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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17 10:27
일본의 근대화는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2,665  

"한국 근대화 뿌리는 유교 

동서양 정치사상사를 연구해온 황 교수는 신간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에서 또다시 역사학계의 상식을 깨는 주장을 한다. 서구의 근대화는 개신교가 아니라 유교 문명에서 기원했고, 실학이 조선 근대화의 맹아였다는 견해는 명백한 허구라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성의 정의부터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민주정이나 공화정을 근대성의 절대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근대화는 탈종교적 세속화, 군사적 근대화는 국민개병제에 기초한 군대의 정예화, 경제적 근대화는 시장화와 산업화가 각각 잣대라고 설명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근대화에 성공한 지역은 서부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에 불과하다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극서(極西)와 극동(極東)을 묶어 근대화 과정을 논한다. 

우선 서양에서 꽃핀 자유와 평등 개념, 자유시장, 공무원 임용고시, 관료제 등 근대화의 이념적 아이콘은 거의 모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역으로 서구의 근대성은 유교를 발전시킨 동아시아에 이식됐고, 중·동부 유럽이나 중남미보다 큰 열매를 맺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극동의 구 유교국가들은 '준비된 근대국가' 또는 '낮은 단계의 근대국가'였다"면서 "극동과 극서는 시차를 두고 서로를 번갈아 깨워서 높은 근대화를 향해 함께 진보했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많은 역사학자가 내재적 근대화의 동력으로 지목한 실학은 오히려 비근대적이고 반근대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신분제 철폐를 꾀하지 않았고 사유재산과 자유시장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학은 복고성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역행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정인보 이래 사학계를 지배해온 '실학의 신화'를 해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어 저자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네 가지 사상으로 사대주의를 배격한 '조선중화론', 우리나라 임금을 지존으로 여긴 '신존왕주의', 나라의 주인이 양반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본 '민국사상', 외래 문물을 한국화해 도입하고자 한 '구본신참론'을 꼽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사상들은 독립주권국가 대한제국의 창건을 가능케 했고, 대한민국의 사상 동력이 됐다"고 결론짓는다.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8/02/131300/

(위의 주장은 근대화에 대한 여러 이론적 설명 중 기존 유럽과 서구중심의 근대화 이론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내재적 근대화의 원동력에 대해 완벽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지만(어느 이론도 완벽한 이론 역시 없고)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나름의 근거를 가진 이론이라고 생각되군요) 

얼마전 잡게에서도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불가능했는가? 라는 글이나 이런 일반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내용들이 많고 나아가 쨉의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는 성공?? 했다는 당연한 소리들이 주류적 시각 마냥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오래전부터 이부분에서 고민해오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의 근대화는 전혀 실패하지 않았다군요. 

만약 우리의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실패라는 여러 이유를 든다면 쨉의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는 분명하고 극명한 실패작임. 

이는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2차대전 이후 인류 역사의 드라마틱한 핵투하와 함께 패망한 전범 쨉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결과물이군요.(왜 쨉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패망까지 전근대적 우리쪽의 근세 조선에서 조차 상상할 수 없는 자국 백성까지 인신매매질같은 막장 수출질까지 쳐하면서 무기를 수입하고 전비를 충당할까? 왜 쨉의 전투 양상은 자국 군인에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성전마냥 왜왕제를 앞세워 절대적 종교화 전근대적 인명 경시의 반자이 무대포 돌격 전술이나 가미가제식 인간 어뢰같은 짐승 이하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인명경시가 난무한 것일까?(그외 민간 구분 없는 대규모 교전 학살등). 

