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1-02 23:23
[한국사] 일제가 조작한 유물이 있나 물어본이유
 글쓴이 : Marauder
조회 : 2,010  

길게 글을 써놨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쓸필요도 없게됬군요.(대신 이글이 좀 길어졌군요)

옛날에 제가 낙랑군 유물은 조작되었나라는 글을 썼을때 알게된내용인데...
유물 조작에 대해서는 정황증거는 있지만 사실 진짜 조작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죠.
사실 그정도의 증거면 확실히 조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니 여러생각이 들더군요.

반박하는 사람들 모두가 사학계에 이익관계가있는것도아니고 바보도 아닌데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재야사학계측에서도 만약 그 전에 일본 학계에서 유물조작을 한 케이스가 단하나라도 있다면 그걸들이밀면서 '이전에 한번조작을 했으니 낙랑군 유물도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했을만한사람이있을텐데 제가 아는중에서는 없더군요.(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래서 조금 알아봤는데
사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역사를 조작했다는건 상식이라고 알고있었는데 생각외에 많은것들이
알고있던것과 다르다는것을 꺠달았습니다.
가령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던가 혹은 호태왕비 비문을 일부러 지웠다던가 하던내용...
물론 나무위키에서 본 내용이지만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지금까지 알고있던것과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었죠.
알게된게 한가지 더있었는데 외국에서 후지무라신이치 이전 일본의 학계는 신뢰받고있다는내용이었죠.

물론 그 신뢰받았던것이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군정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후지무라신이치의 조작 이후로 박살나긴하지만 어쨌든 그는 학위조차 없는 아마추어라고 하더군요.

그이전에는 외국에서 중국보다 신뢰받았고(이부분은 수긍은 갑니다만) 심지어는 한국보다 신뢰 받았었다고(뭐 저는 모르지만 반박할수있는 지식이 없더군요. 검색해보니까 얼핏 맞는거같았습니다.)
말하는거 보면 아무튼 항복 이전의 경우도 신뢰하고있는것같더군요.
논리적으로는 왜 항복이전까지 신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전에도 딱히 유물조작이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다 이런생각은 들더군요.

이게 중요한 이유는...
주류사학계에 파면 팔수록 일본 사학계에 대한 신뢰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식민사관을 타파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데... 일본사학계의 결과물을 신뢰한다는게
뭔가 이율배반적인것처럼 느껴졌죠.
그 사례를 대충 살펴봤습니다만 제가 본중에서는 전부 해석의 차이정도거나.. 사학계와는 별관계가 없는 일본정부의 별 의미없는 인물사진조작같은것이더군요.
(궁금하면 대충 나무위키 살펴보시면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낙랑군 유물을 조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알수있더군요.
한국 사학계에서는 북한에 가서 제대로된 연구를 한적이 없고 유물들도 제대로된 연구를 한적이 없는듯하더군요. 대부분 연구를 해방전일제와 북한의 연구결과에 의존하는수밖에 없죠.
그런데 주류사학계에서는 북한의 연구결과를 믿지않습니다.
사실상 유물을 보는 시점은 일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죠.
젊은사학자들 모임에서 한사군의 위치는 100년전에 끝났다라고 말을했죠. 거기서 알수있는게... 일본의 연구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뜻이죠.

당연히 그 말을 처음들었을땐 이거 매국노들아닌가? 라고했는데 앞서말했다시피... 
사학과만 들어가면 대부분사람들이 그렇게 변한다는게 납득이 가질 않더군요.
모든사람들이 교수가되려는것은 아닐테니 일단 시험은 그렇게 보더라도...
졸업한뒤에 의문을 갖는사람들이 왜 많지않을까 이생각이 들더군요.
그들이 납득할수있는 최소한의 무엇이 있지않는이상 그렇게 말할리가 없겠죠.

뭐 이 글의 결론은 조작이 확실이다 혹은 아니다 이런건아니고 아직까지는 모르겠다는겁니다.

개인적으로 임나일본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주류사학계쪽에서 임나xx부를 밀고있는 사람들이 일본을 변호하고있는게 아닐까 싶어서였습니다.
임나xx부가 있었던것과 없었던것과 일본사학계의 신뢰도는 상당히 차이가 발생할테니까요.
뭐 지금 생각하면 별 의미는 없는듯합니다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도배시러 18-01-02 23:39
   
그 신뢰가 교조주의를 만들죠.
그들의 논문에 대한 반박을 통해 정설이 된게 없고... 그들의 정설을 후세에게 강요하는 현실.

