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멸망할때 668년에 당이 확인한 고구려인구가 69만 7천호 입니다...대략 400만정도 되는 인구죠...
물론 한호를 몇명으로 잡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바뀌겠지만 고구려를 연구한 학자들은 400만정도로 잡더군요...
이중에서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로 평양성과 인근에서 20만이 끌려가고 신라로도 10만이 끌려갑니다..
거기에 대동강이남의 고구려 영토는 신라가 점령하면서 대동강이남의 고구려인들은 신라백성이 됩니다...
참고로 이일대가 고구려의 중심 평양성일대죠...인구수가 많을 겁니다...평안남도 황해도 함경남도지역에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까지 신라의 영토가 되서 많은 고구려인이 신라백성으로 바뀌게 되죠...
이런데도 오늘날 고구려인은 전부 중국인이 됐으니 고구려와 대한민국은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짱께와 왜구들 그리고 식민사학자나 쓰레기등은 다 죽어야 겠죠...
고구려가 장수왕때에 충청도 충주까지 점령하고 충주에 국원성을 세우죠...남쪽 국내성이란 뜻으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수있죠...한마디로 부수도를 세운겁니다..그와 함께 경북 일대도 점령하여 100여년간 충청도와 경북일대까지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이들은 고구려인들이 아니란 말이냐....짱께들 왜구들....에이 욕나오는 군요....
잠시 주제를 벗어난 얘기좀 적을게요^^
임진왜란직전에 조선인구가 최소 800만에서 최대 1200만까지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추정하더군요...
그리고 임진왜란직후에 인구가 최소 200만에서 최대 400만정도로 역시 학자들은 추정하구요...
이자료에서 알수있는게 나라에 힘이 없어서 적군을 막을 힘이 없어 전국토가 적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 백성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간다는 겁니다...
적군에게 죽은 조선군이나 조선백성은 많아야 수십만으로 아무리 잡아도 100만이 넘질 못합니다...
이 몇배나 되는 백성들은 전란으로 농토와 집을 잃고 가장 많은수가 굶어주고 또 못먹어서 전염병으로 많이 죽고 집을 잃어서 겨울엔 혹한으로 또 수많은 백성이 얼어죽어서.. 전란이 자국영토내에서 오래 지속될수록 그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진다고 하더군요...
반면에 고구려군은 수나라와 전면전만 4번...당나라와는 전면전만 3번을 치뤘고 당나라와의 국지전은 수십번이 됩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이 모든 전면전에서 마지막 세번째 전면전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하고 적을 전멸시킵니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1년이 넘기는 전면전쟁이 없고 모두 몇개월안에 침략군을 전멸시키고 당연히 그럴수있는 강력한 군대와 고구려군의 전략,전술의 승리 였고 이런 고수전쟁..고당전쟁 합쳐서 약 70여년간 벌어진 장기전을 수행할수있었던건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면서 전쟁을 미리부터 잘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걸 추정할수 있습니다..보통 고구려는 평소엔 평지성에 거주하다 전쟁이 터지면 산성으로 들어가서 수성전을 벌였고 또 적과 야전에서 맞붙어서 물리칠 힘이 있었다는 거죠...
고구려군의 야전능력은 수십만 혹은 100만이 넘는 적을 단 몇개월만에 적을 전멸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것만 봐도 알수있죠....적보다 적은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다는건 강력한 군대 그중에서도 강력한 기마군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것도 추정할수있을 겁니다..고구려 멸망으로 기록이 없다고 해도...
반면에 제대로된 야전능력이 없는 조선군은 임진왜란때...7년이 넘도록 적을 물리치지 못해서 적이 오랫동안 정복지를 유지하게 만들고 전쟁을 장기간으로 끌고갔죠..적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철군령이 내려져 적이 스스로 물러날때까지 계속된 전쟁만봐도 야전능력이 없는 군대와 야전능력이 있는 군대의 차이를 쉽게 알수있을 겁니다...
쓰다보니 주제에 벗어난 글들도 좀 끄적였네요^^''
본주제로 넘어와서.....
고구려와 당과의 고당 3차 전면전에선 이미 남생파와 남건,남산형제의 대립으로 고구려는 내분중이었고...
