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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2 22:17
[기타] 기독교가 친일은 좀 아니지 않나요?
 글쓴이 : 북창
조회 : 4,685  

일제시대때 우리 민족 소설가 분들 작품 보면...기독교 소재 무척 많이 나오죠.
왜구들이...기독교 탄압을 하지 않았는지...당시...나라 잃고 희망을 잃은 우리 민중들의 돌파구중 하나였다고 보여지네요. 그래서인지...그 신도 수도 그때 많이 증가한거 같고요.
암튼, 이런 상황인데...기독교 일부가 친일 한 사실이 있다고...전체를 싸잡아서 친일이라 하는건 바람직하지 않는거 같네요.
뭐...그 시대를 살아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제가 문학 작품 같은걸로 간접적으로 접해본 바로는 당시 친일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친일이라고 한다면...우리 민족 시인, 소설가 분들중 상당수를 재평가 해야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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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 14-06-13 00:20
   
기독교에 친일이 많이 몰려있는 것은 맞음.. 안타깝지만..
     
북창 14-06-13 09:40
   
글쎄요...일제시대때...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졌는데...보통 일제의 강압에 현실을 외면하는 형태인걸로 아는데요...
기독교에 친일파도 있었지만...독립 투사분들도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도 기독교셨구요...
          
영웅문 14-06-14 19:50
   
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진 것은 한국전쟁이후부터 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에게 교회는 먹을 것으로 회유를 했죠.
물론 그 전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개신교보단 카톨릭쪽이 많았죠.

조용기라는 개독의 우두머리도 초창기땐 꽤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돈이란 것에 빠져버려서 쓰레기가 됐지만...

이곳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자신의 담임목사가 부자인지부터 살펴보세요.
만약 부자면 절대로 댁들은 천국으로 갈수 없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알아도 천국에 갈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대표적인 부자교회들은 얼렁뚱당 그 부분을 넘어가려 합니다.
성경구절에 이런 말이 있죠.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
다시말해서 불가능하다는 말.

목사를 목회라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양치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다시말해서 양치기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데 양들이 어떻게 천국에 갈수 있겠습니까?
잉어 14-06-13 00:58
   
일제강점 당시에 개신교 자체는 오히려 일제에게 탄압을 받았고.. 경계대상이었으니 친일은 아닌거 같아요...
주기철 목사님만 해도... 천왕에 대해 경례하라는 것을 반대하다가 고문당하고 순교(1944년)했고..
개신교 개열 이화학당에서도 유관순 열사도 계셨으니..
하지만, 문화말살정책 이후로는.. 계속된 회유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로 돌아섰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도
배신하게 되었으니... 흠

다만, 교회가 커지고 모일장소가 되니까, 비교적 친일 성향이 두드러지는 정치인들과 상류층의 교류장소가 되어버리고 저리된듯 함... 대표적으로 이명박씨를 생각하면 되겄죠...

교회가면, 제일 조심해야하는게 사업제안이랑 인맥찾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입장으로 실제로 신앙을 이유삼아 접근해서 사기치려는 사람들에게 당하기도 했었고.... 정치인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들먹 거리면서 다니는 것도 봤었으니 흠....

그리고 권력화된 교회 제외하고 교회에서 여당 밀어주는것중 가장 큰 이유가 북한때문인거 같아요. 물론..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흡수 통일될 건덕지는 없지만... 만약 된다는 가정하에 제일 먼저 처형될게 개신교 인들이니... [지금 평양에 교회는 있지만, 형식적인 교회이지 그 내용은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장소이죠... 제 1의 신은 김씨네 자손들이니...] 그러한 공포가 도사리는 것 같아요... 때문에, 표면상만 북한반대! 이러는 여당을 지지하는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교회에서는 정치적인 사견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뭐... 우리나라에 아랍인들 대거로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아랍인들에 의해 골머리썪는 영국이나 독일을 생각하면...] 그 외에 정치적 개입은 종교에서 하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라디안 14-08-06 11:04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것은 역사적으로 맞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원래 주기철 목사가 장로교였는데

장로교에서 친일을 인정했죠 거기에 반한 주기철 목사외 12명 경남 부산권일대 목사

장로교 고신파가 형성되죠 그것이 한국 개신교 장로교 고신입니다..

고신말고는 장로교 감리교 전부 친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도 개신교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못한것  임시정부에서 오는 돈을 거의 전부다 하와이 갱스터 이승만에서 돈을 전달한거죠  참 그래서 임시정부가 항상 금전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갱스터 이승만은 그돈으로 자기 사리사욕한 인물입니다.
어모장군 14-06-13 01:35
   
일제 초기에는 불교, 천주교, 개신교 종교계가 다 탄압을 받습니다.
그러다 전부 친일로 돌아서죠.
탄압을 받는데 어쩌겠어요. 살아야하니 돌아서야죠.
물론 소수의 항일론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친일론자가 다수였습니다.
     
