전쟁은 보급이다.
굿잡스 14-12-11 17:06
   
저는 당시 가능성이 반반에 만약 송과 연합해서 반격을 가했다면 성공확률은 더 높았다고 보이군요.

이와 비슷한게 명과 조선이 후금에 대항한 샤르후 전투인데 이당시의 가장 큰 문제가

당시 후금의 뛰어난 기마술과 용맹함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서 날짜를 정하다 보니

만주족 기병의 기동력에 각개 격파를 당해서 이미 조선군이 도착했을때는 다 깨진 상태에 그것도 같

이 싸울 명군 조차도 먼저 선수치고 나가다 격파당했다는 거죠. 그기에 애초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로 소극적 전투의지로 임했던 상황이라 2만 정도의 보병 위주였고.


그런데 남북국시대 이후 금 고려의 관계를 보면 막상 금이 대국의 위치에 올라도 고려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는 금황실에 창업 연합 세력인 발해인들의 영향력도 있었겠지만

앞서 윤관이 여진족에 대항한 기병등 <별무반> 편제를 통한 17만 대군으로 두만강 700리까지

몰아내고는 동북 9성을 실제 쌓은 저력 때문이죠. 이당시 여진족은 거의 완성 직전에 있던

전투력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진족이 특히나 고려의 물량빨에 혀를 내두르고는 이후 고려

쪽에는 기와 한조각도 던지지 않겠다고 한 거죠.


이당시 고려의 군사 동원력을 보면 작정했을시에 수십만을 일시 동원도 가능했던 때라서

만약 작정하고 쳐들어 갔다면 금나라도 막는데 타격이 상당했을 겁니다. 물론 당시 발해가

망하고 발해 부흥국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도 하지만 고려 조정내로 발해인들의 귀화가 줄을

이어면서 고려 군사편제에 만주에 대해 잘 아는 발해인들이 상당 부분 흡수되고 이들에 의해

고려내에서 북방 영토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래서 힘을 실고 대두될 정도에 발해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진 때입니다.

만약 이정도의 동시 수십만 동원에 옆 송과 협력해서 양공작전을 펼쳤다면 금나라도 상당한

타격에 휘둘렸을 가능성도 높다고 볼 수 있죠.(그런데 좀 애매한게 고려 조정내에서도 같은

민족인 발해인들이 대거 흡수되듯 금나라 역시도 이런 발해인들의 금의 건국 주체 세력중 하나였

다는 사실에서 서로가 트잡이 할 경우 안면 있는 이들이 제법 있어 전투시에 좀 애매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네요 ㅋ)
굿잡스 14-12-11 17:08
   
그리고 조선왕조 실록에 이 공험진에 대한 기록중에 눈여겨 볼 내용이 나옵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karin123 14-12-11 17:11
   
무리수가 있었을 것 같네요. 송과의 연합이라면 모를까.. 음.. 고려 단독으로 30만 이상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보병 위주로 그것도 '정벌'을 가는건데, 금나라 홈에서 금 중장기병에게 이길 수 있을지..
     
굿잡스 14-12-11 17:52
   
윤관의 17만 대군안에 별무반이라고 이미 기병편제를 활용해서 실제 동북 구성을

개척했던 경험이 있던게 고려군이죠.(이미 이때 여진족의 전투편제는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상황) 그기에 발해가 망하면서 동만주일대의

상경용천부나 서경압록부등 북방에서 살던 발해인들이 계속해서 고려내로 들어와

군내에서도 활약하고 있던 상황이였고.


그리고 중장기병이라는게 마냥 최강은 아닙니다. 물론 위력적이긴 한데 무게가

있다보니 장거리 기동력에도 문제가 있고 단독으로 돌격~ 어쩌고 이런 편제 활용

은 아닌.궁수병등 보병과 연계해서 활동해야 위력적이지 마냥 독고다이로 중장기병

이 날고 뛰지는 못합니다.
          
karin123 14-12-11 18:19
   
음 근데 역시 금나라 본토로 들어가니 좀 힘들지 않을까요?
               
