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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16 11:48
[일본] 임진왜란 해전사
 글쓴이 : 애국자연대
조회 : 4,603  

임진왜란 해전사 - 1. 불멸의 원균 - Pgr21

임진왜란/인물 2013/08/07 02:47
출처 :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28333

임진왜란 해전사 - 1. 불멸의 원균
2011/04/11 04:33:54 눈시BB


지도에서 거제도와 사천의 거리를 잘 봐 주세요.

생각해보니 저번 편 타이틀인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 편 타이틀입니다. 어느 걸로 보나 이이가 주인공이 됐어야 했는데 이순신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군요. 시작합니다.

명종 30년, 원준량이라는 인물이 아들을 무과에 응시하게 한 것 때문에 비리 문제로 욕 먹습니다. 이 원준량이라는 인물은 실록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미친 듯이 까이죠. 원준량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원연은 문과였고, 셋째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여기에 관련될 만한 아들은 딱 하나 뿐이죠. 원균입니다. 시작부터 참 화려했습니다.

한편, 20세기 말에 원균옹호론이 등장합니다. 이재범이라는 사람은 "이순신이 혼자 몰래 장계를 올려서 원균이 피해받았다"고 하면서, 원균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장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거였죠.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옥포의 오기)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이 실록의 기록 중 이재범의 원균 정론(후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다시 출판되니다)에서 추가한 건 [옥포의 오기] 하나였죠. 이거 하나로 저 장계는 옥포해전의 기록이며 진짜 이순신이 그 때까지 혼자 장계를 올려서 원균이 피해 봤고, 원균이 뒤늦게 장계를 올린 거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 근데 저 실록의 기록은 8월 24일. 그 때는 이미 이전의 해전으로 이순신은 물론 원균도 상을 받은 때였습니다. 이재범이라는 사람이 지식 수준이 얼마나 되든 저걸 헷갈렸을 일은 없죠. [옥포의 오기] 이거 하나로 역사 왜곡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원균은 시작부터 저렇게 더러웠습니다. 그리고 원균옹호론 역시 시작부터 저렇습니다.


1. 경상우수영의 규모
처음에 각 수영의 규모는 다 비슷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각 왜변을 겪으면서 주로 침입하는 곳 등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변형되었다고 하는군요. 임란 즈음에는 각 좌수영은 작아지고 우수영은 커졌다고 합니다. 임란 중에도 심심하면 바뀌고 후에도 바뀌면서 당시 확실한 숫자를 찾기는 어려운 듯 하네요. 가장 확실한 것은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입니다. 경상좌수영은 현재의 부산 다대포부터 시작해서 동해로 울산 등으로 올라가면서 8포, 전라우수영의 경우 8~11관으로 예상하더군요. 어차피 지도에 나온 보성 왼쪽부터 전라도 해역은 모두 전라우수영 걸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렇다면 경상우수영은? 일단 기본적으로 알려진 건 8관 16포입니다. 이 중 웅천, 진해, 고성, 거제, 사천, 남해, 곤양, 하동의 8관은 확실하다고 보시면 될 듯 하네요. 인터넷에 퍼진 여러 논의를 보면 8관 20포, 11관 19포 등 다양합니다. 전쟁 당시 시점(8관)이나 전쟁 중 시점(11관)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일단 제 지식으로 확신할 수 없으니 이 정도로 해 두죠.

이런 비율로 추산할 수 있는 경상우수군은 최소 40척, 통설로는 70척, 최대 100척입니다. 징비록 등 당대 기록에서도 그렇게 나오구요.

전쟁이 시작하면서 병력들이 도망가서 다 모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적었듯 경상좌수사 박홍 휘하에 경상우수군은 집결했습니다. 이 병력을 천오백에서 이천으로 추산하니 그 때 모일 수 있는 병력은 다 모였다고 봐도 되겠죠. 1, 2군은 주로 동북쪽으로 움직였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상륙한 게 19일이니 부산포 서쪽 경상우수영 영역은 아직 적이 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직격타를 맞은 경상좌도의 병력들이 집결했는데 우수영이 집결하지 않은 건 이상하죠. 최전방에서도 집결에 모두 성공하는데 경상우수영만 안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원균에게는 시작부터 도망간 다른 장수들보다 더 죄가 있다고 봐야 됩니다.

위에 언급한 8관 중 전쟁 초기에 함락되었다고 기록된 곳은 웅천, 진해, 고성 세 곳 뿐입니다. 그나마 진해는 파선되서 육지로 표류한 60명에게 당했고 현령은 원균과 함께 도망갔다고 돼 있죠.
원균의 공문이 이순신에게 도착한 게 15일, 임란 당일에 보냈다고 생각하면 이틀 거리죠. 전라좌수군이 집결하기 위해 각 관포에 공문을 보내서 모이는 기한을 3일로 잡았습니다. 경상우수영에도 같은 시간을 적용한다면 임란 발발 당일, 혹은 다음 날에 집결을 명령해도 3군이 김해에 상륙하기 전에 모일 수 있으며, 그 두 배로 잡아도 김해 근처가 아니라면 충분히 모일 시간이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탁영의 정만록에는 개전 직전 경상감영의 검열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전 전 달인 3월달에 경상우수영의 모든 관포를 점검했다는 거죠. 대마도에서의 최후통첩 때문에 이일과 신립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점검하던 때였고, 전쟁광인 김수가 점검하던 때입니다. 예정대로의 숫자가 없었다면 분명 문제가 되었겠죠. 준비가 안 돼 있어서 판옥선이 네 척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2. 원균의 도주 시점
원균이 초기에 도망갔다는 기록은 실록,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등에서 공통되게 나타납니다. 다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죠. 모두 옮기면 너무 길어지니 간단히 넣어 보면...

