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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13 03:27
[기타] 고구려 존속기간은 1000년?
 글쓴이 : 대은하제국
조회 : 5,228  

1.서론
 
고구려 시작은 ‘天의 개념’으로 출발하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구려 동명성왕의 내력을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중국의 『후한서』,『삼국지』,『위서』등 살펴보겠다. 고구려 동명성왕의 관리의 칭호를 살펴봄으로써 고구려 건국기의 조직을 파악하려한다.

고구려 동명성왕을 계승한 그의 아들 유리명왕의 국가조직 연계성을 살피려한다. 동명성왕 때 만든 조직을 그대로 전승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고구려 초기의 국가 조직 실체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의 초기를 주목한 이유는 많은 중국 사서에 동명성왕의 탄생설화와 그의 행적 사료가 신라나 백제의 시조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시 말해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과 백제 온조왕과의 기록의 분량을 비교한다면, 동명성왕에 관한 기록의 양이 압도적이다. 한 가지 특기 할 사실은 중국 사서에서 주몽과 동명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동명이라는 글자 의미는 중국과 대적할 정도로 강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걸출한 지도자였다는 것과 연관되어서 필자가 주목하였다.

위와 같은 실체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고구려 동명성왕의 관련된 고구려 행적의 대한 기록을 규명하려 한다.
 
                        
 
 
 
 
2. 천자의 나라 부여와 고구려
 
북부여 시작에 대하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古記에 의하면, 『前漢書』에 宣帝 神爵 3년(B.C.59) 임술 4월 8일 天帝가 訖升骨城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탔다. 도읍을 세워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고 했으며, 스스로 解慕漱라고 이름했다. (『三國遺事』권1「紀異 北扶餘」32쪽(東國文化社,1965),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북부여가 해모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동명성왕 언급과 동시 부여에 대한 계보가 비교적 상세하다. 부여 왕 가계는 해모수→해부루→금와로 이어졌다. 그런데 해부루의 아들 금와의 출생설화가 한국고대사 규명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의 첫줄에 나온다.
 

시조 東明聖王의 姓은 高氏요. 諱는 朱蒙이다. 앞서 부여 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구려 東明聖王조의 출생설화 관련된 부여 태자 금와의 행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부여 왕의 권력이 강력하였다는 뜻을 지닌 왕권신수설과 같다. 그 이유는 부여 왕 해부루가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산천에 제사 행위은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행하여진 일반적인 유형이다.

기원전 3세기 흉노에 대한 기록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간구하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드렸던 행위를 찾을 수 있다. 사마천의 『史記』의 「匈奴傳」에 의하면, 매년 정월, 모든 우두머리들은 선우의 뜰에서 小會를 하며 제사를 지냈으며, 5월에는 籠城에서 대회를 열어, 그들의 조상과, 천지, 귀신을 제사하였다. 가을에는 말이 살찔 때 蹛林에서 大會를 하면서, 사람과 가축의 수효를 계산해 궁리를 모색하였다.
 
위의 내용은 흉노가 지닌 제사 행위자체가 바로 유목 공동체의식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흉노는 그 당시 중국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였을 뿐 아니라 북아시아를 최초로 통일한 유목제국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흉노 풍습과 동일한 의식을 행했다는 사실이 『後漢書』의 「高句驪傳」에 기록되어 있다. 즉, 10월에는 하늘을 제사하고, (나라 가운데 있는 사람은) 대회를 한다. 이를 동맹이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제천의식을 東盟이라 불렀다. 그런데 고구려가 고향을 떠나 비류수 가에 내려와 살던 부족들이 자신의 조상을 잊지 않기 위해 부여의 제천 행사인 迎鼓에서 제사지내던 하늘의 아들 동명에 대한 제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제천의식 東盟은 고구려를 결속하는 전투공동체 중심 의식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 이유는 북아시아 유목사회의 가을 제천의식을 통해 국부 조사를 실시하여 다음 해를 대비한 공동체적인 경제 의미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東盟’은 ‘東明’의 ‘東’처럼 동쪽에서 생활하며 공동체 결속을 의미하는 ‘盟’이 결합된 그런 제천의식이라 해석해야 맞다.

