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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8 22:11
[한국사] 한많은 발해유민의 슬픔(여진 금나라의 배신과 강제이주와 인종청소)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131  

1) 동조동근론을 내세우며 발해인을 회유 

발해부흥운동은 주로 요나라 시기에 지속되다가 말갈(여진)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이들이 발해 유민들을 포용 , 이주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게 통설이다. 특히 마지막 부흥운동인 대원국이 요말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초기의 금은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데서 근거하나, 이러한 포용은 금태조 때만 있었다. 


a)멸망 후 260년이 지나도 정체성을 가졌던 발해인: 금나라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에서 비문이 발견됨, 비문은 1190년 쓰여진 한 스님의 일대기, 스님의 성은 高氏 "東京遼陽縣渤海人" 발해는 926년에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망해서 유민들이 거란의 동경과 상경으로 끌려갔는데, 260년이 지난 1190년에도 여전히 발해인이라 표기함.

 

b)女眞渤海同本一家: 아골타가 거란과 대적할때 발해인의 동참을 이끌어 내어 요나라에 정벌에 크게기여함. 금국이 건립된 후 많은 발해인들이 관직에 등용되거나 발해여인이 금국과 혼인하여 연합정권형성.

  

c)북경은 송대에는 변방에 불과했으나 여진은 발해인 장호(張浩遼陽縣渤海人 本姓高氏東明王之後)를 북경건설최고책임자로 임명하였다. 北海公園도 이때 조성한 것이다.

대제국을 다스린 경험이 많은 발해인들이 고위관리층에 등용됨. 금제국건설에 중추를 담당함.

요양은 금대 오대도시중 하나로서 요양박물관에 특별한 비문이 있다.

  

'통해원명대사의탁명'으로 불리는 비문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따님이시며 태조황제 셋째아들   허왕의 아내 동경유수 정국공의 어머니로 발해인이었다.

 정국공은 나중에 금의 황제가 되는데 이가 금의 성군이라불리는 세종황제이다.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배씨였다. 이처럼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황실에 시집   을  갔다. 

-> 이 때까지는 분위기 좋음 


그러나, 금나라 시절의 사료를 확인하면 애초에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발해인들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만약 발해의 유민, 상당수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동류의 집단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발해 주민 상당수는 엄연히 고구려인의 후손이었기에 이토록 길고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끈질기고도 긴 항전을 계속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2)발해유민의 숙청과  민족청소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고,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었다 한다. 

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결국 발해인은 한족과 융합을 강요당하며, 민족말살을 당하게 된다.

(발해유민은 거란만도 못한 3등 국민에서, 아예 한족에 강제융합 당함) 


3)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실패한 이유  


(1)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때 같은 식구였던 여진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인데, 이미 발해시절 흑수부 말갈계 여진의 복속으로, 서로 원한 관계가 깊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진족들은 당연히 금나라의 조상인 흑수부 말갈 계열의 여진일 것이다

(2) 각 부흥운동 세력간의 통합적인 전선 구축이 안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시간차로 일어났지만 결국엔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고구려 부흥운동 당시 대조영과 같은 통합적 리더십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을 텐데 아마 그런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남쪽에서 같은 동류 집단인 고려가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풍부한 귀족층들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가 흡수한 발해인들은 아마 상당수가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 즉 핵심 인적 자원들이었을 것이며, 위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대조영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도 고려로 이미 유능한 인재풀들이 많이 유출되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


(이 이유를 제시한 것은 정안국 사람들 조차, 고려에 오기만 하면 돌아가지 않았다는 골수의 예를 보 듯, 고려에 빠르게 발해유민들 중 상류층이 집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 발해유민을 여진족으로 표현하거나, 필요해 의해 이용하기만 했다) 송막기문 발해국.jpg

*송막기문'의 역사 기록 중 금나라가 발해인을 산동성으로 강제이주시켰다는 기록

天祚之亂 其聚族立姓大者於舊國為王 金人討之,軍未至,其貴族高氏棄家來降,言其虛實,城後陷 契丹所遷民益蕃,至五千餘戶,勝兵可三萬 金人慮其難制,頻年轉戍山東 每徙不過數百家,至辛酉歲盡驅以行

천조의 난이 일어나자 그 족속(발해인)은 고국에서 성(姓)이 대씨(大氏)인 자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금나라가 그들을 토벌할 때 군대가 이르기 전에 귀족 고씨가 집을 버리고 나와서 항복하고 그 허실(虛實)을 말하여 주어 성이 나중에 함락되었다. 거란이 (발해) 백성을 옮긴 것이 더욱 늘어나 5천여호에 이르렀고 뛰어난 병사가 3만명이나 되었다.

