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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7-19 22:36
[기타] 간도, 대마도 우리땅인가?
 글쓴이 : 바토
조회 : 5,874  

우리땅인가? 
아니면 중국 일본땅인가? 

만일 우리땅이라고 한다면 ..
연해주, 몽골일원도 우리땅 인가?


그런데 이곳에 대해 우리땅이란 얘기는 적게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간도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는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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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ain지성 14-07-19 23:24
   
실소유하고있는 나라가 중국과 일본이므로 우리땅은 아니죠.

대마도는 뭐 우리땅이라고 하기에는 근거도 거의 없고 무리가 크다고 보구요. 김종서가 대마도 가서 실제로 점령을 하고 온것도아니고 발만 딛고 온 수준이니.. 간도는 역사적으로는 얼마나 우리땅인지 증명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국제법상 협약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려면 100년 이내에 이의신청을 하여야하는데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협약이 일본에 의해 맺어진게 1909년으로써 2009년에 이미 100년째가 지났습니다. 국제법상으로도 찾을 확률도 없고 그냥 중국땅이라 생각하시면 맘편함
     
투기꾼 14-07-19 23:32
   
제발 이런 무식한 소리는 안하셨으면 합니다만.

1. 짱깨가 조어도를 요구하는 그 근거에는 실효지배도 아니고 '명나라때부터 자기네들이 가졌다'라는 사소한 증거 하나임. 적어도 주변국은 억지로라도 이런걸 강조하는데 한국은 미리부터 아닌건 아니다라고 꼬리내리는 중.

2. 국제법에 협약무효를 시키는데 100년내에 이의신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음. 국제법이라도 좀 보시지 그러셨어요? 100년설의 기원은 휴고 그로티우스(국제법의 아버지)가 '전쟁과 평화의 원칙'에서나 떠든 말임. 그리고 일본은 1960년대에 일제시절의 협약을 이미 무효화한 바가 있음.

3. 영토분쟁에 있어서의 핵심은 해당 영토에 대해서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 주장을 하였는가의 증명력문제로 귀결됨. 행정권의 주장, 사법권의 주장 등과 같은 등등.
          
Captain지성 14-07-20 00:02
   
음. 제가 잘 모르고말했네요

100년 시효얘기는 예전에 2009년전에 빨리 되찾아야한다고 인터넷 게시판마다 돌리는 글이있었어요. 전 그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아니였나보네요..

사실 전 깊게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영토문제에서 제가 생각하는 기준은 있는데 가장 중요한게 현재 실 소유하고있는 국가가 어디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보거든요. 왜냐면 영토란건 역사적으로 늘 뺏고 뺏겨오던 곳이고 이미 100년가까히 실소유하고있는땅이라면 자기네땅 아닐까 싶어요. 만약 그때부터 계속 영유권을 주장해오던 땅이라면 모를까
               
투기꾼 14-07-20 00:09
   
"영토란건 역사적으로 늘 뺏고 뺏겨오던 곳이고 이미 100년가까히 실소유하고있는땅이라면 자기네땅 아닐까 싶어요."

이 말을 하신다면 일관성을 가지시는게 어떨까요.

영토의 자연적 귀속여부를 부정하는 말을 하시면서 ->>> 실소유하면 자기네땅이라는 결론을 얻나요?

영토는 원하는 자가 빼앗고 가질수 있는 거라고 주장하실거면 '원래부터의 자기네땅'이라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되요. 영토는 가변적이니까요.

말 그대로 영토도 이런 원하는자에 의해서 가져가는 것이라면 '간도도 결국에는 누가 원하는가의 문제이지 중국의 땅이 자연스럽고 그게 자기네땅'이라고 우기는건 짱깨식 편향성입니다.

중국이 땅을 가져가는건 '역사적으로 늘 뺏고 뺏겨오던거', 반대로 중국이 빼앗길 위기가 오면 '실소유하면 자기네땅'

이게 무슨 억지인가요?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억지 짱깨식 논변과 묘한 옹호를 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습니다. 간도관련 블로그부터해서 논쟁한 글까지 한둘이 아님.
                    
Captain지성 14-07-20 00:27
   
일단 저는 님보다 이 분야에 지식이 없는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아는것이 부족해 잘못 말을 할 수도 있으니 양해해주시고, 틀린부분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연적 귀속여부'라는게 저는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님이 오해하시는게 있는듯해요. 물론 영토는 역사적으로 늘 가변적이였습니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통해서 무력으로 조어도를 강제로 뺏어간다면, 중국 영토가 되겠죠. 만약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무력으로 독도를 뺏어간다면 그것역시 일본땅이 될겁니다. 하지만 그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일본이 자기네땅이라고 주장할수 있는 근거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가장중요한 실효지배를 우리가 하고있구요. 그래서 현재 우리땅인거에요.

저는 원래부터 누구 땅이였다 라고 말하지않았습니다. 100년가까히 실소유하고있는 나라의 땅이라면, 개인적으로 그 나라의 땅으로 봐야맞지않나 싶다는거죠.

조어도의 경우는 제가 방금 좀 찾아보니까 51년경에 미국으로 이양되어 71년도에 일본으로 반환되었다고하네요. 그리고 71년에 바로 중국에서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하구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토분쟁이 계속되고있는 땅인것같습니다. 하지만 간도의 경우는 글쎄요. 우리가 공식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한적도없고 역사적으로봤을때도 애매한걸로 알거든요.
                         
투기꾼 14-07-20 00:33
   
2004년에 반기문씨가 간도협약의 무효성을 주장했었고, 2011년에는 국회차원에서 간도협약에 대해서 한마디 한 걸로 압니다만.

이건 사실관계이니 부정이니 뭐니 할 끈덕지도 없고,

"저는 원래부터 누구 땅이였다 라고 말하지않았습니다. 100년가까히 실소유하고있는 나라의 땅이라면, 개인적으로 그 나라의 땅으로 봐야맞지않나 싶다는거죠. "

중국이 만주를 차지하게 된 시기는 1950년 6.25 동란 이후에 스탈린으로부터 받은 때가 시초입니다만. 이 만주도 북한에게 줄려다가 김일성이 거부했다라는 카더라도 있고요. 몇가지 거슬리는 전제들부터 치워버립시다.