위의 사실은 흉노처럼 ‘祭天’을 하기 위해 고구려가 10월에 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이며. 흉노의 가을 제천의식이 다음해 경제문제를 가늠하기 위한 대회였다는 사실에서 고구려의 10월 제천 의식과 성격이 동일하다고 본다. 그런데 부여의 경우는 臘月(殷正月)에 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드렸으나 10월에 제천을 위한 대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臘月 즉 12월 부여에서 제천을 하여 「迎鼓」라 했다. 여기서 유추해석이 가능한 것은 부여도 고구려와 같은 제천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며 이는 공동체 결속 강화라는 유목공동체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부여는 법속과 兄死妻嫂 제도등 많은 것이 흉노의 법속과 동일하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유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하기가 쉬워 구성원 모두 회합할 수 있는 대회 개최가 가능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부여 벽화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고구려나 부여가 제천의식을 했던 유목집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흉노처럼 부여 왕 해부루도 산천에 제사한 것은 북아시아 유목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하여진 습속이다. 이런 사실을 중요 연결 고리로 생각하는 까닭은 전투 공동체였던 고구려 활동무대가 북아시아지역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부여 해부루를 이을 아들을 금색 개구리로 묘사했는데, 북아시아에서 최고의 장식품은 금이다. 이와 관련해서 금으로 된 수의는 오늘날 카자흐스탄지역에서 이미 4기가 발굴되었다. 또 동아시아에서 개구리가 달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은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 묘에 널방 천장고임 벽화에 하늘세계를 그리면서 달을 두꺼비로 형상화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의 쌍영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해(삼족오), 쌍영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달(두꺼비), 각저총 널방 왼벽 천장고임벽화:해(삼족오), 각저총 널방 오른벽 천장 고임벽화:달(두꺼비), 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 벽화:해(삼족오), 덕화리1호분 널방 왼벽 천장고임벽화:해(삼족오), 덕화리1호분 널방 오른벽 천장고임벽화:달(두꺼비)등이 있다. 고구려의 사신총에서도 해(삼족오)와 달(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처럼 중국도 해는 까마귀, 달은 두꺼비 또는 개구리로 형상화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처럼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天下觀’을 갖고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서왕모 벽화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고대 신화에 나오는 法術이 높은 미모의 선녀로 곤륜에 사는 서왕모는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구려의 출발이 강력한 국가였다는 방증자료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 서왕모 소동 사건은 前漢 哀帝 建坪 4년(B.C.4)의 해프닝이었다.

아무튼 천하관의 의미를 갖는 서왕모 벽화가 고구려 고분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한 지역의 국가개념을 뛰어넘어 동아시아의 중심에 섰던 그런 국가였다는 사실을 형상화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구려 벽화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해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몽의 탄생과 그의 행적에서 늘 ‘天’이 강조되었던 이유는 고구려 건국기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長沙 남쪽 馬王堆의 漢初 軑侯의 夫人 辛追 묘에서 비단그림 가운데 ‘해(日)’안에 까마귀, ‘달(月)’ 안에 두꺼비가 그려졌다. 그렇다면 금와를 두꺼비로 형상화했다면 그 이름에서 ‘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의미였다. 따라서 부여가 천자의 나라라는 의미를 반복적으로 금와의 출생설화를 통하여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 왕이 ‘天帝子’였다는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석된다. 이는 부여가 천자 국가였다는 사실을 금와 출생설화를 통해 다시 확인하였다.

천자의 나라는 황제 또는 왕을 중심으로, 그 휘하에 제후를 거느린 국가형태를 말한다. 그런 나라에서는 왕의 형제나 아들에게는 공이라는 작위가 주어졌고, 異姓 제후들에게는 후라는 작위가 주어진 국가 시스템이다.
 

                          
 
 
 
 
 
 
3.천자의 나라 고구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계속된 부여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후에 (부여)국상 阿蘭弗이 말하되, 『日前에 天神이 나에게 강림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天神)의 자손으로 이곳에 건국케 하려 하니 너희(나라)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東海 가에서 迦葉原이란 곳이 있으니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阿蘭弗이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東扶餘라 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扶餘 國相 阿蘭弗이 말하길 東海 가에 토양에 오곡이 좋은 곳에 가서 하라고 하였다. 그곳을 迦葉原이라 했다. 그래서 왕을 권해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김부식은 고려시대 유․불․도의 3교를 아는 그런 불교학의 대가였다. 불교에서 阿蘭에서 阿蘭迦蘭과 阿蘭若을 의미하여 迦葉原은 迦葉을 뜻한다. 그렇다고 이때 부여에 불교가 들어 왔던 것은 아니다. 다만 김부식이 알고 있던 불교에 관한 지식이 가미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북부여에 대해 해모수 이후의 사실을 간단하게 언급하였으며 이는 부여와 고구려 연결을 알리는 단서이다.
 