어찌보면 현 사학계가 무능한 것일지도... 고대사 문제는 과거 논문과 싸울 생각조차 못한다능...
     
Marauder 18-01-02 23:56
   
뭐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틀린게없으니 반박할게 없다... 라고 하겠죠. 다만 최근 고고학계에서 왕검성의 위치라도 바뀐게 큰 소득이라고 볼수있겠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도배시러 18-01-03 00:00
   
반박할 꼬투리를 찾으러 다니는게 일반 학문이고 연구 입니다.
더 완벽하게 하려는거죠.

그리고 다른 학문은 꼬투리를 찾아서 발전시키면 학위를 받을수있습니다.
역사학계는 그런짓하면 호로자식 취급을 당하는 유교적 분위기가 있어 보입니다.

정상적인 학문은 아니라는거죠.


중세기독교가 주류사학처럼 교리를 강요하다가 많이 변했죠
일체의 의문을 금지하고 교리를 강요만 하다가 대중의 의문에 대해 변론하는 단계로...
아직 주류사학의 위치는 중세기독교 수준입니다.
밥밥c 18-01-02 23:53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

주류사학에서 말하는 낙랑군 유물은 전부 북한의 영토에 있으며, 정작 북한은 낙랑군의 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실제로도 '낙랑군'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은 단 한개도 없는 상황입니다.

 단지 고대고분이 수천개 발굴되었을 뿐인데, 이것을 주류사학계에서는 단 한번도 현장에 가본적도 없으면서

 뜬금없이 전부 낙랑군유물로 확정하는 것이죠.

'낙랑군 호구부'조차 사실 맞지도 않는데, 그들이 늘상 주장하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의 지명과

 전혀 일치하는 구석이 없어요.

 실제 옛 지명에 한나라 지명조차 없습니다.
     
Marauder 18-01-02 23:58
   
여기에관해선 주류사학계에 별다른 반론이 없더군요. 그냥 뭐 무조건 믿으라는건지... 아무튼 납득가게 설명한건 못봤군요.
밥밥c 18-01-03 00:02
   
조선시대의 '황해도 수안군'을 한나라시절의 '낙랑군'이라고 하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당시 지명이

 '고소어'였습니다. 즉, 현재의 북한땅의 낙랑군의 추정지는 조선책 기준으로도 이미 당시 지명은

 '고소어', '장새현'이였죠.

 게다가 이미 고구려땅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장새현'이였다고 분명하고 적혀있는데 , 뜬금없이 한나라의 '수성현'으로 둔갑해버린 셈이죠.

 적혀있는 것을 적혀있다고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과 전혀 다르게 적혀있어서 문제가 된 것이죠.

 이곳에서 고대 유물이 나온다면 고구려의 '장새현'유물이지,

 한나라의 '수성현'유물이 될 수조차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황해도/황주목/수안군(遂安郡)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수안군)

현재 황해북도(黃海北道) 수안군(遂安郡)



동쪽으로 곡산군(谷山郡) 경계까지 45리, 남쪽으로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25리,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34리, 서쪽으로 동부(同府) 경계까지 35리, 북쪽으로 평안도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48리,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9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장새현(獐塞縣)이다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원(元) 나라 조정의 폐관(嬖官) 이대순(李大順)의 요청으로 승격하여 수주(遂州)가 되었다 고을 사람 이연송(李連松)이 나라에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출처] (신증)황해도/황주목/수안군(遂安郡)...(세종)황해도/황주목/수안군|작성자 후무사

https://blog.naver.com/humoosa/220675109231
꼬마러브 18-01-03 00:40
   
모두 아는 내용이겠지만, 20세기 초중반의 일본은 군인을 중심으로 하는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천황이라는 강력한 권위 아래, 모든 것이 종속되었을 시기입니다. 조선인은 말할 것도 없으며, 가미카제 ... 등등의 수많은 만행들을 굳이 예시로 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학계도 이러한 분위기에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역사체계에 신뢰성이 있겠습니까? 

