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20-04-04 18:28
[북한] (하얼빈 특종) 조선족 이민 여사의 증언. 04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660  

(하얼빈 특종) 조선족 이민 여사의 증언. 04편..


빨치산 출신 老(노)신사의 풍모


 
 
  敏(이민) 부인과 그 남편인 前(전) 흑룡강성 성장 陳雷(진뢰)가 나를 위해 베풀어준 화려한 저녁 모임은 하얼빈에서 유명한 식도락 궁전 雪酒家(설룡주가)에서 열렸다.


 
  모두들 내가 동북지방에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중국공산당 中央顧問委員會(중앙고문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省長(성장)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몸이 장대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83세의 중국인 紳士(노신사)는 뿔테 안경 너머로 사물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분이 젊었을 때 용감한 항일 빨치산이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당한 비극의 주인공이요, 또 흑룡강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省長(성장)이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風貌(풍모)였다. 비록 연로했지만 분명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리 있게 환영사를 해주었다.


 
  중국 동북지방 최고의 요리사가 특별히 마련한 산해진미가 끊임없이 서브되는 동안 새 접시가 나올 때마다 乾杯(건배)(간빠이)를 계속했다. 우리들은 알코올 도수 38도짜리 白酒(백주)를 마셨지만 敏(이민) 여사는 중국산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다른 젊은 손님들에게 지지 않는 省長(성장)의 酒量(주량)에 놀랐다.


 
  省長(성장)과 다른 손님들이 간빠이를 제의할 때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재빨리 잔을 비우고 진짜 友情(우정)을 나누는 분위기에 동참하였다. 나로서는 省長(성장)과 (이)여사의 나에 대한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분들이 나를 믿으면 믿는 그 만큼 앞으로 사흘간 가질 인터뷰에서 솔직한 얘기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人民日報(인민일보)와 영자신문 차이나 데일리에 난 내 기사와 중국 에드거 스노 연구회 명예이사 임명장 카피까지 그분들에게 보여주었다. 省長(성장)이 나를 좋아하는 빛을 보고 나도 그가 좋아졌다. 따뜻한 우정은 서로 오고가게 마련이다. 이번 취재 여행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 같은 육감이 느껴졌다. 못해도 50%는 성공한다는 자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하얼빈 도심 省(성) 정부 청사에서 가까운 鞍山路(안산로)에 있는 省長(성장)의 저택을 찾아갔다. 거대한 저택의 정원 담은 漢詩(한시) 구절을 새긴 석판으로 장식되어 주인의 詩(시)와 서예에 대한 조예를 짐작하게 한다. 널찍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한가운데 작은 亭子(정자)가 있어서 흡사 天(노천)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자연과 예술의 완벽한 調和(조화)여!


 
  敏(이민) 여사의 한국어가 서툴고, 그 남편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르기 때문에 黨史(당사)연구소 소장 金宇鍾(김우종) 교수와 흑룡강신문사 太福(이태복) 부주임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다.

 

사실 陳(진)성장이야 말로 만주 시베리아 항일 투쟁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력자이면서, 한국인 항일 빨치산들과 공동 작전도 펴왔고, 그러다가 (이)여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金日成(김일성) 부자와 각별히 친한 사이인 만큼, 나는 그와 먼저 인터뷰할 필요를 느꼈다. 아니, 내가 첫 질문을 떼기도 전에 陳(진)성장은 자신의 獨白(독백)을 읊어나갔다.
 
 
  조선족 反日(항일)투쟁 보고 中2(중2) 때 혁명 가담
 
 
  『나는 1917년 흑룡강성 佳木斯(가목사)시 서쪽 교외 火龍溝(화룡구)라는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淸朝(청조) 말엽, 원래 산동성에 살던 증조부는 이 고장에 와서 말을 달려 금을 그어 백ha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여 제법 큰 地主(지주)가 되었지요.

 

말을 달려 땅을 차지하게 한 것은 그 당시 淸朝(청조)의 변방 개발 장려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家門(가문)이 기울어진 것은 가족간의 訟事(송사) 때문이었어요. 종부 한 분이 증조부의 재산분배가 불공정하다고 관청에 고발하자 증조부도 맞고소하여, 아무튼 이 송사가 베이징의 大理院(대리원)까지 올라가면서 몇 년이 걸리는 동안 家産(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했지요.

 

결국 증조부는 땅을 열 몫으로 나누어 나의 조부에게만 부모를 모신다고 하여 20ha를 물려주고 나머지 일곱 아들에게는 11ha 남짓 되는 땅들을 쪼개어 주었답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해졌지요.


 
  1929년 열두 살 나던 해에 樺川縣(화천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고 내 장래에 큰 희망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점쟁이까지 불러서 내 운명을 점쳤으니까요. 그 점쟁이는 기껏 좋은 소리 한다는 것이 내가 크면 管帶(관대) 벼슬에 오르겠다고 했다나요.