(해모수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扶婁라 하고 解를 氏로 삼았다. 왕이 뒤에 上帝의 명을 받들어 도읍을 東扶餘로 옮겼다. 東明帝가 扶餘의 계통을 이어 일어나 卒本州에 도읍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卒本扶餘고, 고구려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부여가 天帝(上帝) 나라라는 사실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고구려도 天帝子 해모수를 동명왕의 아버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고구려 동명성왕이 天帝子라는 표현이 맞다. 고구려 동명왕은 ‘天子’였다. ‘天帝之子’라는 假說이 부여 해모수와 고구려 동명왕의 출생설화에서 확인된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삼국사기』에서 보면.
 

옛 도읍지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解夫婁가 죽자 金蛙가 그 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위의 사실은 天帝의 아들 해모수라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음을 말하는데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해모수가 ‘天帝子’라고 표현한 점이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천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시대까지는 왕을 천자라고 하였고 秦 제국부터 황제를 천자라고 했다. 따라서 해모수가 天子로서 도읍하였다는 이야기는 부여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가늠 할 수 있는 칭호였다. 간단히 말해 부여 최고 통치자가 ‘天帝子’였다는 사실은 천자의 나라였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천자라는 용어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해모수가 죽었을 때 ‘薨’이라는 표현 대신 ‘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은 철저한 유학자였기 때문에 12세기에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중국을 의식하여 ‘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한 예를 든다면『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 연개소문을 기록 하면서 중국을 너무나 의식한 나머지 당 황제 李淵의 이름과 같은 ‘淵’을 쓰지 않기 위해 姓氏마저 바꾸어 「淵蓋蘇文傳」이라 하지 않고 「泉蓋蘇文傳」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철저히 중국을 의식하였다. 蓋蘇文의 姓이 淵이었던 것은 아우 淵淨土가 『삼국사기』의 「문무왕본기」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성이 泉이 아니라 淵이라고 밝혀졌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신라본기」 淵淨土기록을 泉淨土로 바꾸지 못했다.

부여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즉위했다. 정확히 말하면 해부루의 적장자가 금와였다. 금와 출생 설화가 북아시아에서 유행한 탄생설화와 궤적을 같이 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이유는 왕권신수설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해모수의 또 다른 아들 동명성왕 출생을『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들어보면,
 
“나는 하백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 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優渤水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명의 어머니가 하백의 딸 유화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에서 유화에게 동명을 임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화는 부모 허락 없이 해모수와 정을 통하였기 때문에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정황까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 『삼국사기』에서 금와가 이상하게 여겨서 유화를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쯤 되었다는 동명의 출생설화이다. 중국사에서도 하백의 딸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마당에, 고구려사에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바꾸어 말하면 고구려에 의해서 하백 신화가 구체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그 부분에 대하여 적고 있다.
 
金蛙는 이상히 여겨 그를 집 속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에게 日光이 비치었다. 몸을 피하자, 日光이 또 따라 비치었다.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金蛙)이 (상서롭지 못하게 여기어) 그 알을 버리어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다 먹지 아니하였고, 또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牛馬가 (밟지 않고) 피해 갔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안았다. 왕이 그 알을 쪼개보려 하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표히 凡兒와 달리 제 손으로 궁시를 만들어 쏘매, 百發百中이었다. 扶餘의 俗語에 善射者를「朱蒙」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금와에게는 七子가 있어 항상 朱蒙으로 더불어 遊戱하되 그 技能이 다 朱蒙을 따를 수 없었다. 그 長子인 帶素가 왕에게 말하되, 『朱蒙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또 용맹스러우니 만일 일찍이 그를 도모치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오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소서』하였다.
 
주몽의 탄생은 『後漢書』의 「선비전」에 나타난 A.D.2세기의 檀石槐의 모습과 같다. 기원전 주몽의 활약상도 鮮卑 檀石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2세기에 작성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무려 7세기나 앞선『후한서』의 「부여국전」에도 고구려 동명에 대한 출생설화가 언급되었다. 이를 소개하면,
 
처음에, 北夷의 索離國왕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그 시녀가 後(宮)으로 임신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 시녀가 말하기를,「이전에, 天上의 정기가 있어서, 크기가 계란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내게 내려와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임신했지만, 왕은 시녀를 가두었다. 그 후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게 명령하였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넣었으나 말도 똑 같이 행동하였다. 왕은 (그 아이가) 신이라고 생각하여, (시녀인 그)엄마에게, 거두어 기를 것을 허락하였다. 이름은 동명이라고 불렀다.
 
위의 내용은 『후한서』의「부여국전」에 언급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索離國은 부여국안의 또 다른 나라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여도 ‘天帝子’ 개념의 국가였기 때문에 부여국로부터 작위를 받은 그런 국가가 부여국 안에 散在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주몽의 출생이 別種이란 점이다.