1. 청 ->> 중공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중공이 청나라의 계승자인가의 여부는 중화주의 해석이 늘 개입되어 있지요. 그러니 1909년의 간도협약을 놓고서 중국이 자기네 들이 이런 주체를 계승한다라는 말도 억지임.

2. 만주, 간도의 역사는 청나라 시절에도 무주공산이었고, 1880년대에 봉금이 풀리면서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지역임. 이것도 중화민국 북경정부를 둘러싼 군벌들의 싸움에서 만주가 군벌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기도 하나 대련에는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남만철의 이해관계의 여부에서 만주 자체가 중화민국의 귀속된 것도 아님. 그냥 무국적상태.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고 1945년이 소련군이 밀고오면서 관동군해체. 이러다가 1950년도에 중공으로 편입됨. 이게 만주의 근현대사죠. 어디에 100년 실효지배? 중공은 1949년에 건국된 나라입니다. 100년설도 헛소리이지만 이 100년설을 주장할거면 중공이 만주를 실효지배한 날로부터 기산해야죠. 그럼 2050년.
                         
투기꾼 14-07-20 00:38
   
님의 논리를 그대로 주장하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한국이 간도를 다시 실효지배하게 되면 간도도 자연적으로 우리네땅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이죠.

영토가 늘 가변적이었습니다라고 우기실거면 이 주장 그대로를 따르시든가, 아니면 근거를 운운하면서 명분론으로 파고드실거면 명분에 대해서 확고하게 근거를 제시하시든가 둘중에 하나만 합니다. 지금 님이 말하는건 짱깨옹호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자기가 만주를 얻은건 '영토는 가변적이라는 원칙론' , 만주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니 '만주는 중국이 실효지배를 하니 중국의 땅'

이런 이중성을 떠든다는 말.

영토가 가변적이라는 말을 할거면 '누구네땅'이라는 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진다니까요?
이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영토가 가변적이라면 우리나라도 간도를 실효지배하면 되는 일이고 (이러면 근거고 뭐고 다 중요하지 않죠), 우리네땅이라고 근거 세워가면서 주장하고 싶으면 근거를 찾으면 됩니다.

님은 자꾸 맞지도 않는 2개를 둘다 주장하니까 문제라는 것이죠.
                         
Captain지성 14-07-20 00:46
   
찾아보니 2004년에 반기문이 주장했다는건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에 질문에 대답한 차원의 언급이고, 2011년 김원웅 의원이 국회에서 그런 언급을 하였다고는 나오는데 이것들이 공식적인 영유권 주장은 아니죠.

그렇지만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답변감사합니다.
꼬마러브 14-07-19 23:43
   
힘이 약한게 죄죠ㅠ
투기꾼 14-07-19 23:51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영토를 한반도로 좁혀서 생각하게 된건 이승만 이후부터입니다. 대한민국의 大韓이 그냥 국가앞에서 붙이는 존칭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의미는 梵게르만, 범슬라브, 범투르크와 같은 넓은 영역을 의미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한국 거리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이름은 아니라고 보는데 대한민국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했고, 그 임시정부가 금,청사를 민족사에 포함시킨 이유에 관해서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간도에 관해서 위의 사람과 같은 이야기기 계속 나올 것임. 애초에 대한이라는 영역을 한반도로만 생각을 하거든요. 한반도와 부속도서라는 헌법 3조의 이유가 6.25동란이후의 북한에 대한 확고한 영토의식을 가지기 위함이지만 이것때문에 간도에 대한 영토의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림.
덕계모텔 14-07-20 00:08
   
둘다 우리땅이 아닙니다 우리땅이 였던 적이 한번도 없으니깐요
대마도는 조선에 왜구가 하도 출몰하니 대마도 영주한테 조선 명예시민증 준거에 불가하고
간도는 조선이 하도 어려워서 먹고살기 힘드니 불법으로 월경해서 농사짓고 무단으로 산거죠
간도가 조선땅이였으면 청나라가 가만 있어겠습니까
전쟁해서 뺏겨겠지 무능한 조선을 너무 높게 보지마세요
대동여지도만 봐도 간도는 조선땅이라고 볼수 없습니다
     
투기꾼 14-07-20 00:12
   
간도의 행정권의 귀속여부가 문제가 되자 1885년부터 감계라는걸 열어서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을 놓고 싸웁니다.

"간도가 조선땅이였으면 청나라가 가만 있어겠습니까 '

청나라가 가만히 있든 말든 조선은 이미 간도에 대해서 토문의 이남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어요. 

대한제국부터 간도관리를 할려고 행정관을 파겼했었고, 러시아와의 공동통치협약, 간도협약의 내용. 그외 조선기의 서양지도(당빌)에서 간도에 대한 표기 등등.

독도는 일본땅하면 거품물고 자빠질 사람들이 간도에 대해서는 느긋하게 생각.

왜곡된 반일정서, 그리고 중국속국 노릇을 스스로 자처하는 대한민국. 쯧쯧.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해서는 어디서 선동적인 이미지나 읽으면서 되도 않는 민족분노를 일으키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그 알수 없는 모화주의가 발동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음)

자. 독도도 한국땅이라는 근거가 없으니 독도는 일본땅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왜 한국땅이라는 근거가 없어요? 이런 소리 할 사람들 분명히 있음)
          