내분중에 남생이 당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게되고 당고종 실은 측천무후가 명령을 내려서 1차로 당나라군 50만이상이 투입되죠...그후로도 지원군도 계속 투입하고...
거기에 남생은 당에 투항하면서 고구려에 복속된 거란족 5개 대부족(거란족은 8개의 대부족으로 나눠졌는데)과 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고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를 수십개 성을 들고 신라에 투항하면서 결국엔 고구려가 패망하게 되죠...
고구려는 666년 부터 668년까지 평양성이 함락될때까지 약 3년간 전쟁을 계속 수행했고 이 기간엔 절망적인 전쟁이 계속 됐고 고구려가 패망하는 시기였기에 많은 고구려군과 고구려백성들이 죽어 갔을 겁니다...
고구려가 지금까지 치뤘던 고당전면전과는 다르게.....
이때 적어도 고구려군 수십만이상이 죽었고 백성들도 역시 전쟁중에 최소 수십만은 죽었을 겁니다...
거기다 고구려 패망후에 30만이 당과 신라로 끌려가고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인들은 신라 백성이 되고...
나라를 잃은 백성들과 유민들은 많은 수가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겨울엔 얼어 죽었을 테니...
고구려 패망후 수년간 고구려 인구가 최소 절반정도는 감소했을 걸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많아야 200만 정도 이것도 고구려가 조선과 다르게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당군의 진격로가 아닌 고구려 동부와 동남부..그리고 중부는 전란을 비껴갔기에 추정할수 있는 수죠...
거기다 고구려인들은 반농반목으로 조선처럼 농사만 짓던 사람들도 아니고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목축과 수렵도 행했기에 그정도는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에 대조영이 고구려 패망후 30년만인 698년에 발해를 건국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패망후 30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고구려의 후계국가가 세워졌는데 갑자기 그 땅에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족이 백성의 대부분이다...이건 뭔가 말이 안되죠...갑자기 그 넓은 영토에 고구려인은 다 어디가고 말갈족만 남나요....더욱이 발해가 건국된 동모산 일대가 바로 고구려 동부지역으로 당군의 진격로가 아닌 지역들로 고구려인들이 별다른 피해없이 그대로 살아가던 곳입니다...
이걸로 추정할수있는건 당나라 즉 떼국넘들의 붓대끝 논리로 멋대로 지들 쓰고 싶은대로 춘추필법에 따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은겁니다...당은 올리고 발해는 낮추고....
그리고 이기록등이 현재는 유일한 기록으로 남게되서 저들의 붓대끝 논리가 오랜시간이 지나서 정설이 되버린거죠...비극입니다ㅜㅜ...
본주제에 벗어난 얘기 하나더....
발해의 영토중 가장 논란이 많은 발해의 서쪽영토 요동반도일대는 언제 발해의 영토가 됐는냐는 건데요.....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일대를 초토화하고 평양일대의 백성들을 당과 신라로 끌고 가고 초토화된 평양성을 버리고 요동에 안동도호부를 두지만 이것도 714년에 요서 평주로 안동도호부를 이전합니다...
왜냐구요?...발해군이 요동을 수복했기에 이전 한겁니다...그렇지 않다면 멀쩡히 잘지배하던 요동반도를 버리고 요서 평주로 철수할리가 없죠...
수십년후 발해군이 수륙으로 732년~733년 수군은 산동반도 등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육군은 요서 지역을 공격하고 유주일대까지 진격하자....당나라는 유주절도사가 16개주와 요서 평주에 있는 안동도호부 군사까지 징발해서 발해군을 막게 합니다..
이 기록에서 알수있는건 발해군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고 요서를 공격했다는 거죠..만일 발해가 요동반도를 이미 점령하지 않았다면 발해군은 요서가 아닌 요동을 공격했다고 기록될겁니다...
요동을 점령하지 않으면 바다로 나가 산동을 공격할수도 없고 육로로 요서를 공격할수도 없기 때문이죠...
잠오네요....쓰다보니 이것저것 뒤죽박죽으로 쓰게됐는데 퇴고는 없습니다...귀차니즘^^...다들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