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읍루전과 삼국사기의 숙신
만주의 말갈을 중국 기록에서 찾아보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로 시대마다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말갈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선조라고 여겨지는 부족들에 대한 기록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읍루(?婁)전〉으로 276자 분량이다. 『후한서』〈읍루전〉은 232자 분량으로 『삼국지』를 거의 옮겨 적어 사료(史料)적 가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기록들은 『위략(魏略)』이란 책을 많이 인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245년 위(魏)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환도성까지 쳐들어 올 때 얻었던 동방사회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고 있다고 하며, 언어가 부여, 고구려와 다르다고 했다. 읍루인은 숲에서 살면서 돼지치기를 하고, 동굴에서 주거생활을 하는 동방지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종족이라고 했다. 화살과 적색 옥, 담비가죽이 특산물이며, 옛 숙신의 나라라고 했다. 무척 추운 곳에 사는 이들은 대대로 부여에 굴복한 종족이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서기 220~226년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고, 부여가 이를 정벌하였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이들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숙신(肅愼)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태조대왕 69년(121)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묘(유화부인의 묘)에 제사를 지내며 머물 때 처음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는 존재로 숙신이 처음 등장한다. 숙신의 위치는 부여의 동쪽인 지금의 우수리강 유역이나 삼강평원지역, 연해주북부 지역을 포함한 흑룡강 하류일대로 볼 수 있겠다. 이곳은 삼림이 우거져 도시가 발달하기 어렵고, 부족 집단이 흩어져 살기에 좋은 지역이다. 지역 내 넓은 평야지역에서는 농사도 지었던 것 같다.
태조대왕이 부여에 가서 고구려의 위세를 과시하자, 부여의 지배를 받던 숙신도 고구려에게 붉은 여우 가죽과 흰매, 흰말을 바치러 왔다. 하지만, 이들이 부여의 지배를 벗어난 이후에는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서천왕 11년(280)에 숙신이 공격해오자, 고구려에서는 왕의 동생인 달가를 보내 숙신의 추장을 죽이고 적 600가구를 포로로 잡아와서 부여 남쪽으로 옮기고 부락 6~7개소의 항복을 받아 부용(附庸-속민)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숙신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고구려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동북쪽의 큰 성인 신성(新城)에 왕이 직접 행차를 하기도 하고, 달가로 하여금 숙신부락을 지배하도록 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8년(398)에 왕이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지방을 관찰 순시하였고, 막?나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식신은 고구려에게 조공하고 자신들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식신은 강원도 지역에 있던 예(濊)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만약 강원도 지역의 예를 지칭했다면, 『삼국사기』에 표현된 것처럼 말갈로 기록했거나, 아니면 『삼국지』의 기록대로 동예나 예로 표시했을 것이다. 또 『릉비』에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무덤을 수묘해 줄 예(穢)족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식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구려 동북쪽에 위치한 숙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여기서 고구려가 이들에 대한 행동이 『비문』의 다른 기록처럼 정벌한 것이 아니라, 관찰 순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숙신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세력으로 정벌의 대상도 아닌 셈이다. 즉 이들은 영락 20년에 조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이 군대를 보내 토벌한 동부여보다 더욱 고구려에 굴복한 존재였었다.
진서의 숙신과 위서의 물길
『삼국지』다음의 기록은 순서 상으로는 『진서(晋書)』〈숙신(肅愼)전〉이 있다. 『진서』는 456자 분량으로 『삼국지』의 자료를 비롯해서 『숙신국기(肅愼國記)』『업중기(業中記)』등을 인용하여 『삼국지』보다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읍루 대신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숙신으로 그들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진서』는 64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라 당시의 정보보다는 후대에 편집된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아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책은 554년에 쓰여진 『위서』「물길(勿吉)전」이다. 전체 624자 분량의 대부분이 북위에 온 물길의 사신인 을력지(乙力支)를 중심으로 한 사신왕래 기사와 이들이 가져온 정보다. 『삼국지』 내용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을력지가 북위에 온 것은 470년대이고, 위서에 기록된 물길의 사신은 540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길에 대한 매우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위서』에 따르면 이들은 단지 고구려 북쪽에서 주변의 작은 부락민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던 세력에 불과했다. 『위서』에 등장하는 물길 주변에 12개국이 있어 이들이 각기 사신을 북위에 보냈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 대막로국(大莫盧國)은 부여의 후예인 두막루국(豆莫婁國)을 지칭하며,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은 고구려에 의해 붕괴된 거란8부의 일원인 부족들로 물길 부락이 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물길의 사신을 통해 고구려 세력권 내부에 여러 다양한 부족들이 있고, 그들이 때로 독립의사를 갖고 있음을 알고 기록한 정도이지, 중국인들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사정을 알아간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에게 고구려 내부를 통과해서 동류송화강, 삼강평원, 우수리강 유역까지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길(勿吉)이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온 사실이었다. 고구려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북위였지만, 내심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던 터라 물길의 제안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물길의 제안은 북위로부터 거절되고 만다. 물길이 고구려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못된다고 북위에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길은 문자명왕 시기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일시 완전 제압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틈틈이 북위 등에게 사신을 보내나,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수서의 말갈 7부, 신당서의 흑수말갈.