고구려 동명의 출생설화에서 주몽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신적 존재로 묘사하였던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조상을 신처럼 숭배하고 고구려를 가장 신성한 天帝 나라로 생각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그런데『삼국사기』보다는 『후한서』의 「부여국전」이 동명에 대한 언급을 더 신격화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김부식의 축소지향적인 고구려 역사서술로 말미암아서 동명 출생설화가 신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결과인 것 같다. 한 예는 『후한서』에서는 동명이라고 기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서는 동명보다는 주로 주몽이라고 했던 사실에서 비교된다. 물론 활 잘 쏘는 의미가 朱蒙이다.

그밖에 주목되는 것은 『후한서』의 「부여국전」의 맨 앞에 동명왕의 출생설화가 언급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부여국전을 기록하면 당연히 부여국에 대한 이야기가 우선시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부여와 고구려의 출발이 거의 동시성을 갖는다는 의미라고 본다. 결국 이는 고구려가 출발부터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린 기록이라 생각된다.
 
‘天帝子’ 해모수의 아들 동명에 대한 설명에서 천제자의 개념이 빠질 수가 없다. 고구려 동명은 ‘天의 개념’에서 설명되어야할 인물이다. 天의 질서와 동명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필자가 ‘天의 질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 앞서 신라가 건국되었는데도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서 ‘天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백제 경우도 고구려 동명의 아들 온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天의 개념’이『삼국사기』의「백제본기」에 온조 왕 기록에 없다. 물론 신라 혁거세 居西干과 달리 백제 온조왕 경우는 주몽 아들로서 고구려의 계승으로 칭호를 왕이라고 했던 사실로 본다면 신라와 차이가 있다.

위의 추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후한서』의 「부여국전」에 동명 출생설화 유형과 거의 일치되는 鮮卑 檀石槐 출생 배경 기록이다. 정확히 말해 『후한서』의「부여국전」과 『삼국사기』의 동명 출생설화를 합친 것 같은 檀石槐 출생설화라 더욱 흥미를 끈다. 다시 말해 東明과 檀石槐 출생설화가 왕권신수설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물론 檀石槐 출생관련 내용이 동명 출생보다 2세기이상 뒤의 일이지만 북아시아 역사 해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후한서』의 「선비전」의 桓帝時 조에 의하면,
 

桓帝(A.D. 146-167)때에, 선비 檀石槐라는 자가 있었다. 그 아버지 投鹿侯가, 처음 흉노군을 따라서 3년 동안 있을 때, 그 처는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投鹿侯가 집으로 돌아와서 괴이하게 여겨, 그 아들을 죽이려하였다. 처가 말하길「어느 날, 낮에 걷고 있는데, 우뢰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우러러 보자, 우박이 나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을 삼켰더니, 드디어 임신이 되어, 10개월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분명히 무언가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자라는 것을 지켜봅시다.」라고 하였다. 投鹿侯는 듣지 않고, 드디어 그 아이를 버렸다. 처는 몰래 家人에게 말해서,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도록 하였다. 그 아이를 檀石槐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이 14·5세가 되자, 용맹한데다가 지략마저 갖추었다.
 

위의 내용은 鮮卑 檀石槐 출생설화이다. 달리 말하면 檀石槐가 후일 鮮卑 대통합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檀石槐의 출생설화가 『후한서』와 『삼국지』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북방민족에게 여인의 정절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사실과도 결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비 投鹿侯가 匈奴군을 따라 3년 동안 종군하였는데 그때 부인이 집에 있으면서 하늘에서 떨어진 우박을 삼켰더니 임신이 되어 아들 檀石槐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때 檀石槐 배경이 『후한서』「부여국전」에서 동명이 태어나게 된 경위와 너무 흡사하다.

또한 나이14·5세 檀石槐가 용맹하고 지략을 갖추었다는 사실도 동명이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명이나 檀石槐 모두 북아시아에서 유목군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이는 고대 북아시아 유목사회 통솔자의 출생설화와 같은 궤적이다. 그렇다고 檀石槐에 의해서 鮮卑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선비가 檀石槐에 의해 대통합을 이루었을 뿐이다.

鮮卑와 중국 관계는 “漢代 초, 역시 鮮卑도, 흉노 冒頓 單于에 패퇴당해, 멀리 遼東의 塞外로 도망했다. 그래서 烏桓과 相接하였다. 아직 중국과는 통교하지 못했다.”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匈奴 冒頓이 東胡를 격파할 때 東胡 일대가 烏桓山에 들어가서 烏桓이 되었고, 일대는 鮮卑山에 숨어들어 鮮卑가 대두되었다.

