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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31 09:35
[기타] 통설의 지리비정이 쓰레기인 이유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909  

1. 철령

통설에 한반도내의 함경도에 있었다고 하고,

교과서에 그렇게 싣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역사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파고들지 않는 보통사람은 철령은 한반도내의 지명으로 알게된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13024002

명 태조 주원장은 홍무(洪武) 20년(1387) 12월 우왕에게 국서를 보내 이렇게 통보했다. 

“철령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부터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해 있었으니 (명나라) 요동에서 다스리게 하고, 철령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으니 본국(고려)에서 다스리라. 서로 국경을 확정해서 침범하지 말라.”(‘명사’ ‘조선열전’)

우왕은 요동정벌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재위 14년(1388) 4월 표문을 보내 “철령 땅은 실로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왔으니 예전처럼 고려 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주원장은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은 철령이라고 꾸미니 거짓임이 분명하다”면서 불화의 단서를 만들지 말라고 받아쳤다.

주원장은 철령을 개원로(開元路) 소속이라고 말했는데, 개원로는 원나라가 요동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했던 관청이다. 그 치소(治所·다스리는 관청)를 중국에서는 지금의 길림(吉林)성 장춘(長春)시 북쪽 농안(農安)현으로 보고 있다.


고려는 국경분쟁 지역이 함경도인데 왜 요동으로 군사를 보내려했나.

철령을 지키기위해 명나라와 전면전이라도 일으키려고 한것인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주원장의 발언에서 고려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은 철령이라고 하니 거짓이다 라고 했다.

주원장의 이말을 해석하면 압록강까지만 고려땅이고 철령은 고려땅이 아니다 라는것이다.

철령이 지금의 통설처럼 함경도에 있었으면 모순이되는 말이다.

철령이 고려땅이라고 인정하면서 철령은 고려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의 고려시대때의 영토분쟁이 있었던 철령이 함경도 철령이라고 통설이된게 일제시대때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다.

일본인의 주장이라서 안되는게 아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 하던 시대배경에서 나왔기때문에 검증을 해야한다.


2.패수

평양 주변 대동강을 패수라고 위치비정 했다.

패수란 강은 고대사에서 평양이라는 지역을 비정하는 주요 지표다.

위만이 기자조선의 평양을 갈때 패수를 건너서 동쪽으로 갔다고 사서에 나온다.

간단히 말해 기록상 패수는 평양의 서쪽에 있어야한다.

지금의 대동강은 기자조선의 패수가 될수없고,

지금의 평양이 기자, 위만 조선의 평양이 될수가 없다는 말이다.


3.진국

몇년전부터 한반도 남부에 진국이라고 지도를 만들어서 교과서에 실어놨다.

진국이 나오는 사서 기록에는 어떻게 나올까?

사서에는 진국이 기자조선의 동쪽에 있다고 나온다.

대략의 구절이(기자,위만조선에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라고 적어놨다.

중원의 사서에 진국을 어떻게 적어놨는가.

삼한이 진국이다 / 진한이 진국이다

여기서 삼한이 진국이라는 구절만을 갖고와서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과 다른세력 진국을 만들어낸것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학자는 사서를 읽지못하고 한자를 읽을줄 몰라서 진국을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주장하지 않은것인가?

한반도 남부의 삼한만을 가지고 위치를 비정하기엔 기록상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고조선 삼한은 어딘가?

한단고기 같은 얘기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 왕족 묘비에 자신을 진한, 진조선 출생이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놨다.

고조선 해체후 남삼한이 생기기 전의 진한은 고구려, 백제의 선조가 살던 부여라고 볼수밖에 없다.

고구려, 백제 지배층이 한반도 남동부 신라와 무슨 인연이 있다고 진한인을 자처했겠는가.

부여가 진한이다라는건 기자조선 동쪽의 진국이라는 사서기록과도 맞아떨어진다.


한반도 남부에 진국을 만들어내서 교육하는건,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도 하지못한 획기적인 식민사학의 발전 성과다.

고조선과 한반도인을 분리할수 있게 된것이다.

지금이 식민지 시대도 아닌데,

식민사학이 계승만 되는것이 아니라 발전하며 민족성을 파괴하고 있는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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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S 19-03-31 11:52
   
환빠님아 도대체 식민사학의 기준이 머죠?

식민사학 식민사학 거리는데, 설마 삼국사기(안타깝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나 조선초에 편찬된 관찬사서들의 입장을 따라도 식민사학이 됩니까? 이건 머 세종대왕도 식민사학을 추종하게 되겠네요? ㅋㅋㅋ

당장 철령만 해도 철령위 문제를 겪었던 시대와 근접한 조선 세종실록지리지만 봐도 나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철령은 강원도와 함길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즉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나옵니다.

고조선(위만조선 포함) 시대의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확정할 수 없겠지만, 고구려 평양성과 관련된 패수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조선초의 관찬사서 모두 패수를 대동강으로 확정합니다.

진국이란 개념 자체가 사실상 모호한 표현(실제로 이런 왕국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냥 고조선 지배를 벗어난 한반도 남쪽 지역에 대한 중국측의 표현이라고 보는게 타당, 삼한 자체도 고대왕국이 되지못한 다수의 군장국가들의 연맹체 정도)이지만, 이들이 중국세력과 교역하는데 고조선이 걸림돌이었다는 것에서 그 위치 비정이 현 통설과 같습니다.

식민사학 운운하기 전에 우리 조상님들이 편찬하신 정사들에 대한 공부부터 좀 하고 아가리 터시길. 이건 머 쪽바리랑 전혀 상관도 없는 세종대왕님도 식민빠로 매도시켜버리는 환빠님아 ㅋㅋㅋ

대륙백제, 대륙신라 이딴 환빠짓을 해도 상관없는데, 괜히 식민사학 운운하면서 세종대왕님까지 식민빠로 만들지 마세요.
     
감방친구 19-03-31 12:22
   
     
포테이토칩 19-03-31 14:07
   
저 위에 발제자 역시 <명사> 조선열전의 기록을 인용했잖습니까??
<명사>는 24사 중에서도 최고의 정사라고 인정받는 모양이던데요
     
신수무량 19-03-31 15:38
   
이님은 아직도 여기서 설치시네...식민사학의 기준은 님같은 역사의식임...알아먹었소?
조선시대 역사학이 다인 줄아네..잘못된 건 고칠 줄아야지..철령이 강원도 철령이오.?
모르면 그냥 끄지시죠 섬으로~~...식민빠가 괜히 식만빠가 아닌가봐요??
우리조상들의 역사서..ㅎ 그런데  그 역사서를 믿기나 한지 몰라..편취라도 안하면 다행이지..
          
칼리S 19-03-31 17:09
   
이 정신나간 인간 수준이 그렇지 뭘 ㅋ.

세종실록 지리지 한 번 봐라. 철령은 강원도와 함길도를 나누는 기준이다. 아무튼 무식한 놈들이 설치지. 조선시대 역사학이 다가 아니라,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의 정사 모두 환빠새퀴들이 주장하는거랑 맞지 않는데, 그들이 모두 식민빠라는 물음에 동문서답하고 자빠졌네.