굿잡스 14-12-11 18:29
   
금의 수도가 우리 발해인들이 모여 살면서 이룩한 도시문명인 요양일대라서

딱히 모르겠네요.( 마냥 북쪽도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본격적 금의 정벌을 획책했다면 송과 연합해서 고려의 물량빨

에 송과 연계된 금이 쉽게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금나라 역시도 이후 몽골과 송의 샌드위치에 내부적으로 일시 복속시킨

거란등의 배반으로 인해 내우외환격으로 무너져 버렸거든요.(몽골이 마냥

강했던게 아니라 이런 국제적 역학을 잘 이용하면서 승기를 탔던 시기)

여진족이 인구가 적다보니 발해인, 거란, 한족등

잡종에 이런 세력들도 반독립적 군사력으로 활용하다보니 실제

이런 반요사상의 발해인들이 돌아서면서 요나라도 급격히 무너져 버렸던

이유이고. 만약 고려조정이 강력한 의지가 존재하고 내부적으로 이런 금나라

내부의 발해인들을 포섭해서 고려쪽으로 끌어 당기는 전술적 유화책에

국제적으로 송과 공조해서 금을 본격적으로 무너뜨릴 의지를 가지고 강행

했다면 금도 상당히 위태로와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현실은 이렇게 되지 않고 도리어 고려가 이런 금의 송에 대한

공세적 부분을 이용해서 송나라에게 막 뜯어 먹었던 시절이라서리 ㅋ
                    
karin123 14-12-11 19:50
   
정말 안타까운 시절이에요..
                         
굿잡스 14-12-11 23:40
   
저는 딱히 안타까운 시절은 아닌듯 보이군요.(고려가 금때문에

전쟁의 혈투를 벌이면서 상흔을 입었던 것도 아니였고 도리어 실리는 더

챙겨갔던 시절이니)

그기에 저는 금사를 남북국시대 발해 신라 이후의 연장선으로 금을 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얼마전 장경희 교수의 금 태조인 완안 아골타의 황릉과

고려 태조 황릉의 유사성 그리고 서토 송 황릉의 상이점에 대한 비교 논문을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금나라의 도시 문명이나 황실의 인적 요소는 우리쪽

에 직접적 친여성이 매우 높은 역사입니다. 후대 후금의 만주족이야

서토의 도시문명속에 들어가서 이원적 정치 체계의 다원적 제국주의에 입각

해서 정복왕조를 펼쳤지만 금나라는 기존 요양의 우리 발해인 즉 고구려

도시문명과 행정,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이후 북경까지도 직접 고구려인의

도시설계를 통한 팽창 정복활동의 시기였든.

제가 고려시대에 그나마 안타깝게 생각한 시기는 만약 고려가 무신집권기

의 이원적 정치 체계로 군대가 사병화 문란해지지 않고 이전처럼 고려 황

제의 단일 구심점으로 대군 운용이 가능했더라면 박살난 금시기에

요동일대까지 확장해서 몽골세력을 사전에 억제시키고 고려가 요동을 제패

하면서 분열,약화된 북방의 세력들을 규합 흡수해서 덩치를 키워 고려,몽

골, 남송의 삼각구도로 가져갈 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

네요.(그랬다면 거대한 황룡사 구층 목탑도 불타버리지 않았을)
                         
karin123 14-12-15 01:28
   
음 ㅋ 그냥 개인적으로는 고려가 땅 좀 많았으면... 그리 생각하는 지라..
남아당자강 14-12-12 09:02
   
전쟁은 그냥 전투병끼리 막싸움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보급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식량만해도 만약 총병력 30만에 그중 5만이 기병이라 생각하고 계산하면 아무리 적게 먹어도 사람은 일인당 500g 말이 하루 1kg을 먹는다 치면 하루 소모 식량이 사람이 15만kg 말이 5만kg 합이 20만kg 즉 200톤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외 필요한 물품을 제외하고 식량만 매일 200톤을 도로 사정도 엉망인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중국땅에 보급하면서 전쟁을 한다는게 고려의 역량으로 가능 하겠습니까? 그리고 수당시절 고구려가 승리한 요인은 지속적인 보급의 차단 덕분입니다. 야전에서는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서 한끼만 굶어도 싸움 못합니다. 강수의 답설인귀서에 당나라 군사들의 뼈는 중국 것이지만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굿잡스 14-12-12 11:48
   