북창 14-06-13 09:35
   
살려고 일본을 따른건 친일이라 할 수 없죠. 창씨개명한 사람을 모두 친일이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모장군 14-06-13 16:50
   
해방 후 일본에 친일한 행적을 고치고 뉘우치고 하면 상관없겠죠.
문제는 살기위해 한 행동이 계속 친일로 이어지니 문제인거죠.
     
얼렁뚱땅 14-06-15 13:09
   
살기위해 어쩔수없이 따른것과, 나팔수역할한것은 다르죠
사랑투 14-06-13 01:57
   
우리나라 종교중 종교인이 가장 세속적인 종교가 기독교라서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사이비종교도 거의 대부분 기독교에서 많이 파생 됩니다.

종교인이 결혼이 가능해서 가족을 이룰수 있느냐 아니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느냐 없느냐..
물려주어야 할 재산이 필요하냐 아니냐...
이런 것들은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자극하고 갈등속에서 현실과 타협하게 되고요.

신앙심을 떠나서  세속적이면 세속적일 수록  욕망와 욕심에 굴복하는 종교인이 많아 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이죠.
     
북창 14-06-13 09:45
   
현재 기독교는 분명 그 세속성이 짙어져서...비판 받아 마땅하죠.
저희 아버지가 시골에서 적적하여 교회를 나가시는데...
무슨 헌금 같은거...저는 천 원만 내도 아무 신경 안쓰는 건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아버지가 5천원을 내시더니...이젠 만 원을 내시더군요.
그래서...왜 그러시냐고...누가 눈치 주냐고 하니까...분위기가 그렇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만 나가시라고 했는데...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만원이면 1년에 두당 최소 60만원씩은 건진단 소린데...ㄷㄷ
이건 이미 장사치이지...종교가 아니라 판단이 되더군요.
더욱 웃긴건...만원내도 가장 적게 내는 축에 속한다는거...
교회 다니시는 분 계시면 대답좀 해보세요. 이게 제정신인가요? 미친거지?
이러고도 세금 한 푼 안내고 있죠. ㄷㄷㄷ
백척간두 14-06-13 06:25
   
그보다는 친일파들이 일제시대 이후에 재빠르게 다른걸로(?) 코스프레를 해버렸죠.

공산당을 때려잡자며 이승만에게 붙었고 또 이승만 하면 기독교와 무관한 인물도 아니니...
빠셋 14-06-13 10:17
   
기독교가 친일만 있는거 아닙니다 목사가 힘이있는교회는 목사 정치성향에 따라갑니다 제가다녔던 교회중에는 진보가더 많은것 같네요 서울 큰 교회는 보수성향이 좀 많은 것 같고요 워낙 교회가 많다보니
에투 14-06-13 15:21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 15명, 16명, 2명씩 참가했다."

기독교 자체가 일제 시대때 탄압을 젤 심하게 받았고, 타 종교에 비해 가장 반일 선봉에 섰던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저도 간간히 기독교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비판하는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어모장군 14-06-13 16:52
   
하지만 나중에 제일 먼저 친일로 돌아섰으며 가장 앞장 선게 기독교 입니다.
          
shonny 14-06-14 05:46
   
일제시대 초기부터 가장 친일했던 종교는..
1,. 불교 2 천도교임..
               
얼렁뚱땅 14-06-15 13:11
   
독립운동 제일많이하고 일제에의해 뿌리까지 뽑힌게 천도교라고 알고있는데 무슨소리세요?
                    
shonny 14-06-15 16:50
   
동학일때 일진회로 친일에 앞장섰자나여.. 그뒤 떨어져나가면서 천도교가 됐지만 최린때 다시 친일했구..
500원 14-06-13 16:40
   
진짜 문제는 정치권이 종교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해 일찌기 그쪽에 깊숙히 침투해 왔다는 것이죠.
현재 뉴라이트라는 단체도 그 쪽에 뿌리를 두고 있고요,
박사모도 근간이 비슷합니다.

2012년에 한창 이슈가 되었고 현재도 활동중인 십알단도 특정 종교단체에 기반해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종교를 이용하는 이유가 돈도 있겠지만
종교의 교리를 이용해서 박정희를 신으로 종북을 사탄으로 비유해 맹목적인 지지를 받아오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종교계가 제대로 유지 되려면 이런 세력과 정경유착을 몰아내고 스스로 자정하고 정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청춘별곡 14-06-17 23:04
   
기독교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누구를 사람이나 그 누구와 무엇을 우상화 하는건 다 우상숭배입니다.
떡대 14-06-14 06:35
   
한국기독교의 어두운 태생을 제대로  인정하며 그것을 반성하며 제대로 알리는 신앙인이 과연 몇 이나 될까요?  씁쓸하네요
떡대 14-06-14 07:25
   