이런 쨉의 전근대적 수많은 모순과 한계점을 본다면 애초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이들은 기존 에도시대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하급 무사들이였고 이들이 만든 제국 헌법은 서구의 껍데기만을 모방 자신들의 쿠데타의 정당성과 왜왕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그들 입맛에 따라 춤추게 요리할 전근대적 그리고 근대적 흐름으로의 이행을 역행하는 모순과 한계가 명확한 메이지 헌법을 가지고 왜왕제를 이슬람 극단주의의 종교적 교리와 신봉마냥 절대화해서 군국주의화를 촉진시켰고 민의는 외면하면서 결국 아시아 태평양 수천만명의 무고한 희생속에서 패망의 길로 이르게 된게 실체) 


우선 사람들이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근대화의 이론 자체는 50년대 말과 60년대에 미국에서 나온 이론으로 
이는 당시 미소 냉전 체재로 극명하게 갈리면서 이후 미국식(서구식) 자본 공업과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위해 나온 
시대적 배경이군요. 그리고 눈여겨 볼 것은 기존 저개발 국가들이 소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게 기본 내용이고 이에 대한 남미에서 반론등으로 종속이론들이 나오게 됨. 

하여튼 제일 중요하게 볼 부분이 '근대화'라는게 애초에 결과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선진국 즉 개발된 나라 더 정확히는 민주주의 체재에서 공업화와 자본주의 제도와 사회 시민의식이 성장한 나라로 
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군요. 

그렇기에 서구의 근대화는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을 기점으로 이야기도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본격화 되는 
16세기로 거슬러 중상주의 정책등을 통해 자본을 지속적 축적하고 시민혁명과 왕정 시대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북미도 독립과 노예제의 폐지와 점차 삼권 분립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서구에서 여성인권 신장과 여성도 참전권 부여등에 노동자의 권익 보호등이 나오는 이런 일련의 수백년의 과정이 '근대화'-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군요. 


그럼 다시 앞선 서두의 논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군요. 

왜 우리의 대한제국이 근대화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정확히 말해서 실패했다고 말하지 못하는가군요. 
대한제국이 실패했다고 말한다면 구한말 시작된 쨉의 메이지유신 역시 철저히 실패했다고 봐야할 것이군요. 

이는 오늘날 우리는 세계 유수의 여러 통계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분류. 

여기에는 인간 개발지수나 다양한 물질적 경제적 제도적 정치적 부분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이미 
분류하고 있고 이는 우리가 이미 '근대화'라는 과정을 지나오면서 근대화의 성공의 산물로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걸 
의미하군요. 

그리고 << 알아야 하는 것이 이런 쨉 역시도 메이지 유신이라는 건 앞서도 말한 애초에 많은 전근대적 문제와 역행의 시도들로 점철되었고 미국이 60년대 당시 이런 미소 냉전체재가 격화되는 와중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쨉만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라는 표현은 이런 메이지시대 전범 극우 똘아이시절의 근대화 성공이 아니군요.>> 

이런 쓰레기 전근대적 민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전통성도 없던 왜국에서 농민고혈을 빨고 자국 백성까지 인신매매 수출질을 강행하면서 서구 무기로 전국 징병제를 통한 군국주의 힘에 의해 침략적 만행과 수많은 자타 인명을 갉아 만들어 전쟁질하다 패망하고 

이후 미군정하에 '평화헌법'이 들어서고 이후에 제대로된 
민의 참정권이 부여되면서 우리가 남북전쟁을 치를때 후방의 군수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미국의 기술과 소비시장이 열리게됨으로써 정치적 민주제도와 경제적 공업화의 개발이 급속히 급진적으로 가능했던 시대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러하기에 근대화라는 자체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일련의 전근대적 생산방식과 사회 정치 문화상을 타파하는 전체적이고 변화되는 과정을 의미하기에 

만약 우리의 대한제국이나 앞선 여러 조선시대에 이미 서구보다 앞선 근현대적 자본주의 복식회계문화등과 상업 활동, 민본주의 정치 철학과 선진 관료주의 행정 체계과 맞물려 서구의 기계동력을 받아들이면서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던 대한제국이 쨉에 악랄한 식민 지배로 35년간 올스톱된 부분을 
가지고 실패니 자체 근대화의 동력이 없으니 어쩌고 할 소리라면 쨉의 메이지 유신 역시 전근대적 한계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후진적 정치 시스템하에 전쟁 미치광이 군국주의와 왜왕제라는 전근대적 전제주의 사회상에서 결국 패망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게 없다고 보군요. 