6월 28일 김성일 장계 - 군영을 불태우고 격군만 있는 배로 사천에 숨어 있음 -> 고성에 적이 없어 가라고 몇 번이나 독촉하니 "19일"에 고성으로 갔다가 적이 오는 걸 보고 다시 후퇴. 전라도 수사와 힘을 합쳐 다시 치겠다 함. 남해는 기효근이 이순신이 군량을 다 불태워서 기효근이 돌아와서 어렵게 지키고 있음. 거제 현령 김준민은 혼자 성을 지키다가 근왕하자고 김수가 불러서 육지로 가니 적이 거제도를 점령함
같은 날 김수의 장계 - 조라포, 지세포, 율포, 영등포 등이 비었고 김준민만이 성을 지키고 있음. 원균은 육지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에게 관고를 불태우게 함. 웅천 현감 적이 오기 전에 도주.
김수의 다른 장계 - 남쪽 변방을 침범한 적은 수사 원균이 잡음. 자기는 18일에 근왕하러 전주에 왔고 지금 곧바로 님 보러 감.

(이상은 같은 날에 적힌 걸로 봐서 늦게 오거나 그 때 가서 다 같이 적은 걸로 보입니다. 저 장계들은 5월 중에 쓴 것일 겁니다.)

같은 날 전라도 절도사 최원의 장계 - 5월 7일에 옥포 해전 승전 전함

난중잡록
적이 거제도로 가니 원균은 백천사로 갔는데 어선을 보고 적인 줄 알고 노량으로 후퇴. 우후는 백성들을 내쫓아서 백성들이 혼란해졌는데 도망이 늦을까 무서워서 활을 쏘면서 강요. 여기에 임신한 여자 둘이 맞는 등 많이 죽음. 기효근은 창고를 불 태우고 달아났는데 정작 적은 남해에 아직 안 옴 (경상 순영록에서 베낌)
삼도 수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가서 크게 이김. 근데 원균이 이전에도 한 번 갔었는데 적이 많아서 퇴각. 원균은 전함 다 침몰시키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이운룡이 막아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함.

자. 이것들을 보면 뭔가 어긋나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원균의 도주 시점이죠. 김성일의 장계에는 원균이 이미 도망갔고 자기가 명령을 내려서 19일에 고성을 탈환하러 갔다고 하죠. 임란이 벌어지자마자 도망갔다는 얘깁니다. -_-; 문제는... 김성일은 이즈음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했다는 죄로 잡혀갔을 때라는 거죠. 난중잡록에는 가덕도 (요새 화제가 됐던 그 가덕도 맞습니다. 앞으로 자주 나옵니다)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고 백천사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백천사는 지금의 사천 지방에 있습니다. 거제도보다 뒷편이죠. (이렇게 서로 상이한 기록이 있을 경우 다 같이 적어서 후세의 판단에 맡기는 게 당시, 특히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의 방침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전쟁 초반이라 그런지 혼란스러운 내용이 많습니다. 난중잡록에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할 때 "전라좌우수군이 모두 모여 있었고" "적이 사천과 남해에 가득 차 있다"고 했죠. 둘 다 사실에 맞지 않은 내용입니다. 전부 의심해 가면서 봐야죠.

일단 맞는 것끼리 맞춰보면
"가덕도까지 갔다가 도망가서 거제도의 우수영 본영 불태우고 전선 다 자침하고 도망"
"사천에 있다가 고성 먹으러 가다 백천사에서 적을 보고 노량으로 도망" (지도 보시면 이것도 웃기죠)
으로 볼 수 있겠죠. 이걸 난중일기에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15일 - 90척이 영도 앞바다에 정박
16일 - 부산진 함락
18일 - 동래성 함락
20일 - 김수의 지원 요청 (을 조정에 허락 받기 위해 장계 보냄 -_-; )
한편 임진장초에 보면 20일 김수의 장계에서는 원균에게 출동 명령 내렸다고 함.
26일 -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에 전라좌수군도 지원해야 될 거라고 해서 경상도 각 장수들에게 그 곳의 상황과 집결지 설정해 달라고 함.
27일 - 민준의 서장(23일 작성)에 원균이 출동할 거라 해 왔으며 전라좌수군도 지원하라고 함.
29일 - 적선 500척이 부산, 김해 등 장악 후 각 해변고을 침입. 10척을 깼으나 본영 함락. 당포로 헬프

23-25일분은 없습니다.

경상우수영 본영에서 전라좌수영 본영까지 걸린 시간을 이틀이라고 치면 저기서 -2를 시켜야겠죠. 김수가 20일에 "원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는 공문이 도착한 걸 보면 원균에게 출동명령을 내린 건 17~18일 쯤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때 원균이 가덕도로 갔다가 도망쳤다면 김성일이 어떻게든 우도 내에서 반격을 시도하면서 원균에게 고성을 점령하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같은 기록에 여러 장수들을 거느려서 고성을 탈환하려 했다가 후퇴한 게 나옵니다. 원균에게만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함께 간 거죠)
즉, 원균이 김수의 출동 명령에 곧바로 출동했고 곧바로 퇴각했다면 -_-; 원균은 개전 직후에 도망갔다는 게 됩니다. 이 때 경상우수영에서 버틴 시간은 불과 3~4일. 당연히 적은 거제도는 둘째 치고 김해까지도 오지 않은 시점입니다. 이렇게 볼 경우 옥포해전 전까지 원균의 말은 모두 훼이크가 됩니다. 적이 무서워서 도망가놓고 "싸울 거다" 이랬다는 거죠. 그리고 원균이 100척을 가라앉힌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 됩니다.