우리나라 기독교의 어두운 태생에 대해 알려야 할 것 같네요.
1592년 4월 14일 7년간의 왜란이 시작되는 날...그날이 바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던 날이었습니다.
일본군의 배에는 십자가의 깃발이 휘날렸는 데 25만의 왜군의 10%, 일본군 총수의 대부분은 기리시단.
 바로 기독교 원정대였습니다.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고 살가죽을 벗기고 인육을 먹던 기리시단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행군했었습니다.
7년 왜란은 신의 이름을 가장한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관구장 고메즈의 비서 프란시스코 파시오 선교사는 1598년 일본보 중 " 임란은 주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일본 기독교를 지켜낸 승리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전 신학교수인 김임규 목사는 성결교신학교 논문에 "일본의 조선 침략은 기독교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역사가 히데요시를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졌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 유럽전역에 피바람을 부른 십자군 전쟁 아시죠?
그들의 목적은 여호와 주님을 믿지 않은 자 모두 처형하는 것 이었습니다. 십자군에게 지급된 면죄부는 천국보장권과 경제적보상 그리고 무차별 살상에 대한 그들의 죄의식은 주님만이 용서하신다고 생각했죠.
 이 후 제국의 역사는 기독교 선교를 구실삼아 민족전통 말살과 횡포, 폭압, 살인을 일삼았죠.
그런데 이러한 일은 이 땅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32년 아편시장 확보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협의없이 제주무역관을 건립 추진했고
1846년 식민개척의 도구로 선교사의 프랑스함대가 진입했습니다.
1866년 제너러셔먼호 사건... 총칼 찬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했으며,
1868년 선교사들이 앞장 서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묘를 도굴했습니다.
1897년 선교사가 이권을 획득한 노다지개발로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1905년 가쓰라 테프트 밀약, 일본과 미국간의 이 밀약은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암묵적인 밀약이었으며, 한국 기독교 선교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열강들은 일본식민지배를 용인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인 일본에 복종하라면서...
일제 당시 조선내의 선교사들의 입장은 확고했죠.
1895년 11월 11일 암호전문 미국무성 국무장관 Oney는 " 한국의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는 것은 미국 선교사의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친일 외교를 선택했죠 태평양 전쟁 발발 전에는..
그들은 선교의 보장과 그에 따른 상업적 이익을 얻기로 하였으며.
그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저지 세력이 될 것이고, 조선을 차지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는 주님의 권세인 일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세계 열강들에게 이권 획득의 즐거운 사냥터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알렌과 언더우드는 금광을 시작으로 철도부설,전기, 전철 부설 등 그들이 챙길 수 있는 이권은 모두 따내서 그들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천제를 지내던 곳에 정동교회당을 세우고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짓밟았습니다. 물론 일제의 협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조선에서 확산 된 이유는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택한 곳은 치외법권지역인 교회였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원수는 일본이었지 서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일본과 손 잡은 기독교의 내막을 알 수 없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회 당시 모든 사람들이 발을 구르고 그들의 죄를 고백했으며 그런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교수인 사무엘 휴 모벳은 훗날 고백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낯선 모습이었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 부흥의 출발점이 되었죠. 그리고 그들이 보인 선진 의료기술과 학교 설립은 개화파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대국에 대한 동경으로 기독교 예찬과 대중화를 강조했죠.
서양처럼 기독교를 믿으면 부강해 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민족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일본에 대항하는 것을 하나님의 대한 죄로 규정하고 일제의 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정치행위를 했습니다.
일제식민은 무기력하고 미개한 우리 민족이 받아야 할 인고라고 생명론을 설파했습니다.
민족의 혼이 빠진 후 기독교는  친일의 선두에 줄줄이 나셨습니다.
그들은 1941년 일본군 징병과 합병 출정을 독려하기 위한 임전보국단과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조직했으며,
1941년 기독교인들은 일본 천황을 상징하는 천조대신 외에는 참 하나님의 없다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민족배신의 집단 한강 신도침례를 거행했습니다.  또한 창씨개명에도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태평양 전쟁이 극심해진 1942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신사에 참배를 하고 일본군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고 보답하는 의미로 국방헌금을 자진 납부했습니다.
심지어  1942년 9월 교회종 1540개를 무기제조용으로 일본에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행태들이 이어졌지만, 너무 글이 길어지는 것 같네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요?
지금 한국 기독교는 그들의 어두운 과거를 제대로 알리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네요...
     
청춘별곡 14-06-17 22:28
   
개신교와 카톨릭(제수이트)를 구분 못하는 무지한 글이네요...임진왜란 발발 전에 일본군에게 조총을 전해주고 고니시 유키나카와 조선출병에 함께한 자들은 카톨릭(제수이트) 신부입니다. 일본의 조선과 명정벌을 부추기고 지원한 세력이 제수이트(예수회)입니다. 임진왜란 종결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일본 막부와 제수이트는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떡대 14-06-18 10:08
   
네 카톨릭 맞죠 .십자군도 카톨릭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한 이유는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개신교이든 카톨릭이든  뿌리가 같으니까요
 그래서 개신교의 과거를 부정하고 싶으신가요?
               