그외 필요한 물품을 제외하고 식량만 매일 200톤을 도로 사정도 엉망인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중국땅에 보급하면서 전쟁을 한다는게 고려의 역량으로 가능 하겠습니까>??

우선 분명히 짚고 넘어갈 부분은 금나라의 수도인 요양은 전혀 쭝국땅 어쩌고

할게 아니군요.

이 요양일대는 바로 고구려의 서북쪽 중대형 방어 성곽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으로 요동성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 300만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이

요동성 하나 격파 못하고 이후 정예 30만 별동대를 평양으로 급파하다 을지문덕에게

궤멸(살수대첩)되었고. 이후 당나라가 일시 평양성 함락에 유효했지만 여전히 견재해서

요동일대의 성주들에 의해 이후에도 치열한 저항지역중 하나였고 그래서 이후 요동은

30여년 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고 본격적 이전 고구려지역과 백성을 통합하기 전까지

고구려로 불리던 지역으로 따로 큰 고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소고구려로 불리다 흡수된

지역입니다. 당연히 발해 영토에 이후 요나라가 상경용천부를 함락시키고 동만주 일대에 치

우쳐 있다 보니 관리가 힘들고 반란이 지속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대대적으로 이 요양일대

로 우리 발해인들을 대거 이동시켜 이곳을 요나라의 5경중 동경으로 관리하며

발해인들이 밀집 중요 도시문명으로서 반독립적 군사력까지 가지고 있었던 상태임(이 일대

의 해안가는 1000여리 즉 400킬로가 곡창지대로 요나라의 최대 곡창 지대 2곳중 한곳으로

가구수만 수십만에 이를 정도였던 상황) 한마디로

서토 송나라는 요나라에 치여 연운 16주까지 빼앗기면서 군신관계로 더욱

찌그러져 있던 상황인데 요동은 쳐다보지도 못했고 짱개들의 땅 어쩌고 운운 한다는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 시작이죠.


고구려 성곽 배치도.

http://tadream.tistory.com/501


그리고 위 고구려 성곽 배치도를 보면 알겠지만

중세 고려는 북진정책을 국가의 중요 정책중 하나로 삼고 있었기에 수도인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동급으로 더 위의 서경(평양)도 중시했던 나라였습니다. <윗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도리어 수도인 개성과 평양을 기준으로 봤을 때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700리까지 몰아 붙친 동북방 공험진보다 서북방의 해안을 따라 요양일대의 거리가

훨씬 더 짧습니다>


고려는 북방의 정세가 어지러워지고 요나라와 1차대전에서 평안북도 서북방의

강동 6주를 손에 얻으면서 압록강 하류쪽에서 바로 진격해 오는 지점들을 중심으로 사전에

차단할 요충지와 준비태세를 갖추고 북방의 어지려운 정세에 대비해서 지속적으로 국방력을

키워온 나라입니다.


<조선시대에 가면 고려시대보다는 더욱 선진 행정체계에 인구수나 식량 부양도 증가하지만

도시의 크기를 보면 향촌 자치화로 이농 분산되는 시기라 도리어 중세 고려시대의

도시인구 밀집이 훨씬 크고 대형화된 시기입니다.> 이전 남북국시대의 서라벌 100만에

수도인 100만 대도시인 개경과 동급으로 서경도 이만큼 중시해서 키웠는데 이런

대형 밀집 도시의 크기라는 말은 <일시 인구, 물자 동원에서는 상당히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고려시대의 물량 찍어내는 수준을 보면 감탄할 때가 많은)