그러나 우리의 고려가 조선으로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나아가 쨉의 35년 암흑기로 잠시 올스톱되는 상황에서도 전국적 3.1운동과 항일 독립투쟁 및  해방후 정치적 공백속에 남북 분단, 남북전쟁으로 남한이 잿더미 황폐화속에서도 60년대 다시 본격적 근대화의 기치를 통해 경제 개발을 하고 이승만 독재를 타파, 다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으로 우리 국민 스스로 직접선거제를 이룩하면서 구습을 타파하면서 엎치락 뒷치락 그렇게 우리 국민 스스로 
반세기 만에 민주주의와 공업화라는 양대 산맥을 기적처럼 이룩하면서 오늘날 세계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며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올라왔다면 이런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미개하고 철학도 없는 인명경시의 
쩁에 의해 잠시 스톱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 보군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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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컴플렉스 19-05-17 10:30
   
근대화 성공해서 조선 먹고 만주먹고 상하이 점령한거 아닌가요?
     
굿잡스 19-05-17 10:44
   
근대화라는 이론의 시대적 배경과 개념부터 다시 윗글 정독 하길 바라군요.

근대화는 결과가 아니며 쨉의 근대 성공 어쩌고 표현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미소냉전이 격화되는 시대상에 미군정하에서 쨉에 평화헌법으로 실질적 민주제도와 미국의 후방 군수보급기지로 미의 기술과 시장이 열리면서 급격히 경제적으로도 성장했던 시대의 쨉을 말함.(전근대 미개로 점철 막장짓하던 메이지시대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자국 농민고혈에 자국 백성을 막장 대대적 인신매매 수출로 외산 무기를 수입하는 전근대성에 전국적 징병으로 군국화한 힘으로 대한제국을 강점했을 뿐 메이지유신을 이끈 쨉의 하급무사들의 제국헌법 자체와 이행은 전근대적 역행과 모순 한계로 점철 전통적 민본주의 부재의 철학과 맞물려 아시아 태평양의 수천만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핵쳐맞고 패망으로 적날한 실패작임을 여실히 보여주었군요.
굿잡스 19-05-17 10:30
   
토착 왜구나 쨉의 대표적 개솔 중 하나가  지들이 
한국인을 신분해방 시켰줬네 어쩌고 왜곡 드립인데 이게 얼마나 뻘소리인지는 

정작 쨉 스스로가 21세기에도 지들 천민부락쿠들이 존재. 그리고 더 막장인건 1990년대까지도 법률적으로 장애인이나  결손 가정 자녀는 산아제한까지 받던 전근대 미개사회와 구습을  못벗어난 나라군요. 이런 나라가 

대한제국을 해방? ㅋ . 도리어 임진 이후 조선후기로 가면서 조선은 양반 계층이 점차 유명무실 신분사회가 와해되고 있던 반면 왜국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선진관료체재와 중앙집권형태를 받아들이면서 무사의 사를 정점으로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고착화 심화. 

여기에 메이지 시대로 가면서 군국적 전범 쨉극우들의 관치 군수 주도로 인명경시가 극에 이르면서 자타국민 수천만명이 갉려나감. 이런 기형적 칼의 경직 문화 정치상에 미개 인명경시와 고착된 신분제가 핵쳐맞고도 그대로 유지 되어 온게 쨉의 수준.(쨉이 대한제국을 강점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온갖 억압과 수백만명의 강제 징용 착취, 악랄한 수탈, 학살, 생체실험, 총알받이등 비인권적 극렬한 폭력의 시대에 직면.) 