 

지금 대대장 급에 해당하는 당시 군대 계급이지요. 할아버지께서 그 말을 듣고도 몹시 기뻐했다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점쟁이 담이 작았던 모양이지요. 흑룡강성 省長(성장)까지 된 사람을 겨우 관대 벼슬이라니. 하하하』


 
 
이제부터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답변은 붉은색으로)


 
  ─당신이 아주 어려서부터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투쟁에 가담하게 된 動機(동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혁명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른바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 9월18일 이후였다고 기억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지요. 당시 동북지방에서 제일 먼저 反日(반일)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조선족들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조선족들은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 와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저렇게 희생적으로 反日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 우리도 일어나 日帝(일제)에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 이런 생각에 나도 反日(항일) 활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反日(항일)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일본군이 가목사를 점령한 것은 1932년, 그 바람에 우리 학교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 1년 넘게 농사를 지었지요. 짧은 경험이었지만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가, 농촌의 깊숙한 面(이면)을 좀 깨닫게 되었지요. 이 귀중한 체험은 나의 진로 선택과 인생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만주사변 후 동북지방의 애국 將領(장령) 馬占山(마점산)이 嫩江(눈강) 다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들의 항일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지요. 우리는 그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항일 운동을 선전하는 연극을 만들어 거리에 나가 공연하고 또 義捐(의연금)을 모아 항일 전선의 장병들을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골 농촌까지 내려가서 농민들에게 反日(항일) 애국 사상을 선전했습니다.


 
  1933년 화천중학교 사범반에 들어갔습니다. 학비가 면제되는 사범반을 지원한 것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지요. 1936년 졸업하자마자 나는 가목사 동문소학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이상..      05편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8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877
838 [북한]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등..이승만은 왜 학살을 명령… 돌통 05-25 850
837 [한국사] 동호東胡는고조선인 북부여로 구레나룻 수염이 있는… 수구리 08-08 850
836 [한국사]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 하이시윤 03-18 850
835 [한국사] 저 사람은 빡대가리 경계선지능이하인지 모르겠는데 (38) 연개소문킹 02-23 849
834 [세계사] 미국의 국력 변화 역사 (5) 고이왕 04-15 849
833 [한국사] 강화도 조약 후 조선과 일본의 행보 2 히스토리2 06-04 849
832 [한국사] 스스로 중국의 속국이였음을 인정한 조선 (2) knb14 08-15 848
831 [한국사] 노비의 원한을 풀어준 암행어사 여동식 레스토랑스 09-07 848
830 [북한] 되돌아보는 6.25 수수께끼 01편. 돌통 07-29 848
829 [한국사] 임진왜란하고 한국전쟁이 생각보다 닮은점이 많군요 (1) 삐릉 08-22 848
828 [한국사] 식민사학자들은 동방의 진국 단군조선을 남방의 작… (6) 스리랑 08-08 848
827 [한국사] 환빠로 몰리다 (2) 마누시아 06-05 847
826 [한국사] 요동과 요동군, 요수와 압록수 감방친구 04-16 847
825 [북한] 황장엽이 김정일에 대한 비판.김일성에 대해..11편.마… 돌통 01-13 847
824 [한국사] 창원시ㅡ 국내 최대 가야 고분군... 일부 현장보존 … (2) mymiky 11-13 847
823 [한국사] 수구리님께 질문 (18) 감방친구 08-17 847
822 [한국사] 왜(倭) 2 - 《산해경》의 倭 (3/6) (1) 감방친구 08-17 847
821 [한국사] 건방지다 못해서 악랄한 강단식민빠들 카노 06-11 846
820 [기타] 현자인척 하는 고XX분 (3) 위구르 03-21 846
819 [한국사] 한복과 한푸 논쟁 관련해서 정리 해봅니다. (2) 탈레스2 11-05 846
818 [세계사] 요하문명과 중국역사 왜곡의 쟁점 (4) 하시바 02-22 845
817 [한국사] 역사채널e 청동거울의 비밀 레스토랑스 06-12 845
816 [한국사] 연남생은 생각할수록 찢어 죽일 인물인 듯... (2) 쇠고기 03-26 845
815 [기타] 초한쟁패 (1) 응룡 04-24 845
814 [한국사] 연구자들이 논문을 공개하고 책을 펴내는 이유는 (4) 감방친구 07-11 845
813 [북한] 김일성의 절친 독일인 저명한 여작가 루이저 린저의 … 돌통 09-16 844
812 [기타] 아는만큼 보인다. 우린 세계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나 (3) 글봄 08-14 844
 <  701  702  703  704  705  706  707  708  709  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