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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30 08:43
[한국사] 단군조선 연대기??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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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남성 정주시에서는‘10억 이상 되는 중국 인민의 역사의식을 개벽해야 한다!
 
우리는 지구촌 문명의 중심이다! 중화문명!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이 우리의 조상이다!’라고, 문화혁명 이후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중국 문명사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83년도에 만리장성 밖 동북쪽 우하량에서 길이가 150미터 되는 동북아 최초의 피라미드, 소위 우하량의 총塚·묘廟·단壇, 거대한 무덤과 제단과 여신의 사원이 발굴됐다.
 
그때 중국과 한국에서 대대적인 신문 보도가 있었는데‘신화, 전설인 삼황오제시대의 문화유적이 나왔다.’고 했다. 만주지역까지 발굴해 보니 소위 홍산문화에서 동북아의 신석기 또는 옥문화가 7천년을 넘어 8천년, 9천년 전 것이 나온 것이다. 중국의 황하문명에서는 신석기 유물이 한 8천년 전 것까지 나오는데, 그보다 천년이 앞선 것이다. 그래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이 너무도 큰 충격을 받고‘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고민을 했다. 
그것은 사실 만리장성 이남의 한족 문화와는 색깔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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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 환인 계보 (7대, 재위년수 : 3,301년)      
                                        
1대 안파견(安巴堅) 환인(B.C.7199)  
2대 혁서(赫胥) 환인,  
3대 고시리(古是利) 환인,  
4대 주우양(朱于襄) 환인,  
5대 석제임(釋提任) 환인,  
6대 구을리(邱乙利) 환인,  
7대 지위리(智爲利) 단인(檀仁이라고도 한다)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미국의 고고학자 넬슨 교수는‘동북아 중국의 홍산문화, 소위 우하량을 중심으로 해서 5천년 전에서 9천년 전에 이르는 동북아의 시원문명 역사의 현장이 드러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족 문화권과는 다르다.’고 지적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젊은 소장학자들도‘중국 문화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해서 남방문화와 북방문화, 이런 전혀 다른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이 모든 문화는 우리 중화문명권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고서 본래 이 문명의 주인인 조선의 문명을 해체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단군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다.
 
 
최근 학회에서 ‘중국의 문헌이나 학술서적에서 일체 조선이라는 말을 없애자! 그걸 조선국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일개 지방 이름으로 격하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학계의 정보가 그 문화의 주인공인 대한민국 국민에게 전혀 전달되고 있지 않는다.
 
 
중국은 그들이 말한 신화, 전설 시대의 역사 유적이 원형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우리가 세계 4대 문명의 원 뿌리, 근원되는 이 문명의 주인공이다. 이제 우리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인류 문화와 역사의 본래 창조자로서 진정한 세계 일등 지도자, 문화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
 
 
 
넬슨 교수가 중국 곽대순 같은 학자들이 쓴 논문을 영어로 번역을 했는데 거기에 주를 붙였다. 홍산문화는 한반도, 대한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이 그것을 저 동아시아 또는 북아시아에서 온 거라고 에둘러 말함으로써, 그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의 존재를 폄하하는, 정직하지 못한 역사 해석을 하는데 대해 썼다. 그러면 우리 한국은 실제 역사의 성립이 언제부터인가?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교과서 내용이다.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틀을 전혀 못 벗어나고 있다. 일본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지 통치본부를 세워놓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를 다스렸다.’고 조작했다. 지금 국내에서는 극복되었지만, 일본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역사의 진실로 가르치고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본래 일본의 구주라는 땅은 저 북쪽에 있는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와서 문화를 가르쳐 주고 개척한 곳이다. 구주는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본비왜인세거지本非倭人世居地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이름이 본래 임나任那다. 그것을 삼가라三加羅로 나눠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치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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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은 삼신문화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패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도 나오고, 조선왕조 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 내용이 있다. 이 삼한 체제는 22대 색불루(BC 1285~ BC 1238)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게 되면서 차츰 삼조선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에, 병권을 막조선과 번조선에 완전히 나눠줌으로써, 삼조선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다가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그리고 이후 오가의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게 된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기록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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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단군 계보 (47대, 재위년수 : 2,096년)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 초대 단군임검∼21세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1대 단군 임검(王儉, 93, B.C.2333)  
2대 부루 단군(扶婁, 58, B.C.2240, 태자)  
3대 가륵 단군(嘉勒, 45, B.C.2182, 태자)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38, B.C.2137, 태자)  
5대 구을 단군(丘乙, 16, B.C.2099, 羊加)  
6대 달문 단군(達門, 36, B.C.2083, 牛加)  
7대 한율 단군(翰栗, 54, B.C.2047, 羊加)  
8대 우서한 단군(于西翰, 8, B.C.1993, ? )  
9대 아술 단군(阿述, 35, B.C.1985, 태자)  
10대 노을 단군(魯乙, 59, B.C.1950, 牛加)  
11대 도해 단군(道奚, 57, B.C.1891, 태자)  
12대 아한 단군(阿漢, 52, .C.1834, 牛加)  
13대 흘달 단군(屹達, 61, B.C.1782, 牛加)  
14대 고불 단군(古弗, 60, .C.1721, 牛加)  
15대 대음 단군(代音, 51, B.C.1661, ? )  
16대 위나 단군(尉那, 58, B.C.1610, 牛加)  
17대 여을 단군(余乙, 68, B.C.1552, 태자)  
18대 동엄 단군(冬奄, 49, B.C.1484, 태자)  
19대 구모소 단군( 牟蘇, 55, B.C.1435, 태자)  
20대 고홀 단군(固忽, 43, B.C.1380, 牛加)  
21대 소태 단군(蘇台, 52, B.C.1337, 태자)  