반면 김수, 민준의 공문이 원균의 훼이크가 아니고 그 때까지 경상우수영에 있었으며, 거제도 부근까지 적이 오자 도망갔다면 경상우수영에서 도망간 시점은 20~27일 사이가 됩니다. 이 경우 어느 정도의 교전은 있을 수 있었겠죠. 이 시기 김해, 웅천 등지에 200척이 상륙했다고 하니 (물론 수송선이었습니다) 여기에 겁 먹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거제도를 향한 적 병력은 겨우 20척 -_-; 거기다 이 때 경상우수영을 지키고 있었다면 사천 쪽에 있는 백천사에서 적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거랑 다릅니다. 지도 보면 알겠지만 거제도에 적이 나타났다는데 사천에서 놀라서 도망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죠.

재밌는 건 원균옹호론자들의 성경이나 다름 없는 원균행장록의 기록입니다. 거기에는 "휘하에 4척밖에 없어서 우후에게 본영을 맡기고 곤양으로 물러났다"고 돼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원균이 도망간 시점을 임란 직후, 늦어야 18일 정도로 추측하며 그 이후 원균의 행적은 곤양-사천-고성 수준으로 배가 있기는 하지만 김성일 혹은 김수의 지휘로 육전에서 싸우기를 명령 받은 상태고, 원균은 김수, 민준, 이순신을 모두 속이면서 아직 경상우수영의 전력이 남아 있는 쪽으로 주장했다고 추측합니다. 그 훼이크를 변명하기 위해 4월 20일-30일쯤에 원균은 남해 등의 아직 안전한 후방에서 병력을 다시 집결하고 고성 쪽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다시 후퇴했고, 이순신에게는 남해까지도 적이 가득 찼다는 쪽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거죠. 그 때문에 나온 게 이순신의 남해 부근 4개 포구의 군량을 방화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으로서는 원균이 "싸우다가 졌고" "적이 남해까지 진출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경상우수영을 방화하고 100척을 가라앉힌 시점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기는 피하고 휘하 병력은 우후에게 맡겨서 보존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이 거제도로 오는 상황에서 가라앉혔을 것은 확실합니다. 그게 원균이 초기에 도망갔을 시점이든 적이 거제도로 오던 시점이든간에요. 그리고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거제도로 온 적의 규모"는 20척 정도였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원균은 4월 20일 전에 부산포 쪽에 적이 많은 걸 보고 사천-곤양 쪽으로 도망갔고, 늦어도 적이 거제도로 올 때는 우후를 시켜 본영을 불태웠으며, 자신은 김수나 김성일의 명에 의해 육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병력을 모아서 치러 간다고 김수와 이순신에게 훼이크를 쳤습니다.

임진왜란을 집필하신 김경진-윤민혁-안병도님 트리오(?)가 있는 워포그(warfog.net)에서는 우후가 경상우수영 본영을 불태운 걸 4월 22일로 추정하시더군요. 음... 일단 제 생각은 저렇습니다.


3. 10척, 30척 분멸설
29일 난중일기에는 "원균이 10척을 분멸했다 카더라"라고 돼 있습니다. 5월 10일에 선조와 선전관 민종신의 대화에는 "원균이 30척을 깨뜨렸다 카더라" 가 기록돼 있습니다.

원균옹호론의 골자 중 하나죠. 임란 최초의 승전은 원균이 (4척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록했다는 거죠.

글쎄요. 이 모든 건 원균이 했다 카더라일 뿐입니다. 문제는 위에 적었듯 그 때 원균은 곤양-사천 땅에 있었으며 적이 그 때까지 거기에 오지도 않았다는 거죠.
워포그에서 보니까 창원에 상륙한 적이 조선 수군을 깨뜨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내용이 불분명하며 원균이 거기에 참전이나 했을지 의심합니다. 글쎄요. 위에 적었듯 전쟁 극초반에 가덕도로 갔다는 것 말고는 원균이 거제도 쪽으로 갔다는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백천사(기록에는 배천사로 합니다만 한자가 백천사네요)가 사천에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고 알고보니 이 배천사는 거제도 동쪽에 있더라... 이게 아닌 이상 원균은 후퇴한 후 거제도 동쪽으로 간 일이 없습니다.

거기다 이순신에게는 10척이라고 해놓고 선전관에게는 30척으로 알려진 것, 원균이 정말 30척이라는 나름 대승을 거둔 거면 이순신에게 가장 먼저 알렸어야 했죠. 원균행장록과 옹호론자들은 이걸 "승첩"이라고 하지만 원균이 이순신에게 알릴 때 이건 "패전"이었습니다. 10척을 깼지만 졌다 이런 뉘앙스였죠.

이것과 위에 말한 원균의 "훼이크"를 합치면, 어디까지나 이건 원균 자신의 체면 살리기용 훼이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과 원균이 남해까지 적이 진출했다는 훼이크 때문에 이순신은 남해의 포구의 물자를 방화했고, 옥포 해전에서 만날 때 "단 한 척밖에 없었다"면서 원균에게 실망하는 단서가 되는 거죠. 원균이 애초에 단 한 척밖에 없으니 살려달라 이렇게 말했으면 그런 말이 없었겠죠.

원균은 이순신에게 아직 싸우고 있다는 식으로 말 한 겁니다.