조선 후기 이미 와해되어 버린 신분제 (통계자료)  


고종 23년(1886)에 노비의 신분 세습법  

이 폐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까지 법제적으로 해방되면서 본격적  
  
급격한 광무개혁으로 근대 국가인 우리의 대한제국이 들어서기 전,  


<순조(재위 1800~1834)는 원년 1월에,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귀천이 없  
  
고, 내외가 없으며 하나같이 적자(赤子)이다, 노(奴) 이다, 비(婢)이다 하여  
  
구분하는 것은 어찌 백성을 똑같이 보는 일이겠느냐. 왕실 노비 36,974명과  
  
중앙 관청 노비 29,093명을 양인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  
  
비안(奴婢案)을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급격히 힘을 잃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122&sca=&sfl=mb_id%2C1&stx=eogkseo


《 수십만 여성들에게 성노예 착취가 당연시 되었던 전범 쨉의 미개 정치 사회상》    

조총과 화약 무기를 수입하기 위해 자국 백성을 노예로 팔아 치우던 아프리카급의 막장 왜국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dg00010&logNo=221300104544&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nil_profile%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9D%25BC%25EB%25B3%25B8%2B%25EC%259E%2590%25EA%25B5%25AD%25EB%25AF%25BC%2B%25EC%259D%25B8%25EC%258B%25A0%25EB%25A7%25A4%25EB%25A7%25A4%2B%25EC%2588%2598%25EC%25B6%259C������������������

このように??時代も明治大正時代も大勢の日本女性が?春婦として?り飛ばされたのですが、現代の日本人としては認めたくない事?なのだろう(「明治から大正にかけて、30万人もの日本の若い女性が海外に?られていった」)          

이와 같이 전국시대도 메이지 타이쇼 시대도 많은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서 팔아 치워졌습니다만, 현대의 일본인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메이지부터 타이쇼에 들이고, 30만명의 일본의 젊은 여성이 해외에 팔리고 갔다」)          

러일 청일 전쟁을 위해 30만명의 여성을 매춘부로 수출        

露日戦争と 日清戦争 ために 30万名の女性を売春婦で輸出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t4NB&articleno=1466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즈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디킨스의 표적은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예·창기약정(芸·娼妓約定)>도 노예계약이라는 거였죠. 디킨스는 이런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실제 유녀의 연한계약증서 사본과 요코하마 병원의 치유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실제 일본 내에서 인신매매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러한 변론을 받자 오오에로서도 당장 논리가 궁해질 수밖에 없었죠. 급거 휴정에 들어간 재판정은 한참 후에야 재개장되었고, 고심 끝에 내려진 최종판결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http://nestofpnix.egloos.com/v/4214900

최악의 일본군 인육사건..청년 부시, 희생자 될 뻔 했다  

부시, 2차대전 해군 조종사 참전  
일본군 인육 사건 희생자 될 뻔  
44년 9월 일본 남쪽 해상 추락  
4시간 표류 미군 잠수함 구출  
전우들은 일본군 포로로 잡혀  
45년 2월 회식 자리에서 타살  
군의관이 장기 적출해 안주로  
전후 일본군 5명에 사형 선고  


https://news.v.daum.net/v/20181202010104303


'出羽奥州와 奥州(현재의 동북지방)에서          
매년 1만 6, 7천명, 上総(현재의 지바현)에서는          
3~4만명의 갓난아기가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        
ㅡ에도시대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          

쌀로부터 돈(화폐와 상품 경제)으로, 경제의 중점이 옮겨 갔다.상품 경제에 날려 돌려진 농민은, 돈 갖고 싶음에, 농지를 담보로 하고, 고리의 돈을 지주나 상인・고리대금등에서 빌린다.이 농민의 빚정책은, 가난한 농민의 대량생산을, 필연적으로 재촉했다.        
「오공 오민」은, 마침내「6공사민」의 맹렬한 착취에까지 발전했다.막부의 大寒・神尾는, 이것에 관해서「백성은 참깨의 기름과 같아서, 짜면 짤수록 잘 나온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에도시대의 대략 250년간, 일본의 총인구는 2500~3000만명의 사이에 정체하고 있다.  이 원인으로서는, 어려운 연공이나 부역의 징집으로, 농민은 생활에 필요한 최저의 축적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은 채, 조그만 흉작에서도 빈농은 기아로 연결되어, 아사하고 있는 것과 평년이라도 생활을 위협해지고 있던 농민이, 스스로의 지금의 최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갓난아기를 죽이거나(솎아냄), 버리거나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라고 생각되고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rich77&logNo=40143933532&proxyReferer=&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m%2F        