덕계모텔 14-07-20 00:49
   
얹잖게 들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치만 조선은 암만봐도 자랑스러운점이 하나도 없는거 같네요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에 사대한건 엄연한 사실인데 부정한다고 달라지는거 있나요
정확히 북방 이민족한테 사대하다가 일본식민지 당하고 남북분단 독도문제도 이런일 겪지 않았으면 없었을일들을 조선이 무능해서 일어난거 아닌가요
간도나 대마도 우리땅이라고 해봐야 중국 일본하고 전쟁하자는건지 현재 북한도 중국에 흡수하라고 헛소리 짓꺼리는 놈들도 먾은데 간도 대마도 우리땅이라고 말해봐야 북한도 컨트롤 못하는데 무슨 소용있나 일본놈들은 홋카이도 하고 비슷한 나라가 반일 힌다고 비웃고 있던데 조선이 간도 연해주 컨트롤 했으면 지금은 우리는 중국동북 지방 한부분이였겠죠 그만큼 조선은 무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인데 어쩌라구요
               
투기꾼 14-07-20 00:54
   
그건 님의 생각이죠. 조선에 대해서 근대 중상주의와 산업화로만 모든걸 역사의 단선적 발전으로 이해를 하니 조선이 미개하게 보이는 '식민사관'의 시각에 길들여지는 겁니다. 그만큼 한국사이해를 단편적으로 앝게 이해한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1. 조선은 동시대의 문명국가. 여말선초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서 혁명적 의도로 국가를 개혁, 전복시킨 사례가 세계사에서 찾기 힘듬.

2. 조선후기부터 중국을 극복하면서 (여기서의 중국은 모화관을 상징하는 문명, 문화사적인 중심과 주변관념에 더 가까움) 조선유일문명국으로 자뻑하는 시기임.

3. 조선사내내 지배했던 유교적 합리주의와 정신문명의 극단은 왜 잘 안보려고 하는건지요? 그렇다면 조선이 초가집이나 만들면서 비루하게 살았다라는 인식은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날조에 가까울 가능성이 농후. 조선후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지만 조선전기는 고려의 연장선상입니다. 사림과 훈구의 대립구도에서 성리학자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한 무언가를 놓치면 곤란하죠. 게다가 조선시대의 꽉 막힌 모습은 예송논쟁에 치우진 송시열같은 노론거두들에게서 맞추어진 이미지일뿐. 성리학자들의 영정조시기의 모양새는 북학론과 서학에 나름 관대한 입장을 가졌습니다.
                    
Captain지성 14-07-20 01:02
   
태클은 아니고 유교적 합리주의가 뭘 말하는거죠?
                         
투기꾼 14-07-20 01:07
   
정도전이라는 드라마를 잘 보시면 거기서 울리는 민본주의와 성리학적 사고를 잘 지켜봐야 할겁니다만.

1. 조선이 추구한 제왕중심의 질서가 아닌 신하들간이 견제기능와 합의를 추구하는 재상정치.

2. 합리주의는 이런 유교적 이상향(대동사회)를 추구하는 언변과 사고관의 총체성. 즉, 인간으로서의 禮와 옮음에 대한 테제를 놓고서 정치와 사회, 경제, 군사적 담론에 있어서 논리를 구축하는 형태.
                         
투기꾼 14-07-20 01:12
   
오늘날에서의 합리성은 서구식 실용주의와 기술적 사고가 바탕이고, 무엇이 인간에게 유용한가의 여부를 진리판단의 기초로 놓는다는 점과 서구로고스분석의 토대인 논리학을 그대로 수용한 절차에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유교적 합리성은 유교가 추구하는 목적의식과 방법론이겠죠. 무엇인 인간에게 유용한가, 유용함이 인간됨을 뜻하는가, 그리고 이런 인간실현을 위한 방법은? 성리학자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기 시작했고,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다른가 논쟁했습니다. 이미 공맹의 학설에서 분명해지듯 인간이 다른 이유는 禮의 문제이고, 예를 갖추는게 자연적인가, 후천적인가의 논리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건 인의예지의 문제로 다뤘다는 것이죠. 그 방법이 서구식 명제분석처럼 가지 않으니 이걸 비합리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Captain지성 14-07-20 01:18
   
이상향을 추구하는 언변? 그와 사고관의 총체성? 제가 부족해서인지 무슨말인지 잘 그려지지는 않는군요..^^; 전체적으로 내용을 잘 이해는 못했습니다만 답변 감사합니다.
               
투기꾼 14-07-20 01:01
   
"간도나 대마도 우리땅이라고 해봐야 중국 일본하고 전쟁하자는건지 현재 북한도 중국에 흡수하라고 헛소리 짓꺼리는 놈들도 먾은데 간도 대마도 우리땅이라고 말해봐야 북한도 컨트롤 못하는데 무슨 소용있나"

그럼 독도는 일본땅. 일본하고 해상전해서 이길 수 있나요. 일본땅 합시다. 깔끔하게 내어주죠. 왜 조선만 무능하다고 생각?

"조선이 간도 연해주 컨트롤 했으면 지금은 우리는 중국동북 지방 한부분이였겠죠"

고려는 만주일부에 대해서 컨트롤 했는데 우리는 동북지방의 일부분? 이 밑도 끝도 없는 패배주의는 뭐지? 그리고 경고하지만 저는 님같은 패배주의 부류와 '우리'라고 할 생각없습니다만. 님 혼자 중국-핵심을 깔고 주변속국이니 뭐니 자위하면서 생각하시길.



그리고 가장 역겨운건 역사공부좀 제대로 하시죠. 무슨 명-청-중화민국-중공을 잇는 역사적 억지계보를 들고 와서 중국에 사대니 뭐니 하니 원.

1. 고려, 조선기의 국명 이름은 대원, 대명, 대청입니다. 이건 중국이 아니죠. 중국을 지배한 제국이름이고요.

2. 사대는 조선중기의 모화주의자의 관념이고 고려나 조선이나 조공이라는 이름하에 질서가 정의된 국제관계의 일부를 따랐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조공=사대라는 되도 않는 억지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일본 역시도 대륙국가에 조공을 했습니다만. 그럼 대륙에 사대?
     
투기꾼 14-07-20 00:16
   
"전쟁해서 뺏겨겠지 무능한 조선을 너무 높게 보지마세요 "

그렇다면 조선민족은 게으르고, 나태해서 DNA자체가 ㅄ이다라고 말한 문모씨도 같이 옹호해보시죠. 어디 인터넷에서는 이 사람 욕하고 자빠진 대가리들이 널렸지만 정작 자기가 하는 식민사관은 눈에도 안 들어오나 봄.
     