보통 보병 위주로 1만단위가 하루 소비량 200석 어쩌고 이야기등 보급 문제가 분명

원정전쟁에서 문제이긴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수도 자체가 이미 개경의 100만 대도시에

평양에 물자와 인적 도시를 키워두고 있었고 단거리로 압록 하류를 지나 요동으로 넘어갈

흥화, 용주 등 강동 6주를 획득하고 강력한 진을 형성하고 있어 만약 송과 연합하는 식의

양동작전에 작정하고 전 30만 동원은 후방 수도 보호도 필요하니 20만 정도에서 물자를

강동 6주쪽으로 실어 날라서 일직선의 요동일대로 간다면 17만대군을 이끌고 실제 동북방

의 이보다 더 멀고 추운 원정 정벌도 성공시켜 항복을 받고 돌아왔던 전력을 봤을때

이보다 도시 여건이 이미 완비된 요양일대를 함락만 시켰다면 이후 물자등 현지 보충이나

관리는 훨씬 쉬웠을 것으로 보이군요.(그외 거주하던 수십만의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포섭하면 더 원활히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높은)



강동 6주 위치

http://victoryhoney.tistory.com/110
          
남아당자강 14-12-12 12:05
   
고려때도 조선때도 서북이나 동북을 개척할때 어떤 악전고투끝에 얻을수 있었는지 기록을 보시면 압니다. 고작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얻는데 그정도 인데 대규모 원정군이 요양성으로 공격해 간다고요? 그리고 당시 만주에 살던 여진이라해야 할지 마갈이라해야할지.... 아무튼 토착 세력들이 고려군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 할까요 아니면 침략군이라 생각 할까요? 살수 대첩이든 귀주대첩이든 요체는 하나 입니다. 대규모 원정군에 대해 성을 의지한 지구전 버티기... 그리고 청야전술과 끊임 없는 보급선 끊기.... 그뒤의 원정군의 괴멸을 노린겁니다. 강대한 수당도 대규모 원정으로 수는 나라가 망하고 당도 무너질뻔 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대규모 원정은 불가능 합니다.
               
굿잡스 14-12-12 12:13
   
님은 뭔가 착각하시는게 이미 요양은 완비된 도시입니다. 개척할 동북방등의

형태가 아니군요(제가 괜히 요나라시절 최대 곡창지대중 하나에 동경으로 이후

금의 수도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시는)

그리고 저는 위에서 반반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송과 양동작전시에는

승률이 더욱 올라갈 것이고. 무엇보다 금나라의 내부적으로 봤을때는 여진족이

소수라서 여전히 반독립적으로 발해인, 거란등 짬뽕으로 데리고 있다보니 실제

외부적 타격이 거세지면(몽골, 송의 양동작전) 돌아서는 배신자들로 인해 요나 금도

와르르 무너지는 형태였음.


무엇보다 고려는 실제 17만대군을 이끌고 요양보다 훨씬 먼 원거리 투사까지

앞서 해보였던 나라입니다. 이후 고려말기의 약해진 상황에서도 요동정벌을 성공시켰

던 나라이고. 물론 전쟁이 어렵고 물자 소비가 많은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쟁이라는게 당연한 물자소비에 여러 희생등을 간과해서 어쩌고가

아니라 고려가 의지가 있었다면 그정도는 가능했던 나라였다는 점은 인지하라는

의미에서 덧붙인 내용이군요. 무엇보다 요동일대는 당시에는 짱개들이 전혀

넘볼 땅도 주제도 전혀 아니였고.(님의 당연하듯 불가능 어쩌고 였다면 고려 윤관

의 17만 대군은 뭐고 이후 약해진 상황에서도 요동정벌등은 뭔지 재차 묻고 싶군

요)
                    
남아당자강 14-12-12 12:31
   
고려가 언제 요동을 정벌했나 하고 찾아 봤습니다. 그런 의견이 나오긴 했는데 그런적 없다가 정설인듯 합니다. 역사를 IF로 가정하기 시작하면 공상만 늘어집니다. 한마디로 군사학적으로 고려는 요동으로 들어갈 능력 안됩니다. 전쟁을 군사와 군사의 싸움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전쟁은 무력의 충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국력과 경제력의 싸움입니다. 거란이 요로 통합된 후엔 고려는 국력상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비록 강감찬 장군에게 패했지만 소배압의 큰소리가 달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대국 송도 우리에게 굽신 거리는데 조그마한 너희가 까부냐??? 그런 소배압도 고려땅에 와서 대패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군이 금의 땅으로 공격해 간다라.... 불가능입니다.
                    