위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鮮卑 등장은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史記』의 「匈奴傳」에
 

처음처럼 東胡는 흉노선우 冒頓을 가볍게 여겨,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冒頓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여서, 크게 동호 왕을 파멸하여, 그 백성과 가축을 약탈했다.
 

이런 사실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檀石槐시대에 鮮卑가 북아시아에 등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檀石槐가 後漢 永壽 2년(A,D. 156) 가을 3·4 千 騎를 거느리고 雲中을 침공하면서부터 중국 사서에서 등장하였다. 鮮卑가 최초 모습을 드러낸 것은 後漢 建武 21년(A.D.45)이다. 이를 들어보면, “그 해 가을 선비가 요동을 공격하자, 요동태수 祭肜이 이를 대파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후한 초에 중국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鮮卑였는데, 후일 檀石槐가 중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永壽 2년(A,D.156)부터이다.

아무튼 鮮卑가 중국 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後漢 초보다 훨씬 앞선다. 『後漢書』의 「鮮卑傳」에 의하면,
 
(後漢) 光武帝 초에, 흉노가 강성하게 되자, 鮮卑를 거느리고, 烏桓과 함께 漢의 북변을 노략해서, 한의 관리와 백성을 殺略했다. 北邊에 평온한 해가 없었다.
 
위의 『사기』의 「흉노전」언급처럼 흉노선우 冒頓에 의해 東胡가 멸망된 후 一族이 鮮卑가 된 사실을 멀리 塞外로 도망하였다고 范曄은 『후한서』에서 기록하였다. 이런 사실에 대해 司馬光은 『資治通鑑』에서 흉노역사를 언급하면서 “드디어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애초에 冒頓을 가벼이 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冒頓이 드디어 동호를 멸망시켰다.”라고 정리하였다. 이때 동호 일부가 흩어져 鮮卑山에 保守한 것이 계기가 되어 鮮卑가 출현하였다.

鮮卑가 등장된 후 200여년이 지나서 檀石槐가 출현하였다. 필자가 檀石槐 등장 시기를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말해 탄생설화를 갖고 있는 檀石槐가 鮮卑 시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히 말해 선비는 檀石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鮮卑가 대통합을 이루어 북아시아를 석권하였다. 이는 주몽도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 고구려의 대통합을 이룬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암시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鮮卑 檀石槐의 출생사실이 주목받게 된 것처럼 鮮卑의 대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가 신격화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주몽도 탄생에서 고구려의 대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이 주목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앞서 언급된 鮮卑史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북아시아에서 대통합을 이룬 유목기마민족의 군장 출생 설화의 궤적과 거의 같다. 이는 주몽에 의한 고구려보다 앞서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방증자료가 될 수 있다.

『후한서』의 「부여전」내용처럼 고구려 동명이 태어났던 것이 索離國 왕이 출타 중에서 태어난 것과 같이 선비 단석괴도 출생과 흡사하다. 그런데 선비 檀石槐가 흉노 이후 북아시아를 석권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동명도 북아시아를 석권한 강력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의 출생설화에 담긴 의미라고 해석하고 싶다.

위의 출생설화를 통해서 그 당시 유목사회 습속이 유추될 수 있는 것은 여인 정절이 문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남편 없는 사이에 부인이 임신하였어도 그 부인을 처벌할 수 없고 다만 아이를 버림으로 그 죄가 종결되었다. 고구려 동명의 어머니가 부여 왕 외의 아이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만 버렸던 것은 유목민족의 嫂婚制(Levirat) 풍습이 부여국(索離國)에 유행한 근거라고 유추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부인의 권위가 대단하였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정사에서 북아시아에서 강력한 리더가 출현하였을 때는 신화 형식을 빌려 그 인물의 출생을 기록하는 것이 대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보다 앞서 前漢부터 역사 무대에 등장했던 烏桓에게 그런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오환 세력이 약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후한서』의 「오환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昭帝(B.C.86-74)때, 오환이 점차 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흉노 선우 무덤을 도굴해서, 冒頓으로부터 받은 원한을 갚았다.
 

기원전 1세기 흉노 선우 冒頓에 대해서 복수할 정도로 선비보다 오환이 먼저 강성하였다. 그런 오환에게 선비 檀石槐나 고구려 東明과 같은 출생설화가 없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환은 북아시아에서 잠시 흉노와 대적하였으나 이내 중국화 되면서 북아시아를 제패한 사실이 없었다는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 檀石槐가 북아시아를 석권한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출생설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고구려 동명이 그의 생전에 북아시아를 제패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가 동명의 신격화된 출생설화와 ‘天帝子’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된다.
 