금나라가 발해인을 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매년 그들을 옮겨 산동(山東)을 지키게 하였다. 매번 옮길 때 수백 집에 불과했으나 신유년(1147년)에 이르러 모두 몰아서 보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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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3-08 23:03
   
발해멸망 이후 수 만호의 발해인들이 요나라 동경, 상경 등지로 강제이주당하고

고려의 포용정책으로 역시 수 만호에 상당하는 발해인들이 고려로 귀순한 이후.....

이들 발해인들은 고려와 요나라 양국 모두에게 여-요 전쟁에서 좋은말로 하면 선봉에 서서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화살받이로 이용되었습니다.

이후 요와 금과의 전쟁에서도 발해인들은 요나라에 의해 선봉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며...

금나라에게 점차 전세가 기울어지고, 또한 요-금전쟁 초기 당시에 인구가 희박하여 한 명의 장정이 아쉬운

금나라의 적극적인 회유와 포용정책에 힘입어 금나라편에 섰던 발해인들이 이번에는 요나라 잔당들과의

전쟁 뿐만 아니라... 금과 북송이 전쟁을 벌이게 되자 금나라의 개봉포위전 등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북송을 제압하고 금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무렵 이용가치가 떨어진 발해인들을 토사구팽시킬 당시

금나라인들이 발해인 장정이 3만에 달할 정도로 장차 나라의 화근이 될 수 있음을 명분으로 삼았듯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일대를 장악하여 적어도 한족들을 대거 흡수하기 이전까지는 장정수 3만에 달하는

발해인들의 규모가 금나라 전체에서도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었습니다.

금나라 건국 당시 완안부와 주변 여진부족들의 장정수가 고작 2~3만 규모였고....

요나라를 제압하고 북송을 쳐들어갈 당시 개봉을 향해 진격한 금나라군의 규모가 6만 규모였으니

당시 오르도스 일대까지 달아난 요나라잔당을 뒤쫓고, 금나라 본거지에 남은 잔류병력까지

전부 포함한다 하더라도 총병력이 10만을 크게 상회하지는 못했을 당시에... 금나라 여진인들에게는

옛 상전에 해당하는... 게다가 병력으로 차출가능한 규모 또한 3만에 달하는 발해인들이 여진인들 입장에서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history2 18-03-09 00:38
   
그러게요ㆍ그렇다고 발해 인종청소 까지 하는건 쫌 ㅠㅠ ㆍ그런데 이 발해유민의 한을 갖고ㆍ몽골로 간 자들의 후예가 칭기즈칸이라는 사람틀도  있기는 하더라고요ㆍ암튼 한을 주면 안됩니다 ㆍ한은 한으로 돌아오지요 ㅡㅡㅡ테무르가 여진한데 하는것 보면 사실 심하긴 했는데요
굿잡스 18-03-09 00:54
   
한규철 교수의 1994년 논문
밑에 글은 일부 발췌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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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에서 발해부흥운동이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劉肅勇은 금나라가 발해유민을 다스리는 통치술이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0) 그러나, 요나라의 통치술이 결코 금나라보다 못했다고 단정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금나라에 맹안모극제가 있었던처럼 거란에도 남북원제가 있었다. 거란이 발해유민을 통제키 위해 실행했던 동단국의 요양 이동과 같은 강제 사민정책은 강력했다. 금나라에서도 발해인들에 대한 사민책이 있었다고는 하나,31)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란에서처럼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에 대한 대처였던 것은 아니다. 금초에 있었던 발해인에 대한 화북·산동으로 사치는 고영창의 대발해국이나 고욕의 난에 가담하였던 발해 세력, 또는 후발해 조정에 있던 무리가 아니었나 한다. 당시의 발해인이 고영창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대발해국 당시 고영창이 금나라와 협상하면서 ‘황제’를 고집하다가 금에 의해 참살되었던32)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올야 정권의 후발해 조정과 연결된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금나라를 건국한 세력과 올야 정권은 일정하게 같은 ‘일가’이면서도 금나라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견제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나라에서의 발해인 사치라는 의미는 거란초의 발해유민 사치와는 그 의미가 자못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란과 이민족의 입장에 있던 발해의 부흥운동에 대비한 것이 거란의 사치정책이었다면, 금나라에서의 그것은 ‘일가’안에서의 반대세력을 소개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 조정에서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인을 특별히 구별하였던 것은 거란내에 있었던 고영창 등의 발해유민 세력이거나 후발해 조정안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 여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발해와 여진의 역사적 관계에서 금나라에서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발해와 일정하게 ‘본동일가’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금나라는 한편으로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3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굿잡스 18-03-09 00:55
   
