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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0-09 12:38
[한국사] 단군조선 도읍 변천4ㅡ도읍의 위치
 글쓴이 : 하이시윤
조회 : 1,151  

고조선의 도읍지를 추정하는 실마리를 찾게하는 기록은 “사기 조선열전”에 보인다.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인데 그 가운데 “蠻夷(만이)와 옛 燕國(연국). 齊國(제국)의 망명자들이 그(위만)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왕험에 대한 주석을 보면 “史記集解(사기집해)”에는,

徐廣(서광)은 말하기를 昌藜(창려)에 險瀆縣(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고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韋昭(위소)는 말하기를 (왕험은) 옛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한서 지리지”에 주석 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舊都(구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주석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위소는 왕험을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과 응소는 險瀆(험독)을 王險(왕험)과 같은 뜻으로 파악하였으며 신찬은 이것을 王險城(왕험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왕험. 험독. 왕험성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도읍에 대한 명칭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위만조선 지역의 언어 즉 고대 한국어가 漢字化(한자화)된 것임이 분명하며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도읍으로 기록된 아사달. 평양성과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통치자를 壇(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 하였으니 “사기 조선열전”의 王險(왕험)과 신찬이 말한 王險城(왕험성)의 왕험은 단군왕검의 王儉이 달리 표기된 것이다.

결국 險瀆(험독). 王險(왕험). 王險城(왕험성). 王儉(왕검). 王儉城(왕검성). 阿斯達(아사달). 平壤城(평양성) 등은 한국 고대상에 나타난 도읍에 대한 다른 호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집해”와 “사기색은”은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곳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위치를 보면 서광의 창려 험독현, 응소의 요동 험독현, 신찬의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이 된다.

중략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다. 이 조선현 지역은 중국의 先秦(선진)시대 문헌에서도 조선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위치했던 지역으로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고증된 바 있다. 그리고 조선현의 위치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조선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기자국의 도읍이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내에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기자국의 도읍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동부연안에 위치했으며 그곳은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관한 서광. 응소. 신찬의 설 가운데 신찬의 견해가 옳은 것임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하북성 창려 부근에 있었던 서광과 응소가 말한 險瀆(험독)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남는다. 험독이라는 명칭이 고대에 도읍지에 대한 호칭이었다는 점이라든가 서광과 응소가 전한 내용으로 보아 이 곳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도읍지(그전은 기자국의 도읍지)인 王險城(왕험성)은 앞에서 확인되었으므로 창려 부근의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조선이라는 동일한 국명을 사용하였으므로 그 도읍지들이 단순하게 조선의 도읍지로만 전해짐으로써 후세에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문헌들은 두 개의 험독을 더 전하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이 있는 大凌河(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으로서 일찍부터 이 곳이 험독으로 전해오고 있다.

북진의 舊名(구명)은 광녕이었는데 “대청일통지”에는 광녕현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險瀆舊城(험독구성)이 광녕현 남부에 있는데 漢(한)시대에는 현으로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에서도 보인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요하 동부연안에 있는 심양 부근으로 “遼史(요사)”“지리지”에서 확인된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는 集州(집주) 懷衆軍(회중군)에 대해서,

옛 陴離郡(비리군)의 땅으로 漢시대에는 험독현에 속했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삼았다가 渤海(발해)가 州(주)를 설치 했다.

고 전하고 있다. “독사방여기요”에 의하면 遼(요)시대의 集州(집주)는 지금의 심양 동남에 있었다고 한다.

대능하 동부연안의 북진과 요하 동부연안의 심양 지역은 그 위치로 보아 漢(한)시대의 요동군 또는 험독현이 될 수 없는데 서한의 요동군에 그 지역의 옛 명칭과 같은 험독이 보이므로 후대에 혼란을 일으켜 한시대의 험독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이 험독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세 곳의 험독이 확인되었다.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창려 부근,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북진, 요하 동부연안에 위치한 심양 지역이 그것이다.

여기서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기록과 그것에 따라 필자가 앞에서 추정한 고조선의 천도 사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연은 “古記(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은 평양성으로부터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하였고, 기자가 조선지역으로 이주해 오자 다시 장당경으로 천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아사달로 옮겼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기자가 秦(진)시대에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려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왔었는데 이러한 기자의 이동이 고조선으로 하여금 천도를 하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고조선의 당시 도읍지가 너무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어 조선 지역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아사달 천도는 위만조선이 성장하여 지금의 요하 가까이까지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과 장당경은 지금의 요하 서쪽에 있었을 것이고 마지막 도읍지인 아사달은 요하 동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일연이 고조선의 마지막 천도를 기록하면서 “아사달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일 것인데 아마도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이었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필자의 가정은 王險城(왕험성)과 險瀆(험독)의 위치가 입증하여 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자국은 그 말기에 고조선의 변경인 지금의 난하 중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하고, 신찬이 말한 낙랑의 왕험성에 도읍하고 있었다. 당시 고조선이 도읍지는 서광과 응소가 말한 험독으로 지금의 창려 부근 이었다. 이곳은 난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므로 새로 이주해온 기자국의 영역에 거의 접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당시의 도읍이 기자국에 너무 인접해 있고 또 이제부터는 기자국이 중국 세력에 대한 완충지의 역할을 할 것이므로 도읍을 굳이 서쪽 변경에 둘 필요가 없었으므로 동쪽으로 옮겼을 것인데 그 곳이 바로 대능하 중류 동부연안의 험독인 지금의 북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이 성장하여 지금의 요하 서쪽을 거의 전부 차지하게 됨에 따라 고조선은 다시 요하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이 지금의 심양 동남에 있었던 험독이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창려 부근의 험독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이었고, 북진의 험독은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이었으며, 심양 동남의 험독은 첫 번째와 네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이었다.

이상의 고찰로서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의 천도 기사가 중국문헌이 전하는 王險城(왕험성)과 險瀆(험독)에 관한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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