나와나 14-07-20 01:41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세종실록 4권

하..ㅋㅋㅋ 조선왕조실록에서 엄연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걸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완전히 무시하네요 ㅋㅋㅋ
          
나와나 14-07-20 01:59
   
“건문(建文) 3년 봄에 내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비주수(肥州守) 원상조(源詳助)라는 사람이 그 나라의 명사라는 것을 듣고, 가서 보고 싶은 뜻이 있었는데, 원이 먼저 와서 보기를 요청하고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하여 그 나라의 지도를 보여주기를 청했더니, 원이 이 지도를 내어 주었는데, 상세하게 갖추어져서 완연한 한 지경의 방여도(方輿圖)였으나 오직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 두 섬이 빠졌으므로 

-세종실록 80권

정작 일본에서는 대마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는 게 기록되있네요
     
나와나 14-07-20 02:11
   
"간도가 조선 땅이었으면 청나라가 가만 있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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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 소리죠?
간도가 조선 땅이었으면 청나라가 가만히 있어냐고요?
뭔 헛소린지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조선은 약하니 청나라가 조선 땅을 빼앗을 거라는 건가요? ㅋㅋㅋ
그렇게 간도 하나 빼앗으려고 주변 조공국 중 가장 발전된 조선을 적국으로 만들어요?
그럴 꺼면 병자호란 때 조선 전체를 먹고 말지 ㅋㅋ
오히려 거꾸로 말하자면 간도가 청나라 땅이었으면 조선이 미쳤다고 형님 나라한테 나대가면서 싸웁니까? ㅋㅋㅋ
상식적으로 고등학생이 중학생 돈 뜯는 거랑 중학생이 고등학생 돈 뜯는 거랑 뭐가 더 일리 있죠?
     
나와나 14-07-20 02:17
   
전쟁해서 뺏겨겠지 무능한 조선을 너무 높게 보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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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조선 전기 군사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최상위권이고

그나마 망해가던 후기에도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을 궤멸시키고 청나라 명장이자 누르하치 사위인 양고리조차 전사시켰고

나선 정벌 때 청나라군이 러시아군에 개털리고 있을 때,

수백명의 조선 조총병이 지원군으로 오자 상황 종료...
투기꾼 14-07-20 00:22
   
간도는 당연히 우리땅이라는 생각자체를 해본적도 없고, 그냥 그 대상이 중국이니 모화주의, 사대주의 근성이 발동해서 '우리땅 아니죠'라는 명분론, 현실론 둘다 들고와서 납득해버리는 패배주의가 만연. 원래부터 지적한건 이겁니다. 어째서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생각자체를 못하는가. 영토관, 국가관에 심각한 매국의식이 있지 않고선 납득하기 힘든 결론임. 이런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독도는 일본땅 운운하거나 고젠카류의 열등한 한국인론과 동급으로 보임. 이런 인간들이 식민사학이 어떻고 쪽바리가 어떻고 이런 들어볼 가치도 없는 개소리나 늘어놓고 애국하는 줄 암.

간도는 우리땅 아닙니다라는 사람들한테 일본측 자료 가져와서 '독도는 일본땅' 주장하겠음. 후자에는 거품물면서 왜 전자에는 이런 생각이 안 드는지가 간도문제의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임.
     
shonny 14-07-20 00:54
   
조선 청간에 맺은 협약만봐도 서간도 (x).. 북간도는 토문강때문에 헷갈려졌는데 애초..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삼을려고했던거고.. 두만강 근원이 토문강인줄알고해서 벌어진일임..
          
투기꾼 14-07-20 00:57
   
애초 압록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했던 근거는 미약합니다만, 감계회담의 토문의 자리를 놓고 송화냐 두만이냐의 논쟁을 다시 끌어와야 하는 겁니까?

님같은 사람들이 꺼내드는 자료가 숙종실록인데 문제는 태종실록에서의 공험진의 위치나 고종실록에서의 토문의 위치, 이런걸 다 제쳐놓고 대한제국은 실제로 간도에 대해서 행정권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간도냐 북간도냐의 문제는 아직 본격적으로 떠든바는 없습니다만, 저는 서간도가 우리네 땅이라고 전제를 깔고 떠들지 않았습니다만.


매국노들 참 많네요.

독도는 일본땅입니다. 애초에 원래 일본땅이었는데 한국이 해방후에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거죠. ㅉㅉ
               
shonny 14-07-20 02:16
   
기초는 좀 알고 나대길...
애초 백두산 정계비가.. 두나라 국경인 압록강 두만강의 상류의 경계가 명확하지않아서 살인사건도 나면서 경계 명확히하자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답사해서 정해진거였져..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86%A0%EB%AC%B8%EA%B0%95&keyword=%ED%86%A0%EB%AC%B8%EA%B0%95

 이선부가 또 치계하기를,
“다시 혜산 첨사(惠山僉使)로 하여금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더니, 강의 근원은 백두산 산마루 중간에서 시작되어 거의 8, 90리(里) 흐름이 끊어졌다가 감토봉(甘土峰) 및 1식(息)16154) 남짓 되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땅 구멍 속에서 솟아나와 무릇 세 갈래로써 두만강이 된다고 합니다.”
애초 백두산정계비 자체가 압록강 두만강 상류찾는거였슴. 그래서 양국 국경을 명확히하잔거였고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86%A0%EB%AC%B8%EA%B0%95&keyword=%ED%86%A0%EB%AC%B8%EA%B0%95

읽어보길
토문강이 두만강의 상류인줄알고 정했단 내용이니.. 근데 따져보니 토문강은 동북으로 흘러서 잘못됐단 내용이고

"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투기꾼 14-07-20 02:22
   
역시 쳐 들고오는건 숙종실록.

어디에 두만강 상류 찾는다는 말이 있음? 원래 원문 그대로 따라가면 土門이고 이게 두만이라고 우기기 시작한건 감계회담에서의 청나라 주장부터임.