 왜농민의 의복에 관해서는, 삼・무명으로 한정되어 노동에 적절한 염색되지 않은 筒袖・잠방이가 사용. 농민의 주거에 관해서는, 더 비참해서, 가건물기둥에, 토방을 강제. 마루는 불경제로 여겨져 토방 위에 멍석이나 짚을 깔고 잤습니다. 땀으로 부드러워진 멍석이나 짚은, 논의 비료로 사용. <농민의 식사에 관해서는, 엄격하게 규제되어 보리나 조가 주식이었습니다. 작은 새의 먹이입니다. 부식이나 간식도 금지.> 오락도, 연중 행사 이외는 금지        

http://blog.naver.com/marich77/40201615696


마비키 まびき [間引き]  

1930년대 홋카이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아이의 목을 눌러 살해하는 '마비키'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이 자장가 중「강에 버린다」,「묻어 버린다」는 마비키의 은어라고 한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486


日 '참혹한' 약자 차별…"법으로 강제 불임 수술" 

믿기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이른바 우수한 유전자만 보호하는 우생보호법이 지난 96년까지 시행됐습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269142_24634.html
설사방구 19-05-17 10:37
   
좋은 글이네요 추천 !!
굿잡스 19-05-17 11:02
   
그리고 사람들이 청과 대한제국을 비교하면서 범하는 우가 청은 기본 만주족이라는 정복 왕조라 우리와는 사회지배 민족 성격이 전혀 다른 양상이였군요.

이때문에 서구 열강시기에도 만주족은 한족과의 민족 대립과 투쟁으로 쇄진하고 있었던 상황에다 기본 만주족은 한족 자체를 자신들의 피지배 세금 착취의 종으로 생각.(우리처럼 자체 내부에서 점진적 신분 해방의 근대화로의 이행이 나오기 힘든 왕조 체재)

이부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짱국의 중화민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주도한  쑨원 자체가 반청복명 즉 만주족을 몰아내자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왕조지배형태.

나아가 오늘날 복지등 최고 선진국도 북유럽처럼 작은 국가에서 좀더 잘 나오는 형태에 유럽처럼 고마고만한 크기에서 경쟁하며 빠르게 근대화로 이행했던 반면

청은 정복 지배계층인 만주족 자체가 피지배의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종으로 여겼던 한족들로 채워지다보니 기계등 공업화 생산력의 필요성을 체감하기 더 힘든 부분이 있던 나라였군요(미국은 이미 유럽의 근대적 사고와 문화 기술자의 지속적 이민자  유입에 자체 풍부한 자원이 맞물려 제국적 영토임에도 빠르게 공업화에 미국식 민주주의도 발전을 거듭)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 

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학살하던 앞잡이 한족계열은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27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B2%AD%EC%A0%9C%EA%B5%AD&sop=and
개정 19-05-17 11:03
   
이를테면 진정한 민주화 진정한 근대화 진정한 진정한 시리즈인데

패자로 분류되어 식민지배를 받은 시점에서 그런 관념적인 무언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

나름 자생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고 ! 정도일까
     
굿잡스 19-05-17 11:14
   
그건 님이나 우리가 실제 쨉 강점기를 살고 있다면 현실적으로 그렇게 느낄수 있지만

애초에 근대화라는 개념 자체가 결과물이 아니라 전근대적 생산,정치 사회 의식을 타파하면서 소위 선진국에  이르기 위한 일련의 전체적 과정이 분명한 개념이라면(서구 역시도 그렇게 수백년 엎치락 뒤치락 근대화의 과정을 거친것이고)

 대한제국의 좀더 급진적 근대화의 이행 이후 쨉의 무력으로 국권이 잠시 상실  스톱된걸 실패라고 말한다면 쨉 역시도 전근대적 온갖 뻘짓으로 점철되는 메이지 유신 이후 결국 핵쳐맞고 패망  역시 극명한 실패작일 것이군요.

