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고려가 패 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는 보병위주고 금나라는 경기병이 아닌 고구려의 개마무사를 그대로 물러받은 중장기병 이였습니다. 넷에서 금나라 기병 검색해보시면 금중장기병 일러스트가 여럿 나옵니다. 아무리 고려가 군사강국이고 활을 잘 다룬다고 한들. 옛 고구려의 정신을 그대로 물러받은 금나라기병을 쉬이 이기기는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례로
고려를 폄하 하는 것은 아나지만 고려가 요를 물리친 것도 고려땅에서의 전투라는 점이 크지요. 대규모 원정의 불리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듬니다. 금이 고려를 침공하였을시 고려가 물리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고려가 금의 땅으로 들어갔을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밀리터리의 금과옥조 전쟁은 보급이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전쟁은 그냥 전투병끼리 막싸움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보급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식량만해도 만약 총병력 30만에 그중 5만이 기병이라 생각하고 계산하면 아무리 적게 먹어도 사람은 일인당 500g 말이 하루 1kg을 먹는다 치면 하루 소모 식량이 사람이 15만kg 말이 5만kg 합이 20만kg 즉 200톤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외 필요한 물품을 제외하고 식량만 매일 200톤을 도로 사정도 엉망인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중국땅에 보급하면서 전쟁을 한다는게 고려의 역량으로 가능 하겠습니까? 그리고 수당시절 고구려가 승리한 요인은 지속적인 보급의 차단 덕분입니다. 야전에서는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서 한끼만 굶어도 싸움 못합니다. 강수의 답설인귀서에 당나라 군사들의 뼈는 중국 것이지만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고려때도 조선때도 서북이나 동북을 개척할때 어떤 악전고투끝에 얻을수 있었는지 기록을 보시면 압니다. 고작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얻는데 그정도 인데 대규모 원정군이 요양성으로 공격해 간다고요? 그리고 당시 만주에 살던 여진이라해야 할지 마갈이라해야할지.... 아무튼 토착 세력들이 고려군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 할까요 아니면 침략군이라 생각 할까요? 살수 대첩이든 귀주대첩이든 요체는 하나 입니다. 대규모 원정군에 대해 성을 의지한 지구전 버티기... 그리고 청야전술과 끊임 없는 보급선 끊기.... 그뒤의 원정군의 괴멸을 노린겁니다. 강대한 수당도 대규모 원정으로 수는 나라가 망하고 당도 무너질뻔 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대규모 원정은 불가능 합니다.
고려가 언제 요동을 정벌했나 하고 찾아 봤습니다. 그런 의견이 나오긴 했는데 그런적 없다가 정설인듯 합니다. 역사를 IF로 가정하기 시작하면 공상만 늘어집니다. 한마디로 군사학적으로 고려는 요동으로 들어갈 능력 안됩니다. 전쟁을 군사와 군사의 싸움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전쟁은 무력의 충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국력과 경제력의 싸움입니다. 거란이 요로 통합된 후엔 고려는 국력상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비록 강감찬 장군에게 패했지만 소배압의 큰소리가 달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대국 송도 우리에게 굽신 거리는데 조그마한 너희가 까부냐??? 그런 소배압도 고려땅에 와서 대패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군이 금의 땅으로 공격해 간다라.... 불가능입니다.
1년만에.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넘겨주고. 이 동북 9을 받은 여진은 6년후. 금나라를 건국하고. 10년 후에는
요나라를 멸망 시키고.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는 북송을 추가로 멸망시켰죠.
이런 진행이전. 즉. 윤관 별무반 동원이전
1103년. 여진 우야소의 침공에. 고려는 우습게 보고. 1104 년 1월 반격를 주도 하였지만. 총사. 문하시랑 임간을 비롯한. 김덕진. 이위등은 패퇴
같은해 3월 출병한 윤관 역시 대패.
적의 과소평가를 혹독하게 치른 윤관은. 왕에게 고해. 가히 국가동원령급 전시체제 전환으로
백성의 원성을 살정도로 군 집중을 꾀해 별무반을 조직하고. 훈련시킨뒤
국경으로 나아가. 기회를 틈타
여진족 족장 추장 사면시켜 줄테니 데리러 가라고 전한후
모인 여진족 대소부족의 추장들 일행 400명이 모였을때. 사면 축하연을 펼친뒤
싹다 베여죽여 버렸죠.
이후 머리잘린 닭마냥. 우왕좌왕 하는 여진족을 상대로 100여개의 부락을 무너트리고. 6개의 성을 쌓고. 이후 3개 성을 쌓으면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나누다. 교착상태가 유지될때 쯤 윤관등 . 지휘관들은 1108년. 개선식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9성은 위기에 빠져. 윤관등이. 8천 군세로. 출정하다. 여진족 매복에. 대패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척준경이. 패전의 위기속에서 발군이여서. 합문지후?로 승차 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이런. 9성의 위기. 지원. 패배. 고착상태 유지. 다시. 위기. 를 반복하다 전비지출등 국력소모와 인적희생이 커지자
1109년 7월. 기껏 쌓은 성을 화친의 대가로 넘겨주고 화친파 24명에 주전파 2명의 조정 대세에
윤관과 오연총은. 원수. 부원수. 에서 파면당하고 1111년. 사망한 윤관과 1116년 사망한 오연총 그리고 되돌려준 동북 9성의 결과를 보자면
과연 여진정벌이 최종적으로 성공적인 원정이였나? 에 대해서는 저는 회의적이네요.
수군2000을 포함한 17만병력 동원의 결과가 여진족. 5000의 수급과. 5000의 포로 가 동북 9성의 포기를 상쇄시킬수 있다면야.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