아무튼 무식한 환빠새퀴들이나 유사뽕쟁이들이나 팩트는 아몰랑 해버리지 ㅋㅋㅋ.
영종햇살 19-03-31 12:0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대무신왕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빼앗아 한군현으로 삼다 ( 44년 09월(음)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한 광무제가 병사를 파병하여 바다(또는 강)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어 군현을 설치했다.
살수 이남의 땅은 한에 속하게 되었다."

살수가 한반도에 있다면 한반도 남쪽에 한나라가 있었다는  웃기는 얘기가됩니다.
     
포테이토칩 19-03-31 14:21
   
광무제가 살수 이남의 낙랑국에 군현을 설치한 기록이라고 봐야죠
(살수 이남의 땅이 전부 한나라의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살수 이남에 한나라가
위치해 있었다는 기록 역시 없음)
실질적인 지배는 단연 불가능했을 터이고요
          
yj12 19-04-01 08:03
   
왜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데도 어떻게 중국 기록에 살수 이남의 땅은 한제국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올수 있는가 하면 그건 한반도하고 중국의 방향이 반대로 위치해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현재 중국과 한국 사이에 흐르는 황해는 한국 입장에서는 서쪽에 있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동쪽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때 당시 평양에 있는 살수를 기준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평양까지가 살수이남이 되는 셈이죠
영종햇살 19-03-31 12:05
   
後漢書 서기 44년 기록
卷一下‧光武帝紀第一下
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동이한국인 솔중 예낙랑 내부.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도착하여 내부하였다.
(내부하다~적 또는 외부와 남몰래 통하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
(詣예~이르다, 도착하다).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나라도 한반도에 있어야 함~^^
     
감방친구 19-03-31 12:22
   
삼국사기 자체가 중국사서를 분석하여 교차 편집한 것이 내용분량의 대부분입니다

위 44 년 기록은 말그대로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기술이라 보는 게 타당합니다

고구려는 낙랑국을 멸한 후에 그 지역을 조차지 비슷하게 두었다 판단됩니다

낙랑국 자리에서 백제가 성장했다 보는 것이 제 추정입니다

그렇다고 그곳을 내버려뒀다든가 한나라 땅이 되었다 볼 수는 없습니다

신과 후한은 만리장성 밖의 경비를 오환 등 이민족에게 맡겨두고 있었고 곧 이어 공손씨가 차지했으며 조조가 오환 정벌에 나서는 시점에서는 노룡새 바깥의 도로가 모두 망실된 상태였습니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등의 인구가 전한 대비 급격히 줄었고 특히 요서군의 경우 현 진황도시 방면으로 쪼그라들었고 우북평군도 마찬가지로 쪼그라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바다 건너 군사를 보내서 어쩌고 할 정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태조대왕이 요서 10성을 세운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BC 1세기 초 현도군을 서쪽으로 밀어붙이며 성장한 고구려로부터 위나라 관구검 침입의 3세기까지 근 300 년이 한 맥락 속에서 흘렀습니다
          
포테이토칩 19-03-31 14:11
   
저와 견해가 비슷하시군요.
고구려는 국토를 두가지 방법으로 다스렸지요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 多勿 故以名焉
2년(기원전 36)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곳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땅을 빼았아 성읍으로 삼거나, 정복국의 왕을 그 지역을 다스리게끔 봉해서 반독립국화
시키거나.

여기서 낙랑국의 통치는 반독립국화 시킨다는게 더 개연성 있어보입니다
     
yj12 19-03-31 21:45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도착해 내부하였다는 기록은 그냥 그 주변에 있는 마한, 진한등의 동이 한국인들이 일부분 낙랑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인데 그게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으면 한나라도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과 뭔 상관임?
오히려 낙랑이 요서에 있었으면 마한, 진한같은 여러 한국의 국민들인 한국인들이 굳이 근처에 있는 지역이 아닌 멀리 떨어진 요서까지 이주해 가는건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역시 낙랑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고 그 밑에 있었는 여러 진한, 마한같은 한반도 국가의 국민들이 낙랑군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야지
실제로 마한, 진한같은 여러 한국의 동이 한국인들이 멀리 떨어진 요서보다 가까운 평양으로 이주하는게 훨씬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촐라롱콘 19-03-31 12:32
   
고려말기 당시 철령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철령위 설치를 두고 고려와 명나라가 옥신각신하던
바로 당대의 기록을 통해 확실히 비정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군을 출정시키기 전에 밀직제학 박의중에게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달라는 표문을 휴대시켜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표문의 내용 일부에는......

[철령은 우리 수도의 개경과 불과 3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공험진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닙니다. 제 부친(공민왕)때 다행히 현명하신 황제(주원장)의 치세를 만나 제후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우리 땅도 상국의 판도에 편입된 바 있습니다.

이제 미천한 이 몸(우왕)에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주심으로써 일시동인(一視同仁)
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옆드려 바라옵건데 폐하(주원장)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도타운 덕으로 어루만져주시며 앞에 든 몇 주의 땅을 저희나라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는(우왕) 나라를 다시 일으켜 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늘 폐하(주원장)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
.
.
.
위 표문 내용 가운데 [철령은 우리의 수도 개경과 불과 30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중략) ]

바로 결정적인 힌트가 나왔네요...!!!

개경과 300리 거리의 철령은 아무리 봐도 강원도와 함경도 경계의 철령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네요...!!!^^
     
감방친구 19-03-31 12:44
   
당시 고려 조정은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실제 명나라가 철령위를 최초로 둔 곳은 현 심양과 본계 사이에 있던 봉집현이었습니다 봉집현은 후에 봉집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 시대까지 남습니다

명나라는 고려의 반발과 무력시위 예고로 철령위를 봉집현에서 현 철령시로 이치시킵니다

이는 대명일통지에 그대로 적혀있습니다
     
감방친구 19-03-31 12:46
   
봉집현(옛 철령위)은 현 번시시가 아니다 ㅡ 복기대 교수 연구팀의 주장에 대한 반박
감방친구 작성일 : 17-12-19 18:15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366&sca=&sfl=mb_id%2C1&stx=cellmate&page=30
          
촐라롱콘 19-03-31 12:58
   
위소가 설치된 철령위와......

철령의 위치 포인트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감방친구 19-03-31 13:09
   
뭘 더 아는 척을 하시려고요? 적당히 찌그러지시지

쌍성총관부에 대해서 공부해 보시고
또 고려사에서 철령위 사건 당시 기사를 잘 읽어보세요
               
감방친구 19-03-31 13:10
   
있습니다만?

이건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르장머린가요?
한국 사람 가운데 이런 말 쓰는 사람은 일본앞잡이, 일뽕, 토착왜구, 그리고 한국인인 척 하는 일본인밖에는 없던데

어디 분이세요?
                    