그러나 우리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후 쨉에 의해 근대화 과정이 잠시 올스톱된 상황에서도 3.1운동과 끊임없는 독립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후 대한민국이 반세기만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하는 등 일련의 근대화의 과정속에 어디 다른 종족이 다른 땅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면 대한제국의 근대화로의 이행은 실패가 아니라 잠시 스톱되어다가 맞다고 보군요.
굿잡스 19-05-17 11:22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 혼천시계 

1669년(현종 10)에 천문학 교수인 송이영이 만든 천문시계로, 세종 때부터 전통적인 물을 동력으로 하는 시계장치에 서양의 기계식 추를 통한 자명종의 원리를 응용하여 만든 새롭고 독특한 동·서양의 시계장치가 조화된 귀중한 유물이다. 원래 홍문관에서 시간의 측정과 천문학의 교습용으로 쓰이던 것으로 관측을 주목적으로 하는 중국식의 천문시계와 달리 실내에 두고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고 천체의 운동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만든 희귀한 과학 문화재이다.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시계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화재로 세계 시계제작 사상 훌륭한 기술적 산물이다. 국보 제230호이다.서양식 자명종 원리를 이용한 추동식(錘動式) 시계장치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상 특필한만한 귀중한 자료이고 세계시계제작사상 훌륭한 기술적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찍이 니덤(Needham. J.)은 이 천문시계를 높이 평가하여 "세계의 유명한 과학박물관에는 그 모조품을 반드시 전시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송이영(1669)이 만든 시계 장치는 1657년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호이헨스(Christiaan Huygens)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태엽장치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했지만, 태엽장치 대신 추의 상하 운동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해 시계 바늘을 움직이도록 하여 타종하도록 고안되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rich77&logNo=40111218452


조선시대 자동 알림 물시계 자격루 

https://www.youtube.com/watch?v=rNopR8YbRWg


고려시대 물시계의 이름을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 

http://cm.webdaily.co.kr/view.php?ud=201410301157350045764ws_7&md=2019050717_H


조선의 과학수사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129




고려 '사개송도치부법' 서양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근현대적 회계 복식부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41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B%B3%B5%EC%8B%9D%EB%B6%80%EA%B8%B0&sop=and����
    

조선시대 회계문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rd2345&logNo=220490650000��

조선시대 현대적 복식부기 회계문화의 의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rd2345&logNo=220490650000&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nil_profile%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A1%25B0%25EC%2584%25A0%25EC%258B%259C%25EB%258C%2580%2B%25EB%25B3%25B5%25EC%258B%259D%25ED%259A%258C%25EA%25B3%2584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시행과 상업의 발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nightblack&logNo=10004077104


오늘날 반도체에 비견되는 금,은보다 비쌌던 조선의 바이오 의약품-인삼(및 홍삼) 

고종실록 1권, 1년(1864) 2월 3일자 
“중국 배가 와서 시끄럽게 하고, 홍삼을 몰래 사가는 것을 단속하되, 아울러 이러한 내용을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평안도·함경도) 두 도의 관찰사에게 경계하라고 명하였다.”라고 한다. 
  
1828년 북경에 다녀온 박사호의 기행문인 '심전고(心田稿)'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된 물건은 금, 인삼, 담비가죽인데 홍삼은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다. 연경 사람들이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하므로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7&wr_id=35938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3%AC




세계 3대 금광으로 불린 평안도 운산광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0302


보빙사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뒤 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자 고종이 1883년 미국에 파견한 일종의 답례사절로 서양에 최초로 파견한 외교 사절단. 

