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5-02-22 02:35
[기타] 우리나라 기병 대해서인데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4,185  

어디서 들은 말이지만 조선 기병 1명이 여진족 기병 5명을 상대할정도로 강하더군요
 
진짜 우리민족은 고대부터 기병은 강한것 같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버러버러범 15-02-22 02:58
   
어디서 들은 말인데요?
바로 아래에 바토님이 근거자료좀 제대로 올리자고 말해놨는데
참 뜬금없는 글이 올라오네요.
인수라 15-02-22 03:06
   
아마 신립등과 관련해서 특정 전투의 교환비보고 그러는 모양인데...... 병자호란때처럼 패배한 전투에서는 어쩌실려고...... 청군하나가 조선군 수백은 상대하는 겁니까.
전쟁망치 15-02-22 10:25
   
기병은 오히려 청군이 압도적으로 강했을텐데요
개떡 15-02-22 12:40
   
여진이라 불렸을때는 국가가 아니라 한낮 부족에 지나지 않았으니 장비든 무기든 규율이든 매우 후졌겠죠.
그러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제대로된 국가를 만들고 기틀을 바로잡아 청나라를 세웠을때부터 조선군과 비등비등해졌을겁니다. 거기에 조선은 임진왜란 전후상황 이라는 패널티로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세등등했으니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거죠.
사커좀비 15-02-22 15:24
   
고려말 또는 조선초의 완편된 기병이라면.. 중갑기병입니다..
기본적으로 여진은 거의 대부분이 기병인데.. 경기병이었고요...
제대로 완편된 부대끼리 클래시컬하게 대회전으로 붙는다면
조선쪽이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병자년 때의 팔기군과 조선군은 그냥 뭐... 정규군과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대결이었고요...
이쉬타르 15-02-22 15:36
   
고려나 조선이나 기병이 (소수에 불과)아닌 보병이 주력이였고 전원이 궁기병으로 구성이 된 유목민 국가에 비한다면 역부족 였던 게죠
 심지어 고구려 조차도 기병은 고구려인 아닌 영내 거란족으로 구성 됬었담니다
Centurion 15-02-22 15:46
   
신립은 평소에 철기(鐵騎) 5백여 명을 훈련시키면서 사냥을 하고 전술을 익히며 강 연안에서 치돌(馳突)하였는데, 그 빠르기가 귀신같았다. 이 광경을 오랑캐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하였던 것이다.

당시 태평 세월을 오래도록 누린 나머지 군사들이 싸울 줄을 모르고 그저 성벽이나 지키면서 마치 먼 거리의 과녁에 맞추는 것처럼 활을 쏠 뿐이었다. 그래서 적이 혹시라도 육박전을 하며 성에 올라오기라도 하면 모두 겁에 질려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신립이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벌이며 싸울 때마다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변방의 군사가 비로소 분발하여 이에 과감하게 야전(野戰)을 벌여 적을 공격했으니, 육진을 보전하여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은 신립이 앞장서서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었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 립(申砬)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級)의 목을 베자 적병들은 퇴각하여 달아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신립은 니탕개를 유인하여 생포하고, 서예원(徐禮元)은 율보리 등을 유인하여 생포했는데 다 목베다. 서예원은 반드시 변방의 수장이었을 것이나 자세히 알수 없다.

*************************

신립이 500 정예기병을 육성해서 말타고 활쏘기를 집중 훈련시켜,
니탕개의 난 때 대활약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승자총통을 적극 활용했다는 말이 있죠.

아마, 일종의 궁기병, 총기병을 키웠던 셈인데..
유럽으로 치면 권총이나 카빈총을 쓰는 기병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여진족이 아직은 그다지 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 그런지..
팔기군처럼 대단한 갑옷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http://cfile220.uf.daum.net/R400x0/2128813553C880F20D927B

하지만, 청나라의 팔기군은 다르죠..
소위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중장기병으로 꼽히는게 팔기군이거든요.

일단 얘네들도 조선의 두정갑 형식의 갑옷을 입었는데,
부위별로 두겹,세겹쯤 껴입는 부분도 있는걸로 압니다. 디자인이 그렇게 생겨먹었죠.
최종병기 활을 보면, 안에 사슬갑옷 같은 걸 껴입은게 보이구요.

조선의 기병들은 초창기엔 창기병과 궁기병으로 나눠지는데..
조선 조상님들이 가까이서 단병접전하는걸 별로 안좋아해서,
주로 원거리에서 활을 사용하며, 기동력을 중심으로 싸우는 장병전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엔 백병전 기술이 너무 단절되어, 명나라군을 통해 새로 무술을 들여오게 되지요.
그래서 만들어진게 무예 18기 + 마상무예 6기 = 24반 무예, 무예도보통지인데..
무사 백동수란 드라마가 이 내용을 배경으로 만들어진것이죠. 백동수도 실존인물이구요.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편곤을 사용하는 기병도 등장하는데..
기존의 창기병의 경우엔 찌르고 뽑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거나, 뽑기가 번거로운 점이 있는데..
편곤 기병은 그런 점이 덜하죠. 이건 그냥 도리깨 둔기 형식이라 갑옷을 입어도 충격이 고대로 전해지고,
휘두르는 기병 자신에게도 충격이 별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도 팔기군에 비할바는 못됩니다.
팔기군은 그야말로 몽골, 명나라, 이자성의 반란세력, 남명세력, 기타등등
아주 쫙쫙~ 밀어버릴만큼 뛰어났습니다.
이들의 병력이 사실상 만주 8기, 몽고 8기, 한인 8기 등등 규모가 대략 15만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기병 위주로 이뤄져 있었구요.

