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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6-22 23:28
[일본] 중일전쟁당시 일본의 군사전략에 대한 비판
 글쓴이 : 휘투라총통
조회 : 2,772  

일본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달이면 충분하다"라며 호언장담하며 중국과의 전면전을 시작했다고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고 결국 스스로도 승산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결국 정해진 수순마냥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입으로는 "1억의 국민이 하나가 되어"라고 말하면서 정작 전쟁 지도부는 그야말로 전략의 부재함과 무능 그 자체에다 자기들끼리는 극심한 파벌과 알력다툼을 보이죠. 왜 그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8년이 넘도록 중국 하나에게도 이기지 못했으며 끝판까지 갔던 것인가. 과연 일본군은 근대화된 군대로서 현대전의 특성인 국가총력전에 대비되어 있었던 것인가.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주의국가로서 국가안보와 국방방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러일전쟁 종결직후인 1907년 천황을 비롯해 육해군 참모총장과 해군군령부장, 군의 각 원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제국국방방침"을 최초로 제정합니다. 이는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의 기준을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제국국방방침은 이후 3차례 개정됩니다.(1918년, 1923년, 1936년) 1936년의 3번째 개정은 중일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정은 원래 해군의 요구에 따라 추진된 것으로, 일본제국의 안보를 위해 당시의 군병력을 당초 평시 17개사단, 전시 30개사단에서 평시 27개 사단, 40개 비행중대와 전시 50개 사단, 140개 비행중대로 확대하고, 최대 가상적국으로 미국과 소련, 중국을 상정하였습니다. 또한,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총력전과 지구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1차대전 초반 독일의 주된 단기결전전략이었던 "슐리펜계획"을 기초로 하여 개전과 동시에 조기에 단기결전을 위한 상비전력을 정비할 것을 강조합니다.

 

또 유사시를 대비한 작전계획으로 총 8가지 안을 상정합니다. 이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부터 차례대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①작전전반에 대한 계획 ②대소작전계획 ③대미작전계획 ④대중작전계획 ⑤대영작전계획 ⑥이들 4개국중 2개국이상의 국가와의 작전계획 ⑦이들 4개국을 제외한 국가와의 작전계획 ⑧동맹국과의 작전계획, 이런 순입니다.

 

그런데 이 제국국방방침 3차 개정안부터가 심각한 문제점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전에 제가 언급했듯 군사전략이란 어디까지나 국가전략의 하위개념에 불과하며 전쟁과 군사력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 목표의 수단일뿐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군부의 독주로 인해 정부가 군을 통제하지 못하다보니 오히려 이것이 정반대로 바뀌어 군이 정한 군사전략에 국가전략이 따라가는 격이 됩니다. 모든 정부 방침과 정치, 외교, 경제전략 역시 군의 요구에 맞추어지고, 군내부에서도 육군과 해군간, 또 하위부대와 지휘관들끼리 심각한 파벌대립을 보여도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를 조정하고 조율할 능력자체를 상실합니다. 이래서 한마디로 막장이 된 것이죠.

 

둘째로, 총력전과 지구전에 대한 "각오"와 "준비"를 강조하고서도 원론적 차원에서만 거론했을뿐 정작 구체적인 실천계획과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있었습니다. 아예 이에 대한 개념 정립과 연구 자체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 열강들이 국민총동원과 국가총력전을 보여줌으로 일본 역시 필요성을 깨닫기는 했지만 이에 필요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 국가가 가진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전쟁을 위해 총동원하기 위해서는 평시부터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대규모 예비병력의 확보, 전시 소요되는 예비간부요원의 대량 양성, 군 편제의 개편,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전반의 총력전 체제의 정비 등이 뒤따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즉, 서구열강들처럼 국가 체제자체가 거대한 대중군의 동원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능력과 전시의 자본, 공업동원을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함에도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는 반근대화되고 반봉건적인 일본이 어느날 갑자기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또 교육수준이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낙후된 일본은 그만큼 병사들의 숙련도를 위해 복무를 장기화할 수 밖에 없어 대규모 예비군을 확보하는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잘 훈련된 하사관과 장교의 확보 역시 마찬가지였죠. 단순하게 인구가 많다고 그만큼 병사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점이 나중에 전쟁에서 고스란히 증명됩니다.