나.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索弗婁, 48, B.C.1285, 욕살 고등의 아들로 우현왕을 거쳐 단군으로 즉위)
23대 아홀 단군(阿忽, 76, B.C.1237, 태자)  
24대 연나 단군(延那, 11, B.C.1161, 태자)  
25대 솔나 단군(率那, 88, B.C.1150, 태자)  
26대 추로 단군(鄒魯, 65, B.C.1062, 태자)  
27대 두밀 단군(豆密, 26, B.C.997, 태자)  
28대 해모 단군(奚牟, 28, .C.971, ? )  
29대 마휴 단군(摩休, 34, B.C.943, ? )  
30대 내휴 단군(奈休, 35, B.C.909, 태자)  
31대 등올 단군(登 , 25, B.C.874, 태자)  
32대 추밀 단군(鄒密, 30, B.C.849, 아들)  
33대 감물 단군(甘物, 24, B.C.819, 태자)  
34대 오루문 단군(奧婁門, 23, B.C.795, 태자)  
35대 사벌 단군(沙伐, 68, B.C.772, 태자)  
36대 매륵 단군(買勒, 58, B.C.704, 태자)  
37대 마물 단군(麻勿, 56, B.C.646, 태자)  
38대 다물 단군(多勿, 45, B.C.590, 태자)  
39대 두홀 단군(豆忽, 36, B.C.545, 태자)  
40대 달음 단군(達音, 18, B.C.509, 태자)  
41대 음차 단군(音次, 20, B.C.491, 태자)  
42대 을우지 단군(乙于支, 10, B.C.471, 태자)  
43대 물리 단군(勿理, 36, B.C.461, 태자)  

다.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 단군(丘勿, 20, .C.425, 욕살) :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정  
45대 여루 단군(余婁, 55, B.C.396, 태자)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R> 
계해 58년(B.C.238) 단군조선을 폐관하고,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리면서 21세 소태(BC 1337~ BC 1286)단군 때, 쿠테타가 일어나 1048년 동안 나라의 수도를 유지했던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44세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는 수도를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진실은 수도 송화강 아사달 1048년 시대와 백악산 아사달 860년 시대를 합하면 이게 1908년이다.
 
단군조선은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의 대부여(大夫餘) 이후 마지막 47세 고열가(BC 295~ BC 238)단군까지가 188년이다. 그리고 대부여大夫餘는 BC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 맥이 이어진다.
 
 
 
전국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년~ BC 108년)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그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예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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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말살되어 지금 고주몽이 동명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解夫婁)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로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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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마 16-07-31 16:56
   
글에서 오류 찾았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한무제가 조선의 준왕을 공격해 한사군을 설치해 마치 준왕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준왕은 조선의 부단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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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은 위만의 손자 우거였습니다.
단군 조선 내지 기자 조선의 마지막이 준왕이었다는 의미에서 쓴 글이셨다면 왜 한무제가 나오는 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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