촐라롱콘 19-03-31 14:05
   
이제는 하다하다 본 주제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사소한 표현 하나 가지고도 트집이신가요....!!! ^^
     
감방친구 19-03-31 12:51
   
명사 지리지 철령위 원문과 해석
감방친구 작성일 : 17-11-02 13:10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7571&sca=&sfl=mb_id%2C1&stx=cellmate&page=39
     
감방친구 19-03-31 19:34
   
감방친구 19-03-31 13:20
   
여러분, 이 촐라롱콘이라 자는 역사 기록에서 극히 일부만 발췌하여 철령과 철령위에 대한 오해를 일부러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자의 수법에 혹하지 마시고
해당 사건이 있었던 고려사 기사를 전체적으로 보셔서 맥락을 파악하시고 분별심을 잃지 마세요

우왕 14년(1388) 무진년 <국역 고려사 : 세가>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407&cid=49617&categoryId=49629

위 링크를 타고 해당 페이지에 가셔서 '찾기'로 '철령'을 검색하시면 해당 내용에의 접근이 용이합니다

사서 기록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면 금세 탄로가 나는 세상입니다
     
촐라롱콘 19-03-31 14:37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40)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두 명에게 군사 1천여 명을 딸려보내 강계부(江界府 : 지금의 자강도 강계시)에 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는 진작 철령위에 진무(鎭撫) 등의 관직을 두어 이들이 모두 요동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요동에서 철령까지 일흔 개소에 참(站)을 설치했으며 각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
.
.
.
님이 작성한 바로 위 댓글에서 님이 소개한 링크를 타고 들어간 해당 페이지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명나라 요동도사가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지휘 두명과 군사 1,000명을 보낸
지역이 압록강 이남인 '강계'군요...!!!

당시 압록강 이남에 위치한 강계일대가 명나라와 경계를 이루는
고려측 최북단 행정구역 또는 군사기지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당시 고려의 북방 경계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압록강
이남임이 거의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님이 평소 주장하셨던 압록강 건너 요동 남부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이었다는 내용과는
님이 링크해주신 자료만 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위 링크된 내용 가운데 저 또한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개소의 참을 설치하고 '참'마다 백 호를 두었다면
적어도 당시에 이미 고려의 영역이었던 오늘날의 함경남도일대에서도 여러 개의 참을
설치했다는 논리인데.....

적어도 고려 영역내에 설치한 참들에 대해서는, 이를 고려가 먼저 알지 못하고
명나라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상당한 의문점이기는 합니다.....!!!
          
감방친구 19-03-31 19:42
   
2년 전 게시글의 댓글을 보자면 촐라롱콘, 댁도 철령과 철령위를 구분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구먼

또한 명나라가 원의 쌍성총관부 지역을 그대로 승계하려고 고려에 강짜를 부린 정황까지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7241&sca=&sfl=mb_id%2C1&stx=cellmate&page=39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촐라롱콘 17-10-29 15:55 답변
철령이북에서부터 적어도 오늘날의 함경남도일대까지는 이미
고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명나라가 철령이북은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땅이니
원나라를 계승한 우리 명나라에게 다시 토해 놓으라고 강짜를 부린 것이고

이에 우왕과 최영이 반발하여 만주-한반도 일부를 관할하는 명나라 요충지에
해당하는 요동을 점령하여.. 위기를 정면돌파하려고 시도한 것이구요....

철령과 그 이북의 상당한 지역은 이미 고려땅인데 왜 철령일대를 치러가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감방친구 19-03-31 19:47
   
//님이 평소 주장하셨던 압록강 건너 요동 남부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이었다는 내용과는
님이 링크해주신 자료만 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

왜 그러세요??

내가 고찰을 통해 증명한 것은
고려 말이 아니라 고려 전기입니다
고려 예종까지 말입니다

제목도 '고려 전기 서북계 추적'이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감방친구 19-03-31 19:57
   
당시 명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의 기점은 현 혼하와 본계 사이에 있던 봉집현입니다

이는 제가 독사방여기요, 명사, 명일통지, 요사, 금사 등의 사서 기록을 교차해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즉 공민왕이 현 요심 지역까지 차지하고는 제대로 경영하지 못 했을 뿐으로 당시 고려의 실질 행정력은 현 압록강 선이 한계였습니다

당시 요동 지역에는 고려인들이 그냥 살고 있었고요

명나라가 현 강원도와 함남의 경계에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근거로 요구하자 고려 조정은 요동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쌍성총관부의 연혁을 설명하고 본래 공험진까지 고려 땅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죠



여말선초 명나라와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명나라가 요동도사를 최초로 설치해 이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와 만주에 대한 기미지배를 꾀하던 때로부터

ㅡ 봉집현 동서 500 리 선
ㅡ 연산관
ㅡ 봉황성
ㅡ 현 압록강

으로 변화합니다

조선은 현 압록강 이북의 땅에 대해서 요동정벌이 실패, 무화된 이후로는 명나라에게든 스스로든 조정 차원에서 전혀 거론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댁도 조선왕조실록 태조~태종~세종을 보면 알겠지만 오직 동북계, 즉 공험진까지의 영토를 공인해 달라고 요구를 계속 할 뿐입니다

여말선초의 우리나라는 현 요동지역을 경영할 능력이 없었고
당시 스스로 명나라 중심의 세계질서에 예속되는 것을 택하여 사대질서와 성리학을 국가 성립과 지속의 명분이자 원리로 삼은 만큼 더 명나라와 맞설 이유도 힘도 없었던 것이죠

즉 힘이 없어서, 또 명분의 굴레에 스스로 속박돼 가만히 앉아서 땅을 내어준 꼴이 된 것입니다
감방친구 19-03-31 13:31
   
우리나라에는 학계와 일반인 사이에 섞여서 사실을 편취, 비약, 왜곡, 부정적 화법 등의 수작과 수법으로 역사대중의 눈을 속이고 정신을 흐려서 역사공동체 구성원이면 누구나 품고 의지해야 하는 공동체 역사에 대한 긍지에 상처를 내고 또 역사대중으로 하여금 자기의 근본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끔 유도하여 이로써 쾌감을 얻고 이를 소임으로  아는 버러지보다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몸의 구속은 풀려났으나 정신은 속박돼 있는 강점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역사관심, 나아가 역사연구는 독립운동에 다름 아닙니다
     
촐라롱콘 19-03-31 14:03
   
[[우리나라에는 학계와 일반인 사이에 섞여서 사실을 편취, 비약, 왜곡, 부정적 화법 등의 수작과 수법으로 역사대중의 눈을 속이고 정신을 흐려서 역사공동체 구성원이면 누구나 품고 의지해야 하는 공동체 역사에 대한 긍지에 상처를 내고 또 역사대중으로 하여금 자기의 근본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끔 유도하여 이로써 쾌감을 얻고 이를 소임으로  아는 버러지보다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
.
.
설마 저를 염두해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무슨 음모론도 아니고..... ^^
어디서 돈 천 만원이라도 거져 준다면 또 몰라~~~
저렇게 해서 나에게 득이 되는 일이 도대체 뭔지....??? ㅋㅋㅋ

본인의 견해와 다른 이들은 죄다 쓰레기 취급하는
상당히 위험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계시네요.....!!!
          
