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력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기반 중 하나입니다. 국방력이 미약하면 외세의 침략에도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구한말의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대한제국 군대는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여 일제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그 마저도 1907년 해산당하고 마는데요, 그래도 마지막 순간 군대 강제 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박승환과, 그의 죽음을 보고 일본군에 저항한 대한제국군, 그리고 해산 후 항일의병에 가담하여 구국의 의지를 보인 군인들이 있어 마지막 명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순간과 의미,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박승환은 1887년 18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관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무관학교를 졸업한 박승환은 대한제국의 중앙군인 시위대에 소속되어 참위(지금의 소위)와 정위(지금의 대위)를 거쳐 1904년 2월 참령(지금의 소령)으로 진급,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에 임명됩니다.
대한제국의 장교로 복무하면서 애국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박승환이었지만, 정작 대한제국군으로 활약할 기회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대한제국은 군대를 갖추기 위한 노력은 하였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아주 부족하진 않은 수준의 군대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보면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양 상인으로부터 제 값의 몇 배를 주고 무기를 사기 일쑤였고, 퇴역 상선에 대포 몇 문 달고는 군함이라고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구입한 무기마저도 교관이 바뀔 때 마다 교관의 국적에 따라서 다루는 무기도 변해, 제식화기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여 소총만 해도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소총이 아니면 소총탄도 달라지므로 탄약 보급도 소총에 따라 달라져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정부도 국방과 외교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중립을 선포하였지만, 일본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행동 함에도 대한제국 정부와 군대는 이를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우리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킵니다. 이에 분개한 서울을 지키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2연대 3대대는 궁으로 진입하여 사실상 감금된 고종을 구출하고 일본군으로부터 호위하면서, 필요하다면 친일관료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군부대신 이병무에 의하여 일본에게 알려지면서 실패합니다. 군부대신은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자리지만, 이병무는 국방의 최고 책임자면서도 조국수호의 의미를 뒤로하고 일본에 협조하면서 정미칠적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깁니다.
한편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또한 고종의 강제퇴위를 막을 거사를 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종에게 오히려 화가 미칠 수 있어 포기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한 음모를 계속 진행합니다. 일제의 입장에선 대한제국 군대의 존재는 침략에 있어서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완용 등의 대한제국 정부 내 친일파와 결탁하여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데 주요내용은 사법권과 경찰권을 일본에게 위임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따라 아무런 힘이 없었던 순종 황제는 7월 31일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립니다. 이를 알리기 위하여 서울의 각 부대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는 긴급소집명령을 받지만,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박승환 참령(지금의 소령)은 신병을 이유로 중대장을 대신 보냅니다. 군대 해산 사실은 대대장들을 통하여 각급 중대장에서 전달되고, 사병들에게는 누구에게도 사전 유출되어선 안 된다는 내용도 전달됩니다.
그리고 1907년 8월 1일, 동대문에 있던 훈련원에서 대한제국군 병사와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제국 군대 중 시위대 2연대 1대대만이 황실 호위를 위하여 존속되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해산한다는 사실이 발표되고, 일본군이 엄중히 감시하는 가운데 대한제국군의 계급장이 떼어지고 소지 중인 무기는 반납하게 됩니다.
하지만 박승환은 군대해산에 분개하고 마지막 결심을 합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이런 내용의 유언을 남긴 박승환은 권총으로 자결하고 맙니다. 총성을 듣고 나온 시위대 병사들은 대대장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려는 일본군과 친일 매국노에게 반발하여 봉기를 일이키며, 이는 다른 시위대 병사들에게도 확산됩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시위대는 훈련원 자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에게 용감히 맞섰지만, 탄약고는 이미 일본군이 장악한 뒤였기에 가지고 있는 탄환이 떨어진 후에 더 이상 추가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무기도 단발 소총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기관총 이상의 중화기도 시위대 2연대의 고종 퇴위 저지 거사가 실패한 후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화력 면에서도 대한제국군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습니다. 결국 대한제국 시위대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진압되고 마는데 피해는 전사자 68여명, 부상자 100여명, 포로가 516여명 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전사 10여 명을 포함해 사상자 60여 명 정도 였습니다.
이렇게 군대는 해산 당하였지만, 시위대의 저항은 지방군이었던 진위대로도 전해졌습니다. 시위대에서 탈출하거나 역시 해산된 진위대 출신 장병들은 의병항쟁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에 나서고, 강원도의 진위대 장교 민긍호는 의병장이 되어 활약을 하다가 순국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정부는 박승환과 민긍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대한제국군은 군대가 해산하고야 저항다운 저항을 보여주었지만, 군대를 잃은 대한제국은 끝내 멸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이 보다 체계적으로 군대를 갖추고, 정부가 중요한 순간 군대에 올바른 명령을 내리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역사의 방향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일도 못하다가 해산하고 나서야 개별적으론 나선 장병들에 의하여 침략에 저항하였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은 체계화된 무기 도입과 훈련, 보다 발전한 경제력의 지원으로 대한제국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군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방심하지 말고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남긴 교훈을 되새기며,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훈처 대표블러그에서 퍼왔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했어도 일방적으로 나라가 넘어가지 않았을텐데 너무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