명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류사학계의 통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Marauder님이 말씀하셨듯... 이상하리만치 신뢰를 한단 말이죠.
바람따라0 18-01-03 01:06
   
일본의 역사사기, 전방후원분

후지무라 신이치는 한때 일본에서 ‘고고학의 마법사’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그는 1981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속속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여, 일본의 역사를 70만 년 전까지 올려놓는 업적을 달성했지요.


그러나 후지무라의 발굴은 대부분 거짓이었고, 2000년 마이니치신문의 몰래카메라에, 후지무라가 미리 준비한 유물을 발굴현장에 파묻는 장면이 촬영됨으로써 그 사기극이 들통 났습니다.


후지무라의 고고학 사기는 20여 년간 162개 유적 발굴에 자행됐는데, 수많은 해외 고고학자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제대로 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그 대신 후지무라의 사기행각에 고취된 일본인들은, 일본에 ‘4대문명’에 버금가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후지무라 신이치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왜곡과 사기는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만세일통 이라는 일왕의 가계도도 사기이고, ‘무사도’도 사기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조작이, 전방후원분을 이용한 역사왜곡입니다.


일본은 마치 전방후원분이 일본 고유의 무덤양식인양 말하고 있으며, 전방후원분의 원형을 가진 고구려고분이  발굴됐다는 것을 애써 감추고 있습니다. 1999년 발굴된 북한 자강도 운평리고분군 4지구제6호분은 전방원형분의 초기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건축 시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전후로, 일본의 전방원형분 보다 수백년 앞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대마도 인근에 위치한 이키섬은 133.7㎢에 불과한 작은 면적이지만, 13기의 전방원형분이 밀집해 있는데, 그 형태는 고구려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형태였지요. 즉 전방후원분은 고구려의 무덤양식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정착된 것입니다.

일본은 240기에 달하는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을 ‘능묘’로 지정하여 발굴을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랑하는 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인 ‘인덕왕릉’에서 출토된 유품이 준 충격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덕일왕이 더 혼란을 가중시킨 것은, 그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상당 수가 백제의 유물이고, 그 연대가 인덕일왕이 죽은 뒤 수백년 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물의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환두대도와 거울 등  백제의 유물들이었습니다. 그 뒤로 일본은 전방후원분의 발굴을 ‘능묘’ 보존이라는 구실을 대면서 막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남부에서 발견된 15기의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임라일본부설’이나 왜의 백제지역 진출과 같은 역사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역시 폭포수가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른다는 식의 궤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국 남부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초기 형태를 띠며 왕릉이 아닙니다. 그 무덤들의 주인공은,

 

1. 고구려 계열의 원형 무덤을 차용한 인물

2. 왜국 출신으로 백제에 파견된 인물

 

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것이 ‘임라일본부설’은 물론이고 왜국이 백제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수서왜국전에 왜국의 인구는 호수 10만 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당시 75만 호의 인구를 가진 백제와 비교가 안 되는 규모로, 왜국이 일시적으로 백제를 도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군사적으로 앞서 백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한 것입니다.
     
도배시러 18-01-03 02:36
   
수서왜국전에 왜국의 인구는 호수 10만 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 그런 내용 없네요
  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于俀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羅國,經都斯麻國,乃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于華夏,以爲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余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俀。俀王遣小德阿輩台,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余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清相見,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禮義之國,故遣朝貢。我夷人僻在海隅,不聞禮義,是以稽留境內,不即相見。今故清道飾館,以待大使,冀聞大國惟新之化。」清答曰:「皇帝德並二儀,澤流四海,以王慕化,故遣行人來此宣諭。」既而引清就館。其後清遣人謂其王曰:「朝命既達,請即戒途。」於是設宴享以遣清,復令使者隨清來貢方物。此後遂絕。
          
도배시러 18-01-03 02:58
   
왜의 인구는 위지동이전에만 나오네요.
對海國.有千餘戶, 一大國 有三千許家 末盧國 有四千餘戶 伊都國 有千餘戶 奴國 有二萬餘戶
不彌國 有千餘家 投馬國 可五萬餘戶. 邪馬壹國, 女王之所都 可七萬餘戶.

