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단군기(檀君記)에 가로되, 단군은 서하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이를 낳으니 그 이름이 부루이다. 이제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생각컨대,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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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동명왕신화 [東明王神話]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며, 단군(壇君)·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한자표기는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 지만,『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에 실려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재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단군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 기이 1 고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이름이 주몽 또는 추몽이고 단군의 아들(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동명왕과 단군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 고조선조에서는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과 고조선의 건국을 서술하였다. 즉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을 다스리며 교화하다가 사람으로 변한 곰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이다. 단군은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고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는데 뒤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라고 하였다.
단군의 한자표기는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 지만,『제왕운기』이래 조선시대 사서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단군은 우리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에 실려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 충렬왕 13년(1287)에 쓰여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단종 2년(1454)에 편찬된『세종실록』 지리지와 조선 세조 8년(1462)에 쓰여진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制詩註)』등에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군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古記)』의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역사의 기원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단군신화가 그 전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다가 고려시대인 13세기의 저작물인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후대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단군신화의 출전으로 인용한 『위서』와 『고기』의 원전이 확인되지 않아 일연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今西龍, 1937)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고의적이거나 단견(短見)인 것으로 혹평받았다. 육당은 과거의 역사서 가운데 후대에 없어져 일문(逸文)만 전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고 보고, 『위서』는 북위(386-534)의 『위서』, 조위(220-265)의 위서, 중국 문헌의 범칭일 가능성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위서』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최남선, 1954)
무슨 개뻘소리를 -_-;; 고조선이 바로 한족 부여는 예맥족 고조선이 농경국가였다면 부여는 기마민족의 국가입니다. 부여가 고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구요? 어디서 무슨 소설을 읽고 와서 그런 주장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고조선과 부여는 다른 민족이 세운국가이며 생활양식도 많이 다릅니다. 나중에 고조선이 망하고 부여계통의 왕족이 조선땅에 고구려를 세우면서 통합된거죠.
골때리는 양반들이네 漢족이 아니라 韓족이라는 말이고 한이라는 말은 그당시 북방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쓰던 단어입니다. 국가가 자리를 잡고 한이나 고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농업이 자리를 잡은거지 부여나 고조선의 5부의 부족명이 뭘 뜻하는지 모르나요? 그리고 기마민족이라고 쓴게 농경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까?
"고조선이 바로 한족 부여는 예맥족 고조선이 농경국가였다면 부여는 기마민족의 국가입니다."
이게 위에 님이 쓴 문장이죠
예맥한에서
한을 어디에 있던 이들을 가리키는 줄도 모르면서 한의 부여?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세요
예맥은 요동과 만주, 한은 한반도에서 활동한 종족으로
애초에 예맥과 한은 다른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었으나 다시 예맥한은 같은 혈통의 종족으로 다만 거주 환경에 따라 성격화됐을 뿐이라고 보는 쪽이 대세입니다
고조선이 농경국가였다면 부여는 기마민족국가였다가 아니라
고조선도 농경을 기반한 반농반목의 기마민족국가였고
부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헤게모니를 부여가 계승했고, 같은 문화, 같은 계통이었다는 게 상식인데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합니까?
에휴... 고조선의 마지막왕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내려가 아래쪽에 자리잡게 되면서 스스로를 韓왕이라고 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3한사람들 모두가 그를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말이 나오구요. 그리고 부여는 고조선에서 북상해 세운국가가 아니고 북쪽에서 남하해서 세운국가입니다. 3한을 뭉뚱그려서 한족이 된게 아니고 옛진국에서 마한 진한 변진이 갈라져 나온겁니다.
侯인 준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지만 연나라의 망명자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 사람들과 궁인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韓땅에 이르러 韓왕이라 자칭하였으나 그 뒤에 망했다. 지금도 韓나라 사람은 그의 제사를 지낸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韓條
//삼국지에는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적고 있지만 망명당시 위만이 온 땅이 연에게 빼앗긴 옛 조선땅이였고 복식역시도 조선복식이였기에 조선의 유민이였을 가능성이 높고 조선 준왕역시 별다른 의심을 하지않고 병력과 봉토를 주어 서쪽 경계를 지키게 했습니다 같은이유로 위만도 왕위를 차지한 뒤에도 국호를 바꾸지 않았고 조선백성들도 별다른 반발을 하지않았구요. 고구려가 조선의 정통을 이었다면 왜 건국설화를 단군설화를 따오지않고 동명설화를 차용했을까요?
고구려는 단군신화를 알고 있었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단군신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고조선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지역에서 발견된 장천 1호분 벽화에는 단군신화를 암시라는 그림이 있다. 앞방 북벽 수렵도가 그것이다. 왼쪽에 신단수로 보이는 나무 아래의 굴 속에는 곰이 안전하게 숨어 있고, 나무 밖에는 호랑이가 사냥의 대상이 되어 화살에 맞는 그림이 있다. 마치 단군신화를 변형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하나의 그림은 각저총(씨름무덤)의 동벽 벽화이다. 그림 가운데 큰 나무(신단수)가 있는데, 그 위에 새가 앉아 있고 아래에는 나무를 중심으로 짐승 두마리가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이를 두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단군신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단군신화의 내용과 더욱 밀접한 것은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유화부인과 웅녀와의 관계이다. 고구려 시조의 어머니, 부여신으로 숭배받은 유화부인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를 웅심산 아래의 웅심연이란 연옷에 만났다. 그것은 곰의 산, 곰의 연못이며 곰, 검 군장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또한 유화부인이 방에 갇혀 있던 중 햇빛이 따라와 임신을 하고 알을 낳는다. 그 과정은 웅녀가 굴 속에서 햇볕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 것과 단군왕검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같다. 유화부인은 웅녀를 상징한다. <삼국유사> 에 '단군기'에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만나 아들을 낳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해모수는 곧 단군을 웅녀는 유화부인을 각각 지칭한다.
고구려는 극동대혈이라는 곳에서 수혈신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수혈신이 유화부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굴 속의 신, 웅녀를 의미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곰을 사냥하는 그림이 없다. 그것은 곰이 곧 유화부인, 웅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예가 호랑이를 섬겼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고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배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동물인 곰이 아니라 생명을 탄생한 신으로서 보다 세련되게 섬긴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인의 의식세계는 고조선인의 의식세계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천왕 21년(274년)에 평양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본시 ‘선인왕검의 집’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고려시대 평양지역에 내려오는 단군왕검에 대한 신앙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앞서 벽화의 내용에서 보았듯이 단군에 대한 신앙은 집안지역에서도 나타나며, 건국신화에서도 단군신화의 기본줄기를 그대로 채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단군신화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