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내용이 전과는 다르네요.
게시판 돌아가는 분위기가 짜증나시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진실에 눈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된 건지
걍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이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글을 올릴려면 단편적인 부분만 올리지 말고
전체 맥락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죠.
전두환 나쁜 새끼 시민들도 나쁜 새끼 이런 양비론은 피하시고
148 VS 23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시민과 군인의 사망자 수인데요.
군인사망자중 12명이 교도대와 다른 부대끼리 오인사고입니다.
그럼 11명 정도가 시민군땜에 죽은 거지요.
수만명의 시위대중 수천,수백명정도가 무장을 했는데 11명 정도가 죽었다.
혼란스런 그 와중에서 그 정도의 사망은 폭도가 아니라는 거죠.
대한민국을 뒤집을 세력이었다면 엄청났겠죠.
그와 마찬가지로 공수부대도 살상에 있어서만은 최대한 자제했고
근데 시민군이 무장한 계기는 우발적이 맞아요.
공수부대는 부마민주항쟁처럼 생각했죠
초기에 강경한 진압으로 기를 죽이면 부마처럼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이것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죠.
그러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왜 이렇게 전개되었나?
전남대생에 왜 일반시민들이 가세하게 되었나죠.
초기에 공수부대가 나타나면 전남대생은 도망치고 그럼 그 공간에는 구경하는 일반 시민들만 남게 되죠.
공수부대는 겁줄 요량으로 일반시민들을 때려 잡게 되고 그럼 일단의 용기있는 시민이 왜 이러냐고 따지면 그 시민도 때려 잡고 이런 식으로 사태가 가 버리죠.
그럼 부상당한 시민들의 가족이나 친척들도 같이 참여하게 되고
이런 사건은 고만고만하게 끝날수도 있지만 잘못되면 엄청 큰 사건으로
퍼지게 되죠.
신군부는 대량학살까지는 아니더라도 광주를 하나의 본보기로 잡았죠.
초기 적은 부대의 공수부대로 무리한 작전을 했죠.
그럼 수세에 몰린 공수부대는 더 무리하게 작전을 수행하게 되고
덩달아 시민들은 더더욱 흥분하게 되고
광주사태의 예고편
계엄확대 조치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발표되었으나 군병력이 시위진압 작전에 나선 것은 17일 오후부터였다. 이날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전경들을 버스에 태운 채 역 앞 광장에 세워두었다. 이 버스에 타고 있었던 金모 상경(33. 현재 기자)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공수부대원이 트럭을 타고 나타나더니 한 장교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경고를 했다. 「즉시 해산하라, 1분 이내로 해산하지 않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장에는 시위군중은 없었고 행인들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그 대위는 「해치워!」라고 명령했다.
수 십명의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하더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어느 노인이 대어들자 5∼16명의 군인들이 그 노인에게 몽둥이질를 했다. 이건 진압이 아니고 집단 폭행이었다. 진압봉으로 머리를 안 때리도록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 는 가려서 때리는 것 같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상처가 안 나도록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30초만에 영등포 역전은 무인지경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을 입 벌리고 지켜보던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며칠 뒤 광주사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金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해 여름에 불량배 단속과 삼청교육이 있었다. 나는 서울 미아동의 파출소에 배속되었다. 공수부대원과 함께 경찰의 안내를 받아 교육대상자를 잡아오는 일을 했다. 진짜 불량배는 거의 달아나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과자들이 주로 잡혔다. 경찰관들에게 책임량(검거대상 인원)이 할당돼 있어 무리를 해서라도 머리 수를 채우려고 했다. 파출소로 연행된 사람이 항의하면 그 때부터 공수부대 원들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군화로 짓이기고 얼굴을 걷어차고 몽둥이질을 하고… 바닥에 유혈이 낭자하고, 바깥에서는 가족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나는 저들이 과연 동족인가, 하고 의심을 해보았다.
광주사태가 끝난 뒤 전경들이 특전사령부로 초대되어 그들의 진압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박력 있는 공세적 진압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저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경들은 방어적 진압에 주력하는 편인데 공수부대원들은 적극적 강공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호용 사령관은 우리들에게 훈시를 했는데 광주사태의 진압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제5공화국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진압봉의 공포
부마사태 때 부산에 투입되었던 공수 3여단(이하 기사에 나오는 부대명과 지휘관 이름은 군당국이 이미 공개했고, 군 당국의 지원하에 출판된 책 등에도 나온 것들이다)의 나영조 당시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79년 10월18일 새벽 김해공항에 내리니까 자칫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송부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위대를 만나면 차를 구할 생각은 하지말고 우선 달아나라고 하지 않는가. 파출소가 불탄 것을 보고, 국민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우리보고 과잉 진압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때 몸은 지치고, 신경은 날카로와져 있었다. 구덕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3일간 특전 식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하루에 8∼9시간씩 거리에 나가 부동자세로 서 있으니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부마사태에서 공수부대가 한 역할은 과장된 면이 많다. 1979년 10 월18일 0시를 기해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자 공수 제3여단이 평화시 규모로는 사상 최대의 야간공수 작전 끝에 부산에 도착했고. 이 병력은 18일 저녁 8시쯤에 딱 한번 시위대와 부딪쳤다.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 서 3백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자 공수부대 1개 대대는 순식간에 이들을 박살내 버렸다. 그 뒤로 공수부대가 한 일은 시위진압이 아니라 주로 행인들의 구타였다.
부산 동래구 동상동에 사는 신희철 씨(회사원·당시 37세) 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 는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진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씨(당시 32세)는 계엄령 첫날인 10월18일 밤 9시30분쯤 서면 태화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 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진단을 해보니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칠성음료주식회사에 다니는 최홍일씨(25)는 그날 밤 8시쯤 동료 직원 네 명과 함께 영도다리를 걸어서 시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리자 공수부대 군인들은 길을 막고 인도에 서 줄을 서서 차례로 걸어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시청을 지나 버스정류소 쪽으로 갔다. 상공회의소 앞 육교 밑에서 그들은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영도다리 쪽의 군인들이 보내주어서 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길바닥에 꿇어앉혀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머리·어깨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최홍일은 얼른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군인의, 무릎이 그의 안경 낀 얼굴을 강타했다. 왼쪽 안경알이 깨어지면서 유리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비명을 질렀지만 진압봉 세례는 사정없이 그의 머리와 허리에 쏟아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