포테이토칩 19-03-31 14:12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사실을 편취하는건 사실입니다
재야사학 몇몇도 그렇지요.
이에 대해서는 딱히 딴지를 걸만한 부분이 없다고 보입니다
          
신수무량 19-03-31 15:44
   
촐랑대지말고 말귀를 못알아들었으면 케이군이랑 손잡고 섬으로 고 하세요..본인의 의견이요? 쓰렉역사의식의 바탕에서 나오는 못되먹은 사고방식이거나 물건너 온 이이거나..
백운 19-03-31 15:12
   
매우 훌륭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몸은 풀려났으나 정신은 아직도 그물속에 갖혀 있는 상태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악령이 지독하게도 젊은 이들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는 중이지요.

처음부터 한민족의 정신을 죽이기 위한 사악한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니 그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온통 악으로 물들어 있음은 겪어보지 않아도 알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 겪어보니 이 놈의 악령이 온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우리의 역사를 토론하는 공간에는 어김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군요.

단 한 번에 그 뿌리를 와지끈 짜를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뭐, 그래도 어쩔수 없지요.
먼 길 돌아가더라도 바르게 가르쳐 가며 품안에 감싸 안아야 하는 것이지요.

스스로 머물러 있는 공간이 결코 정의롭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바른 길을 찾아서 갈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 또한 누구보다 현명한 한민족의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되면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올바른 역사를 전달해 줄 것이라 믿어봅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속박된 정신마저 완전히 풀려나는 진정한 자유를 맛볼수 있겠지요.

그러니 그들이 언제고 바른 길을 갈수 있도록 항상 깨우쳐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인생사 19-04-01 05:48
   
강원도인 이란 자하고 촐랑이는 동향 사람 같은데.
지누짱 19-04-01 11:30
   
좀 더 정확한 근거를 대면 좋겠습니다
yj12 19-04-01 19:14
   
그리고 관심병자 님은 위치를 중국기준이 아닌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겁니다
패수를 기준으로 한반도를 기준으로야 패수의 동쪽이면 평양의 서쪽이지만 중국 기준으로는 한반도랑 방향이 반대라서 중국의 영토를 기준으로는 패수의 동쪽으면 평양이 되는 셈이죠
진국역시 마찬가지로 중국 입장에서 동쪽이면 한반도 방향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왕이 스스로 자신들을 진국의 후예라고 말한 기록을 보여주시죠
     
관심병자 19-04-02 00:13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890&sca=&sfl=wr_content&stx=%EC%A7%84%ED%95%9C%EC%9D%98+%EC%98%81%EC%A1%B1&sop=and

고진묘지명(高震墓誌銘)

護公迺扶餘貴種辰韓令族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의 영족(令族)이었으나 교화를 그리워하여 땅을 연 후에도, 대를 이어 왕을 칭하면서 자손이 국빈(國賓)이 되어 식읍이 천실(千室)이나 되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7703&sca=&sfl=wr_content&stx=%EC%A7%84%ED%95%9C%EC%9D%98+%EC%98%81%EC%A1%B1&sop=and

『遼史』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辰州, 奉國軍

辰州, 奉國軍. 節度. 本高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勣攻破蓋牟城, 卽此. 渤海改爲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 最爲衝會. 遼徙其民於祖州. 初曰長平軍. 戶二千. 隸東京留守司.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高麗]의 개모성(蓋牟城)이다. 당(唐) 태종(太宗)과 이세적(李世勣)이 모여 개모성을 격파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고쳐서 개주(蓋州)가 되었다가 또 진주(辰州)라고 고쳤는데, 진한(辰韓)에서 이름을 얻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larladudtnr&logNo=220734710084&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kr%2Furl%3Fsa%3Dt%26rct%3Dj%26q%3D%26esrc%3Ds%26source%3Dweb%26cd%3D10%26ved%3D0ahUKEwit6duaqYjWAhXCmZQKHeQBBb8QFghOMAk%26url%3Dhttp%253A%252F%252Fm.blog.naver.com%252Frlarladudtnr%252F220734710084%26usg%3DAFQjCNFCqqtnT7NBZlj1kTMXs59M1kUsyw

백제 의자왕 아들 부여융  묘지명에도 있군요 ..公諱隆字隆百濟辰朝人...  진조인이다...

                                                          진조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족에서 나왔읍니다,  진한[辰韓]과 진조 [辰朝]에서 핵심이 진[辰]이란 단어속에

 있다면 범 부여족이 진국[辰國]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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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 구절에서 기준은 연나라 입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동쪽으로 건너 고조선의 평양으로 갔다는 겁니다.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일인데 다른 지점을 기준으로 잡아서 기록한다는게 말이 안되죠.
예를들어 2차대전 전쟁사를 동양에서 기록한다고 할때
우리기준으로 양쪽다 서쪽에 있다고 독일이 서쪽의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서쪽의 폴란드를 침공했다 라고 적을리가 있겠습니까?
남쪽의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동쪽의 폴란드를 침공했다 고 적지요.
굳이 사서에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렇게 추상적인 의미의 방향을 기록할리가 있을까요?
패수라는 한반도의 대동강은 사서에 기록된 패수와 물이 흐르는 방향도 반대로 흐르는 강입니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전제에 맞추기 위해 어거지로 끼워맞춘것입니다.
식민사학의 한사군 한반도 설에 끼워맞추기위해서,
갈석산 한반도설, 만리장성 한반도 시작설, 요동 한반도설등 억지주장을 내놓던게 주류사학이죠.
갈석산은 아예 사전에 한반도에 있는산이라고 적었썼지만 중국에서 워낙 유명한 산이라 무리수였고,
만리장성의 시작이 한반도에서 시작된다고 했지만,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시작되는건 요즘세상에는 상식이죠.
요동 한반도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구요.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지리비정을 했는가.
갈석산 부근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고, 이 갈석산 부근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사서기록에 맞추다보니, 한사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에 맞추기위해 한사군 주변의 지명을 다 한반도로 끌어온겁니다.
          
yj12 19-04-02 00:29
   
연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당연히 패수의 동쪽은 평양이 됩니다
그때당시 조선을 기준으로 하면 서쪽이 되겠지만
왜냐하면 연나라도 위치가 중국의 가장 동쪽 위치에 있는데 연나라를 기준으로 동쪽은 한반도 북부가 되니깐요
그리고 평양에 온갖 낙랑군 유물에다가 낙랑군 무덤만 한두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무역으로 나온 것 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나오고 있습니다(그리고 낙랑군 유물중 일제때 나온건 일부고 상당부분이 북한때 발견된것)
특히 무덤같은건 워낙 정교해서 조작 같은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한 두개도 아니고 그 많은 유물들은 일제가 티 안나게 조작하고 무덤까지 조작할 정도면 그때당시 일제는 거의 하이테크 수준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는 셈이고 그게 가능할 정도면 정작 가장 중요한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한반도 남부 유물을 정작 그렇게 대대적으로 조작 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말도 안되고
               