기초는 커녕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기초' 강변하는 수준. 어디서 중뽕블로그에서 뇌가 녹어버린 그런 편향해석만 들고 와서 되도 않는 소리 타령.
                    
투기꾼 14-07-20 02:25
   
- 귀속문제 -

[배 경]

청나라 태조는 백두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여겨 백두산 일대를 그들의 성역(聖域)으로 삼았다. 청나라 태종은 병자호란 뒤에 백두산과 북쪽 간도 일대를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장책(長柵)의 변장(邊墻)을 설치해 동북 지역으로의 입주를 엄금하였다.

그 뒤 청나라 성조는 봉금지역의 남방 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경선 획정을 위한 교섭을 전개해 마침내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즉,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대표인 오랄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과 우리측 대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이선부(李善溥)가 양국 경계의 공동 조사를 위해 혜산진에서 회동하였다.

목극등의 제안으로 백두산 일대를 실지 답사해 국경을 작정하기로 하고, 목극등 일행과 조선측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일행이 백두산에 올라 현지 조사 끝에 이른바 백두산정계비(중국측 지도에는 穆碑로 표시)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목극등이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송화강 상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간도 지방은 곧 토문강과 송화강의 동쪽 지역으로,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해 놓았던 것이다.

목극등의 주장에 의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을 때 우리 역관(譯官)이 백두산 도면 한장을 요청하자, 그는 서슴없이 “대국산천(大國山川)은 다 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너희 나라이니 어찌 주기가 어렵겠느냐” 하고 건네주었으니,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한 언동이 아닐 수 없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간은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월경 농경을 하는 조선 농민은 주거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에 두고 두만강을 넘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촌 경제의 악화와 지방관의 탐학이 날로 심해지면서 아예 두만강 너머로 주거를 옮기게 되었고, 조선 관료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간도 깊숙이 들어가서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생활 근거를 잡은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도 이주민은 날로 늘어갔다.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자, 먼저 이주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게 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발 단]

1881년 10월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은 간도 지방을 개간하고자 이 지방을 답사하였다. 그는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청나라 정부는 1882년 초에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러나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 등 만주 지역의 청나라 관리들은 기왕 이주한 조선인들의 입주를 기정 사실화 하되, 조세의 징수, 호적의 정리, 그리고 범죄자를 청나라가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해 왔다.

그런데 1883년 4월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은 9월 수확 후, 태도를 급히 바꿔 간도의 우리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해 왔다.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의 현지 관료들의 태도가 이처럼 경화되자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던 간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는 한편,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종성 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을 호소해 왔다.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이보다 앞서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한편,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우리 정부도 청나라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였으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되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하게 되니, 이제 간도 문제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간도 귀속 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을유·정해감계회담]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회담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나라가 응해 온 것으로,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7월 우리 정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하였고, 1월에 청나라 측 대표인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 독리상무위(督理商務委) 진영과 회동하게 하였다.

이때 이중하는 정계비를 먼저 사감(査勘)하고 강의 발원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원(江源)을 먼저 조사해야 하며 정계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두만강 상류를 도문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들 주장대로 우리측을 승복시키기 위한 강변이었다.

회령 제2차 회합에서는 강원을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백두산으로 현지 답사를 실시, 강원 지역과 정계비를 답사하고 무산에 내려와 의견 조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정계비의 표지가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임을 확인하고서도 양국의 경계가 원래 도문강이고, 또한 본국 정부로부터 도문강의 사감만을 지시 받았다는 청나라 측의 강변과 비문의 토문은 문자대로 토문강이니 간도는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우리측 주장이 맞서 끝내 타결되지 못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청나라는 서울 주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토문감계문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내세워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고 강변하며 다시금 감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다시금 토문감계사로 기용해 현지로 출발하게 하였다.

토문감계의 제2차 토문현지회담인 정해감계회담은 1887년 4월에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측 대표인 독리길림조선회 판변방영무처(督理吉林朝鮮會辦邊防營務處) 진영, 혼춘승판처 덕옥,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 방랑(方郎) 등과 회담한 이중하는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내세워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지 답사에 나선 청나라는 홍단수(紅丹水)를 가지고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며 군대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쌍방간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 국경선 전체를 획정 지을 수가 없었다.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가 합류하는 지점 이하로 경계를 가결정하려는 노력을 폈으나,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888년 정초에 청나라 측이 다시금 감계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였다.

이중하는 현지답사 때의 청나라측 협박에 의한 협상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양국 정부의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본국 정부로 하여금 홍단수를 경계로 하자는 제의를 공사 위안스카이에게 타진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측이 현지 회담보다도 앞으로는 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게 되어 토문감계의 교섭은 자연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의 적극 대책]

청일전쟁 후 독립협회의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 운동이 활발해지고,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발족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 국가에로의 움직임에 따라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간도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현황 파악을 위해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趙存禹)에게 백두산정계비와 그 일대의 분수령의 강수(江水)에 관해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조존우는 현지 지세를 답사해 도본(圖本)과 대요 설명서인 담판오조(談判五條)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1898년에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李鍾觀)에게 재차 현지 조사를 시달하였다. 이종관은 경원 군수 박일헌(朴逸憲)과 관찰 부사 김응룡(金應龍)을 파견해 철저하게 현지를 답사, 보고하게 하였다.

두 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 정부는 토문강 상류로부터 하류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는 강줄기의 동쪽에 위치한 땅인 간도와 더 나아가 청나라가 1860년 러시아 제국에 할양한 연해주(沿海州) 땅까지 우리의 국토임을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을 토대로 1901년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고, 1902년에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해 간도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범윤의 적극 대책의 건의를 받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의 “간도주민보호관의 파견이 필요하다.”라는 건의가 있자,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범윤은 간도 주민을 보호함에는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의 군대가 출동하면 국제분쟁이 야기될 염려가 있다고 보고, 사병(私兵)을 모아 병영(兵營)을 이루어 실력으로 간도의 우리 주민들을 보호하기에 힘썼다.