원균의 10, 30척 분멸설이 "승첩"이라고 주장하는 건 원균행장록밖에 없으며, 그렇게 원균을 찬양하던 선조도 "원균이 제일 먼저 이겼다"고 하지 않고 "원균이 구원을 청하고 경상도에서 이겼으니 원균의 공"이라고밖에 못 했습니다. 선조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원균도 임진왜란 극초반의 행각에 대해서는 절대 승리라고 말 하지 못 한 겁니다.

여담으로 원균행장록은 칠천량 해전도 "지는 상황에서 8척이나 깼으니 대단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 대단하네요.

그리고 위에서 나온 김수가 "남쪽 바다에서는 원균이 이겼다"는 건 시기상 옥포해전의 기록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4. 결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준민은 거제현령이었습니다. 진주에서 기꺼이 전사한 것처럼, 그는 절대 적을 피할 인물이 아니었죠. 실제 임진왜란 초기에 그는 원균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거제성을 지켰습니다.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나(원균이 김준민 욕 했는데 구라다) 이순신의 옥포해전 장계(김준민은 원균이 불러도 안 오니 왜 이럼?)를 보면 원균은 그를 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김준민은 원균이 도망가는 걸 보고 실망하고 후에도 거제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김성일의 기록에 "김수가 근왕을 위해 불러서 김준민이 거제도를 떠났고, 그 후에 적이 거제도에 가득 찼다"는 걸로 봐서 거제도가 완전히 함락된 시점은 김수가 근왕군을 소집해서 전주로 향했을 때이며, (전주에 도착한 게 18일이죠) 옥포해전 이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거제도는 경상우수영 전체가 괴멸될 정도의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원균이 싸우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해전에서 밀려도 거제도에서 김준민과 함께 싸웠겠죠. 그가 김준민을 욕한 것은 김준민이 거제도를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경상우수영의 전력은 최소 40척(윤민혁님의 추정이더군요 보니까)에서 아예 전라좌수영과 비슷한 20척으로 봐도 충분히 적과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최대 100척에 이르는 병력이 흩어지고 경상우수영 본영을 방화한 것은 모두 원균의 죄로 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숨기기 위해 다른 장수들에게 최대한 훼이크를 쳤습니다.

뭐 그 때 경상도의 장수들이 신나게 도망갔으니 원균만 딱히 욕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냥 원균의 병력이 그들보다 좀 심하게 많았을 뿐이죠. 그래도 이운룡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싸우려고 했으니 무작정 도망만 간 장수들보다는 나을 겁니다. 의지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후의 결과를 생각해 보면 그냥 죽거나 멀리 도망가 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불안한 진군을 계속 합니다. 대체 경상도 해안이 어디까지 먹혔을까 걱정 됐겠죠. 원균을 만나기까지 계속 각 포구를 정찰하면서 진군합니다. 근데 희한하게 적을 처음 만난 곳은 거제도 동쪽 옥포였죠. 경상우수영 본영이 있던 오야포는 거제도 서쪽이었구요.


5.
지금 와서 생각합니다만, 원균옹호론이 없었다면 원균이 이리 탈탈 털리면서 욕 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당시 썩은 장수들처럼 도망가고, 잘 싸우는 장수 모함하고 한 것 뿐이죠. 그냥 규모가 좀 심하게 커서 욕 먹었고, 하필 비교 당하는 상대가 이순신이라서 욕 먹은 것 뿐이죠. 그런데 원균옹호론이 기승을 떨치면서 이순신과 비슷한 급으로 연구를 당해서 더 욕 먹게 되었습니다.
거 참... 왜 그럴까요?

사실 원씨 분들은 억울한 게, 원균옹호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원균에 대해서는 조용히 있었죠. 그런데 선조를 띄우기 위해 원균을 옹호하면서 힘을 얻어서 원균옹호론이 발전합니다. 자기 조상이 죄가 없다는 데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죠. 원균은 분명 부끄러워할 조상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조상을 변명하는 것도 모자라 띄우려고 하면 더 욕 먹을 뿐이죠.
김경진님은 말씀하셨죠. "같은 전주 이씨 가문에서 세종대왕도 나오고 연산군도 나온다"구요.

아무튼, 아직도 bgm 틀고 있으신 분들은 같이 외쳐주세요. 개~쉑 개 개~쉑 개 개~쉑 오 오오오오 ( . .)

임진왜란 해전사 - 2. 태산과 같이
2011/04/12 08:28:47 눈시BB


합포 해전은 마산이냐(일단 통설) 진해냐로 설이 나뉜다고 합니다. 진해라면 경야한 걸로 표시된 남포 근처가 되겠죠. 그나저나 직선으로 죽죽 긋다가 곡선으로 하니 힘드네요. 이 글이나 앞으로의 글들에 "일본 수군 병력"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무조건 워포그에서 나온 말들 베꼈다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5월 5일 당포에 도착한 시점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적의 소굴로
앞서 5월 2일, 남해로 나아간 전라좌수군은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남해현의 미조항, 상주포, 곡포, 평산포가 텅 비어 있던 거죠. 이미 이 보고를 접했지만 직접 보니 황당했을 겁니다. 결국 창고를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가져가기에는 어렵고 적이 쓰지 못 하게 함이었죠.

후에 기효근 등이 돌아왔을 때는 초토화된 상태였고, 김성일의 장계에도 이들이 돌아온 후 어렵게 버텼다고 합니다. 이는 후에 기효근 등이 이순신을 욕 하는 구실이 되죠. 이 시기는 적이 한강을 막 넘고 한성에 도달한 때로 이미 점령한 경상우도 일대에는 60~80명 정도의 적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적은 없었습니다.

자기 말로는 싸우러 나갔다고 하지만... 글쎄요.

