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사, 요사를 근거하여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네이버 고려사, 요사 및 국역DB에서 자료를 여러가지 키위드로 검색하여 찾아 제 재주가 기능하는(그대로 가능보다 기능) 선에서 자료를 복사해 정리를 하니 A4용지 10포인트 크기로 40 여장이 되는데 사실 정황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중첩되는 내용을 제한다면 15~20 장 정도가 될 듯 합니다.
2. 한 4~5일 걸린 일인데 주말 동안 쭈욱 몇 번이고 읽으며 보니
ㅡ 강동 6주는 요양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ㅡ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거나 그 지류일 것이다
ㅡ 강동 6주는 지금 비정된 지역이 아니다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기록 자료를 대하더라도 확신하기 어렵고 선입견 없이 보면 지금 비정 지역이 아니라고 수긍 아니 할 근거도 역시 부족하다는 중간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3. 강동 6주는
ㅡ 압록강의 위치
ㅡ 서경의 위치
ㅡ 동여진의 활동 영역
ㅡ 보주 및 내원성의 위치
등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들의 위치를 지금 통설의 위치가 아니다 하고 부정할 근거가 아직 없거나 부실하다는 게 제 현재의 생각입니다
4. 다만 현 통설이 의심되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4-1. 거란은 1차 침입 이후 고려에 소위 강동 6주를 떼어준 이후 금나라에 요동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강동 6주를 다시 되찾고자 애를 씁니다. 2차 침입과 3차 침입 모두가 그 동기는 강동 6주를 고려로부터 되찾기 위한 침략이었습니다. 1014년에는 압록강 동쪽, 즉 고려영토였던 보주와 정주 등을 빼앗기까지 하며 1100 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도발을 합니다. 고려는 계속 그 지역을 돌려달라 하고, 거란은 강동 6주를 돌려달라 하는 게 근 100 년을 갑니다.
ㅡ 아니 엄청나게 큰 영토를 지녔고 송나라로부터 매해 막대한 상납금을 받는 거란이 어찌하여 아주 작은, 그것도 압록강 경계밖의 (우리로서는 안의) 강동 6주를 그렇게 탐낸 것일까요?
ㅡ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ㅡ 그냥 압록강 라인을 따라 경계로 삼아도 무방한 거 아닙니까
ㅡ 게다가 압록강 하구의 우리 땅 보주까지 빼앗아 아주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삼고 우리를 감시합니다
ㅡ 금나라에 쫓겨가며 보주 내원성을 우리에게 맡길 때 그 성에 들어가 보니 금은보화가 가득해서 어깨춤을 출 정도였는데 대체 어느 나라가 강 건너 남의 나라 지근거리의 성에 그렇게 금은보화를 쌓아둘 것이며 그 금은보화는 어디에서 생출하여 득한 것일까 이해가 안 갑니다
4-2. 강동 6주는 원래 거란 땅이었던 것을 우리에게 떼어준 것이 아닙니다.
ㅡ 표현은 그렇게 돼 있습니다만 동여진의 활동 영역이었습니다
ㅡ 거란이 고려에게 그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공인을 한 것이고 고려가 자력으로 여진족을 내쫓고 성을 쌓은 것입니다
4-3. 거란은 고려땅인 보주를 1014에 빼앗고 성을 쌓았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성을 두 개를 쌓아 부교를 놓습니다
ㅡ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강에 부교를 놓고 그 부교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성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ㅡ 압록강은 동서로 흐르는 강인데 성을 쌓으면 그게 남북이 되지 어떻게 동서가 됩니까?
ㅡ 또 압록강은 유속이 아주 빠르고 특히 보주로 비정된 곳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입니다. 거기에 무슨 최첨단공학이 있어서 부교를 놓습니까?
4-4. 압록강과 거란의 동경이 너무 가깝습니다
ㅡ 1011 요사 기록에 보면 고려에서 철군하는 거란군이 귀주에서 비를 만나서 며칠 지체하다가 비가 갠 다음에 그 강을 건너서 압록강 가에서 군장을 풉니다
ㅡ 군장을 푼다음에 전리품을 정리하고 포로인들을 능묘에 나눠서 배치합니다
ㅡ 압록강에서 요양까지는 어림잡아도 500km가 넘습니다 게다가 압록강 가 어디에 거란의 능묘가 있답니까?
ㅡ 고려사에는 압록강의 한자가 혼재하나 요사에는 모두 맑을 록을 쓰는 압록강입니다
4-5. 거란은 고려를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을 여러 차례 했는데 대체 어디에서 출병합니까?
ㅡ 거란이 1차 침입을 하기 전의 요사 기록을 보면 요택에 물이 차서 출병을 연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ㅡ 요택은 지금의 대릉하와 요하 사이가 아닙니까?
ㅡ 위의 1011 요사 기록을 보면 귀주의 산기슭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회군합니다
ㅡ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서 강을 못 건너고 지체했다가 강을 건넙니다
ㅡ 지금의 압록강이라면 적어도 압록강 중상류를 통해 회군한 것입니다
ㅡ 또 요사 지 병위지 하의 1084 기록을 보면 동경(요양)에서 여진 경계를 거쳐서 압록강 라인까지 배치한 수병의 수가 22,000 명입니다
ㅡ 이 지역의 땅 크기는 거의 한반도 크기입니다
ㅡ 강도 많고 산세도 험합니다
ㅡ 이 넓은 지역을 경계하는 수병의 수치고는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4-6. 강동 6주는 '요동성 강 건너와 개사수 사이의 땅'이라고 고려가 거란에 올린 1088 표문에 분명히 나옵니다.
ㅡ 만약 화표주의 요동성과 개사수가 압록강 이남, 작금에 비정돼 통설이 된 평안북도의 서부 일대라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말이 안 되는 것이죠
ㅡ 또한 1388 명나라가 철령위를 최초로 설치한 봉집현은 명이 최초 고려와의 접경으로 삼았던 곳으로 혼하 근처인데 그 연원적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ㅡ 연원이 있고 근거가 있으니 그리했던 것이요 또 이를 명사에 글로써 기록을 남긴 것 아니겠습니까?
5. 결
ㅡ 통설의 주대가 확고건실하다고 하나 이론의 여지가 사료 상에 이토록 많아서 의심스러우니 학계는 눈을 깨끗이 하고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ㅡ 학자로서의 합리적인 의심과 탐구적 분발을 우리 사학계에 주문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