 

셋째로, 이 방침을 수립한지 바로 1년후에 중일전쟁이 발발함에도 위에서 보듯, 이 시기 일본의 전쟁계획에서 대중작전은 대소전과 대미전보다 우선순위가 더 낮았다는 것입니다. 여기다 대중작전계획은 중국과의 전면전 발발시 화북에  5~8개 사단, 화중에 5개 사단, 화남에 1개사단을 투입하여 요지를 점령하겠다는 개략적인 계획만 수립하고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중앙 참모본부의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대소전쟁에 있었고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노구교사변 직전까지도 계획 자체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단지 유사시 산해관의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북경, 천진 등 요지를 장악하겠다는 추상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죠. 이런 상태에서 일본은 확실한 군사전략도 구체적인 방침도 계획도 없이 대소전이나 대미전보다도 먼저 대중전쟁부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아무 생각도 없이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이고 무능했는지 알 수 있죠.

 

다음으로 일본의 군사방침을 본다면 첫째 공세지향주의, 둘째 적주력에 대한 대규모 섬멸전, 셋째 단기속전속결전, 넷째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의 일치 이렇게 네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침은 열세한 국력으로 우세한 적과 싸워야 했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두 전쟁에서 일본은 산업역량이 빈약하고 경제력이 약하다보니 장기전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없었음에도 개전 초반의 기습전략으로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방법이 향후 전쟁에서도 계속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지도와 작전, 용병술의 성공모델로서 교리화합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그들이 이긴 것은 그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선제공격과 속전속결 전략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의 상대였던 청과 러시아가 가진 내부적인 모순탓이 더 컸음에도 이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간과하였습니다.

 

그리고 네번째의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의 일치"는 러일전쟁당시 정부와 군부간의 의견 불일치와 불협화음으로 혼선이 빚어진 경험때문에 최초의 제국국방방침에서는 포함되었으나 2차 개정에서는 오히려 삭제됩니다. 따라서 정치와 군사의 통합은 모든 국가의 기본 상식임에도 일본의 경우에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죠.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이래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내부적인 문제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이 발발했을때 당초에는 현지 부대와 기찰정무위원장(화북정권의 수장)의 송철원간에 사태 불확대 및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든, 도쿄의 육군 중앙이든, 현지의 지나파견군 사령부이건 불확대 방침을 정하고 어디까지나 제1가상적은 소련이며 대소전에 집중할 것을 정하고서도 현지 소수 강경파를 비롯해 육군의 확전파와 정재계, 매스컴을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중국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여기에 휘둘린 고노에 내각은 당초 방침을 뒤집어 전면전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개전은 장개석의 지도아래 중국군의 저항이 예상외로 거세자 초반부터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국지적인 승리를 거듭하며 점령지를 신속하게 확대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병참과 병력 증원의 한계로 진격은 점점 둔화됩니다. 38년 무한 점령과 39년초 남녕공략후 일본은 더이상 내지로 진격할 역량을 상실합니다. 따라서 일본 육군 중앙은 단기전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바꾸게 되죠. 확대될대로 확대된 일선 부대에 대한 보급 지원이 악화되자 일선 장병들의 전투력과 부대 작전능력은 갈수록 저하되고 사기 역시 저하됩니다. 월남전에서의 미군처럼 주둔이 장기화되자 군기도 이완되어 하극상에다 탈영, 군기위반, 심지어 반란사건까지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보급능력의 상실에다 군기이완으로 일본군은 항상 현지 약탈에 주력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로 인한 중국인들의 반발과 저항의지만 높아져 점령지에 대한 치안도 갈수록 악화됩니다. 따라서 이를 제압하기 위해 더욱 병력을 분산할 수 밖에 없게 되죠. 39년부터 태평양전쟁발발까지 일본군의 작전은 주로 항일 게릴라들에 대한 토벌전과 중국군 최일선 근거지에 대한 말살, 보복전이 중심이 됩니다. 또한 장개석의 대외원조루트 차단에 집중하고 39년말 중국군의 대규모 동계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중국군의 대규모 작전능력을 상당부분 차단하죠. 그러나 점진적인 점령지 확대와 국지적인 승리외에 정작 중국군 주력을 격멸하여 전쟁 승패의 향방을 좌우할만한 성과는 전쟁 막바지까지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비유하자면 서로 "깨작"거리는 것에 불과했죠.