청춘별곡 14-06-18 23:47
   
카톨릭과 개신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리가 다릅니다. 초대교회에서 고대카톨릭 그리고 로마카톨릭의 차이를 모르면 교회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죠.. 오늘날의 카톨릭은 아리우스파 계열의 카톨릭입니다. 고대 카톨릭은 아나타시우스파의 계열이고 그것이 초대교회와 사도 그리고 속사도 시대의 신앙전 전통을 따르는 전통파입니다. 오직 믿음과 말씀을 캐치프레이즈로 일어났던 종교개혁과 그 뒤의 개신교 교회는 이런 아나타시우스파 계열의 신앙의 회복을과 전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일어났고요. 한마디로 아리우스파적인 신앙관과 성경관이 주류가 되기 시작하면서 카톨릭은 심하게 변질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겁니다. 신앙관과 성경관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교리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카톨릭을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할수 없고 오히려 교리적으로 전통에 가까운 개신교가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보는 겁니다.
                    
떡대 14-06-19 01:01
   
그 정통적인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그 당시 서로 개차반이었는데 학파와 교리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래서 정통개신교는 깨끗하답니까? 개신교의 종교개혁도 카톨릭의 폭압과 살인을 그대로 답습했는데 하나님이 정통이라고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합니까?  논점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이글은 반성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쓴 글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덮어두기보다는 스스로 진실된 역사앞에서 과거의 죄악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데요?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까요?
                         
청춘별곡 14-06-19 10:33
   
비기독교인에게는 논외겠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진리를 다루는 부분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사안입니다.

어쨌든 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분명히 통렬히 사과하고 회개해야할 부분이겠죠..기독교인으로써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죄송스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사과한다고  일소될 사안은 아니지만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신의 이름과 뜻을 빙자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있을수 있겠죠. 개인적으로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서는 저도 죄송하다는 이야기 밖에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dashi 14-06-17 18:57
   
한국 기독교가 어두운 과거를 왜 모르겠습니까. 평양 노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한 종교도 개신교였습니다. 개신교는 카톨릭보다 사회참여적 성격이 강하죠. 1920년대 기독교는 항일 운동의 최선봉에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모금운동도 하고 내국 항일투사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래서 일제도 개신교를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 심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그 때 일제에 반항했던 많은 성도들이 순교당했고요. 당시 기독교 뿐 아니라 국내 애국지사들이 하도 심하게 고난을 당해서 광복하고 나서 살아남았던 주요 국내 운동가들은 운좋게 거의 끝날 때 잡혀서 아직 목숨을 부지했던 소수와 은둔한 비주류 전향한 다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붕 유명한 사람들이 왜 거의 해외파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죠..

그리고 해외 개신교인들은 그럼 그동안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보신다면 만주의 제암리 학살 사건과 미국 안창호 선생의 모금운동, 하와이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네요.
ultrakoo 14-06-18 16:14
   
정말 역겨운 사실은

사고치면 일부라고 실드를 치면서
참배거부나 항일한 일베에 반한 행동을 한 진짜 극소수의 ' 기독교 ' 의 깃발로 뭉친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독교는 천주교,개신교,동방정교 등등 다 합친것을 이야기 하는것인데....

개신교는  ' 기독교 ' 스스로 지징해서 은근 저렇게 묻어가려하더군요.

그리고 1920년대는 일제가 회유정책으로 탄압을 안할시기였습니다.
개신교가 탄압을 받았다는것은 그들 스스로의 주장이죠.

불교 천주교 개신교는 거의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고
차후 정화되지 않고 친일의 정수가 지금 오늘날의 대한민국 개신교입니다.
떡대 14-06-18 22:21
   
개신교가 좋아하는 마틴 루터에 대해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또 하나의 무서운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개신교에도「마녀 사냥」이 성행 하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도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그대로 답습하여 마녀사냥을 용인하고 계속하여 이단자의 이름으로 수많은 신도를 학살 하였습니다. 사실은 자기야말로「이단자 중의 이단자」인데
또 어떤 이단자를 자기가 처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여 소위 이단 심판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고질병이 되고 개신교도 이 광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이단의 저주"는 지난 400년 개신교가 타종교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였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선교역사>

사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무시하고 살상한 대표적인 종교였습니다. 예를 들면,천주교가 중남미 대륙으로 들어가서 원주민들에게 범한 침략, 약탈, 살인, 파괴, 그리고 정복의 죄과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1,500년도 초기에 유럽에서 온 천주교인들은 남미 페루 지방 일대에서 840~1,35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지방인구의 94%였습니다.