여진이란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의 복합민족 정도로 언급함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20) 말갈의 종족계통을 다원적으로 보고, 지역명에 의미를 두어 속말말갈의 발해 건국세력을 ‘송화강지역 고구려변방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21) 여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해시대에는 흑수말갈의 작은 범위의 주민들이 발해가 멸망하고서 갑자기 대거 남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계기성이 결여된 견해라는 것이다. 아무튼, 소수 흑수인의 남하를 인정할지라도,22) 이들이 번성하여 곧 여진이 되었으며, 금나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금나라 이전 주민들의 발해유민과 흑수인들의 역사적 변화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나라의 주민이 되었던 다수의 주민들은 발해유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대부터 있었던 발해유민의 고려망명이 차지하는 숫자는 전 만주를 흑수인들의 나라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진으로 불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발해유민이었다는 사실은 熟女眞과 生女眞의 분류기준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거란에 부속되었던 여진은 熟女眞이었고, 그렇지 않았던 여진이 生女眞이었다는 위의 ꡔ金史ꡕ 기록을 믿는다면(사료C-5), 발해유민들의 거란화 정도에 따른 생여진과 숙여진의 구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초기의 여진은 흑수말갈로부터 출발하였다 할지라도, 발해멸망 이후의 여진은 다수가 발해유민을 지칭하는 종족명이었다는 것이다. 여진의 종족계통과 관련하여 여진의 시조 函普의 출자를 언급하는 경우도 많다. 즉, 위의 ꡔ金史ꡕ에 의한다면(사료C-5), 函普는 高麗人 또는 高句麗 遺裔 등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23) 그러나, 함보가 어디 출신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여진의 종족계통론의 결정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여진의 힘을 결집하였던 한 통치자의 출신문제와 관련이 있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진의 종족계통에 관한 문제는 오히려, 지배 집단의 출신 문제보다 지역사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함보의 출자문제는 여진의 종족계통과 그 실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또한 여진과 발해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함보가 고려로부터 왔다는 위의 ꡔ금사ꡕ 기록은 여진의 고려 및 고구려적 계통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三上次男이 주장하였던 함보의 고구려 유예적 성격에 의미가 더 있지 않은가 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곧 여진과 발해가 ‘本同一家’였다는 의미와도 통하고, 발해의 고구려적 성격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女眞의 실상과 관련하여 後渤海와 定安國의 관련성도 생각해야 한다

-高麗 來投·來往 女眞人 ―渤海遺民과 관련하여

사치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길 바라군요.(이전의 거란의 사치와

금나라 내부안의 정치적 알력의 양상과는 다른 성격으로 구분)

그리고 이런 3대 희종의 반발해적 정책이 발해인들의 반발을 불러와서 결국 제거되어

옹립된게 발해계 해릉. 

물론 금나라 100여년 기간동안 금황실 외척으로 무려 발해계 황후가 4명이나

포진해 있었고 이런 희종 이후에도 발해계 해릉뿐 아니라 금나라 전성기를 이끈

세종 역시도 발해인 주도의 황위 옹립등 말기까지도 발해계 황제가 등장하는데

일부 기록만을 단순 대입해서

이게 단순히 아골타의 발해인 립서비스에 토사구팽이였다??



