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이 시점에서 누구의 주장이 발바닥의 티보다 못한 것인지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스리랑님이 내 주장이 윤내현 연구실적의 발바닥 티만도 못하다고도 하니 누구의 주장이 발바닥 티만도 못한 것이지도 밝히고 동시에 리지린.윤내현의 어리석은 주장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야겠기 때문이다.
아래는 <진서/지리지> 기록이다.
평주...낙랑군 조선...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위 기록은 진시황 시기 보수.축성한 만리에 이른다는 장성의 동쪽 끝 지점이 사마씨의 진 시기에는 낙랑군 수성현이 설치된 지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윤내현은 위 기록과 아래의 <태강지리지> 기록을 근거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산해관과 부근에 있을 갈석산 지역이 서기전 108 년 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이라 주장한다.
<고조선연구> 제 1 장 고대 조선의 지리와 개념 1.고대문헌에 보이는 조선 2) 란하 유역의 조선 44,45 쪽
<사기>권2하본기 갈석의 주석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그리고 <고조선연구> 46 쪽에서는 현재의 요동 지명과 맞추기 위해 아래와 같이 논설한다.
``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는 그 위치가 달라 지금의 란하 유역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한시대의 행정구역이였던 요동군은 넓은 의미 요동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도 지금의 란하 하류 유역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지금까지의 결론을 요약하연 다음과 같다. 고대 중국인들은 지금의 란하 동부 유역의 일정한 지역, 오늘날 한국의 1 개 군보다 크지 않은 지역을 조선이라고 불렀는데 서기전 12 세기 경에 기자가 그 일족과 함께 그 지역으로 망명하였으며 서기전 108 년에 한4군이 설치되자 그곳은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던 것이다.``
윤내현은 서기 265~317 년까지의 서진 시기의 낙랑군 위치가 위 적색 원 지점이니 곧 전한.후한의 낙랑군 설치 위치도 위와 같다고 인식한 것이다.
결국 저 위치가 <후한서/군국지> 낙랑군.현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지점이라는 단정이다.
과연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