 
                          
 
 
 
 
4. 고구려 동명
 
(1)동명의 탄생
 
어린 동명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동명이 유목생활에 출중했기 때문에 맏아들 대소가 금와왕에게 동명을 죽여야한다고 간언하였다. 그 후 동명의 행적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부여)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위의 내용은 동명이 부여 금와왕 밑에 있을 때 유목의 CEO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사실과 관련된 대목이다. 그런데도 부여의 여러 왕자들과 신하들이 동명을 죽이려 하였으며 이런 사실을 동명의 어머니가 먼저 알려서 동명의 망명길이 시작되었다.

그 후 동명 행적에 대해『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그래서 주몽은 오이·마리 협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서 함께 갔다. 엄시수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 병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은 건널 수 없었다.
 
부여 왕의 아들과 신하들이 동명을 죽이려 할 때, 동명의 부여 탈출과정에 나타났던 기적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후한서』의 「부여국전」에서는 동명이 물가에 도착해 활로 물을 쳤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서 건넜다고 약간 다르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동명이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할 때 자신을 ‘天帝子’라고 말한 사실과 자신을 河伯의 외손이라고 천명한 사실이 특히 주목된다. 이는 ‘天의 개념’이 동명의 삶의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탄생설화는 후일 만들어진 것이나 동명이 자신을 ‘天帝子’라는 말한 것과 河伯의 외손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고구려가 강력한 天子之國이었다.

동명은 자신을 河伯 외손이라는 표현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 정사에 유화의 아들이 동명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으나 河伯 외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魏書』권100 「高句麗傳」,『周書』권49「高麗傳」,『隋書』권81「高麗傳」,『通典』권186「高句麗傳」에 동명을 하백 외손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 정사에서 고구려·신라·백제 가운데 탄생설화에 관해서 실린 유일한 인물이 고구려 동명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명이 중국 역사에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아울러 동명을 하백 외손이라고 기록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중국사서에서 河伯을 水神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河伯 외손이 동명이라는 사실은 북아시아는 물론이고 바다와 黃河 외에 수많은 강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이런 黃河 水神 河伯에 대한 내용은, 앞서 언급한 『晏子春秋』외에, 『史記』권126「滑稽列傳」,『漢書』권76「王尊傳」,『北史』권31「高允傳」,『隋書』권23「五行志下」,『水經注疏』권10「濁漳水」외에도 많이 언급되었다.

河伯은 중국 고대의 水神이다. 河伯 외손 동명이 자신을 ‘天帝子’라 언급한 것은 동명이 단순 권력자가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동명이 河伯 외손이라는 사실을 중국 정사에서 많이 언급한 의미는 동명이 바다나 강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중국 고대 사가들의 암묵적 시인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동명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 강성함을 그의 출생 설화를 통한 간접 설명이었다.

그런데 춘추시대 말 제나라 말기 안영( -B.C.500)의 저서『晏子春秋』권1「內篇」에 하백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景)공이 말하였다.“그렇지 않다. 나는 河伯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니 옳은 것인가?” 晏子가 말하였다. “옳지 않습니다. 하백은 물을 나라로 삼고, 물고기를 백성으로 삼습니다. 하늘에서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는다면, 샘은 장차 말라 갈 것이고, 개천도 모두 마를 것이라, 나라마저 망할 것이라, 장차 백성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사료에서 춘추시대 晏子 주장은 河伯이 물을 관장하면서 물고기를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하백은 水神으로 魚鼈을 관장하는 그런 상징적 존재였다. 그렇다면 주몽이 부여 추격 군이 달려 올 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을 알 수 있다. 주몽이 광활한 대륙만 다스린 것이 아니라 바다와 많은 강들까지 다스렸다는 의미였다. 이는 고구려 영역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몽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위의 사료에서 주몽이 부여 기마병을 따돌린 사실도 주목된다. 그 이유는 부여의 軍制가 유목의 騎馬制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군제도 騎馬制였다.

주몽이 자신을 설명할 때 ‘天의 개념’을 특별히 부각시킨 것은 고구려 강성함을 두루 선포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고구려 왕권이 ‘天’에서 주어졌음을 내외에 알림으로서 왕권신수설이 고구려에서 일반적 행위였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였다. 이런 유형의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구려와 인접한 북아시아 선비모용부의 조상탄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즉 『晉書』권108「慕容廆傳」補註(藝文館刊)와 『太平御覽』권 356「兵部」87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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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14-12-13 10:48
   
블로그 글이 장문이긴 하지만, 나름 잘 썼네요.

머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국가는 아니고, 기존의 세력에 훌륭한 인물이 더해져 발전되서 역사서에 기록된것이니, 고구려 같은 경우 당연히 주몽 이전부터 있었던 국가일 수 있죠.