5월 5일, 당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원균은 오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모르니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죠. 빨리 당포 앞으로 나오라는 통보를 한 뒤 하루를 보냈죠.

6일 원균은 나타납니다. 다음 날 한산도 쪽에서 나타나죠. 단 한 척만을 타고 말이죠. 적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동안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타고 나타납니다. 위에 불태운 남해 포구를 맡은 장수들이었죠. 한편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각기 협선(연락용 배)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윤룡 등이 두 척에 나눠 타고 도착했습니다. 판옥선 네 척, 협선 두 척의 참 대단한 함대였죠. 이렇게 연합 함대는 탄생합니다.

전라좌수영 병력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이었습니다. 포작선은 보자기배로 불리는데 고기잡이 배였습니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싹싹 긁어모아서 간 거죠. 그 이후의 해전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판옥선 28척의 함대가 모였습니다. 목표는 가덕도. 부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앞으로 계속 언급될 겁니다. 가덕도가 역사에 나오는 건 거의 이 때 뿐인데 400년 후에 화제의 중심에 오르게 될 지 누가 알았을까요.

6일에 거제도 남단을 돌아 동쪽 송미포에서 하루를 지샙니다. 견내량을 통과하다간 적의 눈에 띄일 것이니 그걸 피하려 한 것이죠. 조선 수군은 심심하면 이 길로 갔지만 일본군은 단 한 번도 이 곳을 이용하지 못 했습니다. 그 정도로 해전에 약했던 거죠.

다음 날,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장소는 옥포였죠.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신기전을 쏘아 알렸고, 이순신은 전군에 명을 내립니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고 신중하기를 태산과 같이 하라.

아마 옛 말 중 하나를 인용한 것일 건데 못 찾겠군요.


2. 옥포 해전
당시 옥포에서 약탈하고 있던 적은 도도 다카도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맞다면 수군 총대장이 약탈이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게 되겠죠. 그야말로 바다에서 적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느낌이 강합니다. 낮 12시 쯤이었습니다.

임진장초에 실린 이순신의 장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적도들은 그 포구에 들어가 분탕하여 연기가 온산을 가렸는데, 우리의 군선을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어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만 배를 몰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6척은 선봉으로 달려 나오므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배안에 있는 관리와 군사들도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분발하여 죽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이 때 적은 뛰쳐나온 6척을 제외하면 육지로 달아나기 바빴으며, 26척을 깨뜨리고 불태웠다고 했습니다. 이 중 경상우수영에서 깨뜨린 적은 5척이구요.

긴장되었던 첫 전투는 이렇게 화려한 승전으로 장식되었죠. 이후 거제도에 상륙해서 적을 섬멸하려 했으나 포위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포기하고 영등포로 가서 정박할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죠. 왜 대선 5척이 멀지 않은 바다에서 지나간다는 보고가 왔거든요. 이렇게 웅천의 합포 앞바다까지 전진합니다. 오후 4시쯤 마찬가지로 5척을 깨뜨리고 남포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8일에는 [진해 땅 고리량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들고 출진, 각 해변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전진해서 고성 적진포에 도착, 적을 격파했습니다. 이 수가 또 13척이었죠.

이 전투 후 가덕도로 다시 전진하려고 했으나 지형이 영 좋지 않고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각을 결정합니다. 이 결정을 내릴 때 왕이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상감께서 관서로 피난가셨다는 기별을 듣게 되어 놀랍고 통분함이 망극하여 오내(五內)가 찢어지는 듯 하고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종일 토록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습니다.]

임진장초에 기록돼 있는 내용입니다. 다음 날인 9일 정오에 본영에 도착한 후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명을 내린 후 해산합니다. 진격만큼이나 빠른 퇴각이었죠. 이렇게 1차 출동은 끝이 납니다.


3. 일본군 병력
일본 수군의 자세한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키 요시타카 - 1500
도도 다카도라 - 2000
와키자카 야스하루 - 1500
가토 요시아키 - 1000
구와야마 마사하루 -1000
구루시마 미치후사 - 700
도쿠이 미치토시 - 700
스가이 에몬쇼우 - 250
호리우치 요지요사 - 850
스기와카 덴사부로 - 650

이렇게 해서 총 병력은 9450명입니다. 보시면 에게? 하실 겁니다. 가장 많은 도도 다카도라만 해도 이천 명은 순수 전투병력이고 격군 등 비전투병력을 뺐다고 해도 한 척에 40명씩만 태워도 50척밖에 안 나오죠. 그나마 저것도 쥐어짠 병력입니다. 임란 당시 도도 다카도라의 영지는 2만석 정도로, 1만석 당 보통 250명 정도 뽑는 게 평균이라고 하는데 이를 따지면 가능한 병력은 500명, -_-;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경우 3만석이고 구키 요시타카는 3만 5천석.

참고로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동원한 병력은 990명입니다.

이렇게 당시 수군으로 편성된 다이묘들의 규모로 생각하면 이후의 해전 규모가 성립이 안 됩니다. 당장 다카도라만 해도 옥포해전에서 26척이 불 탔으니 전 함선의 절반 이상이 당했다고 봐도 될 정도니까요. (병력은 도망갔다니 그러려니 합시다.) 그나마 2차 출동까지 가면 말이 되지만 3차의 한산도로 가면 정말 말이 안 되네요.

이런 점에서 김경진님은 이 수군들은 모두 수송선 호위, 길잡이 용으로만 해당된 병력이고 옥포 해전조차도 싸운 병력의 다수는 육군이었을 거라고 주장하시더군요. 흐음... 따져보면 처음 돌격해 온 6척만 수군이었을까요? -_-a 아무튼 도도 다카도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 그가 직접 참가했는지 같은 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여기서 만난 적들은 모두 조선 수군을 보자 도망가기 바빴다는 겁니다.