뉴욕에서 아서 대통령을 접견하여 고종 황제의 국서와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보빙사 사절단으로 민영식을 수행한 홍영식은 미국에서 우편 제도를 도입하여 우정국을 설립하였다. 유길준은 일행과 떨어져 미국에 유학한 뒤 유럽을 거쳐 귀국하여 이때의 경험을 <서유견문>에 남겼다. 이들은 또한 농기계 도입과 농업기술 연구에도 기여하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v150ha430a21




대한제국 근대화의 여러 시행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tinet&logNo=10093303485&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nil_profile%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9D%25BC%25EC%25A0%259C%25EA%25B0%2580%2B%25EC%2588%25A8%25EA%25B8%25B4%2B%25EB%258C%2580%25ED%2595%259C%25EC%25A0%259C%25EA%25B5%25AD%25EC%259D%2598%2B%25EA%25B7%25BC%25EB%258C%2580%25ED%2599%2594
굿잡스 19-05-17 11:50
   
쨉을 패망으로 이끈 메이지시대 제국헌법 VS 미군정하의 평화헌법에 기반한 오늘날 쨉 헌법의 차이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omeranian&logNo=220361677168&proxyReferer=&proxyReferer=http%3A%2F%2F



□ 메이지 헌법

 
 1882년 3월에 산키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식의 입헌군주제에 대해 조사하였다. 1881년에 정부에서 축출되었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내각제를 주장했으나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의회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갖길 원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영국식 의회와 헌법은 고려조차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돌아온 이토는 측근과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1887년에 헌법 초안을 작성되었고 1888년에 초안이 완료되었다.

 1889년 2월 11일 마침내 대일본제국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흠정헌법의 형식을 따라 헌법은 공포되고 1890년에 시행되었다.

 메이지 헌법은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는 내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천황이 행정·입법·사법의 권한을 모두 갖고 있는 강력한 천황제 국가를 지향하였다.

 이렇게 되면 의회는 정치적인 권력을 발휘하는데 제약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메이지 시대의 백성 역시 시민이 아닌 천황의 다스림을 받는 신민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권력에 무자비하게 희생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메이지 헌법은 1947년에 평화헌법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일본은 정치적으로 기형화된다. 이유는 내각은 의회의 영향을 받을지 몰라도 헌법 제11조에 의하면 천황이 통수권을 가지기 때문에 군대는 자신들이 내각이나 의회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조문을 해석하고 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이르러서는 군대는 폭주를 거듭하고 군대·의회·내각은 군부에 의해 장악되어 버리고 통합된 절대권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근대국가를 지향했던 메이지 헌법은 시작부터 폭주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iroyume&logNo=220438896406&proxyReferer=http%3A%2F%2F
굿잡스 19-05-17 12:29
   
참고로 위의 유교 어쩌고도 그 뿌리를 보면 유교의 창시자를 공자로 보지만 공자 역시도 보면 어린시절 당시 이민 동이족의 예법과 제례에 정통했던 사람이였군요. 그것을 춘추전국시대 서토의 혼란상속에서 집대성한 인물로 

이미 우리의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보듯 우리는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공자의 인의 이전에 이미 
우리 스스로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위대한 철학이 있었고 이와 함께 천손강림 광명사상과 재세이화(현실세계에서 이상국을 건설 즉 오늘날 선진국같은 개념)라는 전통 사상이 존재. 

