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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2-17 21:48
[한국사] 발해 건국과 수군 활동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421  

발해는 698년에 건국하여 926년에 멸망한 228년간 존속했던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동아시아와 고구려 지역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돌궐이 다시 발흥하여 흥안령()을 넘어 만주 일대에 세력을 뻗쳤다. 한편 고막해·거란·실위 등이 다시 등장했고, 북방 흑룡강 유역의 흑수말갈이 강력해졌다.

발해 강역도(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발해 강역도(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결국 당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면서 다시 북방족들간의 충돌과 혼란이 생겼다. 696년에 거란사람 이진충()이 요서지방 영주(조양)도독을 살해한 뒤에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이때 고구려의 유민출신인 대조영()과 말갈출신인 걸사비우는 이진충을 도우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했다. 그런데 돌궐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이진충은 패하고 걸사비우는 사망했다. 그리고 대조영은 대탈출을 감행하여 천문령을 넘고 1천여 리를 지나 고국 땅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698년에 고구려 계루부의 옛 땅에 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 뒤 713년에는 나라의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그리고 200여 년 동안을 번성하다가 926년에 갑자기 멸망했고, 유민들의 일부는 고려에 귀화했다.

발해의 주민구성과 정통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예를 들면, 『구당서』는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대조영자 본고려별종야))”라고 했다. 별종이란 말은 ‘고구려에서 나온 가지’라는 뜻인데, 이 표현을 가지고 마치 대조영이 고구려 주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중국학계는 발해를 세운 민족은 말갈인이고, 그 국가체제는 당나라가 관할한 지방 정권이며, 발해 문화는 지방적 색채를 띤 당나라 문화의 구성 부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종족들을 별종이라고 표현한 예는 사료상에서 무수히 나타난다. 『구당서』에는 “고려(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별종이다( (고려자 출자부여지별종야)).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백제국 본역부여지별종))”고 했다. 또 『신당서』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 별종이다( (고려 본부여별종야)).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백제 부여별종야))”고 하여 별종이 전혀 다른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님을 보여준다.

더욱이 같은 책에서 “(발해) 풍속은 고구려·거란과 같다((풍속여고려급계단동))”라고 하여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본다면 최소한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적대국이었던 신라인들도 비슷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는 그의 입을 빌려 “고구려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라고 했으며, 또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문선』 권 47에 나오는 글이다. 그 외에도 『삼국유사』(권 1, 말갈발해조)에도 『신라고기』라는 책을 인용한다며 비슷한 내용을 얘기하고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발해가 고구려를 이었다는 증거는 많다. 문화도 언어도 모두 고구려를 계승하였다.

조선조의 실학자인 영재 유득공(1748~1807)이 쓴 『발해고』(1784)에는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을 말하고, 발해를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라고 인식했다. 이후 이러한 인식은 홍석주, 정약용, 신채호를 거쳐 장도빈으로 이어졌다. 김육불이 쓴 『발해국지장편』에서 발해 지배층의 성씨를 보면 총 317명이 나오는데, 대()씨가 90명, 고()씨가 56명으로서 총 146명이 대씨와 고구려 고씨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지배층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발해인들은 스스로가 외국, 특히 일본에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했다. 건국하고 나서 29년째가 되던 해인 727년 가을에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그때 사신인 고인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파도에 휩쓸려 죽고, 수령인 고제덕() 등 일부만이 도착했다. 그때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복고려지구거 유부여지유속))”라고 선언했다. 『속일본기』 신구() 5년 1월 17일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즉 발해는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와 역할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이다. 고구려와 왜국과의 관계를 발해가 뒤를 이어 회복한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발해는 옛날 고구려이다( (발해군자 구고려국야))”라고 했다. 신흥 일본국의 수도인 나라의 평성경에서 발견된 목간에서도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使)라고 했다(使 () (의견고려사회래 천평보자이년 십월(대)팔일 진이계급)). 200여 년 동안 일본에 파견된 발해의 사신들은 정사가 8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6명이 고려씨였다. 이러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고,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계속 고수했고, 그 때문에 발해가 멸망하고 홀한성()이 함락될 때에 세자 이하 고려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십여만에 이르렀다.