남아당자강 14-12-12 12:44
   
요양은 완비된 도시일지 모르지만 요양으로 가는 만주지역은 황무지 였습니다. 오늘날 같은 완비된 도로망도 없었습니다. 그 황무지를 수레에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실고 원정군에게 지속적으로 수송한다..... 그것도 하루에 수백톤을???? 불가능입니다.
                         
굿잡스 14-12-12 13:13
   
아 그러니까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요양보다 훨씬 먼 동북방까

지 어떻게 실제 원정을 할 수 있었느냐니까요? 혼자 뭔 내내 불가능 어쩌

고 (그럼 이 17만은 밥도 못먹고 싸운 부대입니까?? 뭔소리를 마냥

억측으로 하고 싶은 건지? 참.)
               
굿잡스 14-12-12 13:11
   
고려가 언제 요동을 정벌했나 하고 찾아 봤습니다. 그런 의견이 나오긴 했는데 그런적 없다가 정설인듯 합니다. 역사를 IF로 가정하기 시작하면 공상만 늘어집니다>??? ㅋㅋ

이분 울나라 국사를 안배운 티를 너무 내시는. 공상 어쩌고 ㅋ참.(그래도

몇마디씩 적길래 기본은 아는 줄 알았더만)

1369년 공민왕 시절에 출정. 이미 압록강 건너 우라산성을 포위해서

항복받고 이성계는 지용수 군대와 합세해서 요양성까지 빼앗고 돌아왔음. 이런

1차 요동정벌도 모르심?

이후 2차 우왕시기 요동정벌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것이고

그리고 별무반을 편성하고 이런 요양보다 훨씬 먼 동북방으로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실제 여진 정벌에 나선게 1107년이고 아골타가

대금이라는 국호를 세운게 1115년임. 이 간격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윤관이 맞서서 항복받고 왔던 여진족 부대는 거의 완성직전에 있던 단계였고

몇년 안가서 대금이 세워졌던 상황이였음.


님 글을 보니 딱히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슨 본인 수준에서 어떤 의도성인지

마냥 재단을 우선하고 덤비는 식이군요. 쯧.
스마트MS 14-12-12 23:58
   
1년만에.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넘겨주고. 이 동북 9을 받은 여진은 6년후. 금나라를 건국하고. 10년 후에는
요나라를 멸망 시키고.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는 북송을 추가로 멸망시켰죠.

