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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의 기원과 그 행태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네요. 어설픈 양비론까지... 공교육에서 근현대사를 다루지 않고, 대학에서도 이를 커버하지 못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점을 만든 가장 큰 원인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DJ가 지역감정의 시초다", "DJ는 지역감정의 수혜자다", "박정희는 공정했다"라고 단정짓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박정희 사생팬이라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용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여튼 대학생이 물어보고 초등학생이 답한다는 온라인의 폐해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아이들은 지역감정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유럽의 극우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불쌍하기도 하지요. 최소한의 팩트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선동자임에는 변함이 없지요. 대부분의 경우 '못 배운 것'이 아니라 '안 배운 것'이고요.
박정희의 지역감정 선동은 한국 정치에 관심이 있어 기초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본적인 사실이고 근현대사 책 한권만 읽었어도 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제대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지역감정 선동의 구체적 양상과 데이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 박정희의 원조 지역감정 선동
1969년 DJ가 아닌 신민당의 유세 기사 하나를 가지고 DJ가 지역감정을 먼저 선동했다는데...;;;
밑에 2번에 적을 데이터를 보시면 69년이면 박정희가 선동한 지역감정으로 인해 DJ가 피해를 입은 이후지요. 67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이미 영남에서 몰표를 받은 사실을 모르기에 저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박정희의 지역감정 선동에 대해서 똑같은 지역 감정 유발로 대응한 야당의 대응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야당이 먼저 지역감정을 자극했다는 것은 굉장히 황당한 얘기지요.
그런 식으로 발언을 갖고 보자면 역사적으로 지역감정 선동의 원조는 이효상이지요. 이효상이 영남에서 지역감정을 선동했다고 처음 기록된 것은 63년인데 이는 DJ가 정계에 나오지도 않았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효상이 박정희가 지역감정 선동의 선구자라고 하는 것은 박정희의 방식은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발언의 수준의 선동이 아니지요. 71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원과 경찰, 중앙정보부 등 정부권력기관을 이용해서 서울에서 영남 지역으로 내려온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기까지 했어요. 이 때문에 영남 지역에는 참관인들이 아예 발은 붙일 수가 없었고요.
게다가 어용언론으로 유명한 조중동도 지역감정 선동에 발 벗고 나섰지요. "경상도 사람 치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 (조선일보)라든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표 이긴다." 라는 발언을 여과없이 그대로 실어주었지요. (기타 자세한 양상은 온만금의 <역대 대통령 선거결과에 나타난 지역주의 추이와 양상>이라는 논문을 보세요. 링크를 걸어드리려고 했는데 유료네요.)
정리하자면 발언으로 치자면 그 지역감정의 시작은 이효상이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선동은 박정희가 시작했죠. 이러한 구체적 정황과 사례들은 온만금의 논문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중심의 근현대사를 다룬 책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국정치연구회의 <박정희를 넘어서>도 좋죠.
제가 중시하는 것은 다음의 대선 득표율 데이터 자료입니다.
2. 데이터로 증명되는 박정희의 지역감정 선동의 성공
제3대 대선 (1956)>
서울지역(61만) : 이승만 33.7% > 조봉암 19.6%
경기지역(106만) : 이승만 57.4% > 조봉암 17.0%
강원지역(79만) : 이승만 81.6% > 조봉암 8.3%
충청지역(140만) : 이승만 63.1% > 조봉암 15.4%
호남지역(216만) : 이승만 54.0% > 조봉암 26.3%
영남지역(294만) : 이승만 49.4% > 조봉암 34.2%
제주지역(11만) : 이승만 78.2% > 조봉암 10.8%
<제5대 대선 (1963)>
서울지역(130만) : 윤보선 61.8% > 박정희 28.6%
경기지역(128만) : 윤보선 51.7% > 박정희 30.0%
강원지역(83만) : 윤보선 44.1% > 박정희 35.6%
충청지역(168만) : 윤보선 43.9% > 박정희 36.1%
호남지역(238만) : 박정희 49.3% > 윤보선 34.6%
영남지역(343만) : 박정희 45.0% > 윤보선 25.8%
제주지역(13만) : 박정희 63.5% > 윤보선 20.9%
<제6대 대선 (1967)>
서울지역(136만) : 윤보선 49.6% > 박정희 43.7%
경기지역(136만) : 윤보선 49.8% > 박정희 38.8%
강원지역(89만) : 박정희 48.5% > 윤보선 39.5%
충청지역(176만) : 박정희 43.3% > 윤보선 43.2%
호남지역(254만) : 윤보선 44.6% > 박정희 41.1%
영남지역(361만) : 박정희 62.6% > 윤보선 24.7%
제주지역(14만) : 박정희 53.9% > 윤보선 30.6%
<제7대 대선 (1971)>
서울지역(207만) : 김대중 58.0% > 박정희 39.0%
경기지역(146만) : 김대중 47.8% > 박정희 47.2%
강원지역(88만) : 박정희 57.4% > 김대중 37.2%
충청지역(166만) : 박정희 52.3% > 김대중 41.1%
호남지역(241만) : 김대중 58.6% > 박정희 32.8%
영남지역(380만) : 박정희 73.6% > 김대중 21.9%
지역감정이 최초로 시작된것은 역시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부터였다. 공교롭게도 이 선거는 각각 영남과 호남에 연고를 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이미 3선 개헌이란 무리수를 둔 박정희로서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젊은 야당 후보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세력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선거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된다. 경상도 사람 치고 박대통령 안찍는 자는 미친 놈'(「조선일보」 1971. 4. 18.)이라든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 표 이긴다'(「중앙일보」 1971. 4. 22.)는 등의 여과되지 않은 발언들이 유세과정에서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