또 그들은 16세기 중에 중남미에서 6,000~8,00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습니다. 또 원주민들이 쌓아올린 그 찬란했던 잉카(Inca)문명, 타이노(Taino)문명, 아즈텍(Aztec)문명 등을 말살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북미대륙에서도 개신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역시 1억여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지금 미국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 천주교도나 개신교도나 잔인한 침략, 약탈자 근성에 있어서는 피차일반인 셈입니다. 지금은 개신교가 사랑과 정통과 선의 가면을 쓰고 탈레반의 납치 살상을 비인도적 만행이라 외치고 있지만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총칼로 빼앗은 땅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하여 약 300년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1,200~1,500만 명의 흑인들을 잡아와 남북아메리카와 서인도지방 등에 팔아 버렸습니다. 노예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치부에 열중한 것입니다.
                    폴 존슨 (영국 역사학자) 저서에서  퍼옴.
               
 쉴드 쳐보세요
떡대 14-06-18 22:33
   
칼빈은 다르다고?  그  나물에 그 밥이었슴.

※스압주의※
 * 유럽 각국에서 자행된 칼빈주의자들의 인간사냥칼빈의 사상을 이어받은 칼빈의 후예들은 어떠했는가?
칼빈이 사람 죽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수정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참으로 실천하였는가? 칼과 자의적인 칼빈의 교회계율을 앞세워 제네바시를 장악한 칼빈은 불과 1만여 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사는 제네바 시를 그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갔다. 칼빈의 교리와 행위를 보고 칼빈 사상을 이식한 대표적인 나라로는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이 있는 데 이상은 더욱 번져 나갔다. 그의 후예들은 과연 어떻게 행하였는가?
1. 유럽에서 자행한 청교도들의 마녀사냥  1) 개신교의 마녀사냥과 칼빈주의자들의 마녀사냥결론부터 말하자면, 칼빈의 사상과 교리를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 역시 사람을 참혹하게 죽이고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역사를 칼빈 이상으로 자행하였다.
카톨릭이란 교리적 세계관과 인간사냥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그리고 부패한 종교를 벗어 던지고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뛰쳐나온 신교에서도 동일하게 외쳐지고 자행된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톨릭의 강력한 교리적 세계관적 영향하에서 자라나고 보고 익혀온 신교 지도자들의 배경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가 특별히 심화된 신앙에 입각했다고 볼 수 없으며,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발전에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종교적 관용 역시 오랜 종교분쟁에 지친 끝에 생겨난 것이다. --칼빈 역시 사회 통제를 위해 당시 대중적이던 마녀사냥에 집착했다'(이혜령외 7人, op.cit. pp.430-431)고 증언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60년에서 1660년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갈등이 증가하고 악화되면서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A History of Witchcraft', Jeffrey B.Russell. '마녀의 문화사. 다빈치. 2001.6.30. p.142-144)
'프로테스탄트가 카톨릭에 뒤질세라 이 전통(마녀사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종교적 갈등, 민중운동, 전쟁 등이 마술을 태동시킨 사회의 긴장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온갖 종파의 기독교들에 의한 마녀 고발이 현저히 증거하였다('A History of Witchcraft', Jeffrey B.Russell. '마녀의 문화사. 다빈치. 2001.6.30. p.143)고 진술한다. 칼빈의 마녀사냥과 인간사냥은 카톨릭 못지 않은 잔악성과 넓은 지역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칼빈사상의 내면적 특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에 의한 인간사냥의 범위는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잔악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 마녀사냥의 기원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마녀를 사냥하라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마녀를 살상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다. '마귀나 마녀론은 본래 민간전승이었다.'('A History of Witchcraft', Jeffrey B.Russell. '마녀의 문화사. 다빈치. 2001.6.30. p.162)카톨릭도 그러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벌인 마녀사냥, 인간 사냥은 그 기원도, 행위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들을 두고 냉정히 평가하기를 '그리스도교가 말살해 버린 원시종교(민간전승)의 부활이라고 하였다.'('History of America', Andre Maurois, '미국사' 기린원.1988.11.30. pp.80)고 그 기원을 말해 주고 있는데, 어이없는 것은 기독교가 말살해 버린 민간 전승의 악습을 이제는 도리어 기독교가 앞장서서 자행하였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민간전승에 지나지 않는 원시종교의 노예가 된 것이다. 바로 설 수 없는 교리에 의해 양산된 구부러진 역사의 산물이다.
(2) 마녀사냥의 정의 : '마녀란 악마를 예배하는 종파의 신자이며, 밤에 모이고, 입문식을 거행하며, 악마와 성적 관계를 가지며 희생양을 바친다는 대륙의 관념이 그것이었다.'('A History of Witchcraft', Jeffrey B.Russell. '마녀의 문화사. 다빈치. 2001.6.30. p.174)