그리고 신당서의 백제 인구는 76만호
定方令士超堞立幟,泰開門降,定方執義慈、隆及小王孝演、酋長五十八人送京師,平其國五部、三十七郡、二百城,戶七十六萬。
               
바람따라0 18-01-03 03:19
   
일본에서는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을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와 이나기(稻置)로 해석하고 있으나 정당성을 확보할 권위는 없다. 왜냐하면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은 킨키(近畿) 야마토(大和)가 아닌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관제이기 때문이다. 덕(德),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관직에 채용하고 있으니 유교의 가치관은 이미 깊숙히 일본 열도까지 들어와 있다. 주민 80호 당 관리자 이니익(伊尼翼)을 두고 10명의 이니익(伊尼翼)은 1군니(軍尼)에 속한다. 그러니 80호를 1명의 이장(= 伊尼翼)이 관리하고 10개의 리(里)는 1개의 면(= 軍尼)이 되며 전체 120개의 면(面)이 있다고 하였으니 120 x 10 x 80 = 96,000 호의 인구이므로 수서에는 10만호의 인구라고 나와 있다. 호당 7인으로 보면 약 70만의 인구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관리 아래 있었다고 보면 된다.
-------------------------------------------

http://gudaragouri.blogspot.kr/2009/10/66.html

이곳의 해설을 참조했습니다.
                    
도배시러 18-01-03 03:38
   
말되네요. 위지동이전 대충 계산해도 14만호인데... 옛날보다 인구가 줄었네요.
그런데 저동네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풍토라
1호에 할배, 할매3, 가장, 처3, 자녀3 = 11인 이상은 잡아야 합니다. - 일반가정
부유층은 가장 + 처5
110만명이라면 30만명은 남자, 여자는 80만명 ?
          
바람따라0 18-01-03 03:25
   
그는 삼년 동안 벼슬을 했는데, 그 기세가 강산마냥 孤遣다.사자는 천자가 천자에게 불법을 다스리며 불법을 행하고, 천자를 알현하는 데도 십 수년 동안 불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했다.그 보고서는 일출에 이르기까지, 천자는 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帝覽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자는 복을 받는 자가 있는데, 이를 어기는 자는 복을 받지 말라.내년에는 遣文에 올라 정월 대보름을 축하한다.도를 행하고 행하는 자는 바다를 건너리라 생각하여 바다를 건너었으니 바다 속에 있는 자는 바다 속에 있으리라또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가 華에 이르렀으니 그 사람은 여름을 보낼 수 없고, 그 사람의 도리를 헤아리지 못하였다.서 아프리카 경제 협력체.自竹斯國은 東에 예속되어 있어 모두 속국으로 분류되었다.왕은 王遣을 낳고, 백 사람은 백명이요, 백번 싸워 싸우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우리라.이에 다리오 왕이 이르매 왕이 禮을 보내 二百余에서 勞을 보내니라도를 행하는 자마다 왕은 왕이 되고 그 나라는 왕이 되고 나라는 태평하니라 가라사대나는 이승에 있는 방에 틀어박혀 있어서, 음향 효과가 좋지 않으니, 내시가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조사하여 내막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두만강을 떠나 館를 기다리고 있으며, 외교 사절을 지내고 있는 것을 환영합니다."清答"는 "皇帝德並"라고도 불리며,"澤流"는 "王慕化"로 통칭하며, 행인들은 "來此"로 통칭한다.뒤이어 금침 속을 파고 들다.그 후에 그 사람은 "朝命"라고 말합니다.그것은 안락한 것을 취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이 후에 결국 성공하였다.
-----------------------

한문을 번역기로 돌려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오는 군요.

인구수와 관련 있는 내용인가요?
               
도배시러 18-01-03 03:40
   
대개 방문하면 다니는 곳마다 첩보활동을 하는데... 저 내용은 호구조사가 없어요.
호구조사는 도입부에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을 설명했구요
바람따라0 18-01-03 01:07
   
허수아비 일왕, 니토베의 '무사도' 날조.

김해김씨계열과 백제계열로 이어지던 일왕 가문은, 1185년 성립된 카마쿠라 막부에 의해 유명무실한 껍데기 행색이 됐고, 일본의 권력은 군벌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후, 일왕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메이지유신 세력이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존왕양이’를 주장할 때,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돌아오는 듯했지만, 이 역시 말뿐이지 실권은 없었지요. 메이지 일왕의 독살은 그것을 잘 증명했습니다.
 