발해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독자적인 나라였고 정체성이 강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발해인이 직접 세운 비문에는 황상(), 성법대왕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즉 정효공주묘에 보면 “황상께서는 조회를 파하고 매우 슬퍼하셨으며, 취침을 피하고 가무도 중지하셨다( (황상 파조흥통 피침치현)······)”는 글귀가 있다. 또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 금륜성법대왕의 넷째따님이시다( (공주자 아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지제사녀야))”고 하여 문왕의 연호인 대흥 보력 ‘성법대왕’이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정혜공주묘에도 “ □□□(공주자 아대흥보력효감□□□법대왕지제이녀야)”라는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발해는 이러한 정통성과 자의식, 명분을 지닌 채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절묘하게 활용할 수 있는 만주 지역을 대부분 차지했다. 『신당서』에는 전성기 때 발해의 영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땅은 사방 5천 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라고 했다.

발해는 유달리 수도를 여러 번 옮겼는데, 이는 국가발전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두번째 수도는 제3대 문왕 때(742년) 중경 현덕부이다. 세 번째 수도는 755년 상경 용천부이고, 네 번째 수도는 30년 만에 동경 용원부로 옮겼다. 이는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지막 수도는 다시 복귀한 상경이다. 이후 상경은 926년까지 멸망할 때 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점차 영토를 넓혀 한창 때인 선왕 때에는 남쪽으로는 대동강부터 원산, 서로는 요동반도, 북은 고구려시대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연해주와 하바로브스크 일대에까지 뻗치는 광대한 제국이 되었다( 설). 발해는 문화가 뛰어났다. 정혜공주묘에서 발견된 벽화고분들은 고구려를 뒤이은 뛰어난 예술품들이다. 400여 개의 문자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내용은 알수 없지만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발해는 무엇보다도 당·일본·거란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교섭과 교역이 활발했다.

스이픈 강가 언덕에 쌓은 발해성

스이픈 강가 언덕에 쌓은 발해성

우스리스크시 근처 스이픈 강가의 발해성

우스리스크시 근처 스이픈 강가의 발해성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영토에 걸맞는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경제력을 상승시키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는 다양한 배경과 요인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해양활동 능력이었다.

발해만의 발해수군

발해는 2대 무왕이 732년 9월, 육군으로 요서지방, 수군으로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를 공격했다. 당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재편되는 신질서에 위협을 느낀 발해는 북방의 위협적인 존재인 흑수말갈을 토벌하였다. 이어 돌궐·거란 등과 연합하여 당을 공격하기로 했다.

발해는 육로로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당나라는 이에 맞서 무왕의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 지역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신라 왕족인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한다(『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이후 당과 신라는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한편 장군인 장문휴()는 수군을 거느리고 박작성을 출발했다. 박작성은 압록강의 하구에서 130리 쯤 내륙으로 들어간 곳으로서 오늘날의 신의주 건너편인 단동시 외곽에 있다. 고구려 때는 압록강 방어전선의 주력성이었으며,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발해의 수군은 많은 군사와 무기, 그리고 무장을 갖춘 말을 수백 척의 전선에 싣고 박작성을 출발했다. 압록강을 빠져 나온 다음에 가능한 한 요동반도 해안을 벗어나서 근해항해를 했을 것이다. 적의 육군에게 관측되지 않고, 또 수군의 척후선에 들키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양도()·장도() 등이 있는 장산군도의 바깥 해역을 지나서 묘도군도 중간쯤부터 노철산 수로를 이용하여 전광석화처럼 산동반도의 등주항에 상륙했다. 당나라 수군이 고구려를 공격했던 작전과 마찬가지로 수군을 이용한 후방상륙작전을 개시하여 당의 허를 찌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장문휴는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고 점령했다.

등주(봉래시)는 까마득한 절벽이 황해를 바라보고 있고,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가 좁은 난공불락의 해안요새이다. 그 해역은 황해와 발해가 만나는 경계선이므로 물살이 빠르고 교란되어 물길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고려 초기에도 사신선이 이 근처(지강도)에서 파손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러한 악조건을 무릅쓰고도 성공시킨 것을 보면 발해의 수군은 전력과 작전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등주는 북방에서는 가장 크고 중요한 항구였다. 이 공격은 발해가 수군을 이용해서 당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경고성 행위였으며, 상당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쟁으로 당은 동방정책을 수정하여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발해를 배후에서 압박했다.

등주만에 있는 등주수성

등주만에 있는 등주수성

[네이버 지식백과]건국과 수군 활동 (한국 해양사, 2014. 3. 31., 학연문화사)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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