이런 통설 (임란 해전에는 일본 수군만 참전했다) 은 일본인들이 이순신의 공을 낮추는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아마 계속하게 될 듯 하네요. 특히 3차 출동에서요.


4. 후일담

1) 연명장계 사건
수정실록에 따르면 이 때 원균이 "장계를 같이 쓰자"고 했는데 이순신은 "천천히 하자"고 해 놓고 혼자 장계를 올렸고, 그 때문에 원균이 열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 원균옹호론의 중추로 이순신 역시 공을 탐했다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기 전에 송우혜 교수가 강력하게 반박하죠. 당시 장계를 보내는 시스템은 조정에 올리면서 주변 지휘관들에게 그걸 알리고 복사본을 보내는 식이었습니다. 당장 난중일기만 봐도 "원균의 공문이 오고 그걸 주변에 보냈다"는 식이 많습니다. 혼자 몰래 장계를 보낸다는 게 불가능한 겁니다.
임진장초에서나 난중일기에서나 경상우수영 병력이 5척을 깨뜨리고 조선인 1명을 구출했다고 하면서 그 쪽 란을 비워놨습니다. 원균이 이에 반박하려면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애초에 연명장계를 올리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상식에 어긋나니까요.

재밌는 건 임진왜란 중에는 이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분명 이순신을 까기 좋은 내용인데, 정작 나오는 건 "원균이 자기 아들에게 공이 있다고 올리자 이순신이 이걸 깠고, 그 때문에 원균이 열 받았다"는 겁니다. 혼자 몰래 공을 올렸다는 건 정유재란 전에 나오는 얘기죠.

한편 이 장계에서 "오직 우수사 원 균은 단 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신의 여러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을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부와 격군2명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참 잘 하는 짓입니다. 그런 한편 거제현령 김준민이 거제도 근처에서 싸우는데도 원균이 불러도 안 온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전 글에 적었듯 김준민이 원균에게 많이 실망한 모양입니다.

2) 전과
이 때 왜선에 실린 물건을 창고에 넣으니 다섯 칸을 채우고도 남았고, 쌀 300석은 격군과 사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철갑, 총통 등의 물건과 수급 하나를 조정에 올려 보내죠. 확실한 승전의 증거였습니다. 이 때 순천 대장선의 사부 이선지가 왼쪽 팔에 화살을 맞은 것 말고는 아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저 원균이 팀킬한 거 말고는요.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전이었습니다.

한편 순천대장 유섭이 구한 조선인 소녀를 심문했는데 아버지가 다대포 수군이었다고 합니다. 왜란이 닥치자 숨어 있다가 붙잡히고 오빠랑도 떨어졌고, 자신은 배 밑창에 갇혔다고 하죠. 그러면서 옥포해전에서 이긴 적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 줍니다.

30여척 김해 -> 상륙 후 놀다가 6일에 율포 -> 7일에 옥포
이런 식이었죠. 당시 일본군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보여주는 것 중 하나겠네요.

임진장초와 난중일기에는 적 규모가 30척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후에 이충무공전서에서는 50척으로 적혀 있죠. (원균행장록은 100척 ^_^) 김경진님은 일본 기록에는 피해가 50척이라고 하셨는데 이거 생각하면 오히려 어이가 없죠. 당한 일본 기록보다 장계 올린 전과가 더 적은 겁니다.

세 차례의 해전에서 얻은 총 전과는 총 42척 격파였습니다. 자세한 건 해당 장계를 재밌게 읽어 주세요.

3) 다시 바다로
이렇게 옥포 해전으로 대표되는 1차 출동은 경상도 해안을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니던 일본군에게 벼락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거제도 남해안을 돌아가면서 적이 알지 못 하게 했고, 단 이틀 동안 곳곳을 헤집으며 쓸어버린 후 썰물처럼 빠져 버린 겁니다. 그야말로 인간 재해, 쓰나미나 다름 없었죠. (이 말 때문에 임진왜란 편 나중에 쓸까 했는데 솔직히 다른 걸로 대입할 게 없네요. 계속 쓰겠습니다.)

이 때는 선조가 막 도망간 상황으로 일본은 해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1차 출동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본군은 선조의 도망으로 보급을 제대로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경상우도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산포 근처까지 왔다 간 조선 수군을 막을 궁리도 해야 했죠. 초전은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됩니다.

한편 이순신은 (그냥 최대한 이순신이라고 하려고 하는데 ~은 붙일 때마다 두근두근하네요 - -) 적이 육로로 올 때나 상륙을 할 때를 위한 걱정을 시작합니다. 수군에는 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수군에서 말을 훈련시켜서 써도 될까 하는 의견을 장계에 첨부해서 보냅니다.

그는 이번 출동 중에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대체로 보아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분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에 돌진하면서 함께 대첩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무릇 앞뒤 해전에서 40여 척을 불태우고 부술 즈음에,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다만 둘뿐이다 . 섬멸하고 싶은대로 다 못하여 더 한층 통분했지만, 접전할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하며, 우리 배를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하면 으레 기스락을 따라 고기두름 엮는 듯이 줄지어 행선하다가,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뭍으로 도망했다.그런데도 이번에 섬멸하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고 탄식했다."

한 번쯤 곱씹어 보며 이번 편을 끝내겠습니다.
 