이로 말미암아 청나라 측과 자주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나라가 우리 정부에 대해 이범윤을 소환할 것을 거듭 요구해 오므로, 조선 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하였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 관들이 국경 문제의 정식 해결에 앞서 잠정적인 선을 정하기로 하여, 선후장정(善後章程)이라는 잠정적 문서로 합의하였다.

내용은 두 나라의 경계는 백두산정계비에 증빙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양국 대표의 감계를 기다려야 하고, 그 이전에는 예대로 도문강을 격해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해 경작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분쟁 야기를 피하기 위한 임시 조처요, 양국 감계에 의한 국경 획정까지의 잠정 협정이었다. 이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자 주청일본공사(駐淸日本公使)가 청나라에 대해 전쟁 기간에 감계문제를 들고 나와 조선과 분쟁을 야기함이 좋지 않으니, 감계교섭의 재개 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양국이 이 종용에 따름으로써 감계 문제는 중단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도 [間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투기꾼 14-07-20 02:27
   
高宗 43卷, 40年(1903 癸卯 / 대한 광무(光武) 7年) 8月 11日(陽曆) 1번째기사
이범윤을 특별히 관리로 임명하여 북간도에 주재시키다
 
 
내부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 김규홍(金
 
奎弘)이 아뢰기를,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
 
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신의 부(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교화를 선포하고 호구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해당 시찰관(視察官) 이범윤의 보고를 접하니, ‘우리 백성들에 대한
 
청인들의 학대가 낱낱이 진달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굽어 살펴 즉시 외부(外
 
部)에 이조(移照)하여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해서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를
 
막고,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교화에 감화되
 
어 생을 즐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선 호적(戶籍)을 만들어
 
수보(修報)한 것이 1만 3,000여 호(戶)입니다.
 
이 사보(査報)에 의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
 
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
 
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
 
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
 
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
 
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
 
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
 
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
 
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
 
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十一日。 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金奎弘奏: “北間島卽韓、淸交界, 而因爲空曠, 于今數百年矣。 粤自數十年以來, 北邊沿邊各郡我民之移住該地、耕食居生者, 今爲數萬戶十餘萬生靈, 而酷被淸人之侵漁。 故上年自臣部派遣視察李範允, 使之宣布皇化, 調査戶口矣。 今接該視察李範允報告內, 槪淸人之虐待我民, 難以枚陳。 另加下燭, 卽爲移照外部, 與淸公使詰辦, 以防淸員之虐待。 亦爲建官設兵, 以慰萬民感化樂生等因, 而爲先編籍修報者, 爲一萬三千餘戶矣。 據此査報, 則我國寓民之居生此土者, 已爲數十年之久, 而尙未設官保護, 許多生靈, 無所依賴, 一任淸員之凌踏, 其在綏遠之道, 未免疎忽。 先自外部與淸公使商辦後, 文移該地方附近官員, 俾勿得勒加薙髮、法外虐待。 至於疆界論之, 在前分水嶺定界碑以下土門江以南區域, 固當確定我國界限, 執結定稅, 而數百年空曠之地, 遽爾妥定, 似涉張大。 則不可不姑先特置保護官, 亦依該島民等請願, 仍使視察李範允特差管理駐箚該島, 專管事務, 俾保生命財産, 以示朝家懷保之意何如?” 允之。
【원본】 47책 43권 32장 B면
【영인본】 3책 291면
【분류】 *호구-호적(戶籍) / *외교-청(淸) /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 / *호구-이동(移動)
 
-조선왕조실록-
                    
투기꾼 14-07-20 02:37
   
어디서 되도 않는 중뽕블로그에서 맨날 싸우는 숙종실록 내용만 쳐 긁어오는 수준

(본인딴에는 냉정한 자아를 본다며 자뻑하고 있을게 뻔하지만)

숙종실록 내용도 목극등과 합의한게 토문이었지만 이걸 조선조정이 두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일뿐.  이게 토문=/=두만이 될 수 없음에도 마치 간도가 우리땅이 아니라는 결론. ㅉㅉ

입증을 할거면 한두개가 아님. 이거부터 입증하시고 기초니 뭐니 떠드세요. 가소로워서.

1.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

2. 감계회담에서는 송화VS두만으로 왜 싸운 거임?

3. 우리의 땅이 아니라는 말은 있지만 그게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는?
(대개의 간도 어쩌고 하는 애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마치 조선이 간도에 대해서 천부적으로 가져서는 안될 무언가를 강조하는 중빠짓이 그대로 드러남. 본인은 대단한 객관적 팩트를 떠든다는 구역질나는 팩트주의가 있겠지만)

4. 1800년 이전의 국경개념. 조선이 당시에는 한반도북부-간도사이에 명확한 線적 국경개념을 세웠다고 볼 이유도 없음

5. 영토냐 아니냐의 여부는 영향력이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다름. 청나라 입장에서도 만주는 봉금지대. 이것도 청나라의 영토는 아님. 영토의 조건은 행정권을 행사하였는가의 구체적인 사안이 걸린 문제. 1880년 이후에 거주주민들의 귀속여부가 문제가 되자 조선-청이 싸우기 시작한것임. 숙종실록 내용을 가지고 영토성을 운운할 전제부터 꺼내보시길.

6.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면 숙종시기에는 만주가 조선도 청도 딱히 행정권한을 행사할 '근대적 영토'에는 들어가지는 않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조선사람들의 거주가 확산이 되고 '영토-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되니 근대적 국경개념이 나오기 시작하는거. 이 시기가 고종실록에 나오는 무렵과 감계회담의 시기. 마치 숙종실록만 쳐 들고오면 입증이 끝났다라고 보는 머저리들이 있는데 더 후대의 고종실록은 왜 안 보는지 모르겠음.


마지막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석과 고종실록에 대해서 떠드시길 바람.
shonny 14-07-20 00:51
   
대마도 (O) 간도 (X)
투기꾼 14-07-20 01:28
   
몇몇 사람들의 엉터리를 보자니 역사교육의 문제와 기본적인 국가관, 영토관부터해서 죄다 엉망임.