이런 진행이전. 즉. 윤관 별무반 동원이전
1103년. 여진 우야소의 침공에. 고려는 우습게 보고. 1104 년 1월 반격를 주도 하였지만. 총사. 문하시랑 임간을 비롯한. 김덕진. 이위등은 패퇴
같은해 3월 출병한 윤관 역시 대패.
적의 과소평가를 혹독하게 치른 윤관은. 왕에게 고해. 가히 국가동원령급 전시체제 전환으로
백성의 원성을 살정도로 군 집중을 꾀해 별무반을 조직하고. 훈련시킨뒤
국경으로 나아가. 기회를 틈타
여진족 족장 추장 사면시켜 줄테니 데리러 가라고 전한후
모인 여진족 대소부족의 추장들 일행 400명이 모였을때. 사면 축하연을 펼친뒤
싹다 베여죽여 버렸죠.
이후 머리잘린 닭마냥. 우왕좌왕 하는 여진족을 상대로 100여개의 부락을 무너트리고. 6개의 성을 쌓고. 이후 3개 성을 쌓으면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나누다. 교착상태가 유지될때 쯤 윤관등 . 지휘관들은 1108년. 개선식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9성은 위기에 빠져. 윤관등이. 8천 군세로. 출정하다. 여진족 매복에. 대패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척준경이. 패전의 위기속에서 발군이여서. 합문지후?로 승차 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이런. 9성의 위기. 지원. 패배. 고착상태 유지. 다시. 위기. 를 반복하다 전비지출등 국력소모와 인적희생이 커지자
1109년 7월.  기껏 쌓은 성을 화친의 대가로 넘겨주고 화친파 24명에 주전파 2명의 조정 대세에
윤관과 오연총은. 원수. 부원수. 에서 파면당하고 1111년. 사망한 윤관과 1116년 사망한 오연총 그리고 되돌려준 동북 9성의 결과를 보자면
과연 여진정벌이 최종적으로 성공적인 원정이였나? 에 대해서는 저는 회의적이네요.
수군2000을 포함한 17만병력 동원의 결과가 여진족. 5000의 수급과. 5000의 포로 가 동북 9성의 포기를 상쇄시킬수 있다면야. 흠.
     
굿잡스 14-12-13 14:55
   
물론 이런 식의 단편적 부분만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개척한(7만 5천호의 백성을 이주 정착 시킴) 동북방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 역사 지

리학적으로나 훗날 국제 관계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고 강렬한 족적을 남겼으며 후대에도 지속

적 영향력을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군요.

무슨 말인가 하면 향후 남북한 통일시 한,러,쭝 나아가 잽, 미국등 환태평양

경제시대의 본격적 개막에서 물류의 중심지로 이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현대의

함경북도의 나진, 선봉 지역이 오늘날 그냥 우리 손에 뚝 떨어진 게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물론 여진족이 고려 경내로 들어와서 약탈과 혼거가 생기자 고려 조정도 좌시

할 수 없었던 분명한 시대적 명분과 함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당시 윤관과 고려황제의

뚝심속에서 17만대군을 이끌고 동북방을 개척한 역사적 족적과 더불어 3,40만명에 달하는

민호(民戸)를 이주시켜 개척해 냄으로써 단순히 돌려줬다는 식으로만 평가하지만 저위에

제가 올린 조선왕조 실록의 이후 전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원시기부터 공민왕

그리고 이런 역사적 강렬한 족적이 조명 초기에 공험진 이남을 조선의 영역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던 대외 명분론과 함께 태조때부터 태종, 세종. 단종, 세조등 줄기차게 이 동북방의 공험진

이야기들이 조정에서 대두되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즉 이를 바탕으로 세종이 개척한 4군

6진의 6진이 다름 아닌 함경도 일대이고 나아가 후기의 간도 문제등에 오늘날 물류의

중심지인 나진 선봉이 북한 지역으로 향후 통일시 당당히 우리의 자국 영토의 분명하고

뚜렷한 역사 지리적 명분론이 되어왔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보군요.

물론 고려 금 시기에도 단순히 금의 건국 연합 세력이 우리의 발해인이라는 부분을 떠나서

이런 윤관이 이끈 17만 대군을 통해 여진족이 직접 느꼈을 고려의 실력행사를 통해

서 그만큼 고려, 금간의 국가적 관계에서도 상당한 전쟁억지력을 가지고 금도 고려를 함부

로 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결코 간과할 부분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저는 그렇군요. 실제 해본 놈과 마냥 생각만 한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봅니다.

(전자는 역사가 되지만 후자는 그냥 상상의 나래가 될 뿐인)

이런 당시 고려 황제국의 자주성과 영토에 대한 대외적 능동성이 이후 조선초기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나아가 조선의 사대부들과 조정의 사고나 대외적 시각에도 함몰되지 않는

능동성과 개척정신을 부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지리적 결과물은

오늘날에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개척한 동북방의

역사에 대해서 결코 단순한 시각의 잣대로 전혀 실패라는 식으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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