이에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서도 우리에게는 유.불.선을 아우러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사상이 이미 있음을 그래서 이야기 했던 것이고 이후 유교가 근세 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자리하면서 조상 숭배의 제사등은 좀 더 정형화.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설교지원  비상선사 說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實乃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이라. 
차여입즉 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且如入則 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우리나라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는데, 이것을 일러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이미 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시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뭇 인생에 접하여 그들을 참 사람되게 교화하는 것이다.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교지와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삼국사기 최치원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선비 정신  

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신 
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620153&supid=kku010497515


 '한국인이 수많은 외적(外敵)의 침입과 식민지배, 혼란을 이겨내고 오늘날 세계 일류국가를 넘볼 만큼 성장한 생존 능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원로 국사학자 한영우 (72)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50년 가까이 조선시대를 비롯한 한국사를 연구하면서 늘 이런 의문을 품었다. 한 교수가 9일 펴낸 《한국선비지성사》(지식산업사)는 자신의 오래 묵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고조선부터 현재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전통사상을 '선비정신'으로 풀어냈다. 

한영우 교수는 "한국인의 문화적 DNA이자 전통적 공동체 정신이 선비정신, 선비문화"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선비'는 보통 이해하듯이 조선의 유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사를 이끌어온 지성인을 가리킨다. 고대의 무교(巫敎)에서 출발한 '선비'는 고조선 때부터 내려온 고유언어로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선인(仙人) 또는 선인(先人)으로 기록됐을 뿐 선비와 선인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삼국사기》는 단군을 '선인'(仙人)이라 불렀는데, 단군이 우리 나라 최초의 선비인 셈이다. 

 "16세기 천자문에 보면 '士'를 도사(道士)로 번역한 경우도 있어요. 고대의 '선비'가 도사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유(儒) 불(佛) 무(巫)가 통합된 실체가 선비입니다. 조선 유학자만 가지고 선비를 따지는데, 그러면 김유신이나 강감찬·서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한 교수는 "역사학이 변화와 발전에만 주목하다 보니, 역사의 연속성은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칭송한 성리학자 중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사들이 많았던 것은 전통적 선비정신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선비와 신라 화랑의 전통을 계승한 공동체는 조선시대에도 '사장'(社長)과 '향도'(香徒)로 남아있었다. 사장은 한양 한복판에 염불소를 세우고, 승려와 비슷한 옷을 입고 거리를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불러모았다. 향도는 종교단체를 겸하면서 장례를 비롯한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주는 공동체였다. 

한영우 교수는 선비정신의 핵심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과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 사상을 꼽았다. '인간을 골고루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유학과 결합하면서 국가 운영에서 공익(公益) 정신으로 진화했으며, 민심을 존중하는 민본(民本)사상과 애민(愛民)사상으로 뿌리를 내렸다. "하늘과 땅·사람이 하나이고, 우주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천지인합일 사상은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서구의 근대 자연관을 극복하고 상생(相生)을 도모할 수 있는 세계관입니다." 한 교수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이념 대립도 통합과 소통을 강조하는 선비정신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비문화라면 무언가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변화에 저항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요즘 같은 세계화시대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교수는 이런 지적에 고개를 저었다. 

 "선비문화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외래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가 바탕이지요. 개화기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대한제국의 '구본신참'(舊本新參)은 물론,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도 전통적 선비사상과 서양 정치사상을 융합시킴으로써 근대국가 건설을 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 제 것을 우습게 알고 남의 것만 받아들인 결과, 전통문화 브랜드가 후진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http://kdec.re.kr/board/bbs_viewbody.php?code=bbs_edu_pds&page=2&number=376&keyfield=&key=

요즘의 카톡릭등도 중세시절 마녀사냥등 지난 시절 보면 참 웃긴 논리들 많군요. 그걸 시대에 따라 재조명 계속해서 현대화 해오면서 받아들여졌던 것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선비라는 어원도 단순히 조선시대의 문적 성향이 강한 선비만이 아니라 이전 고려시대에는 좀더 문무 겸비의 의미로 삼국시대에는 전란의 시대상에 따라 더욱 강한 전사적 개념으로 더 앞선 고조선은 신권과 왕정이 합쳐진 시대에는 좀더 종교적 성향의 의미등. 

21세기 이런 우리의 유구한 선비 정신 역시 
온고지신 새롭게 해석, 현대화해서 버릴건 버리고 좋은건 취해서 거듭난다면 전혀 나쁠게 없다고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