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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3 13:42
[기타] 조선의 과학수사 수준
 글쓴이 : shrekandy
조회 : 7,960  


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6144&bbsId=BBSMSTR_1008&nm=NS_01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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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가 바탕이 된 범인 검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정조 때인데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조선시대에 탐정이 웬 말이냐는 지적도 물론 있다.역사물이라면 적어도 당대의 여건을 최소한이라도 고증해 영화 속에 반영 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정말로 과학수사가 있었냐는 지적과 다름없지만, 수사에 관한 한 조선이 동시대 어느 나라보다 앞선 과학수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조선시대의 강력사건을 살펴보면 당시에 이미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적용하여 사건의 전후를 판별했다는 것을 여러 면에서 알 수 있다. 정조 31년(1796),황해도 평산 서봉방의 장옹암 마을에서 양반 양성한이라는 젊은 남자가 xx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성추행 사건이다. 한 마을에 사는 상놈 이춘대의 딸인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의 족금이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양성한이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뒤에서 달려들어 갑자기 껴안았다. 양성한은 백주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희롱을 하고 족금이의 비녀를 뽑아 들고는“너는 이제 내 사람이 되었다”고 놀리면서 달아났다.

 

족금의 아비 이춘대는 이 소식에 노발대발하여 양씨 집안으로 달려가서“우리 딸의 혼삿길을 막았으니 어찌할 것인가?”라며 양반인 양성한의 아버지양계수에 항의하면서 심지어 양계수에게‘너 죽고 나 죽자’며 칼을 휘둘렀다.갑자기 상놈에게 봉변을 당했으나 아들의 죄가 너무나 명백하므로 양계수는 족금이를 서둘러 시집보내도록 하자며 이춘대를 구슬린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상놈에게 봉변당한 양계수는 사건의 장본인인 양성한에게“너 같은놈은 필요 없으니 나가 죽으라”고 꾸짖었다. 양성한은 아버지의 심한 꾸중을들은 뒤 집에 있던 간수를 마시고 집뜰에서 xx하고 말았다. 양계수는 자식의 죽음은 어디까지나‘xx한 아들의 애비인 자신이 상놈 이춘대에게 봉변을 받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라며 이춘대를 고발했다. 그리고는 아들의 시체를 상놈 이춘대의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 일종의 시위였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 등 특수한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사또가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그러므로 평산부사이자 초검관인 유광천은 사건 접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사체가있는 장옹암 마을로 달려갔다. 유광천의 검시보고서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시체는 이춘대의 방에서 동으로는 벽까지 4척 8촌, 서쪽으로는 4척 5촌, 남쪽으로는 2척, 북쪽으로는 5척 5촌이다. 방 안이 좁아 시체를 마음대로 조사하기 어려우므로 마당으로 끌어내 판자 위에 놓고 차례로 옷을 벗겼다. (중략) 알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략 23~24세의 중간 몸집의 남자로 키는 주척으로 7척 9촌이고 두발은 흐트러졌는데 2척 5촌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입은 약간 벌리고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왔는데 전신의 살빛이 누런색이고 배는 팽창하지 않았고 구타 등의 상처도 없었으므로 약물사고로 추측되었다. 독을 먹었는지 의심스러워 은비녀를항문에 집어넣었더니 금방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변을 채취하여 가열했더니 흰색의 소금 결정 등이 나타났다. 간수를 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증거 확보를 위해 양성한 집의 곳간을 뒤졌더니 두부를 만들려고 만들어 둔 간수병이 발견되었다. 그 옆에 간수를 담아 마셨는지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망 원인은 간수를 마시고 죽은‘복로치사服鹵致死’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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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록』에는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 은비녀를 인후咽喉안에 깊이 넣었다가 잠시후 꺼내면 비녀의 색이 검어진다고 적혀 있다. 당시의 검시 과정에서는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 특유의 수사기법으로 볼 수 있다.중국에서는 비상으로 인명을 해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상으로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상은 예로부터 죄인에게 내린 사약에 많이 쓰인 독극물로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인데 물에 잘 녹는다. 이는 자연 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은이 비상의 황과 결합하면 검게 변한다. 이러한 색의 변화를 통해 조선에서 많이 사용되던 비상이 독살에 사용됐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상흔을 변질시키지는 않았다 해도 사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시일이 오래 경과되면 시반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법물法物을 사용한 과학수사가 더욱 빛을 발한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은 100퍼센트 순도의 은비녀이며 그밖에 지게미糟, 초醋, 파, 소금, 매실과육은 물론창출蒼朮, 조각 角등의 약재도 사용되었다. 지게미, 초, 파, 매실과육 등은 사체의 상흔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고 창출, 조각은 시체가 놓인 곳의 악취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사람을 칼로 살해하고 피를 깨끗이 씻어내면 육안으로는 칼의 혈흔을 찾아낼 수 없다. 이때에도 과학 수사가 빛을 발한다. 조선시대에는 범행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칼을 숯불로 달구도록 한 후 고농도의 초를 부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않지만 이렇게 하면 선명한 혈흔이 나타나기 때문이다.「CSI」시리즈물에서 루미놀을 사용하여 혈액을 찾는 방법과 유사하다.