관심병자 19-04-02 00:51
   
그렇게 추상적인 의미로 동쪽을 사용했다면
위만이 동쪽으로 고조선 평양으로 갔다고 기록했겠지요.
기록에는 패수를건너 동쪽으로 평양으로 갔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님의 의견은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위만조선의 세력권과 맞지않습니다.
강단사학의 위만조선 세력의 평양은 연나라에서 볼때 동쪽이라기보다 남쪽입니다.
한반도 서쪽은 황해이구요 그 위에 발해(보하이만)가 있고 발해를 끼고있던게 연나라입니다.
그리고 연나라는 고조선과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였구요.
연나라 - 패수 - 고조선
이런식으로 당시 패수는 연나라와 고조선의 국경 역할을 했던걸로 추측할수 있죠.
즉, 패수를 서쪽으로 건너면 연나라땅입니다.
님 말대로 추상적인 의미의 동, 서라고 가정한다고 치자면,
한반도 북부에 연나라가 있었다는게 님의 주장인가요?
                    
yj12 19-04-02 01:04
   
추상적인 의미라보다는 연나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한반도 북부가 동쪽입니다
정확히는 동남쪽이지만(연나라 입장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남쪽 부분으로 가야 평양이  나오니)
그리고 고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요서와 요동을 빼았기고 고조선이 그 후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세력이 이동하거나 그걸 뒷밤치 해주듯이 세형동검이 한반도 북부에서 주로 나타나거나 평양에 온갖 낙랑군 유물과 무덤이 나온듯이 기록과 유물들이 뒷밤치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기록이 연나라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라서 당연히 패수의 지나서 동쪽은 연나라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한반도 북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고 제가 언제 연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했던가요?
                         
관심병자 19-04-02 01:39
   
한국의 현대 지명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부산이 동쪽에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산은 서울에서 동쪽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부산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간다고 표현하겠지요.
일반적으로 발해만 북부에서 한반도 평양은 남쪽이라고 표현했을겁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6461&sca=&sfl=wr_content&stx=%EC%9C%A0%EB%AC%BC+%EA%B3%A0%EC%A1%B0%EC%84%A0&sop=and&page=3
고조선 청동기 유물로 대표적인것이 비파형 동검입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보다 요서에서 더 많이 출토되었구요.
고조선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곳을 고조선 세력권에서 제외시킨게 현 주류사학입니다.
낙랑군 유물, 무덤.
점재현신사비는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을 이용해 성분 분석한 결과 요동에서 나는 돌로 만든걸로 나왔습니다.
https://blog.naver.com/gnacl77/40172932077

조선총독부가 옮겨놓은걸로 의심할수밖에 없죠.
장무이묘는 현대에 들어와 한국 고고학자가 직접가보고 조사해보니 전형적인 고구려무덤 양식이라고 나왔구요.
https://joonho1202.blog.me/221234036632

그외 여러 낙랑관련 유물은 다 일제시대때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던 일본인학자들이 발견한것 입니다.
한반도에서 가는곳마다 우연히, 쉽게 낙랑유물을 발견해내던 일본인학자의 일지에 북경에서 낙랑유물을 조선총독부 자금으로 사들였다는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죠.
http://www.historyin.org/?act=board&bbs_code=sub03_2&bbs_mode=view&bbs_seq=49

한반도인들이 수백년동안 살면서도 발견되지 않던것을 일본학자가 가는곳마다 쉽게 유물을 찾아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지요.
                         
yj12 19-04-02 02:50
   
그때당시 연나라에서 평양까지하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고 똑같이 비교하시니깐 오류가 나는 겁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그냥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로방향으로 가면 부산에 닿을 정도면 동쪽보다는 남쪽에 치우쳐저 있는 반면에 연나라에서 평양 까지는 동쪽방향으로만 한참 가다가 남쪽으로 가야 평양이 나올 정도로 남쪽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즉 상황이 다르다 이말입니다
그리고 점재현신사비과 요서에서 만들어졌다느니 비 밑에 시멘트가 있다니 등의 설이 있지만 그건 전부다 북한 학계의 주장인데 북한 학계는 대동강 5대 문명설이니 김일성 우상으로 독립활동 전공 과장이니 등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믿을수 없고 또 시멘트는 북한측이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 발랐을 수도 있어서 찌라시 설에 불과함 또한 장무이묘같은 경우는 그때당시 낙랑군이 평양에서 사실상 퇴출되고 평양이 고구려의 영향력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 유물과 유사점을 띄는 건 당연한거고(딱히 조작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그밖에 무덤 중에서 평양 정백동 1,2호나 평양 남정리 116호등 평양 내에서 많은 한사군 유물과 무덤등이 나옴
물론 일본학자가 자기 이름 알리기 위해 몇개는 조작했지만 그건 일부분에 불과한거고(특히 낙랑군 무덤은 지하식 구조라서 그걸 조작할려면 대규모 인력으로 장기간 정교한 작업을 해야해서 안걸릴수도 없고)
그리고 비파형 동검이야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요서와 요동을 빼았기기 전에 섰는 물건이니 요서와 요동에 대량으로 나오는 것 역시 당연하지만 그 후에 나타난 세형동검은 한반도 북부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을 볼때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요서와 요동을 빼았기고 그 이후로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 북부로 줄어들었는건 사실이라고 볼수 있겠죠(그럼 무제가 고조선의 핵심 영토인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 역시 당연하고)
그리고 어떻게 한국인들은 수백년동안 모르면서 일본인 학자들은 가는 곳 마다 쉽게 찾는냐의 님의 질문에 대한 반박으로는 사실 낙랑군 유물 상당부분이 일제때가 아닌 북한때 발견되거고 또 점재현시사비 역시
2000년동안 발견이 안되다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어서 조작설이 있지만 이미 그때 당시에는 근처에 마을에  비석이 대한 소문이 있었고 또한  실제로 갑자기 발견이 되는 그런 경우가 없는 것 또한 아닙니다(대표적으로 충주 고구려비 역시 1979년도가 되어서야 발견되었고)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글자에 새겨진 돌 이나 뼈가 흐릿하게 잘 안보여지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그게 중요한 유물이지 아니면 그냥 돌, 뼈인지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갑골문 역시 처음에는 문양이 새껴진 뼈로 여겨 약재로 사용되다가 전문학자에 의해서 연구가 시작되어서 그때 이후로 밝혀진 거고)
관심병자 19-04-02 08:53
   
일단 사서를 적는 사람은 당대의 지식인층 이고,
정사라는건 한두명이 적는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료를 수집해 머리를 맞대고 적습니다.
단순히 역사기록만 남기는것도 아니고 지리, 문화 관련 내용도 따로 모아서 기록을 해놓습니다.
지명, 방향을 제시해놓고 그걸 추상적으로 적을일도 없고,
그런식으로 적으면 같이 작업을 하던 학자들이나 후대학자들이 주석으로 지적이나 부연설명을 했겠죠.
발해만 북부 지역에서 한반도 평양은 남쪽입니다.
발해만 북부에서 한반도 평양이 동쪽이란말은,
부산이 서울의 동쪽에 있다는 말과 같은 수준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벗어나는 구절이라는 얘기입니다.