 

일본은 단기결전에 실패하자 장기 지구전을 채택했으나 이를 위한 일관된 전략 자체가 없었습니다. 지구전이란 앞으로의 결전에 대비해 적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전력을 축적하려고 노력해야 함에도 일선 부대들은 당장 눈앞의 "전과"에만 눈이 멀어 국지적인 공격을 일삼아 병력과 물자만 무의미하게 낭비합니다. 즉, 공격지상주의와 지구전략이 서로 충돌한 것이죠. 게다가 지나파견군 전체의 통합된 작전이나 전략은 결여된채 방면군이나 그 하위제대단위의 지역적이고 국지적인 작전만 계속 수행하다보니 지키지도 못할 점령지만 계속 늘어나고 전투력만 점점 약화됩니다. 큰 희생을 치루며 적 근거지를 어렵게 점령하고도 병참과 증원부대가 뒤따르지 못하다보니 전과를 확대하지 못한채 점령지를 약탈한후 원래 있던 곳으로 도로 귀대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전술은 전략에 기여해야 의미가 있는 것임에도 무의미한 승리에 불과했습니다.

 

철도와 주요도로를 완전히 확보하는데도 실패하여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기동하지도 못하였습니다. 10만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도 병참이 뒷받침되지 못하니 작전을 지속하지 못한채 단기간에 끝낼 수 밖에 없었죠. 기계화전력 역시 독일이나 여타 열강에 비하면 형편없이 취약하여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독일처럼 "전격전"을 흉내내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즉, 일본은 처음부터 명확한 목표도 방침도 없이 무턱대고 개전했다가 아무 일관성도 없이 상황과 여건이 변할때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피동적으로 대처하는 식이 됩니다. 그러니 무슨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냥 중국이 알아서 손드는 그날만을 막연히 기대하며 하루하루 싸우는 식이 되었죠.

 

여기다 외교전략의 부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수공업능력이 매우 낮았던 중국은 대외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은 중국 해안가에 대한 봉쇄에만 주력했을뿐 미, 소에 대한 외교적인 노력은 간과하였습니다. 일본과 소련은 극동에서 서로 대립된 관계였으나, 1929년 중소국경분쟁과 1931년 만주사변당시 서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보장하고 중립을 지킴으로서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양자간의 불신 해소와 관계 개선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채 맹목적으로 대소강경론에만 치중함으로서 중국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지도 못했고 소련의 대중원조도 차단하지 못했습니다. 노몽한전투에서 완전히 아작난후 40년 일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할때까지 소련이 중국 최대 원조국이었고 약 20개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막대한 무기와 1천대의 항공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는 일본의 큰 실책이었습니다.(이후에도 43년부터 신강성과 내몽고를 통해 중국에 대한 원조가 조금씩 재개되죠.)

 

서방에 대해서도 일본은 남으로 남으로 계속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한 것을 기회삼아 인도차이나 전역을 무단으로 점령하자 영, 미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이때문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으로서는 석유와 철강을 비롯한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물자 수입에 심각한 애로가 발생하죠. 원칙적으로 지구전을 방침으로 하고서도 일본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중국을 고립시키려고 노력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이 고립되는 짓을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한다면,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전략이든 국가전략이든 일관성이 없었고 "싸우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목표도 애매하여 전력을 집중하지도, 승리의 기회도 상실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일본은 오히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때보다도 더 퇴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청, 러보다 훨씬 강력한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더 허황된 꿈이었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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