 

KBS-TV <역사스페셜> 팀은「조선 CSI 누가 황씨 부인을 죽였나」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이강봉 박사팀과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검증했다. 이 박사는 수사록에 적혀 있는 고초액 즉 초산을 사용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 실험했음에도 실패했는데 수많은 실험을 거쳐 고초액에 티오시안나트륨을 혼합시켰더니 철과 반응하여 피 흔적이 나타남을 확인했다. 조선시대 수사록에는 단순하게 고초액이라고만 적었지만 고초액에 철과 반응하는 성분을 넣었음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과학수사에 관한 한 조선이 어느 나라보다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의 과학 수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조선에 맞는 과학수사 교과서
조선의 관리 즉, 사또 급은 모두 수사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관리의 필독서라고 볼 수 있는 수사집 즉, 교과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사용된 수사집의 원본은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1261~1346)가 1308년에 저술한 책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 일본 등지에서 법의학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인 문종 1년(1047)부터 인명살상에 관한 재판에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삼심제도를 실시했는데『무원록無寃錄』이 출판된 후 고려에 수입되었을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점차 조선의 사회 구조가 중국과는 달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성향이 다르므로『무원록』의 조사 방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년이 지난 세종 17년(1435), 세종은 최치운을 중심으로『무원록』의 해설을 명했다.

 

최치운 등은 명나라에서 발간된『무원록』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세원록』과『평원록』등을 참고하여 세종 20년(1438) 11월에『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완성했으며1440년에 강원도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을 다룬법의학서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범죄와 얽힌 생활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자료이다.

 

 

http://www.cha.go.kr/unisearch/imagefiles/newsfile/add_cate_1_sec_1/20110314142142876000.jpg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및 병조호란 등으로 사회의 기강이 많이 무너지고 범죄수법도 다양해지자 과거의 법의학 지식만으로는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영조24년(1748)에 간행된 구택규의『증수무언록增修無寃錄』은 이와 같은 변화를 반영하여『신주무원록』에서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새로운 사건 등을 새로이 삽입했다. 구택규의 아들 구운명具允明(1711~1797)이 더욱업그레이드된 형태의 버전을 내놓았다.

 

그는 그동안 조선에서 누적된 다양한 검험 지식과 수사 기법 가운데 기록할 만 한것은 모두 첨가하여『증수무언록대전』을편찬했다. 정조는 서유린徐有隣(1738~1802)에게『증수무언록대전』을 언해하도록 명령하여 1796년『증수무언록대전』과『증수무언록언해』가 함께 출간되었다. 전자는 한문으로 되었고 후자는 한글본이었다. 이두 책은 1905년 새로운 형법이 반포된 이후에도 검시 지침서로 계속 활용되었다. 동양에서는 서양과는 달리 파시 즉 부검을 하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강력범죄를 해결해왔다. 이는 파시를 하지 않더라도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즉 과학수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음을 뜻한다.「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이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의 바탕에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과학수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글 | 사진·이종호 과학저술가, 과학국가박사

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닷컴), 글로연출판사(조선 최대의 과학수사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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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글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4/2008080401095.html


쉿!' 수사 과정은 발설하지 말라

요즘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드라마 CSI는 과학 수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수사관들은 현장에 남겨진 실오라기 하나, 범인 신발 밑창의 흙 성분 등 아주 작은 단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우리나라에도 1955년 과학적인 수사를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설립됐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경찰들은 어떻게 사건을 조사했을까?


다양한 실험장비와 과학적 지식을 갖춘 오늘날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에도 사건 수사에는 여러 과학적 방법이 동원됐다. 조선시대에도 가장 큰 범죄는 살인이었다. 이 때문에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는 여느 범죄와 달리 엄격한 수사가 이뤄졌다.

	[와! 조선시대 이런 일이] 조선시대 과학 수사

http://kid.chosun.com/site/data/img_dir/2008/08/04/2008080400950_0.jpg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각 지방의 수령은 조사를 실시할 검관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엄중하게 보존했다. 검관은 우선 친척, 목격자, 피의자나 이웃 사람들을 불러 심문(초초)했다. 이를 통해 범행 동기, 진행 상황, 원한유무 등을 조사하고 피해자가 살아있을 때 건강상태는 어땠는지, 상처가 있었는지 등도 철저하게 파악했다.


이후 사체에 대한 부검이 이뤄졌는데 몸의 76개 부분을 자세히 살펴 이를 모두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후 또 한 번 심문(갱초)을 실시했는데 처음의 내용과 틀릴 때는 삼초(三招), 사초(四招)를 거듭했다. 모든 내용은 검안(檢案)이라는 문서로 남겨졌다. 조사과정에서 혹시 있을 수 있는 비리를 막기 위해 매번 다른 수사관이 조사를 하고 이들은 서로의 조사 내용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못하게 했다.


세종실록 14년(1432년)에는 임금이 “시체를 검안하는 것은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이 달린 일인데도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 중에 검시를 직접 하지 않고 아전에게 맡기는 이가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하니, 관리들로 하여금 직접 하게 하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수사에 만전을 기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검색어> 검안(檢案), 검시장(檢屍場), 검안서(檢案書), 검장(檢帳)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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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차 15-02-13 23:08
   
저도 조선의 과학수사가 선진적인건 알고있었는데 이리 고도화되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shrekandy 15-02-14 15:00
   
저도 사실 이글 찾기 전까진 님과 같은 상황이였어요 ㅎ
스코티쉬 15-02-14 03:54
   
요즘 올려주시는 글들 시리즈처럼 재밌게 읽고 갑니다
     
shrekandy 15-02-14 14:59
   
ㅎㅎ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공부 15-02-14 08:37
   
한국인들의 과학적 수학적 기술적 능력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국인들의 유전자는 세계적이므로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진정한 선진국이 되겠죠.

글 잘읽었습니다....

화이팅.....
     
shrekandy 15-02-14 14:59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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