'악마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들어보라면 --분리파 교회들 신도들, 이교도들, 그리고 마녀로 간주되었던 자들을 처형했던 일일 것이다. 말도 안되는 고발이 난무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매우 음탕한 종교의식으로 악마를 숭배한다고 하였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추잡하고 괴이한 악마와의 소통을 묘사하기 일쑤였다. 마술과 악마의 힘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존재했던 시대에 사탄을 섬기다는 고발당할 가능성으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The history of the Devul and the Idea of Evil', Paul Carus. 著. 2003.10.20. 더불어 책 p.343)는 것이었다.
(3) 마녀사냥의 목적 : 마녀사냥의 목적 가운데 두드러진 목적은 역시 거룩한 야심가들의 목적이나 개인적인 복수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된 예가 적지 않다. 폴 카루스는 '마녀 처형은 삐뚤어진 사악한 사람들이 목적으로 달성하거나, 어떤 개인적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편안한 무기가 되기도 하였다.'('The history of the Devul and the Idea of Evil', Paul Carus. 著. 2003.10.20. 더불어 책 p.368)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목적은 칼빈주의에서 더 많은 비중으로 적용되었다. '이단자라는 호칭은 오늘날 너무나도 치욕적이고 두렵고 경멸할만한 것이고 무시무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를 없애 버리고 싶다면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즉 그를 가리켜 이단자로 의심된다고 말하면 된다.'('Stefan Zweig. op.cit. p.184)고 하였다.
전자든 후자든 모두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라는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개신교 칼빈파와 마녀사냥
(1) 칼빈파들의 마녀사냥유럽지역에서 칼빈 파는 개신교 가운데 마녀사냥 인간사냥을 대규모로 벌인 가장 대표적인 교파이다.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칼비니스트는 마녀를 불사르거나 교수하였다'('A History of Civilization' Crane Brinton외 2인. 世界文化史, 한국版, 을유문화사. p.111)고 역사는 확인시켜 주고 있다. 카톨릭과 칼빈파들이 자행한 마녀재판의 건수 : '칼빈 파가 우세한 지역에서 마녀재판의 건수는 다른 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Jeffrey B.Russell. op.cit. p.143)라고 말한다.
'잉글랜드에서는 1640년대 대규모 마녀사냥을 경험했고, 스코틀랜드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전역에서 겪었으며, 메사츄세츠의 세일럼에서는 1692년 그 유명한 마녀사냥을 경험했다.'(Brian P.Levack. op.cit. p.271)이들 지역에서의 마녀사냥의 특징은 주로 청교도(장로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 가운데 카톨릭은 그대로 답습하여 잔악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통해 인간사냥을 가장 대표적으로 자행한 인물과 교단을 꼽으라면 단연코 칼빈과 그의 후예들(장로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2) 카톨릭과 칼빈파의 마녀사냥의 잔악상에 대한 비교개신교의 인간사냥은 오랜 전통의 카톨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사가들 역시 이를 확인해 준다.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교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마녀들을 재판에 회부했다.'(Jeffrey B.Russell. op.cit. p.142-144)
특히 칼빈주의자들의 마녀사냥은 신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이루어졌다. 칼빈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예외없이 이루어졌다. 개신교와 카톨릭의 종교갈등이 상존하는 지역에서는 더욱 극심한 살상들이 자행되었는데 성직자들도 그러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도 서로에 대한 인간사냥에 극심하게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종교적 분쟁에 강력한 사회적 대립이 뒤얽힌 곳, 폭풍, 전염병, 기근과 같은 재해가 사회적 긴장을 부채질 한 곳, 또 프랑스처럼 이단심문의 오랜 전통으로 법에 의한 마술 억압의 기초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광기가 더욱 극심했다.'(Jeffrey B.Russell. op.cit. p.144)고 증언한다. 이러한 관행 내지 마녀 사냥은 어김없이 칼빈이 통치하던 제네바에서도 적용되었다.
페스트 균이 유럽에 퍼졌을 때, 제네바 시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를 덮어 씌워 대규모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것이다. 흑사병이 퍼졌을 때, 이 균을 퍼뜨렸다는 마녀를 찾아내는 방법도, 처형도 칼빈파나 카톨릭에서 행한 것을 보면 별로 다를 바가 없다.  2. 유럽 각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자행한 마녀사냥
제임스 6세(Paul Carus. op.cit. p.402-404)는 학식이 풍부한 마녀사냥의 지지자였다.
제임스는 1560-1592년 북 베릭셔 주에서 마녀재판을 경험한 이래 마술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질리 던컨이라는 젊은 여자가 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질리의 고용주는 그녀가 악마의 힘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자백할 때까지 직접 고문했다. 질 리가 악마의 도움을 받아 왔다는 자백을 하자 의기양양해진 고용주는 그녀를 재판소로 넘겼다. 거기서 다시 고문 위협을 당한 질리는 에딘버러 시내와 근교에 사는 많은 남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들 중에는 아그네스 심프슨이라는 교양있고 평판도 좋은 중년 부인이 포함되어져 있었는데, 왕(제임스 6세 후에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됨)은 그녀를 직접 취조했다. 그녀가 자백을 거부하자 취조관들은 그녀를 벌거벗겨 온 몸의 털을 밀어 버리고 악마의 표식이 발견될 때까지 철저하게 몸수색을 했다.