따라서 금나라에서의 발해인 사치라는 의미는 거란초의 발해유민 사치와는 그 의미가 자못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란과 이민족의 입장에 있던 발해의 부흥운동에 대비한 것이 거란의 사치정책이었다면, 금나라에서의 그것은 ‘일가’안에서의 반대세력을 소개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 조정에서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인을 특별히 구별하였던 것은 거란내에 있었던 고영창 등의 발해유민 세력이거나 후발해 조정안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 여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발해와 여진의 역사적 관계에서 금나라에서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발해와 일정하게 ‘본동일가’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금나라는 한편으로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굿잡스 18-03-09 00:55
   
금나라의 국무총리까지 오른 발해계 장호(북송 멸망 후 북경 중도 건설 총지휘자)

장호의 자는 호연이고 요양 발해인이다. 본성은 고씨이고, 동명왕의 후손이다. 증조의 이름은 패이고, 요나라 조정에서 일했으며 장씨로 성을 바꾸었다.
 
- 금사 -
 
 
 
장호는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으로 태조, 태종, 희종, 해릉왕, 세종의 5대를 섬겼다. 태조가 요동을 평정할 때 계책을 올렸고 이 공으로 승웅어전문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관료적 능력을 보였다.
 
 
 
전각의 당사가 일어나면서 대성이 한 때 비게 되자 호는 6부의 일을 모두 맡았다. 장부서류가 모두 기재되고 보류된 처리 건이 없어 사람들은 장호의 재능에 감복하였다.
 
- 금사 -
 
 
 
희종 때 전각이 당사를 일으켜 조정이 마비 되었지만 장호는 6부의 장부와 서류에 대한 결재를 완벽하게 해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행정능력 때문에 장호는 금 조정의 인정을 받고 촉왕에 봉해지고 좌승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세종 때 장호는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 흘석열지녕 등을 추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명신이 되었다. 세종 초에 과거제 폐지론이 있었는데 이때 장호는 "제왕이 문학을 사용하지 않은 자가 있었는가?" 라는 세종의 질문에 "진시황입니다." 라고 대답하여 과거제 폐지를 막기도 하였다.
 
말년에 장호가 병이 들자 세종은 장호에게 입궐하더라도 절을 하지 말고 전각의 계단 동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도 좋다고 하였다. 만약 보고할 것이 있으면 나중에 와서 보고해도 좋고 그래도 건강이 좋지 않으면 결재는 장호의 집에서 받도록 할 것이니 매일 상서성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할 정도로 편의를 봐주었다. 이는 장호에 대한 세종의 총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장호가 죽자 세종은 정사를 하루동안 중단하였고 문강이란 시호를 내렸다. 1194년에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201년에 연경궁에 초상이 그려졌다.


그외 장호의 아들 장여림에 장현소, 장여필 외 고씨등의 황실 주요 요직등에

발해인들의 활약상은 초기부터 발해계 해릉와 세종(世宗 1123~1189) 및 장종등

거의 금나라 전성기 전역을 관통하면서 나오는 상황.
history2 18-03-09 01:00
   
아! 근대 글이 왜이리 겹쳐서 뜨는지....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굿잡스 18-03-09 01:06
   
아무리 같은 일가(一家)내라도 소거(제거)되거나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현상은 둘러보면

별 이상하지도 않는 알력들의 흔한 움직이군요.(심지어 왕권은 형제와 부자, 모자간에도 피를

불러왔던건 동서고금 왕조시대에는 흔했던 상황)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가 되는 과도기적 상황만 봐도

같은 밀접한 민족안에서도 정몽주같은 대표적 친고려 귀족이나 왕족들이 제거되거나

개경파 세력들은 조선왕조에서 철저히 정치적으로 소외, 배제되어

이후 개성이나 평양 일대의 전고려 호족세력들은 결국 조선시대에

가면 사대부들이 멸시하던 상업에 투신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과정에서 개성과 평양, 의주등은 조선시대에 대표적 상업 대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며

이들 양반등 상공인들의 상업 조세로 이 지역의 상당수가 채워졌던 시대흐름.

그리고 조선은 이런 개경 호족들의 정치적 입김을 벗어나기 위해 기존 고려의 4대 대도시중 하나였던

남경을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 이곳이 이후 조선의 정치 중심도시로 변모.
history2 18-03-09 01:19
   
근대,,,고려인은 조선인이 되었고, 일부 왕씨만 사라졌지만,,,발해는 유민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너무나 애석하게 그리고, 몽골이 잔인해도 여진이라는 종족의 씨는 남겨 두었는데,  발해는 발해는 ....정말 아예 지구상에서 부족도
 안남기고 멸종 되었지요
     
굿잡스 18-03-09 01:36
   
그건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상황을 보고 이야기해야할 것이군요.