가장 안타까운 점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역사서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사서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만 자신들 위주로 서술하니 당연히 미흡한 측면이 많죠.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졌다는 건 당연히 김부식의 가계와 연관되서 그런것이고, 고구려가 가장 먼저 제대로된 국가 형태를 이뤘다고 봐야죠. 그 다음이 백제, 신라고요.
숭록대부 14-12-13 13:52
   
현재 고구려 존속기간에 대해서 1천년설, 9백년설, 8백년설, 7백년설이 있죠.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근거한 7백년설이 정설로 알려져 있죠.
고구려 존속기간이 늘어나면 백제 또한 존속기간과 건국연대가 수정되죠.
깡통의전설 14-12-13 13:59
   
금와왕은 좀 의심스럽네요. 고대에서도 혈족 중심 사회였을 텐데 주어와서 왕을 삼았다라... 그럼 주변 일가 친척이나 권력자들이 가만히 뒀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조선 역사에도 이렇게 힘없는 왕이 몇 있죠.)
금와왕이 쿠데타 같을걸로 권세를 잡고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억지로 엮어 신비 스토리로 왕과 연결된 스토리를 만들어 배포한게 아닌지... 의심스럽네요.
변방경상도 14-12-13 14:03
   
되게 웃긴게 고구려를 왜 유목국가라고 생각하는거지? 우리가 농경사회 정주국가로 자리잡은게 부족사회였던 신라 혹은 가야에서 시작했다고생각하는건가?
변방경상도 14-12-13 14:10
   
우리 상고사는 객관적으로 부여를 기준점으로 삼아야됨니다. 이전까지 한반도는 문명이없는 부족사회였어요 예를 들어 삼한 이든지 새로운 철기문명에 대거남하 유입으로 한반도 질서자체가 부여계로 바뀐겁니다 백제 고구려 발해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정주국가이고  문명국입니다 한반도 최초에 중앙집권체제가 형성된것도 고구려에요 역사를 객관적으로보세요 본인에 생각과 희망사항으로 역사를 바꿀수는 없는겁니다
     
구름위하늘 14-12-30 12:15
   
"중앙집권"의 의미를 무엇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앙집권이라는 말은 왕(또는 해당하는 지도자)가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서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에서 왕이 지방에 관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혹시 있는지요?

제가 이해하는 삼국시대 상황은 왕은 있지만, 지방부족장의 힘이 쎄서
왕이 관리를 파견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였다고 보입니다만....
변방경상도 14-12-13 14:21
   
위만조선 과 한사군 유이민이 정주한 전라도 남부 마한 목지국 으로부터 동계에 땅을(경상도) 할양받아 진나라 유이민이 노역을 피해 한반도 끝자락에 정착하여 진한이라는 지역적 그룹을 형성하기이전까지 왜인계가 한반도남부 원주민 이였던것은 부정할수없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엮이고 섞이면서 부족사회를 이루다 그중에 가장 개체수가 많은 사로국이 신라가됩니다 신라가 중앙집권화 할수있던것은 부여세력 유입이후부터 입니다. 그시기부터 왕이라는 칭호로 바뀐것입니다
변방경상도 14-12-13 14:29
   
예족과 부여는 같은 그룹으로 언어가통하고 의복과 전통이 대계 같다고 후한서에 기록을알수있습니다 이미 삼한 유이민세력이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기이전에 만주 한반도 북부 중부까지 정착하여 살고있던 그들이 지금 한반도 인구에 과반수를 차지하는 혈연적 조상이라 할수있겠습니다
변방경상도 14-12-13 14:34
   
신라는 6세기ㅡ이전까지 고구려 속국으로 문화와 정치 외에 군사기술등등 영향을 받고 바뀐것입니다 고구려가 정주국이 아니고 유목민족이였다면 1000년을 유지할수있었을까요? 원나라 금나라 청나라 요나라는 어째서 일찍망했을까요?
변방경상도 14-12-13 14:59
   
날씨에 구애를 받지않는다면 만주가 한반도보다 오히려 농경지로써 적합합니다 만주라고하면 꼭 유목생활을 했을것이라는 전제는 아주 꽉막힌 사고로써 한반도 상고사를 이해할수없는 시각으로 생각됩니다.
변방경상도 14-12-13 15:05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어느부분에서 유목민족같다는 해괴한 망상과 추측을 내놓을수 있던것인지 답이필요할듯합니다 전혀 납득이 되지않기때문에.. 어떻게 과도 유목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문명국가인데 말입니다..
     