'입 안에 마녀의 재갈이 물린 채 그녀는 독방 안에 매달렸다. 그것은 날카로운 갈퀴가 네 개가 달린 기구였는데, 그 중 두 개가 현쪽을 향하도록, 나머지 두 개는 뺨 쪽으로 향하도록 해서 입안에 끼워졌다. 그녀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자백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녀는 많은 남녀가 할로윈 축제 때, 배를 타고 북베릭으로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검은 초가 밝혀진 교회로 들어가 남자로 변신한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둔부에 입을 맞췄다. 마녀들은 덴마크로 건너갈 때 폭풍을 일으켜 그가 탄 배를 침몰시킬 음모를 꾸몄다.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아그네스가 두꺼비의 피로써 왕을 해치는 주술을 행할 계획이었다. 아그네스와 다른 피고들에게 나온 증거를 근거로 다수가 화형대로 보내졌다. 제임스의 주목을 끈 이 재판은 이 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Jeffrey B.Russell. op.cit. p.166-170)
2) 스위스에서 자행된 청교도들의 인간사냥
(1) 제네바(장로교의 본거지)에서 세달 동안에 자행된 500명의 마녀사냥폴 카루스에 의하면 '신교도들 중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종교적 열정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관들과 가장 가깝다. 칼빈의 고향인 제네바에서는 단 세달 동안에 5백여명의 사람들이 이단과 마녀로 처형을 당했다. 1545년 제네바의 교칙을 보면, 고문과 형벌에 드는 인력이 형집행인의 그것을 초과했고, 어떤 고문을 가해도 죄인을 여전히 고백을 거부한다는 불평이 쏟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Paul Carus. op.cit. p.442)고 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세 달 동안에 무려 500명의 이단들과 마녀들이 처형되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들이 성경을 손에 들고 이와같은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경악할 일이다. 로마 카톨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칼빈주의자들의 이같은 만행이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종교개혁이라는 위장된 옷만 갈아입었을 뿐 카톨릭의 연장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1650년 이후 신교가 급격하게 몰락하고 사람들이 신교를 떠나 카톨릭이나 아니면 무종교 내지 무신론을 급격히 빠져 나간 배경에는 칼빈주의에 의한 만행에 대한 평가와 결코 무관치 않다.
(2) 칼빈이 지배했던 스위스에서의 마녀사냥에 대한 증언칼빈의 사상적 영향력이 크게 미치고 있던 스위스에서의 마녀사냥 역시 영국 못지 않는 대규모로 이루어 졌다. 칼빈이 지배했던 당시 스위스에서 자행된 마녀 사냥을 보면, '16세기 동안, 보(스위스 서부의 주)에서만도(무고하게 잡혀온) 마녀들이 년 40명 비율로 처형되었다. 인구가 고작 7백명에 불과했던 오베르 마르흐탈이라는 마을에서는 단 2년 동안 43명의 여자가 화형을 당했는데' --('The Guiness Books of Historical Blunder' Geffrey Regan : '세계사의 대실수' 세종서적. pp.180)라고 증언하였다.그 비율을 보면 가히 마을마다 초토화시키는 인간사냥의 만행이 얼마나 참혹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보(스위스 서부의 주)라는 주에서만 매년마다 40명 비율로 처형했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 잡는 것이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야말로 당하는 사람이나 가족에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악마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스위스 전역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의 희생자'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였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마녀가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고(Brian P. Levack. op.cit. p.267)전한다. 실로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영국도 그러하지만 칼빈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스위스에도 영국에 못지 않는 인간사냥이 폭넓게 자행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Brian P. Levack. op.cit. p.267)
'특히 마녀술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이들 가운데 90%가 처형되고 희생자가 2.000명이 넘었다.'(Brian P. Levack. op.cit. p.267) 적어도 신교라고 하면 카톨릭의 잘못된 것을 보고 그것을 개혁코자 하다고 하면 인간사냥에 대한 만행부터 바로 잡아야만 하는데 도리어 카톨릭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인간사냥을 자행했다는 것은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종교개혁으로써 살상의 종교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스코틀랜드에서 자행된 청교도들의 인간사냥(1) 스코틀랜드에서의 칼빈주의의 마녀사냥제프리 레이건(G. Regan)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1620년대 무렵, 마녀사냥은 칼빈교파가 지배했던 스코틀랜드에서도 성행해 국경남부 지역보다도 3배나 많은 마녀들이 사형을 당했다.---'(Geffrey Regan pp.180-181참고) 특히 제프리 러셀은(J.B.Russell)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찌르기를 선호하였다'(Jeffrey B.Russell. op.cit. p.162)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찌르기란 마녀의 몸에는 악마의 표식인 무감각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마녀는 몸의 어디엔가는 무감각한 곳이 있어 아무리 찔러도 아무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체로 묶어 놓고 뾰족한 바늘 같은 것으로 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데 주로 허벅지, 눈꺼풀, 혀 바닥, 유방, 성기까지 사정없이 찔러대는 끔찍한 고문방식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악마적인 행위 그 자체였다. 