그래서 야전에선 꽤 규모가 되는 십수만 단위의 명나라군도 기를 못쓰고 순삭을 당하곤 했는데..
그나마 버틴게 만리장성과 홍이포라는 유럽산 대포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정예병이자 실질적 주력이라 볼 수 있는 중앙군의 숫자와 북방군 숫자를 다합쳐도
청나라 홍타이지가 끌고온 12만8천 대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근왕군이라고 올라온 지방의 속오군들이 숫자는 좀 됐다만..
그마저도 각 도별로 수천명 단위의 근왕병들이 올라왔지만, 대부분 각개격파되었으며..
경상도 근왕병 숫자는 4만이나 되었다는데 이마저도 패배하고 말았지요.
도원수 김자점은 중앙군과 근왕병 포함 2만3천 병력을 거느리고도 가만히 있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1만2천 병력과 함께 갇혀있고,
이런 상황이니 답이 없었죠.

사실, 인구수로 보면.. 당시 청나라의 인구는 끽해야 100만 정도였고,
조선은 넉넉잡아 800~1100만 정도였는데, 딱히 병력의 우위도 달성못했습니다.
질적으로도 우수하다고 말하긴 어려웠죠.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들 숫자만 50~70만 정도 되는 모양인데..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동원된 병력이 한 8~10만정도 될까말까 할겁니다..

뭐 그나마 위안이라면.. 1천만 인구의 조선도 털렷지만, 1억이 넘는 명나라도 털렸다 정도..
     
이쉬타르 15-02-22 16:04
   
조선 침공 당시 및 후금에서 청으로 국명 바꾸고 할적에 청의  총병력은 30만명대이고 여진8기군은 8-10 만명대로 전부 기병으로 구성 그리고 한족 출신의 보병들 10여만명.. 몽골 출신 기병이 가세..가 당시 청의 군사력 였습니다
     
국산아몬드 15-02-22 20:37
   
밑에 제가 쓴 글에 병자호란 당시의 전투 전적이 있습니다 4승 5패입니다.
.최소한 몇만명은 죽였습니다
크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조가 조기 항복하는 바람에 패한 겁니다

대부분 각개격파되었다니 왜곡하지 마세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586&sca=&sfl=&stx=&sst=&sod=&spt=0&page=2
          
Centurion 15-02-23 00:36
   
님이 링크한 글에도 위 기록들은 대부분 나와 있지요.

한마디로,
남한산성의 인조의 1만2천 방어병력을 구원하여야 되는게
당시 근왕병들의 전술적 목표였습니다.

전략의 목표는 당연히 청태종과 팔기군의 패퇴였죠.
하지만, 전술적 목표나 전략적 목표 그 무엇도 달성되지 못했고,

도원수 김자점이 근왕병들을 규합하여 한덩어리로 모아 의미있는 반격을 하지도 못했고,
사실상 각 도의 근왕병들이 차례대로 소규모로 진격하다 수천병력씩 잃으며 각개격파당한채,
후퇴하거나, 도원수 김자점과 합류하지요.

이런 외부전황과 식량부족 등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니,
인조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요.

45일 농성전이 짧다고 하기엔 꽤 되는 기간인데.
그 기간동안 도원수 김자점이 각 도별 근왕병을 규합을 안하고 방치했다가,
각개격파 당한게 그만큼 무능했다는 건 사실아닙니까?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 같은 도원수였으면, 저런 일도 없었겠죠.
이쉬타르 15-02-22 16:00
   
당시 조선이 맞상대한 여진은  주변부 오합지졸  수준 였고 주력이 아니였죠.. 만주여진 주력은 지금 남만주 위치 건부 여진부 였고 여기서 누루하치가 나오고 여진3부족들 통합의 중심이 되죠
Centurion 15-02-23 00:25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편집]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1]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가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2월 27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西)에 있는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했다. 근왕군은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기력이 다했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를 비롯해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으므로 더는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험천 전투는, 조선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2]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6일 강원도 김화 탑동 부근에서 청군과 한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 온 청군을 격퇴에는 성공하여, 본래 목적지였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조선 조정과 청의 조약이 체결된 뒤여서, 군사를 돌려 서울로 회군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29일 병력 6000여명을 모은 이시방은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만났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수원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배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쌍령 전투[편집]

한편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 병사들을 저지하려고 인근 불당리에 매복하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 칼과 창을 주 무기로 삼아 최후 돌격 단계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구실을 하는 병사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 3백 기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조총으로 중무장한 8천여 조선군은 겁먹은 채 거리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궤멸시키고 허완도 베어죽였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싸웠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했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었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2]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2]

강화부 전투[편집]

청군은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강화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의 수는 채 몇백이 되지 않았고, 강화도수비총대장인 강화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이 지휘권을 놓고 다투면서 분열되어 있었다. 1637년 1월 21일 청군은 1만6천명의 군사를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충청 수사 강진흔은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접근해오는 청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강진흔이 적은 수의 배로 수많은 배를 가진 청군을 힘겹게 대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사대장인 장신은 강진흔을 돕지 않고 도주하였다.