그런데, 636년경에 쓰여진 『수서』에서 〈말갈전〉이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말갈 7개 부족 즉, 속말(粟末), 백돌(伯?), 안거골(安車骨), 불열(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백산(白山)부의 기록이 등장한다. 이들 중 속말부와 백산부가 수(隋)와 가깝다고 하였고, 흑수부는 그 중에 가장 굳세고 건강했다고 하였다. 전체 668자 중 474자는 독창적인 내용이지만, 194자는 『위서』내용을 다소 손질한 것으로 말갈의 풍습은 물길의 풍습을 옮겨 적은 정도다.
『위서』가 쓰여진 지 불과 82년 만에 물길 부족이 말갈로 바뀌어 불려지면서 갑자기 7개 부족으로 늘어나 버렸다. 말갈에 대한 정보는 610년경 속말말갈의 돌지계(突地稽)란 자가 천여 명을 거느리고 수에 항복해옴에 따라 얻어진 것이다. 돌지계는 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그것은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세력권 내부에 수와 협조할 수 있는 반란세력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수서』에 뒤이어 쓰여진 책인 『북제서(北齊書)』,『북사(北史)』,『구당서』〈말갈전〉, 『신당서』〈흑수말갈전〉까지 전부 말갈이란 말이 등장한다. 『북사』는 남북조시대의 북조의 역사를 쓴 책이므로, 물길이라고 지칭했지만, 7개 부가 있다는 『수서』의 내용을 그대로 채택해 마치 물길 때부터 7개 부가 있었던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
『수서』〈말갈전〉의 7개 부를 『구당서』등과 연결지어 이해해보면 말갈은 매우 강력한 세력이 된다. 7개 부의 정예 병력을 합하면 2만 5천명이 넘고, 인구도 적어도 수십만이 된다. 하지만, 물길의 경우를 『위서』를 통해 읽어보면 그렇게 강력한 세력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물길이 불과 수십 년만에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7개 부가 고구려로부터 독립된 상태였다면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6세기말부터 만주의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수서』〈돌궐전〉에는 582년 이전에 돌궐 군대가 고구려와 말갈의 군대에게 크게 패했음이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영양왕 9년(598)에는 왕이 직접 말갈병 만 명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전진기지였던 요서지역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등장하는 말갈은 한반도의 말갈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활동무대가 요서지역이거나, 서요하 상류 혹은 대흥안령산맥 등 한반도에서 크게 떨어져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만주의 말갈임에 분명하다.
고구려는 6세기말에 만주의 말갈을 지배했으며, 왕이 이들을 직접 이끌고 군사작전을 펼쳤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7부 명칭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이들이 반기를 들어 고구려를 괴롭혔다는 단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보장왕 13년(554)에도 고구려 장군 안고가 말갈병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기도 했다. 666년 남생은 동생인 남건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해 국내성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말갈과 거란의 병사를 이끌고 당에 항복했었다. 더욱이 677년 고구려가 망한 후, 요동땅에 보내진 보장왕은 말갈의 무리와 함께 고구려 복국을 꿈꾸다가 당에게 발각된 일도 있었다. 또한 고구려인 유민의 상당수는 이후 말갈과 돌궐 등지로 흩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고구려 멸망까지 말갈이 고구려인과 아무런 종족적 이질감이 없는 존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발해사 연구가인 한규철님은 말갈을 고구려 일부 피지배층에 대한 중국인들의 낮춤 말(卑稱)로 보고 있다. 필자 역시 이 견해에 동의한다.