연나라에서 패수를 건너 고조선 평양으로 갔다라는 구절을 살펴보면
나라간 지역간의 이동을 말할때 중간에 넣는 지명의 성격은 어떤것일까요?
1.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대구로 갔다.
2. 서울에서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갔다.
3. 한국에서 미시시피강을 건너 뉴욕으로 갔다.
4. 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갔다.
누가 봐도 4번이 맞는 표현입니다.
1~3번도 굳이 따지면 맞는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없고, 듣는이의 입장에서는 그런식으로 표현하면 안된다고 테클을 거는게 일반적인 일입니다.
패수를 대동강으로 해석하는건 2,3번의 예를 필자가 말했다고 주장하는겁니다.
비상식적인 해석이란 얘기입니다.

https://blog.naver.com/zz56371/220808907205
한반도 북부 낙랑 출토 중국 한나라 청동 거울(漢鏡) 정리
낙랑지역에는 한나라 청동거울 수량이 매우 많고, 이른시기인 일제강점기부터 확인되었기 때문에 한경 연구는 중국 내지에서 출토한것이 아닌 낙랑에서 출토한 것을 가지고 먼저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고고학 발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국 무덤에 대한 연구도 낙랑 무덤을 가지고 했다는 말도 들은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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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이 뭔가하면 발굴된 유물을 한나라 유물과 비교해서 한나라 양식이다 라는게 아니라, 평양에서 발굴되었으니 한나라 영향을 받은 유물이다 라고 한겁니다.
한나라 유물의 특징을 보는 기준을 평양출토 유물로 잡았으니,
평양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모두 한나라 유물이 되는겁니다.
한나라 무덤을 발굴한 유물,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분석한게 아니란 겁니다.

https://blog.naver.com/zz56371/221135778023
중국고고학에서 본 한국(6) - 목곽묘(木槨墓)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161542471&code=960201
'낙랑'이 한국史일까...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구성 고심

“기원후 1세기 낙랑문화가 이른바 귀틀묘로 대표되지만, 중국 중원의 어느 지역에서도 낙랑고분의 속성을 갖춘 귀틀묘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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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있었던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나라 양식.
이걸 한나라 양식이라고 부를수가 있을까요?

http://egloos.zum.com/roks821/v/8002781
평양 정백동1호무덤(정백동제1호묘)
     
yj12 19-04-02 17:02
   
그러니깐 내가 말했잖아요
그때 당시는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던 시점인데 중국 기준에서 보면 한반도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동쪽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표시한 거라고.
그때 당시에는 한나라가 이미 중국을 통일했을때라 아마 연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영토 전체에서 비교했을 겁니다
아까 내가 연나라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은 그때당시 시대상황을 순간 떠올리지 못하고 잘못 말한 겁니다
그리고 사실 연나라를 기준으로도 연나라 가장 중심을 기준으로 남쪽보다는 동쪽으로 더 많이 가야 할 정도로 동쪽에 더 치우쳐져 있고
즉 님이 비교한건 거리나 방향이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쳐져 있는 상황을 가지고 비교한거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뉴욕까지 라는 예만 들어도 거리가 어느 한쪽에 치우쳐저 있는것)
그리고 평양에서 출토한 양식을 기준으로
한나라 유물을 설정했다?
그때 당시에도 중국에 고고학자가 있었고 그전에 갑골문 역시 청나라의 전문학자에 의해 그게 유물이라는게 밝혀졌고 특히 중원은 문자의 옥등으로 인해 고증학이 발달이 되었는데 과연 그전까지 중국 거의 상당부분의 영토에서 발견이 되었는 유물하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까요?
설령 님 말이 맞아서 중국 영토 전체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평양 낙랑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교하니 서로 똑같으니 한나라 유물이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분석한 결과 그게 전부다 한나라 시기때 유물이라는게 밝혀진다 해도 그게 거짓은 아님(왜냐하면 한나라를 기준으로 했든 낙랑군을 기준으로 했든 유물이 고유흔적이 똑같으면 그건 같은 유물이라는 거니깐)
그리고 평양 정백동 1호도 한나라의 양식을 어느정도 나타납니다(대표적으로 정백동1호에서 권총머리, 버섯머리 청동기 역시 중국계 청동기 유물이고)
그리고 조선의 양식도 나타나는건 낙랑군에 고조선인도 있었고 낙랑군의 유화정책으로 인해 낙랑의 관리중 고조선인도 많았기 때문에
          
관심병자 19-04-03 13:17
   
중국이라는 표현.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혹은 중화민국을 말하는것으로 고대시대에 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일단 넘어가고,
기록상 "패수, 동쪽" 이라는 키워드가 나왔습니다.
방위가 추상적인 표현이라면 패수라는 지명을 적어서는 안됩니다.
위에 다른 댓글에서도 적었듯이,
정사를 적는건 그 시대의 복수의 엘리트 지식인 입니다.
그런 횡설수설한 표현을 할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에 적었다 싶이,
그시대 연, 고조선 사이쪽 지형의 일을 기록하면서(거기가 요서이든 요동이든 한반도 북부던 간에)
그곳이 아닌 다른 위치를 기준으로 방위를 기록할리가 없습니다.
만약 위만이 연에서 조선으로간 구절에서 낙양을 기준으로 동쪽이라고 말할 의도라면,
패수란 지명을 적어서는 안되는겁니다.

님 말과 다르게 한국 지역에서 미국 지역으로 갈때 '태평양을 건너갔다', '태평양을 건넌다' 이런 표현은 자주해왔고 하고있는 표현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간것을 표현할때,
서울에서 출발해 대한해협을 건너 도쿄로 갔다 <이런 표현역시 자주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도쿄로 갔다 < 이런 표현은 위치관계가 애매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일반인 들도 안하는 표현입니다.
이런식으로 애매하게 표현하는건 언어, 사회성이 확립이 안된 미취학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중에 이런 애매한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위만이 조선으로 간 구절에 패수를 기록한건 이 패수란 지명에 조선, 연을 나누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단사학의 주장처럼 대동강이 패수라면,
한반도 평양은 패수를 안건너고도 갈수있습니다.
대동강은 평양 북쪽의 강이 아닙니다.
기록처럼 서쪽의 강도 아니지만요.

위댓글에도 적었듯이,
낙랑유적 즉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것의 대표적인 예로들었었던 귀틀묘는 정작 한나라가 있던 중원에서는 단 한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나라 중심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한나라 유물?
이걸 한나라 유물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들어봤을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낙랑은 왕이 있고, 공주가 있습니다.
한사군이 아니란 얘기죠.
태수가 왕을 칭할수가 없죠.
태수가 왕을 칭하는건 반역이고 당장 본국에서 군대를 꾸려 토벌하러 가야할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낙랑 관련은,
은나라 기자가 낙랑조선으로 갔다는 구절입니다.
은말주초에 이미 낙랑이란 단어가 나왔고,
낙랑이란 문구는 한나라와 관련이 있으니,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엔 이미 한나라가 존재했다는 얘기일까요?
모든 '낙랑'이란 문구가 들어간것을 한나라와 연결지어 버리는게 과연 옳을까요?