청군이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것을 김적이 강화검찰사 김경징에게 알렸으나, 김경징은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청군이 오느냐?"라고 하며 김적에게 군율을 물어 목을 베려까지 하였다. 김경징은 갑곶을 지키는 장수가 김적과 같은 보고를 하자, 그제서야 군사를 정비하고 갑곶을 수비하려 들었다. 결국, 강진흔의 충청 수군 방어선을 뚫고 청군의 배가 강화도에 상륙하게 되었고, 청군은 진해루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뒤이어 강화도에 속속 상륙한 청군은 강화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경징과 강화 부사 이민구는 배를 타고 강화도 근처 섬으로 도주하였고, 청군은 텅텅 빈 강화산성을 단숨에 함락하였다. 많은 강화 백성들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몇몇 사대부들은 자결하기도 하는 등 강화 곳곳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1월 22일 강화부를 함락한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고,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강화도 함락은 인조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쌍령 전투와 함께 인조가 항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전란 후, 조정에서는 강화부 전투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고, 신하들은 패배의 원흉인 김경징의 목을 베기를 원하였으나 인조는 김경징과 강화부사 이민구를 귀양보냈다. 또, 충청 수사 강진흔을 귀양보내고 장신은 자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을 사사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인조는 김경징에게 사약을 내렸다. 또, 충청 수군들과 장수들이 애통하게 강진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인조는 강진흔에게 강화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참형한 뒤 효수하였다.
 
 
Total 2,80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41 [기타] 고구려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16) 마별창 02-22 2385
2640 [기타] 사대관계로 이 정도 이슈가 올라옵니다 (19) fininish 02-22 1788
2639 [기타] 깜짝 놀랐슴...ㅎㅎ (15) 마라도 02-22 1768
2638 [기타] 조공에 대한 가장 웃기는 인식 (19) 마라도 02-22 2453
2637 [기타] 조선이 사대적이고 주체적인 역사가 없다는 사람들 … (21) shrekandy 02-22 3393
2636 [기타] 환단고기를 읽어본 소감 (10) 창기병 02-22 7639
2635 [기타] 우리나라 기병 대해서인데 (12) 두부국 02-22 4186
2634 [기타] 글을 주장하고자 할려면 바토 02-22 952
2633 [기타] 이미 우리나라 자학사관은 충분히 넘치지 않나요? (52) 파쓰타쓰타 02-22 2494
2632 [기타] 삼전도 굴욕 (5) 꼬꼬동아리 02-21 2237
2631 [기타] 임진왜란이 끝난 후 300년의 세월 (20) 마라도 02-21 3501
2630 [기타]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여진족 토벌!!! (3) shrekandy 02-21 8547
2629 [기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처음으로 글을 적습니다. (8) zzag 02-21 2341
2628 [기타] 조선(朝鮮)왕조의 흔적 맛보기 (2) 한국경제 02-20 4749
2627 [기타] 고구려인들은 평균키가 컸다는데 (5) 마별창 02-19 7937
2626 [기타] 조선을 욕해서 얻은게 뭐가 있죠? (44) shrekandy 02-19 5318
2625 [기타] 사고전서 라는책을 근거로 나온말인대 (2) 스파게티 02-19 2298
2624 [기타] 결국 조선으로 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 (89) 오투비 02-18 3560
2623 [기타] 예전 드라마 주몽이 생각나서 잠깐 검색해보니.. (3) 관성의법칙 02-18 2172
2622 [기타] 조선이 조공받던 상국 놀이한건 왜 무시? (26) shrekandy 02-18 5908
2621 [기타] 대한민국 5000년 역사상 지금이 제일 전성기 (87) 파가니 02-18 6346
2620 [기타] 사실상 사림=IS아닙니까? (11) 잉여단결꾼 02-18 2448
2619 [기타] 저격글 보고... 토론의 기본도 모르는 분들. (20) 솔로윙픽시 02-18 3626
2618 [기타] 저격글 잠금 (16) 진한참기를 02-18 693
2617 [기타] 이성계의 선택.. (11) 휴로이 02-17 3775
2616 [기타] 역사를 바로보는것이 왜 필요한가 (4) 국산아몬드 02-17 1438
2615 [기타] 역사 자위질의 허무함... (27) 마라도 02-17 4219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