대은하제국 14-12-13 15:14
   
우리는 유목민이 아니죠 우리가 유목민이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고

세계로 흩어져 지금쯤 다른 민족들과 혼혈되어서 숫자도 얼마 없었을겁니다

우리는 반농반목이죠 즉 문화민족입니다
     
카인 14-12-14 00:18
   
한반도에서 농업이 시작된 지점을 5000년~7000년전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건 신석기(7000년전)시대때 팥씨가 발견되었고..5000년전에 이미 볍씨가 발견되었다고 나오는데 무슨 유목민이 어쩌고..
변방경상도 14-12-13 16:09
   
왜자꾸 우리와 관련없는 흉노족을 부여족과 연관시키는 행동은 무슨 의도일까요? 경상도인들에 소행일까요? 우리가ㅡ흉노족에 자손이면 우리도 지금에 몽골인들처럼 살고있었지 싶습니다  그럼 백제 고구려 는 왜 굳이 흉노말고 부여를 자칭했을까요?  충청도에 부여 는 흉노로 바뀌어야됩니까?
변방경상도 14-12-13 16:19
   
여기 동아시아 관련글을 자주 보곤하지만 너무지나친 감이 없지않아있음 무리한 역사해석이 그것이다 이대로라면 세계에 웃음거리입니다
변방경상도 14-12-13 16:56
   
고구려가 유목민족이라는것을 누구도 부정하지않는다 라던지 그런표현을 너무 일방적으로 하는 ㅋㅋ
밥밥c 14-12-13 22:29
   
위 주몽이야기는 탄자강신화와 메그겐(알랑고아)신화 두개로 만들어진 것이죠.

 특히 알랑고아신화를 선비족도 같이 써먹었다는 이야기구여.

 애시당초 전혀다른집단이면 서로같은신화 이용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삼국유사의 저자 인연스님도 단군이야기 적을때 북위역사서(위서) 보고 적었을겁니다.

 후한서에 적혀있다는 단석괴(檀石槐)이름조차도 연관없는것은 아니죠.
변방경상도 14-12-13 23:19
   
부여 라는 민족자체가 만주북부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서 남하한 하나에 그룹으로 고구려시기에는 이미 농경사회를 이루는 정주국가입니다 당연히 모든 민족국가에 처음은 수렵과 유목생활이겠지요 바이칼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일파중 하나는 부여 동쪽으로는 말갈읍루 서쪽으로 몽골에 조상 선비 흉노 인듯싶습니다 인종적으로 그들은 전부 같은 스키타이계열은 맞지만 그당시는 부족사회를 이루는 여러집합체로 서로 언어나 복장 전통은 차이가 있었을것입니다 기후에 변화로 그들은 이주할수밖에없었고 서로 다르게 정착한 지역에서 오래 정주하면서 지역적 특성에 맞게서로 완전다른 문화로 바뀌고 발전 계승된것입니다  남쪽으로 대거 이주한 세력이 처음 북부여를 세우고 이후에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남부여(백제) 이렇게 형성되어 만주에 부여세력권은 고구려가 통합하고 그이후 평양천도 로인해 부여 문화권은 한반도에 아예 정주하고 자리잡게 된것입니다 부여는 강력한 왕조로써 여러이민족에 지배를 반복했던 고조선이라고 불리우던 현 랴우동반도 보다 확실한 기록이 다수 존재하고있기때문에 더욱더 연구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변방경상도 14-12-13 23:40
   
단군조선이라든지 환국이라든지 후세에 짜맞추어 어설프게 만들어진 가짜라고생각합니다 한반도 단일민족체계를 형성할필요가 있던 고려 조선시기에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필요했기때문입니다
실체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중국에 역사이고  국가적 개념을 놓고얘기할수없는 시대입니다 청동기시대에 부족사회로써 민족관 국가관이 형성될수는 없는 시대이고 한반도에 최초 왕권국가가 성립할수있던 바탕은
 위만조선도 아니고 마한.변한.진한도 아니고 한사군도 아닌 부여에(고구려)이기때문이죠
변방경상도 14-12-13 23:49
   
그리고 일명 홍산문명 이라고 불리우는
랴오둥 반도에 고조선이 먼저 성립했는지
시베리아 바이칼에서 남하한
만주북부 부여국이 먼저 성립했는지 그것도 자세한 연대는
알수없죠
변방경상도 14-12-13 23:50
   
어떻게봐도 서로 다른개체로 고조선>부여는 성립될수없다고 생각하는
밥밥c 14-12-14 01:04
   
원래 한반도의 이야기를 하는것은 아니지요.

 한반도보다 이북에 위치한 지역의 이야기입니다.  위에 메그겐은 오타고 메르겐이죠 ;;;;

 하백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 하백은 황하의 신입니다.

 원래 남조는 하백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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