동방문명권을 다시금 구축한 천년사직 고구려는 오랜 기간 동안 서토내로 들어가서

흥망성쇄를 하던 수많은 북방 정복 이민족을 지켜보면서 고구려가 어떤 위치를 고수하고 영향력을

스마트하게 행사할지를 여실히 느꼈고 그래서 도리어 고구려의 위성국과

다르지 않았던  요서일대의 북연에 대해 물자와 사람을 대대적으로 가져오지만 요서 일대를 완충지대로

비워버리면서 도리어 서토와 일정한 전략적 거리를 두었지만

이후 고려 요 발해부흥국 송의 동북아에서 요나라는 송나라의 연운 16주를 먹고 발해까지

멸망시켜 버렸고 이런 여파가 이후 발해 유민들인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반요의 금나라로

뭉치면서 멸망시켜버리자 본격적으로 요서로 힘과 세력 확장이 투사되어버리게 되는

국제적 지리적 역학 관계가 도래.

그리고 압박해오는 송까지도 멸망시켜 버리면서 이후 북경을 남송 멸망과 서토 지배의 전초전

으로 삼으면서 고구려계 장호의 총지휘 아래 북경에 중도를 건설하고 본격적 발해, 여진의

세금 감면과 대대적 이주 정책을 펴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흥기한 몽골과 남송의 양 사이드의 위치에

있던 금나라는 결국 제대로된 서토 지배를 못하고 협공당하면서

단명하게 되자 이들 상당 세력이 몽골에 흡수되게 되군요.

이후 몽골의 5대 칸이자 서토의 정복 왕조인 원의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도 이런 기존 요와 금의 강북 기반 아래 칸으로 등극해서

이후 남송 정벌을 대대적으로 강행. 이들 서토인을 노예로 삼고 세계제국 경영을 본격화.
     
신수무량 18-03-09 11:44
   
- 발해는 발해는 ....정말 아예 지구상에서 부족도  안남기고 멸종 되었지요 ...- 이 부분은 좀 아닌듯 합니다.
발해를 부족으로 인식하시는 것은 아니시죠?(아니신데...). 발해의 두 주 세력은 성씨로 치면 대씨와 고씨인데 그들이 씨도 안남기고 없어졌나요?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신 듯 합니다. 거란은 족으로 이해하고 여진도 족으로 이해하지만 발해는 족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나라죠. 나라가 멸망한 겁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도 씨도 안남기고 지구상에 없어졌어요, 이세민이 세운 당도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진을 이어받은 당을 이어받은 나라는 없죠.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을 뿐)
          
6시내고환 18-03-09 12:17
   
그리고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것은 과한 생각인거 같아요 고려에 유입된 발해인들이 고려에 동화되면서 조선인이 되었죠 ㅎㅎ
굿잡스 18-03-09 01:24
   
그리고 무슨 발해군사 돌림빵 어쩌고로 물고 늘어질거며

짱개들 청나라를 자기 역사 어쩌고 쳐하지만

정작 만주족은 청 후기로 가면 초기 만주족에 충성하고 더 앞장서면서 같은 서토인들

수백만을 도륙하던 앞잡이 한족 계열 만주족들은 이후 세금만 쳐먹는다고 팔기군에 빼버리군요.

한마디로 토사구팽의 전형.


도리어 금사를 보면 100여년 짧은 기간에 무려 외척으로 발해계 황후가 4명이나 포진해 있을 정도로

금나라 황실의 외척세력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고 아골타의 친발해세력과의 연합 이후 희종의

반발해정책이 강화되자 결국 이 희종이 시해되면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게 발해계 해릉과 세종등임을

볼때 도리어

만주족의 청나라처럼 초기부터 서토인 수백만을 도륙하고 철저히 이원적 지배아래 말기까지 정복자로

굴림하던 상황과 비교해봤을때 금나라내의 발해인들의 황실과 조정내의 정치 참여나 입지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게 실상이군요.
history2 18-03-09 01:29
   