만주의 말갈은 늦어도 120년대부터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고, 280년부터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어 최소한 400년 이상 하나의 정치권력 아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 민족적 이질감이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물길 등 일부 반란을 일으킨 부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나 파장은 크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말갈 7부의 행적을 살펴보자. 『구당서』〈말갈전〉에는 말갈이 수십 부에 이른다고 기록해 말갈을 매우 거대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말갈은 고구려에 굴복되어 있고, 일부는 돌궐의 지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흑수말갈만이 강성하여 이웃 부족의 걱정거리였다고 기록했다. 『구당서』는 945년에 쓰여진 책으로 당이 동방지역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말갈은 돌궐과 고구려, 실위를 제외한 만주 동북부 전체 부족의 총칭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십 부에 이른다는 말갈부족 가운데 등장하는 것은 백산부, 안거골, 호실, 백돌, 흑수부 뿐이다. 백산부는 본래 고구려에 속해있었고, 나머지 흑수부를 제외한 3개부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뿔뿔이 흩어져 미약해져서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이들 4개부는 본래 고구려인과 다름없는 사람들로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읍루-물길과 연결된 족속으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 내부에 있는 변방 부족으로 고구려의 중요 구성원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수에 귀순했던 돌지게의 속말부도 『구당서』〈말갈전〉에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오직 돌지게와 그의 아들에 대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속말부는 발해를 건국한 중심세력이 등장한다. 속말부도 고구려의 본래 구성원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독 세력이 강해진 것은 흑수부였다. 흑수부는 땅을 16개 부로 나누고, 남부와 북부로 구분하여 일컬었다고 했다. 흑수부는 발해 건국 후에도 별도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가장 북쪽에 있으면서 정착 농경을 하지 못하고 수렵생활을 지속했기 때문에 별도의 부족으로 남았던 것 같다. 나머지 부족들은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의 구성원이 되며, 농경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백산부 등은 본래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족(5부족과 초기의 통합된 주나, 개마국, 낙씨부여 등)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말갈 7부 가운데 속말, 백돌, 안거골, 호실, 백산부는 고구려에 속한 부이며, 불열부는 아예 『수서』이후에 기록이 없고, 오직 흑수부 정도만이 다른 족속으로 인정되는 셈이다. 흑수부 만이 읍루-물길로 연결되는 존재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북위, 수, 당 등 고구려와 대적했던 세력들이 고구려 내부에 자신들의 동조자를 찾다가 물길, 돌지게 등의 존재를 발견하고 이들을 범주화시켜 마치 거대한 세력이 고구려 동북쪽에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읍루 - 숙신 - 물길 - 말갈이 모두 같은 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 범위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주화한 말갈의 대다수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세력도 아니었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고구려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11세기 중엽에 쓰여진『신당서』〈흑수말갈전〉에는 흑수말갈이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에 고구려를 도와 당과 겨룬 세력으로 기록하고 있다. 흑수말갈 조차도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존재였다면, 말갈이 이민족이었거나, 고구려의 구성원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5세기말의 물길의 반란, 610년경의 돌지게의 수나라 투항, 그리고 말갈이 몇 번 사신을 보낸 것을 통해 말갈을 고구려와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말갈 7부의 위치를 『수서』의 애매한 표현을 기준으로 『신당서』등을 이용해서 흑룡강성 전체와 연해주 일대가 말갈의 거주지인 것처럼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말갈 7부가 이렇게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고구려로부터 독립했다면 고구려는 국경을 지키기에도 급급했을 것이다. 또한 『통전(通典)』에 고구려가 동서 6천리나 되는 거대한 나라였다는 기록이나, 북위(北魏)가 해외의 모든 나라들을 고구려가 장악했다는 표현은 모두 잘못된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고구려는 수?당과 싸우기에 앞서 말갈에게 멸망당했을 것이다.
만주의 말갈이 살던 지역은 과거에는 정착 농경민이 거주하기에 춥고, 삼림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부족단위로 삼림 속에서 거주하며, 수렵과 어로, 그리고 약간의 농경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지방민이었으며, 고구려 문화권의 내부 구성원이었던 셈이다. 다만, 고구려 중심지역 사람들보다 문화적 소양이 낮았고, 혈연적 유대가 강한 부족단위를 벗어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들은 국가라는 끈보다는 부족이라는 끈이 더 현실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고구려, 발해가 멸망했어도 계속 부족단위 생활을 유지한 것이다. 이들은 때로는 고구려 중앙정부에 진출해서 발언권도 가지며 똑같은 고구려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고 생각된다. 고구려가 다양한 생산기반을 가진 여러 부족들을 함께 아울러 지배했었던 제국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위상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고구려로부터 독립한 거대한 말갈의 존재는 있지 않았으며, 말갈은 고구려의 중요 구성원이었음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말갈문제는 고구려 역사에서도 중요하지만, 발해사, 더 나아가 한국 민족사에서도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으로 이 문제는 더욱 깊게 연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