한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나라식 무덤양식.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이 가장많이 발견된곳을 고조선의 영역에서 제외한것등.
현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학은 고고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낙랑유물의 재밌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전, 그후의 유물이 없이 오직 낙랑유물만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낙랑유물이 출토되는곳이 위만조선의 중심지, 기자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위만조선, 기자조선의 유물도 발견되지않고, 그후의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죠.
일본인 학자들은 평양인근에서 오직 낙랑 유물만 발견해 냈습니다.
이런 학풍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서,
북한이 평양인근에서 고구려 무덤을 발견했다고 발표해도,
믿을수 없다면서 저건 한나라식 낙랑무덤이라고 하는게 한국학계 입니다.
네 한나라 본토에는 없는 오직 낙랑에만 존재하는 한나라식 말입니다.
               
yj12 19-04-03 17:08
   
중국이란 말은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말이라서 굳이 지금의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된게 아닙니다
기록보면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도 스스로를 중국이라 했으니
그리고 연나라 영토를 기준으로도 동쪽을
지나 패수로 건넜다란 말은 전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왜나하면 연나라 영토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갔다는 말은 한반도 북부로 갔다는 말이고 거기서 패수를 지났다는 말은 패수가 한밧도 북부에서도 남쪽에 있으니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가 지금의 평양에 갔다는 말이니
아주 자세하게 적어놓은 것이죠
그리고 낙랑국이야 낙랑군과는 다를수도 있지만 나중에 낙랑군의 태수긴 독립해서 왕이되서 낙랑국을 세웠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건 그런거고 그리고 은나라의 기자가 낙랑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정확히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가선 조선후로 봉해졌다가 기록에 있을뿐
그리고 왜 낙랑군 무덩방식(귀틀묘)가 한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아 그곳에서 한나라식 유물은 나오는데 무덤방식이 다르냐 하면 애초에 낙랑군의 고조선의 문화를 인정해줬고 그곳의 지배자가 대부분이 조선이이기 때문이죠
즉 낙랑군은 흔히들 우리가 생각했던 일제의 그런 전형적인 식민통치 방식이 아닌 한나라인과 조선인의 문화와 형태를 그대로  인정해주었고 낙랑군의 주요 지배자들 역시 조선이이여서 그래서 낙랑군의 무덤은 한나라와 조선의 형식이 결합되어서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낙랑=평양에서 지금의 삼국시대 유물이나 고조선 유물 잘만 나오고 조선시대 유물까지 나오는데 낙랑군 유물만 나온다는건 이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그리고 일본인 학자가 평양에서 낙랑군 유물만 발견해되고 지금도 한국학계가 평양에서 발견된 유물은 무조건 낙랑군 유물이다고 우긴다는건 도데체 어디서 나오는 소리임?
그럼 지금 한국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고구려 유물은 뭐임?
그리고 사실 무제가 조선을 정복하고 사군을 요서지방에 설치했다는게 진짜 말이 안되는게 조선은 진개에게 요서와 요동을 빼았기고 난후 한반도 북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정작 조선을 정복하고 조선의 영토가 아닌 자신들의 영토에 통치기관을 설치했다는게 말이 됨?
                    
관심병자 19-04-03 18:17
   
당나라는 선비계통 나라고 명나라는 중원남부 (한족?), 청나라는 만주족 나라입니다.
지금의 중국이 이들의 옛땅을 갖고 있다고 이나라를 중국으로 표현한다면,
마찬가지로 지금 중공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역사인 부여, 고구려도 중국의 역사라는 말인가요?

하나의 천하관에서 황제국가가 2개가 있을수 없듯이,
태수는 왕을 칭할수 없습니다.
태수가 칭왕을 한다는건 9족을 멸할 죄입니다.
간단하게 '태수가 왕이라 했겠지' 그시대 사람들에게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朝鮮1)王満者, 故燕人也.2) 自始全燕時3)嘗略屬真番、4)朝鮮,5)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6)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7)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8)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 都王険.9)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10)皆來服屬, 方數千里.11)

조선(朝鮮)의 왕 만(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당초 연은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변방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망시키고 요동(遼東) 바깥 경계에 귀속시켰다. 한(漢)이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에 소속시켰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은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추결(魋結, 상투를 틀다)을 하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비어 있는 지역을 점거하고, 변방을 오가며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 때를 맞이하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는 곧 위만과 외신(外臣)이 되어 요새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들어와 천자를 만나고자 할 때 금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를 보고하니 주상이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115. 조선열전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 한자 원문 (사기 : 열전,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谷償;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欲自贖者,人五十萬。雖免爲民,欲猶羞之,嫁取無所讎,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辟。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퇴하자,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양잠과 길쌈하는 법을 가르쳤다. 낙랑조선(樂浪朝鮮)의 백성들에게는 범금 8조(犯禁八條)가 있었다. 사람을 죽이면 즉시 죽이고, 다치게 하면 곡물로 배상하며, 도둑질한 남자는 집안의 종(奴)으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았다. 속죄를 하려면 50만전을 내어야 하는데, 다시 백성이 되어도 풍속이 그를 부끄럽게 여겨 여자들은 시집도 갈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았고, 문도 닫지 않고 살았다. 부인(婦人)들은 정절과 신의를 지키며 음란하지 않았다. - 『漢書』卷28下「地理志」8下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28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2017년 9월 20일 평양시 낙랑구역 보성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을 새로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평양의 ‘낙랑구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씨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 지역을 뜻한다.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길이 300cm, 너비 268cm, 높이 184cm로 이 부부 무덤은 돌로 무덤칸을 조성하고 동·서·북쪽의 벽에 검은 색 안료로 벽화를 그렸다.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고구려 개마무사 벽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성 시기다. 조선중앙통신은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남한 식민사학의 도그마에 따르면 3세기 전반에 평양에서 고구려 지배층의 무덤이 나오면 안 된다. 313년까지 중국 한(漢)나라의 식민지인 낙랑군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yj12 19-04-03 19:43
   