일본의 권력자들은 일왕을 허수아비로 다루면서도, 일본 국민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보이도록 거짓 연출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거짓과 역사왜곡은 ‘무사도’라는 거짓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의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은, 일본 조직폭력배들의 행태입니다. 겉으로 보스에게 충성하지만, 보스의 힘이 약해지면, 배반과 암습이 횡행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제의 적과 손잡고 오늘의 동료를 배신하는 것을 자연스럽던 생각하는 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사무라이의 정체입니다.
 
이런 사무라이들의 행태를 미화했던 것이 1899년 영문으로 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책이었습니다. 니토베는 서양의 ‘기사도’를 차용하여, 일본의 무사집단인 사무라이를 미화했고, 이것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대한 침략 근거로 사용했지요.
 
일본 옹호자들이 말하는 ‘일본 정신’, ‘사무라이 정신’은 니토베의 날조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아직도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은, 후지무라 신이치가 고고학 사기로 일본의 역사를 70만 년 전까지, 올려놓은 것을 믿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올바른 의미는, 한국과 중국에 거점을 두던 세력의 새로운 개척지, 또는 도피처였던 것입니다. 일부 친일적 사고방식을 가진 부류는, 일본의 문명이 15세기에 이미 조선을 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시기부터 일본이 한국에 전파한 문화가 무엇인가요? 기껏 일본이 전파한 것은, ‘왜구’라는 도적집단에 불과 했습니다.
 
조선왕조 세종 때까지 기록만 봐도, 왜구의 노략질은 500회에 달했습니다. 친일적 사고방식을 가진 부류들은 왜구에 대해서도 물타기를 합니다. 그 중하나가, 왜구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구의 활동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왜구가 일본 정부와 관련 없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역시 한심한 것이, 왜구의 편재가 일본 지방정부의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었다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랜 역사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변방이었고, 왜구라는 도적을 수출하는, 비문명 국가였습니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사기국가의 실체입니다.
바람따라0 18-01-03 01:09
   
일본, 거짓과 사기의 역사, 그리고 일왕의 정체...

일본의 역사왜곡과 사기극은 유서깊은 전통(?)에 가깝지요. . 대표적인 것이 ‘만세일통’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일왕의 가계도입니다.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는 905년 다이고 일왕의 명으로 편찬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그 원형이 수록돼있습니다. 내용은 일왕의 시대가 영원 하라는 것이었고, 일본에서는 고귀한 행사에 불렸던 노래였지요. 이것을 1880년 현재의 가사로 정비하고, 프란츠 에케르트의 곡을 받아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미’라는 말이 일본에서는 ‘어이’, ‘자네’, ‘이보게’ 등……. 상대방을 낮잡아볼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것은 국민들의 사기고양과 국가에 대한 애정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데, 상대방을 낮잡아 부르는 말을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지요.
 
이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기미’가 다른 의미를 기지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가능 합니다. 일본어 기미(KIMI)의 또 다른 의미는 왕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대상은 ‘김해김씨’입니다. 즉, 기미가요의 내용은 김해김씨의 세상이 영원 하라는 것이지요. 2009년 명지대학교 강동민 교수는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슬하에 10명의 왕자를 두었고, 큰 아들에게 자신의 제위를 물려주었으며, 2명의 아들에게는 부인 허황옥의 가문을 이어가도록 하였습다. 나머지 7왕자는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규슈로 이주해 정착했고, 그 후손들이 혼슈 야마토 지역에 진출해서 고훈 시대(古墳時代)를 열었습다.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을 통해 일본인에게 무명에 가까웠던 사카모토 료마를, 일본 역사의 최고인물론 만든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1971년 한국 김해를 방문하고, 김해김씨가 일본에 큰 영향을 줬음을 말했습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에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 많은 수의 가락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경작지를 만들고 문화를 전파했다고 말했지요.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의 선봉장이었던 사야카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3,000명의 병력과 함께, 조선에 귀순하였고, 후일 정2품에 까지 이르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김충선 이었으며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됐지요. 김충선이 많은 성씨와 본관 중 김해김씨를 선택한 이유는, 역사를 아는 일본인에게 김해 김씨는 ‘천족’이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8백만 신’의 원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일왕의 가계도는 김해김씨로부터 만들어졌고, 그 뒤 김해김씨와 경합을 벌인 것이, 비류백제계열 이었습니다. 비류백제는 해양세력으로 요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 걸쳐 많은 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남하로 한반도에서 근거지를 잃고 일본의 나라지역에 정착하면서 아스카 문명을 만들었지요.
 