누가 이와 같은 만행적인 행위를 보고 종교개혁이라고 하겠는가? 서구에서 카톨릭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왜 신교가 무너졌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은 만행이 종교개혁이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으며 과연 신교를 카톨릭보다 더 나은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1661-1662년에 스코틀랜드에서 대규모 마녀사냥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특히 남동부 지역에서 수백 건의 고발 재판, 처벌이 있었다. 이 재판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개별적인 재판이 아니었는데 -- 마녀의 혐의자의 몸에서 악마의 표식을 찾은 사람도 같은 사람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마을 사람을 동료 마녀로 고발했다.'(Brian P. Levack. op.cit. p.235)고 전하고 있다.
(2) 물에 빠뜨려 심판하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칼빈파의 재판형식스코틀랜드에서는 심판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 채택되었다. '퓨리턴(청교도들)들은 악마로 지목된 사람 특히 여자들을 모두 벗겨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 근처의 강이나 연못에 빠뜨려 익사시킨 후 시체가 가라 앉으면 결백하고 떠 오르면 유죄라는 식의 수영 시험을 하여 악마의 마법 재판에 이용하였다.'는(Geffrey Regan pp.180-181) 것이다. 물론 떠올라서 살아 있어면 역시 악마라고 하여 다시 끌고가 이번에는 불에 태워 죽이는 광신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한번 마녀로 고발되어 물에 잠기면 살아 날 수가 없었다. 찌르기나
익사시킨 후 시체가 가라 앉으면 결백하고 떠 오르면 유죄라는 식의 수영 시험을 하여 악마의 마법 재판에 이용하였다.'는(Geffrey Regan pp.180-181) 것이다. 물론 떠올라서 살아 있어면 역시 악마라고 하여 다시 끌고가 이번에는 불에 태워 죽이는 광신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한번 마녀로 고발되어 물에 잠기면 살아 날 수가 없었다. 찌르기나 또는 모두 벗겨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 근처의 강이나 연못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방식이나 그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정신나간 광신이라는데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이러한 광신적인 살상적 행위들에 대한 칼빈주의 자들의 가장 흔한 변명은 '그 시대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불가피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자기 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것으로 정당화 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는 반그리스도적인 가장 사악한 악마적 소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외치는 교리나 자행한 역사나 모두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한 교리와 행위일 뿐이다.
(3) 청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마녀사냥에 대한 증언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들에 의해 대규모로 마녀사냥과 이단사냥이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모두 프로테스탄트가 되었고, 극심한 종교적인 갈등을 겪었다. 스코클랜드는 칼빈 사상이 널리 퍼졌는데--- 스코틀랜드의 성직자와 장로는 교구 위원회의 일원으로 마녀 심문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총회 회원으로 마녀를 처벌하여 신정적인 국가를 확립하도록 세속 정부에 끊임없는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압력은 종교개혁가들이 세속 정부가 마녀사냥의 노력을 배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좋은 예가 된다.'(Brian P. Levack. op.cit. p.273)
스코틀랜드의 비옥한 토양(마녀사냥에 대한)은 대륙의 관념이 씨를 뿌리기에 적합했다. 대륙의 관념은 결국 스코틀랜드를 거쳐 영국에 상륙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학식이 풍부한 마녀사냥 지지자였다. 제임스는 1590-1592년에 북 베릭셔 주에서 마녀재판을 경험한 이래 마술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제임스 왕은 아그네스 샘프슨이라는 중년 부인을 직접 취조했다.'(Jeffrey B.Russell. op.cit. p.166-168) 그리고 끝내 아그네스는 다른 피고인들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Jeffrey B.Russell. op.cit. p.170)
아그네스 샘프슨의 재판은 1563년 에식스 주 첼름스퍼드 재판과 1579년 에식스 순회 재판의 엘렌 스마이드란 여성에 대한 재판과 함께 17세기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행한 마녀재판의 선례로 사용했다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결국 개신교도 카톨릭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했는데  누가 더 낫다고 도토리 키재기하는 것은 우스울 뿐이네~~
지니지 14-06-29 14:38
   
떡대님이 서양문화와 역사의 폭력성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아이들이 서양문화와 기독교, 천주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같습니다. 기쁜마음으로 모두 퍼갑니다.
dashi 14-07-07 13:39
   
가장~ 극단적인 측면만 들고 오셨네요. 저런 점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나 극단적 사례를 들어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러하다고 보신다면 참으로 성급한 일반화가 아닐 수 없네요. 딱히 기독교 자랑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저 스스로 신앙의 진리 안에서 위와 다른 긍정적인 측면과 모범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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