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244년에 있었던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 벌어진 비류수 전투와 1차 양맥 전투 이후에 벌어진 2차 양맥 전투.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은 사실 고구려의 선빵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중원에서 가장 체급이 컸던 위나라는 고구려와 비교하면 넘사벽으로 거대한 국가였습니다. 그럼 도대체 고구려는 왜 위나라를 먼저 쳤을까요?
동천왕 12년 238년에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고구려가 위나라를 도왔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안 남아 있지만, 정황상 위나라는 고구려에 대가를 주기로 약속한 것으로 학계는 추측합니다.
근데 요동의 공손연이 패망하자 위나라는 약속한 대가를 주지 않았고 이에 동천왕은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해버립니다. 이렇게 고구려와 위나라의 사이가 험악해지고 전쟁이 시작하게 된 겁니다.
244년 당시 조상이 이끌던 위나라군은 한중에서 촉한에 탈탈 털리고 국경 전체가 전쟁터로 변해 전력이 사방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고구려에 집중할 수 있는 병력이 적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으로는 위나라가 고구려에 우위를 점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실제로 관구검이 1만 명 동원할 때 고구려는 2만 명을, 그것도 강력한 철기병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전력을 보냅니다.
위나라군은 서안평을 기습해서 점령하고 고구려도 군대를 보내 비류수에서 맞붙는데 위나라군을 일방적으로 완전 박살 내버리고 3천여 명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이에 관구검은 후퇴하여 양맥의 골짜기로 가는데 여기서 벌어진 전투가 1차 양맥 전투입니다. 여기서도 위나라군은 고구려군에 패배합니다.
자신감에 가득 찬 동천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관구검이라는 애가 위나라의 명장이라며? 근데 오늘은 그 자식 목숨이 내 손 안에 달렸는데? ㅋㅋ" 그리고 동천왕은 직접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위나라군을 공격합니다.
이렇게 2차 양맥 전투가 벌어지는데 일방적으로 밀리던 관구검은 막판에 방진을 치고 대기병 역전승을 거두어 계속된 승리에 안일했던 동천왕의 고구려군은 여기서 제대로 패배하는데 2만 중에서 무려 1만 8천이 죽는 패배를 당합니다. 냉병기 시절 90%가 사망했다는 건 진짜 그냥 망했다는 소리입니다.
이때의 패배로 인해 동천왕은 옥저까지 피신하고 악에 받친 위나라군은 환도성까지 함락시키고 고구려 영토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계속해서 추격하고 동천왕은 2년이 지난 246년에 이르러서야 패잔병을 수습하고 겨우 위나라 추격군에 반격하여 승리합니다.
만약 양맥 전투에서 동천왕이 안일하지 않고 침착하게 3번째 전투에서도 위나라군과의 싸움에 승리하여 관구검을 사로잡고 대승리를 거두었다면 좀 더 일찍 중원까지 고구려의 무서움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겁니다. 고구려군이 패배하면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는 쓰라린 아픔도 없었을 것이고요.
이상 여수님의 글을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