비류백제계열의 세력이 강해졌지만, 김해김씨의 세력을 압도하지 못해, 고훈 문명과 아스카 문명은 7세기까지 공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때 힘의 균형의 무너뜨린 사건이 660년 온조백제의 멸망으로 많은 수의 백제유민이 일본으로 이주해오면서 발생했지요.
 
백제계열은 김해김씨로부터 일왕의 지위를 빼앗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록이 712년 발간된 ‘고사기’와 720년 발간된 ‘일본서기’의 시각차였지요. 고사기는 김해김씨계열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뤘고, 일본서기는 백제계열의 역사에 방점을 찍었던 것입니다.
 
특히, ‘일본’이라는 이름은 701년에 공식화 된 국명으로, 이 또한 백제계열의국가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만세일통’이라는 일왕의 가계도는 거짓말입니다. 일왕의 계보는 김해김씨계열에서 시작돼 백제계열로 넘겨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본래 국명은 왜(倭)였지요.
 
이런 사실을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나 검증을 회피하고 있지요. 그 대신에 그들은 ‘임라일본부’설과 같은 폭포수 물이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방식의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역사의 진실을 물타기하며,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한다 18-01-03 04:17
   
댓글에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네요. 후지무라 신이치를 사례로 보더라도 역사왜곡을 어떻게 왜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한 행위는 훼손이겠구요. 역사왜곡을 한 이유 일제에 우리나라를 복속하기 위해서, 정치적 이익을 위해, 훗날 몇세기 이후에 저항 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방법은 옳은 역사가를 매몰시키기, 증거가 될만한 유물 인멸, 자신들이 날조한 역사를 배운자들을 높은 위치로 올려 놓기 등을 볼수 있겠네요.
이해한다 18-01-03 04:24
   
그러므로 주류사학을 배운 자들이 행태또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본인들의 위치가 흔들리며, 또한 이 사실이 밝혀졌을 시 역사에는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라도 극렬히 거부한 이유는 본인들의 생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거나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은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익에 관련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탐문하는 분들이 나올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한다 18-01-03 04:56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기에 주류사학이 망쇠하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완용과 같이 국가에 해악을 끼친 사람들로 기록 될 것입니다.
이해한다 18-01-03 06:42
   
이유는 국가가 흥할때는 자연히 자부심을 찾게되는데 현 식민사관은 국가의 이익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 단체의 존재의의에 대해 국가는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고 누가 보더라도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단체는 사라지게 됩니다. 현재 주류사학이 존재될 수 있는 이유는 유물이 없기때문이며 후에 주류사학이 없어 지고 비난 받게 될 이유도 유물이 없기 때문일겁니다. 댓글을 남긴 줄 알았는데 지웠졌네요.
이해한다 18-01-03 07:30
   
그렇기에 현 재야사학들이 열심히 탐문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은 후에 주류사학의 대체재가 빨리 되도록 앞당기는 효과를 주기때문입니다.
신수무량 18-01-03 09:31
   
나무위키는 잡쓰레기에 가짜 정보도 많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위키입니다. 특히 역사관련 정보는 작성자 성향에 따라 작성자 마음데로 적혀있습니다.
그나마 구글의 위키피디아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이것도 일반인이 작성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는 주제에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수학 과학 등 확실한 답이 있는 경우에만 참조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겠습니다.
관심병자 18-01-03 09:58
   
일제시대때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선사를 연구 정리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인 학자들과 조선인 학자들이 참여했고,
'조선총독부'가 주도했다는것에서 알수 있듯이
일본제국주의에 부합하는 일본인 학자들.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역사를 공부해온 조선인 학자들이 모여서 우리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주도한 단체(조선총독부)에서 알수 있듯이, 이단체가 정리한 역사는 일본제국주의, 조선의 식민통치에 대해 조선인의 인식을 변화 시키기 위해 정리한 것이고,
일제는 패망했지만 이때 조선총독부 산하에서 조선사를 연구한 조선인 학자들은 그대로 한국에서 역사학계의 주류세력이 되었습니다.
현 주류 사학자들의 역사 스승이 바로 이때의 조선총독부 밑에서 일했던 학자들이고,
그들의 스승이 일본인 학자들입니다.
주류사학이 일제때의 식민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나유키 18-01-03 19:09
   
