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 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 문화 < 기사본문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joongboo.com)
얼마 전 영화 「남한산성」이 상영되었다. 385만 명이 관람한 영화 「남한산성」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병자호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병자호란의 패전, 삼전도에서의 치욕적인 굴복은 17세기 중반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한국인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고, 21세기 한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가 17세기 병자호란 당시와 비슷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완성도 높은 영화이다. 역사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작가와 감독이 상상력을 보태어 만드는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역사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그려졌다고 해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비판할 수 없다. 필자는 역사 영화 한편이 역사교과서보다 더 훌륭한 역사교과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수업 시간에 텍스트로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그 주변에서 펼쳐진 조선 군대와 청 군대와의 전투를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는 근왕군이 왕의 출병 명령에도 불구하고 출병하지 않았고 도리어 명령을 전달하러 온 서달쇠를 죽이려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조선 군대가 이러하였기에 병자호란에서 청 군대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또 영화의 후반부에서 남한산성이 청의 공격을 받아 함락 직전의 상황까지 간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당시 역사적 실상은 이와 달랐다. 근왕군은 왕의 명령을 받은 후 신속하게 출동하여 청군과 전투를 펼쳤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것은 12월 14일이다. 이 날 부터 1월 7일까지 전국의 근왕군은 청군과 9차례의 교전하였다. 광교산 전투에서는 승리하기도 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고도 출병하지 않는 군대라면 그것은 군대라 할 수 없다. 당시 조선의 군대가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였지만 목숨이 아까워 출병하지 않을 정도의 군대는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투를 그린 영화 「명량」의 마지막 부분에 병사들이 그들의 싸움을 후손들이 알아주겠냐는 말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도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후손인 우리가 당신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마음 속으로 대답하였을 것이다. 승전한 전쟁의 병사만 훌륭한 군인으로 기억할 것인가. 패전한 군대라 하더라도 왕의 명령을 받고 바로 출동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장병들도 훌륭한 장병들이다. 우리가 병자호란에 참전한 군인들을 죽음이 두려워 출동하지 않은 비겁한 오합지졸로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남한산성은 청 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당한 바가 없다. 조선 군대는 청군의 남한산성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남한산성이 평지성이었으면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가파른 산세 위에 축성된 산성이기에 외부 군대가 산성을 공격하기 어려웠다.
청 군대의 남한산성 공략을 막아냈다는 것은 병자호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다. 비록 남한산성 내부가 벌봉보다 낮은 곳이어서 청군의 홍이포 공격을 받았지만 외부의 공격에 오래 버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내부가 평지이고 물이 풍부하였다. 당시 남한산성 내에는 50일분의 식량만 비축되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기에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경우를 대비하지 못한 결과이다.
당시 남한산성에 식량과 화약을 충분히 비축하였다면 전쟁은 47일 만에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청 군대의 사정이 조선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주 공격 목표가 명이었기 때문이다.
또 정해은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하였고 청 황제와 청 군대가 이를 두려워하였기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군이 조금 더 버티었다면 우리가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청과 화약을 맺었고, 병자호란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조와 당시 집권 세력, 군 지휘자의 가장 큰 과오는 이같은 전략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점이다.
병자호란은 치욕적인 전쟁이지만 남한산성은 청군에 함락당하지도 않았다. 남한산성이 가지는 요새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그 일대에서 싸운 군사들의 실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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