임진왜란 해전사 - 3. 거북선 출격
2011/04/14 11:24:40 눈시BB

2차출동

지도를 보실 때 단순히 전투가 벌어진 지역만이 아니라 어디까지 진출했는가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2차 출동에서는 부산 사하구에 있는 몰운대까지 갔었습니다. 부산포에서 코 앞이죠. 그런데도 적은 요격 시도도 못 했죠.


임진록2 오프닝 (Seven Years War 2 Opening)
링크였지만 저번 편 bgm 생각하면 이번 편은 어떤 걸 할 지 대충 예상하셨겠죠. ^_^)


1. 2차 출동

다시 바다로 나갈 계획을 세운 건 6월 3일. 하지만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았죠. 5월 27일 원균에게서 급한 공문이 옵니다. 적선 10여척이 곤양으로 들이닥쳐서 노량으로 피했다는 내용이죠. 이억기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습니다. 급히 병력을 모아서 29일에 출전, 노량에서 원균을 만납니다. 전라좌수군 23척과 경상우수군 3척이 합친 26척의 연합 함대였습니다. -_-; 1차 때보다 적네요.

서로 의논을 하던 중 곤양에서 나온 적 한 척을 포착,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달려들어 불태워 버립니다. 연락선인지 싸울 생각은 않고 육지로 도망가 버렸죠. 그렇게 연합 함대는 사천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표현이 "누각과 같은 것" "대선"이라는 표현이 쓰이면서 비교적 큰 전선들이 투입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게 우리가 잘 아는 안택선, 아다케후네라고 봐야 될 지는 의문입니다. 안택선은 거의 대장선 용도로만 쓰였고,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과 맞서기 위해서 배를 크게 키우자! 하면서 계획했던 안택선도 겨우 20척 수준이었거든요. 이는 한산도 편에서 다시 쓰겠습니다.

"누각과 같은 배 12척"과 산 위에서 진을 치고 있는 400명, 장계에 기록돼 있는 적 수입니다. 붉고 흰 깃발들이 난잡했고 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작전 지휘를 받는 것 같았다고 하죠.

하필 썰물이어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일부러 적을 꾀어내는 쪽을 택합니다. 채 1리나 갔을까, 적은 뛰쳐 나옵니다. 통설로는 적들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고 하지만 장계에 기록된 거로는 그냥 산에서 내려와서 반은 배에 타고 반은 앞에서 신나게 좋아했다는군요. 어느 쪽이든, 이걸 본 이순신은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마침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죠. 여기서 조선 수군의 비밀 병기가 출동합니다.

"그런데, 신이 일찌기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 현.황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곳의 적들도 철환을 비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철환과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같이 발사 하면서 저마다 힘을 다함에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왜적들은 부상을 당하여 엎어지는 자와 부축하여 달아나는 자의 수을 알 수 없었으며, 높은 언덕으로 도망쳐 진치고서는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북선의 등장을 알리는 기록입니다. 겨우 나와서 붙어보려 했던 적들은 그 길로 도망가 버렸죠. 이렇게 적선 11척을 잡았습니다. 적은 멀리서 부르짖으며 발을 구르고 대성 통곡했다고 하죠. 이후 모자랑포, 현대의 삼천포-_-;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6월 1일, 원균이 "어제 남겨 둔 적선이 도망쳤는지 확인해 볼 겸 죽은 왜놈 목 베고 오겠다"고 해서 허락합니다. 두 척을 일부러 남겨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포 해전에서 보이듯 적이 배를 타고 도망갈 때 바다에서 붙잡으려고 한 걸로 보입니다. 육지로 도망가면 잡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튼 원균은 돌아와서 "육지로 도망가서 빈 배 불태우고 죽은 놈 목 세 개만 가져옴"이라고 해서 고성 땅 사량까지 간 다음에 밤을 지냈죠.

일단 출동의 원인이 된 사천의 적을 없앤 상황, 조선 수군은 1차 출동 때처럼 Search and Destroy를 가동합니다. 수색섬멸전이죠. 아마 화포 사거리가 20% 쯤 늘어났을 겁니다.

... 믿지 마시구요.

2일 아침 적이 당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 육지에는 또 다수의 적이 대기하고 있었고 적선 21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크기가 판옥선과 같은 것 9척"이라는 말로 보아 역시 여기도 제대로 싸움배를 동원한 것 같네요. 그 중에 한 대선 위에는 높은 층루가 솟아 있고 각종 비단 휘장을 둘렀다고 합니다. 딱 봐도 대장선이죠. 이순신은 거북선을 층루선에게 돌격시키고 조선 수군 전체가 돌격합니다. 여기서 권준이 왜장을 쏘아 맞추었고, 나머지도 신나게 두들겨서 불태워 버립니다. 이번에도 적은 육지로 도망가 버렸죠. 이 때 거제도에서 적 20척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바깥으로 나가지만, 적은 조선 수군을 보자마자 도망쳐 버립니다.

창신도에서 하루를 묵은 수군은 3일에 여러 섬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적을 보지 못 했고, 4일 아침 당포에서 토병 강탁이 "도망간 적들은 거제로 향했다"는 말을 해서 이를 쫓아 거제도로 향합니다. 이 때 그렇게 기다리던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오죠. 그가 끌고 온 병력은 25척, 이렇게 판옥선만 51척인 연합함대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당항포로 가는 과정에서 또 아군을 만나게 되는데 유숭인의 기병 1100명이었습니다. 장계에는 그저 그것만을 적었지만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하지만 적을 깨뜨리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통상께서는 -_-; 당항포의 지리를 묻고는 쳐들어 갑니다. 여기서도 신나게 깨뜨리고 적이 육지로 달아나자 상륙해서 추격, 머리 43급을 베고 돌아옵니다. 여기서도 배 한 척을 남겨놔서 낚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낚이죠. 방답첨사 이순신이 매복하고 있다가 잡았는데, 배 한 척에 탄 수가 백여명이고 24~5살 정도 돼 보이는 왜장이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지휘했다고 하는군요. 화살을 10발이나 맞고서야 전사했다고 합니다.