뭐 당연한 말을 어렵게 썼나 의도가 아리송 합니다.
일제시대때 일본인 주도하에 만든 단체에서 배우고 자란 친일 학자들이 당연히 그들을 답습하는게 신기한가요?
해방후 그들을 축출하고 재편하지 못했고 그 후학들이 계속 득세 했으니 흐름이 현재에 이른거죠.
하지만 잘못된 흐름이 언제까지나 갈리도 없고, 또 주류의 반성과 노력이 없으니 재야를 중심으로 자정이 되려
하고있는 형편이고 주류의 몰락이 진행중이라 개인적으로 판단중입니다.
주류가 그동안 얼마나 놀았는지 알 수 있는게 도서관 자료실 가보면 비전공자들의 역사책으로 뒤덮혔더군요.
심지어 일부 주류도 슬슬 자성하는 책들도 보이고 말이죠.
 
 
Total 108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08 [기타] 개인적으로 김정민 박사에게 굉장히 실망한사건 (6) Marauder 03-02 1609
107 [중국] 빅토리아3라는 게임에 역사고증 오류있더군요. Marauder 10-25 1955
106 [기타] 책보고 영상 몇개 봤는데 가관이군요. (8) Marauder 09-16 1530
105 [한국사] 개인적으로 역사에서 현실드립치는것을 싫어하는이… (1) Marauder 09-06 975
104 [한국사] 엔닌관련 영상에서 본 신라땅으로 추측하는 9가지 근… (4) Marauder 02-08 1888
103 [한국사] 엔닌의 구당입법 순례기 영상을 보면서 신라가 대륙… (2) Marauder 02-08 1401
102 [한국사] 밑에 유튜버 대륙삼국설 가관이군요 ㅋ (74) Marauder 02-07 2050
101 [한국사] 100리가 얼마나 작은지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게 당연… (35) Marauder 01-23 1687
100 [세계사] 흥무대왕님 글에있는 토마스베델님 댓글보다가 떠오… (16) Marauder 08-29 1132
99 [기타] 동아게에서 역사공부하면서 느꼈던점 (35) Marauder 08-29 1282
98 [기타] 개인적인 역사공부의 역사 (2) Marauder 08-29 895
97 [기타] 밑에 내용해서 간단하게 요약말씀드리겠습니다. (7) Marauder 07-31 763
96 [기타] 역사연구모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20) Marauder 07-31 867
95 [기타] 역사과학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2) Marauder 07-31 762
94 [기타] 제목만 봐도 답안나오는 그채널영상들 (2) Marauder 06-18 900
93 [중국] 중국 바이두 내용을 인용할때는 조심해야한다는 생… (40) Marauder 05-09 2275
92 [기타] 개인적으로 역사 탐구를 그만두게된게 (4) Marauder 05-05 1188
91 [한국사] 전부터 궁금했는데 청나라 후신이나 화교도 아니고 … (5) Marauder 04-26 1173
90 [한국사] 예전부터 궁금했던게 몽골이랑 동북아 지방 칠해놓… (1) Marauder 10-12 1102
89 [한국사] 한일 고대사에 관해 최근에 디시에서 재밌는 글을 봤… (5) Marauder 07-04 1294
88 [기타] 경계선지능이란 무엇인가 Marauder 02-23 1206
87 [한국사] 조선이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그저 물타… (2) Marauder 02-22 730
86 [세계사] 밑에있는 오스만지도는 국가별 국경을 만든게아니라… (5) Marauder 01-30 1715
85 [한국사] 일제가 조작한 유물이 있나 물어본이유 (24) Marauder 01-02 2011
84 [한국사] 일본 학계가 역사왜곡한 사례가 있나요? (8) Marauder 01-02 1807
83 [기타] 오랜만에 집에가서 책좀 읽었습니다 (2) Marauder 01-02 856
82 [한국사] 밑에있는 토지내용 결론 (15) Marauder 12-27 1163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