1번. 영토는 의지의 문제이지 현실적인 군사력 비교하는거 아님. 일본해상자위대가 한국해군보다 약해서 독도는 우리땅하고 있나요? 현실에 대한 순응을 실용으로 이해하는 자세와 똑같은데 문제는 본인들이 대단히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줄 암. 그게 사대주의이고 패배주의의 논리 그 자체.  간도에 대해서는 별 시덥잖은 현실론이 나오지만  독도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땅 이딴 소리 나열.

2번. 조선사를 놓고 딱 조선사편수회와 그 후신인 뉴라이트들의 사고를 그대로 베껴서 미개한 영역으로 쳐 밀어넣는 꼴을 보니 조선이해부터 개판임. 조선이 무능했다면 500년이나 국가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국가의 모든것을 산업화의 지표대로 판단하는 억지를 부리면서 조선기가 추구한 무언가를 못 보게 만듬. 한국사 내내 중국에 사대한 적도 없으니까 역사왜곡을 하지 맙시다. (1번. 중국이라는 나라는 1949년에 건국, 그 이전엔 청, 원 등과 같은 다른 국명이 있음. 2번, 조공이 사대로 이해되는 데 사대는 성리학모화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고 조공은 사대와 관계없는 소리. 만약에 서유럽 봉건체제를 보면서 독일하노버왕가가 영국왕을 겸하는 그런 질서를 놓고 영국은 하노버의 속국이라고 떠드는 바보는 없듯이요.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는데막시밀리앙 시기의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거점을 두었다면 독일은 스페인 속국? ) 우리가 아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영사제도, 외교권의 이해는 국민국가가 등장할 그 시기의 이야기임. 이런 상태를 정상으로 놓고 그 이전 상태를 속국과 사대로 이해하는건 역사왜곡. 고려는 요와 3번 전쟁해서 이기면서 강대국 위상을 누렸지만, 송에 대해서 특별한 모화감정을 가지거나 한 적이 없음.
나와나 14-07-20 02:40
   
shonny 14-07-20 04:27
   
어설픈 애랑 토론하자니 골때려지네.. 기초적인 사실들은 알고있어야 핵심부분 토론이라도 가능하지 -_-.

"어디에 두만강 상류 찾는다는 말이 있음? 원래 원문 그대로 따라가면 土門이고 이게 두만이라고 우기기 시작한건 감계회담에서의 청나라 주장부터임. "

-> 애초 백두산 정계비 세울때 강희제가 지시한게 양국의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상류부분에선 경계가 뚜렷하지않고 모호해서 양국간에 문제가 생기니 이걸 명확히 하란거였슴.
조선에서 파견된 자들역시 압록강 두만강의 상류찾는데 치중했었고..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86%A0%EB%AC%B8%EA%B0%95&keyword=%ED%86%A0%EB%AC%B8%EA%B0%95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토문강에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이유부터가 당시 토문강이 두만강 근원인줄 알고 벌어진일임..
     
투기꾼 14-07-20 05:29
   
검증하라는건 한개도 못하는 가소로운 놈이 까부는것 만큼 밟아주고 싶은것도 없을듯.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 뇌가 하도 저질이라서 주제를 못 찾는것 같은데 지금 주제는 '간도가 우리땅'인가의 여부이지 '숙종실록에 나오는 그 시기 조선의 강역은?' 찾는거 아님. 하도 멍청해서 뻔하고 뻔한 숙종실록 쳐 들고와서 자위중. 이런 대가리들은 이거 하나 들고 오면 '간도는 누구땅'이라는 걸 다 끝났다라고 착각함. 자. 여기 어디에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가 있음?
     
투기꾼 14-07-20 05:35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떠는 내용은 개무시. 고종실록도 마찬가지. 태종실록에 나오는 공험진도 무시.

본인한테 꼭 유리한(본인이 아니라 짱깨겠지) 것만 이야기하고 반박하면 그것만 관련된 것만 떠듬. (맨날 쳐 들고오는건 숙종실록에 기록된 두만 내용)

위에서 나온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종실록, 태종실록의 내용부터 쳐 읽어보시죠. 중뽕에 뇌가 녹아서 어디 간도 치면 나오면 블로그 튀어나오는 허접한 애들 주장 들고와서 쳐 발리지 말고요.

하도 국경과 영토에 대한 기초개념도 모르고 국제법상 영토귀속의 문제를 놓고 필연적으로 나오는 논리에 접근도 못하는 초딩대가리로 여기서 입 열고 까부는 것도 웃김.

이거부터 답변부터  하고 댓글 달길 바람.
1.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
2. 감계회담에서는 송화VS두만으로 싸운 이유
3. 간도는 우리땅이 아니지만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는?
4. 전근대적 국경개념 해설
5. 영토와 영향력의 차이
6. 합리적인 해석 (숙종시기의 간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고종시기로 확장되었는가)

하나도 답변 못하는 주제에. ㅉㅉ
          
shonny 14-07-21 10:02
   
아 무식한게 우기기만 하네.. 니가 질문한거 일일이 찾아서.. 가르쳐달란건지..귀찮게 짜증나게하네...
진짜 간도 관련 책이라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나대길.. 한번이라도 읽어본적 있다면 알만한 기초적인 내용도 모르고 나대는넘이 ㅉㅉ

1.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

-> 당시 정계비 세울당시.. 두만강의 상류 찾다가 토문강이 두만강의 상류인걸로 알고 기록한점.
그리고 이점을 지적하는 상소도 있었고 (위에 링크한 내용)
간단히 말해서.. 당시 착오로 토문강을 경계로 정한것인거고.. 나중에 가서 이걸 근거로 조선 청의 국경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이란 주장이 나오게된 배경인건데.. 다 따져보면 애초부터 두만강이 국경이고(두만강 건너서 국법으로 처벌된 기록들 수두룩함), 강 상류는 경계가 모호해서 이를 명확히 하기위해 정계비 세운것이었다는거 한국측 기록만봐도 나오는 내용들임.

