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지도
삼국시대때 한반도를 영토로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의 한반도까지 뻣어나가는 강! 력! 한! 중화뽕은 한국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업적
"너희들이 과거에 평양까지 지배했었다고!"
"얼른 한나라, 위나라 지도에 한반도 북부도 포함시키라고!"
Japan 지도
일본도 과거 일제시대 조선을 식민통치 하기위해 주장했던 학설일뿐
현재의 일본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중국이 통치했다는걸 믿지않는다고 볼수있다
지도는 삼국시대 배경의 일본산 게임
유명한 게임이고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중국에서도 많이한다
30년동안 저 지도를 썼지만 중국인이 발끈했다는건 들어본적이 없다
식민 joseon 지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자학 사관을 갖고있다.
현재의 일본의 인식과는 다른
일제시대의 역사 인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왜중국이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뻗어있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는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한국인 학자들이 바득바득 우기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도 없었던 중국인들에게 한국에서
여기원래 너희들이 지배했던곳이야
그러니 중국에서는
정말 그런가?
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역사인건가 싶어 연구하게 되는것이다.
고구려와 중국 삼국시대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1512
기원 227년 고구려 연우왕(10대 산상왕)이 죽고 그 아들 동천왕이 즉위하니, 이 때에 중국은 4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국시대인 위(조조, 장강 이북), 오(손권, 장강 이남), 촉(유비, 사천성) 그리고 요동(공손도, 난주 이동과 요동반도)이다. 요동을 빼앗긴 고구려는 요동의 ‘공손도’와는 적국 사이였고, 촉과는 너무 멀어 통할 수 없었다.
고구려, 위나라와 공수동맹으로 요동패망
동천왕이 처음에는 오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관계가 부실하여, 위 황제 ‘조예’에게 밀사를 보내어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치면 위나라가 육군으로 돕고, 위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예’의 수군으로 위나라를 도와주며, 두 적국을 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나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했다.
기원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작자, 대고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동왕 공손연을 치게 하였는데, 위나라에서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수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위나라 군사가 패하여 돌아가자 공손연은 전력을 다해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다.
다음 해에 위나라가 태위 사마의를 보내어 10만의 군사로 공손연을 치게 했다. (소설 삼국지에서 태위 사마의는 촉 승상 제갈공명의 공격을 기산에서 여러차례 막아낸 인물이다.) 사마의는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수를 공격하여 요동 수비군 ‘비연’ 등과 대치하게 해놓고, 사마의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몰래 북으로 진군하여 공손연의 서울인 ‘양평’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공손연은 30 여일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나가 싸우다가 붙잡혀 참수를 당했다. 공손도가 요동을 차지하고 3세 공손연에 이르러 50년 만에 망했다.
관구검의 침입과 제2환도 함락
위나라가 공손연을 쉽게 토벌한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배후를 견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나라는 공손연을 죽이고 요동의 전부를 항복시키고 나서도 고구려와 맺은 맹약을 어기고 한 조각의 땅도 고구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동천왕이 화가 나서 자주 군사를 일으켜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양수 부근)을 함락시켰다.
기원 245년경에 위나라가 동천왕이 자주 침입해 오는 것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수만 군사로 쳐들어왔으나 동천왕이 비류수에서 적군을 대파하여 3천명을 목 베어 죽이고, 양맥곡까지 추격하여 또 3천명을 죽였다. 이에 동천왕이 승리에 도취하고 자만하여 여러 장수와 대다수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왕 자신이 몸소 ‘철기 5천’ 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관구검이 남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맹렬히 반격했다. 동천왕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후방의 고구려 본진의 군사들도 놀라서 도망하여 사상자가 1만8천명이나 되었다. 동천왕은 1천여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간신히 압록강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은 드디어 환도성(안고성)에 들어가서 궁실과 민가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문헌과 전적들을 다 실어 위나라로 보냈다.
서북 만주지역 국가에서 ‘동남지역 국가’로
‘제2 환도’가 철저히 파괴되자 동천왕의 ‘서북정벌’이란 웅심이 차가운 재로 변하여 지금의 대동강 위의 평양으로 천도하니, 이것이 고구려 남천(南遷)의 시작이다. ‘제2 환도’의 파괴와 평양 천도는 조선 고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큰 사건이다.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 중국 등과 충돌이 잦았으나,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 신라, 가라(加羅) 등과 접촉하게 되어 북방보다는 남방과의 충돌이 많았다. 고구려가 광활한 만주의‘서북지역 국가’에서 한반도 평양 중심의 ‘동남지역 국가’로 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한국상고사’에서 발췌 요약
신채호는 위서로 의심 받는 사서는 절대 인용하지 않는다.
즉, 윗글은 중국 정사를 근거로한것이다.
한국 주류 사학자들이 서진 시대까지 유지되었다는 한사군은 저때 뭘하고 있었을까?
공손도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까?
고조선 멸망한후에,
단석괴가 나타나 북방을 한번 휩쓸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나고,
한나라는 멸망했는데도 한나라가 세운 한사군은 아무영향도 없이 꿋꿋이 400년을 유지했었다는게 한국사학자의 주장이다.
위, 공손씨세력, 고구려
경기지방의 낙랑군은 왜 무시하고 있는가?
위나라나 고구려나 아예 없는놈 취급을 하고 있는거 아닌가?
서진시대 지도
위 지도는 한국 주류사학의 주장대로라면 잘못된 지도이다.
한국 학자들의 주장대로 라면 한반도 경기도 지역에 한나라에서 세운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지도에서 한반도 동부지역을 빼면 한국 사학자들이 원하는 지도가 완성
선비족에게 줘털리고 나라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도 끝까지 한반도 식민지를 지켜낸 서진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수있다.
8왕의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5678&cid=42978&categoryId=42978
원홍장 설화(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서진의 8왕의난
낙랑태수의 처신에는 의문점이 생길수 밖에 없다.
대륙에 황건적이 봉기하고 제후들이 일어날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 있었나?
원소와 공손씨가 싸울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 있었나?
조조가 위왕이 되어 한나라에서 위나라로 바뀔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있었나?
오나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을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 있었나?
위나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요동의 공손씨를 칠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 있었나?
위나라에서 사마씨의 서진으로 바뀔때 낙랑태수는 무얼하고 있었나?
단석괴가 만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할때 낙랑군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고구려가 선비족과 연합해 한나라를 공격할때 낙랑군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302년에 현도군을 침략해 8천명을 잡아 평양으로 옮겼다는데 고구려는 왜 현도군에서 잡아온 포로를 낙랑군으로 보내는 뻘짓을 했을까?
고구려가 314년에 낙랑군 남쪽의 대방군을 침략했다는데 한반도 남부까지도 한사군이 있었다는 기록인가?
신념대로 일본서기만이 진서이고 다른 동아시아 역사서는 다 위서라고 말하지 못하는 식민사학자들이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