음....그러면 발해가 지금 전혀 남지 못한것은 발해인들이 스스로 여진에 융합 되었다는 견해신지요? 저는 발해인이 강제로 여진에 의해 한족에 융합되었다고 믿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요

발해의 유민이 어디론가 융합이 되었기에 지금은 남지 않은것이 아닐지요?
그리고 거란은 자체문화라도 보존해 주었지만, 발해는 아예 지나 한족 취급하며 거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기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호나 발해4황후는 아주 예외적인 것 같구,,세종 이후는 아예 발해인은 황후로 못 들어오게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굿잡스 18-03-09 02:16
   
금나라(1115년~1234년) 7대 황제 위소왕 ( 1208년 ~ 1213년) 역시 세종과 발해계 원빈 이씨에서

나온 아들이고 8대 선종(1213년 ∼ 1224년)) 역시 어머니가 발해여인 소성황후 유씨군요.


조선시대로 오면서 이런 북방 여진족은 야인으로 불릴정도로 만주 동북방의 문명이

상당히 쇠퇴하는 이유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이런 발해 이후에도 발해인 주도의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은 5경체재의 도시문명의 영향력이 요와 금으로 이어지고 실제 발해인들이

이런 금에도 중추 역할을 하면서 대국의 행정과 도시문명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이후 금이

서토 정복과 지배를 위한 대대적 이주와 내부적 정치 알력에 의한 일가 내의 소거작업등이

맞물리고 이후 몽골이 요의 정치 군사적 통제에서 벗어나 급격히 세력을 키우면서

금까지 단명시켜버림으로써 동북방의

도시문명을 오랜시간 주도하던 우리 역사의 근간 뼈대였던

잔여 부여계세력들이 요동일대를 벗어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요.

몽골 역시도 말기에 북방으로 세력을 고스란히 이끌고 북원을 세우면서

기존 북방 세력이 다져놓은

강북 기반 아래 명나라 영락제로 오면서 이곳 북경이 서토의 정치적 중심지로

다져지면서 이후 요동으로 입김이 더욱 강화되는 흐름이 되었고

우리 역시도 조선시대로 오면서 고려때와는 달리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유교적 화이 사상이 깊어

지다보니 이런 요동 북방세력에 대해서 좀더 포괄적인 천하관보다는 화와 이에 입각한 식으로 심

화된 측면이 커졌다고 보이군요.


그러나 우리 충남 공주에 부여라는 지역 명칭이 있을 정도로

삼국시대 남부의 해양대국이였던 백제는 남부여로 불릴 나라로 이어졌고

부여의 역사와 부여계를 동족의 예로 부여성까지 아우러고 흡수했던게 우리 고구려였고

현 대한민국 역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을 이은 국호로 이 대한 자체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삼한을 아우르는 국가명칭으로 당당히 그리고 분명히 이어졌다는 점에서

부여계와 여진족의 전신인 한민족 말갈계 연합 주도의 발해와 그런 부여의 역사 역시

현 대한민국이 장자 계승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엄중한 중량감에 현 어느 국가보다 큰 비중과

역사적 계승의 흐름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history2 18-03-09 08:38
   
...명나라도 조선계 후비는 많았고,,,원나라도 황후를 배출었지요.....아무튼 전 여진에 대한 감정이 안좋았는데, 님 덕분에 또 지식을 쌓게 됩니다...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관심병자 18-03-10 11:00
   
여진과 발해계를 구분하는건 상식적으로 볼때 무리가 있습니다.
여진은 흑수부의 남하로 형성됐기 때문에 발해계와 다르다?
흑수부 역시 발해에 포함되어있던 부족입니다.
발해때는 발해에 포함되어 있었고,
고구려때는 고구려에 포함되어 있었죠.

말갈과 고구려인의 구분 역시 무리입니다.
고구려의 영토에서 말갈이 살았던 지역과 활동했던 지역을 빼면 고구려인이 살았던 지역이 나오겠죠?
그러면 고구려안에 고구려인이 살았던 땅이 없습니다.
고구려뿐 아니라 고구려의 출발지인 부여조차 말갈지역이죠.

청과 조선, 한반도와 만주를 분리하려고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정립한 지배, 피지배 개념과 축소된 민족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고구려, 부여시대는 정리가 안되게 되는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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