7일에는 웅천에 이르러 가덕도를 정찰했고, 율포에서 부산으로 도망가던 적을 포착해서 모두 없애버리죠. 이후 몰운대까지 수색했지만 적은 없었고, 9일까지의 수색 끝에 돌아옵니다.

29일에 시작해서 10일간이나 지속된 2차 출동은 이렇게 끝납니다.


2. 적장은 누구인가?

이 과정에서 잡은 적은 총 72척이었습니다. 사천 13, 당포 21, 당항포 26, 율포 7척 해서 67... 어라 6척이 남네요. -_-; 이 중 한 척은 사천으로 가는 길에 잡은거 하나, 당항포에서 "다른 왜선 네 척"이라고 한 걸로 보아 이건 따로 계산한 거 같고 나머지 하나는 남겨뒀다가 나중에 불태운 거겠죠.

여기서 재밌는 건 나름 반격하는 느낌이 들던 2차 출동에서도 적은 포구에서 맞서 싸우고 밀리면 도망갔다는 겁니다. 당항포 전투에서 싸운 적은 이걸 증원한 것 같은데, 역시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당항포까지 몰린 후에야 싸웠죠. 이를 볼 때 일본 수군은 아직도 조선 수군과의 전면전보다는 상륙 호위에 더 집중한 걸로 보입니다. 한 번 매운 맛을 보긴 했으니 나름 경상도 해안을 뒤졌겠습니다만... 적은 전라도에 있었던 거죠. 마침 방침을 바꿔 조선 전역을 완전 점령하기 위해 경상우도에서도 한창 공격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조선 육군 역시 이에 맞서 의병과 관군이 함께 반격하던 중이었고, 유숭인의 경우 고성까지 진출한 상태였죠.

2차 출동의 장계에서 이순신은 적의 깃발들이 서로 다른 것에 집중하며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왜인들의 깃발에 물들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전일 옥포는 붉은 깃발이었고, 이번의 사천은 흰 깃발이고, 당포는 누른 깃발이며, 당항포는 검은 깃발인바, 그원인을 생각해보면 필시 그들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피를 발라 맹세한 글이 또 이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를 깔보고 침범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군병을 준비한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각 가문마다 깃발을 다르게 썼고, 그걸로 상대가 누군지 구분하였습니다. 가문의 깃발, 군기는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거였죠. 이를 통해 각 전투마다 누가 참전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순 있죠.

현재 사천 해전에서 적장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등의 수군 병력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당포 해전의 경우 노획한 금부채에 "우시축전수"라는 말이 적혀 있어서 (풍신)수길이가 우시축전수라는 애한테 줬을 거다, 그러니 이번에 죽은 적장은 우시축전수다라고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우시축전수는 히데요시가 성을 바꾸기 전의 성(하시바=우시)이었고 뒤는 관직명이었습니다. 저 부채는 히데요시가 가메이 고레노리라는 무장에게 준 것이었고, 결국 그가 이번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봐야죠. 하지만 그는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는 걸로 보아 그는 아닌 듯 합니다.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왜장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형인 구루지마 미치유키 쪽으로 결론이 나는 듯 합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도쿠이 미치토시(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700명을 이끌고 수군 장수로 참전합니다. 구출한 포로의 말에 따르면 화살이 빗발치는데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무튼 이 전투에서 수군 주요 장수 중 하나가 당한 거죠.

당항포 해전은 불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묘사한 군기가 너무 개성적이네요.
"또 왜대선 4척이 포구 안쪽으로부터 나와서 한곳에 모이는데, 모두 검은 깃발을 꽂았고 기마다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일곱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 이것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기입니다. 이 때쯤엔 한창 함경도로 가고 있던 가토군인 거죠. 지휘하는 장수가 누구였든 위에서 나온 가메이 고레노리와 이것을 보아 2차 출동에서부터 육군 장수가 참전했다고 봐야 될 겁니다. 다만 저 네척을 다른 왜선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보아 수군+육군인 듯 하며 맞서 싸웠던 다른 적들과 달리 저들은 도망치려 했습니다.

율포는 넘어 가죠 -_-a


3. 후일담

1차 출동은 역시 처음이라는 상징성으로, 3차 출동은 대첩이라 불리는 한산도 해전으로, 4차 출동은 적의 소굴인 부산포에 뛰어든 것으로 유명하죠. 그렇다면 2차 출동은? 거북선 출격이죠. 거북선에 대해 길게 글을 쓰다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따로 글 하나로 돌리겠습니다. 4차 출동 이후에 나올 듯 하네요.

글 중에서 언급했듯 2차 출동에서도 적은 수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맹렬히 맞서고 화살비가 쏟아져도 의연했다는 왜장들이 나오긴 하지만요. 이유는 둘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위에 적었듯 아직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바다에서 싸울 정도로 나가지 못 했다는 거겠죠. 거의 포구에 틀어박혀서 방어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천 해전의 전장은 지름으로 2km, 조선 수군이 움직이기 힘든 환경에 썰물이었는데도 적은 육지에 상륙해서 싸웠습니다. 질 거 같으면 안쪽으로 도망가구요. 그 때문에 일부러 유인책을 쓰고 작은 배를 남겨 놔서 적이 타고 도망가게 해야 했죠. 당시에는 경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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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문 14-08-17 11:26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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