2. 감계회담에서는 송화VS두만으로 싸운 이유
-> 감계회담에서 송화vs두만으로 싸운적 없다..
1차회담에선 청에선 두만강이 국경이니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해보잔거였고, 조선에선 정계비대로 토문강이 경계라 하다가.. 다 확인해보니 토문강은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확인만 한셈이다. 그래서 청주장대로 회령, 무산거쳐서 두만강 상류로 올라가다가 3갈래로 갈라지는 삼하강구에서 탐사팀을 3개로 나눠서 조사한거였고..
청에선 두만강 상류가 젤 남쪽인 서두수라 주장한거고.. 조선의 이중하는 홍토수가 두만강 상류라한거였고.. 여기서 그냥 회담이 깨졌던거고..
이중하는 관련상소 올린 내용이
"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이중하 부터도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보고.. 송화강이 조선의 국경이라 주장하지도 않았고.. 청하고 같이 두만강 상류찾는 탐사한게 1차 강계회담때 내용이란다.

2차회담역시.. 강을 조사하잔거 가지고 다툰건데 이중하는 홍토수를 조사하자고했고 청에선 서두수를 조사하자고 싸우다가.. 타협한게 중간에 있는 홍단수 먼저 조사하고 (셋다 모두 두만강 상류다) 그뒤에 다시 논하자고 했던게 2차회담이다.

"또한 년 청국 관원들에게 양국의 국경선이 홍토수 라고 하니 그들이 1887 ( ) 紅土水
이중하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자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강토는 축소할
수 없다 오두가단 국강불가축 면서 단호하게 그들을 제지하는 ”[ , ] 吾頭可斷 國疆不可縮
모습을 보였다 감계사등록)

2차회담때 이중하가 홍토수가 국경선이라 했는데.. 홍토수가 어딘지 니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라.
http://blogimg.ohmynews.com/attach/691/1400545489.jpg
          
shonny 14-07-21 10:57
   
3. 간도는 우리땅이 아니지만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는?

->청에서 봉금령 내려서 임자없는 땅이라는 논리라면.. 독도를 공도정책펴서 주인없는 섬이된거라 우기는 왜넘들과 다를게 뭔가?

일단 당시 조선에선 월강금지령으로 압록강 두만강 건너면 국법으로 처벌했었고.
당시만해도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에 출몰해서 문제가 되서 강희제가 월경하는 청나라 사람들을 조선에서 잡아서 처벌하게 허용했고.. 그뒤엔 영고탑이 두만강일대 개간할때 조선에서 청에게 자문보낸 내용이 국경일대에 사람이 거주하지않아야 국경을 불법으로 넘나드는 범죄가 안일어날거란거였고.. 이에 강희제가 응해서 봉금지대를 확대했던 배경이었다.


간단히.. 간도가 우리땅이란 근거로 내세우는게 1870년 함경도 가뭄으로 대거 조선인이 빈땅인 간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뒤에 벌어진일이다.
그뒤에 청에서 이들 이주한 조선이들을 다시 데려가란 공문을 고종때 보냈었고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5월 14일(무자) 3번째기사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홍시형(洪時衡)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중국 사람 세 명이 와서 공문(公文)을 전하기에 그 내용을 보니, 길림(吉林) 돈화현(敦化縣)에서 보낸 공문이었는데, 토문강(土門江) 북쪽 기슭을 차지한 채 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민들을 다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먼저 만들어 보내고 유민을 찾아오는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뒤에 조선에서 북간도에 관리 보낼려할당시.. 이미 북간도는 청나라 관리들이 있던 지역임.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8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이범윤을 특별히 관리로 임명하여 북간도에 주재시키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shonny 14-07-21 11:19
   
4. 전근대적 국경개념 해설
5. 영토와 영향력의 차이
6. 합리적인 해석 (숙종시기의 간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고종시기로 확장되었는가)

1870년 가뭄으로 조선인이 대거 북간도에 이주하게됐고.. 이에 청에선 이들을 귀화시킬려하다가 다시 조선에 데려가라고도 했다가 감계회담 결렬되고선 청관리 파견해서 통치했다.
조선이 간도에 관리 파견하게되는건 1902년이고.. 러일전쟁뒤에 일본-청간에 간도협약맺은게 1909년...
저 7년간 조선이 간도 통치했는데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뺏긴 영토란 주장하는건가??
굿잡스 14-07-20 05:35
   
이런 글은 왜 올리는 거지? ㅋ 이 사람은 아래에서도 반도 반도 어쩌고 염불을 외우더만 한반도 넘어가는

건 다 알레르기 반응인감?ㅋ

애초에 대한민국의 대한이 뭔 뜻인지나 찾아보길.
Windrider 14-07-20 07:48
   
ㅎㅎ 투기꾼님한테 싹다 발렸습니다.대단하세요
     
넌몰라도되 14-07-20 10:33
   
천천히 읽어 봤는데요
다들 상대가 안되네요.
소위 다들 투기꾼님한테 개~ 발렸어요.
gaevew 14-07-20 11:34
   
모름 14-07-20 11:51
   
여기 왜이렇게 나약하거 옹졸한 매국노들이 많은지  왜사세요!~~???
     
햄돌 14-07-20 16:13
   
저런놈들 공통점이 레벨보면 다 2짜리들이죠

저런 단순 어그로들은 바르기 쉽죠
햄돌 14-07-20 16:12
   
레벨 2짜리들이 또 어김없이 헛소리 작렬 댓글을 싸질러 놓았구나

저렇게 논리적으로 발릴껄 알면서도 계속 저러는 이유가 뭔지?
nyamnyam 14-07-20 17:15
   
간도는 빼앗긴 땅이고 대마도는 조선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땅입니다.
순심이 14-07-20 20:44
   
간도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땅이고 여진 (청) 또한 고구려의 후예로 우리 동족 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금청사를 한국사에 포함 시킨 생각에 동의하고 우리민족의 원류가 북방에 있는데 우리가 조상들의 땅을 잊어서는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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