중국이란 말은 그냥에 세상의 중심이란 말이기 때문에 한족뿐만 아니라 선비족, 만주족도 사용해서 단순히 한족국가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낙랑군, 낙랑국이 동일성과 별개성이 있는데 동일성은 낙랑군의 태수가 스스로 독립을 해서 낙랑국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전한이 무너지고 신나라가 세워졌는 혼란기였으니 그 틈을 이용해  낙랑군 태수가 스스로 독립을 했다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별개설은 그냥 낙랑군과 낙랑국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전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말한 겁니다
그리고 님 기록에 나오는 낙랑조선은 확실히 무제가 설치했기 이전에 나왔는 낙랑이니 옛 조선을 가르키는 말이겠군요
즉 은말주초에 나온 낙랑과 무제가 설치한 낙랑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은말주초에 나온 낙랑은=조선이라면 무제가 설치한 낙랑을 조선을 점령하고 그곳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기관이고(어쩌면 낙랑군이 조선의 영토를 통치하는 기관이었고 그런 조선의 이름이 낙랑조선이니 낙랑군이라는 이름도 낙랑조선에서 따왔을 수도 있고)
그리고 북한이 발견한 2세기 고구려 벽화는 사실 낙랑군이 평양 전체를 계속 끝까지 통치했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그 3세기이전에도 낙랑군 유물이 아닌 다른 유물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게 없습니다
만약 별개설대로 낙랑국과 낙랑군이 동시에 평양에 있었을 경우 아마 고구려는 낙랑국을 점령한 이후 평양의 지역 일부분을 차지했을 거고
그리고 역사는 유물이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두기가 아닌 대규모 한나라 양식의 유물이 나오기 때문에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포테이토칩 19-04-03 20:08
   
학계통설 상으로는 낙랑군 조선현이 현 평양이고 곧 낙랑군 치소인데 낙랑군이 끝까지
평양을 점유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후한서 군국지엔 낙랑군 속현으로서 조선현이 언급되는데요??
                         
yj12 19-04-03 20:41
   
포테이토칩님
낙랑군이 평양 전체를 점령한게 아니라 그중에서 상당 부분만 점령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평양이 조선시대 때도 서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라서 상당히 넓은 곳이고
그리고 낙랑군 낙랑국 별개설도 둘다 평양에 동시에 각각 존재하였다는 설입니다
(뭐 이덕일 같은 유사학자들이야 낙랑군은 무조건 요서지역이니 다른곳에 있었다고 하겠지만)
                         
포테이토칩 19-04-03 20:52
   
??? 상당히 특이한 학설이군요.
예, 일단 알겠습니다
                         
yj12 19-04-03 23:48
   
상당히 특이한 학설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사학계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다고 지정해서 별개설은 둘다 평양에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물론 유사학계야 줄기차게 요서를
 주장하니 다르게 주장하지만)
                    
포테이토칩 19-04-03 18:22
   
1.낙랑군의 태수가 뭔 독립을 해요?? 애초 24사 지리지
모두 낙랑군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조에는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런데 고구려 본기에는 이 이후로도 꾸준히 '낙랑군'은 등장합니다.

이는 낙랑국과 낙랑군이 별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2. 그리고 중국의 정사에서는 분명 낙랑태수 파견 관련 기록이 많은데, 그곳의 지배계층이
조선인이라는 근거는 뭐죠??

3. <사기> 조선열전에는 분명 요동의 옛 새(즉, 성과 같은 군사기지 정도 되겠죠)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이는 곧 조선이 요동지역을 점유했다는
근거가 됩니다
                         
yj12 19-04-03 20:05
   
낙랑군=낙랑국 동일설에서 설명하자면 그건 한나라때의 문헌이나 금석문에서 국을 군또는 방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이고  그 이후에도 나오는건 고구려에게 멸망후 광무제가 다시 재설치하고 미천왕때에 비록서 완전히 멸망했다고 설명할수 있지만 사실 너무 의문인점이 많아서 따로 님 말대로 별개설이 있습니다(그래서 저도 무조건 낙랑국=낙랑군이라 말한게 아니라 위에서 낙랑국과 낙랑군이 다를수도 있다고 말한거죠)
하지만 그거랑 상관없이 평양에 대규모 한나라 유물이 나왔고 진개의 침략이후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 지형으로 쫓겼났고
그걸 증명하듯  세형동검역시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니 낙랑군은 평양에 있다고 보아야죠
그리고 낙랑에 지배자는 한족이여도 그 밑에 관리들 중 조선인 지배자가 많았는 이유는 평양이 한나라 본토로부터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서  중국의 토착사회가 조선 지역에서 그들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 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가 한족을 지배하고도 한족 정책을 많이 섰듯이)
그 증거로 낙랑군 유물과 한나라계 유물 말고도 세형동검 같은 조선계 유물도 같이 나오죠
그리고  한이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가 어려워서 요동의 옛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아 그곳이 연에 소속 시켰다는 기록은 말 그대로 한나라가 요동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지키기 힘들자 요동에 군사기지를 세워 국경을 강화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아 그 땅을 연나라 영토로 했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조선이 요동지역을 점유했다는 기록임?
기록에 조선이 요동에 요새를 세워  조선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음?
오히려 연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지
                         
포테이토칩 19-04-03 20:51
   
예, <사기> 조선열전 관련해서는 다시보니 제 실수가 맞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기록은 어떨까요??
<사기> 흉노전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以往者 東接穢貉 朝鮮
모든 좌방의 왕들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고
상곡에서부터 동쪽으로 예맥/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한서> 권94 흉노전
諸左王將居東方 直上谷以東 接穢貉 朝鮮 右王將居西方 直上郡以西 接氐 羌 而單于庭直代 雲中
이 역시 조선/예맥이 상곡 이동에 접하였다는 기록이죠.

그리고, 연나라는 얼마 안가 크게 약화되어 망하는데, 그 즈음에 조선이 다시 영역을
회복했을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군을 '국'이라 표현한 사례가 많다 하셨는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공손씨를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공손씨가 '국'이 된 건 위촉오 삼국지로
찢겨졌을때의 일이라고 알고 있네요.

p.s: 제 처음 댓글을 보니 살짝 님이 불쾌할 어투가 섞여있네요.
이에 대해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yj12 19-04-03 23:57
   
님말대로 사기 흉노전에서 상곡에서부터 동쪽으로부터 조선과 경계를 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확실히 요동까지야 조선이 그 이후 잠시 연나라로부터 되찾았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이미 한나라때는 기록에도 있듯이 요동에 옛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기준으로 그곳을 연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에서 확실히 그때즘에는 조선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었다는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군을 국이라 표현한건 원레는 제가 그 출처를 올릴려고 했는데 컴퓨터가 고장나서 내일쯤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낙랑군=낙랑국 동일성과 낙랑군 낙랑국 별개설은 아직 확실이 결론이 난게 아니니 너무 진지하게 생각을 안하셔도 됩니다.
                         
포테이토칩 19-04-04 07:59
   
연에 소속시켰다는건 곧 이 기록이 연나라 대의 기록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yj12 19-04-04 19:19
   
출처 올리겠습니다.
한대의 문헌과 금석문이 郡을 '邦' 또는 '國' 으로 표기한 예는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楊鴻年(1985),「漢人視郡如邦國」, 『漢魏制度叢考』, 武漢大學出版社, 275~276쪽은 한대인들이 郡을 邦國으로 인식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삼국사기』중 낙랑군을 '國' 으로 표기한 예로 낙랑국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주장은 찬성하기 어렵다.
http://shaw.egloos.com/1894340
그 밖에 낙랑군이 단순히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나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처럼 그런 강압적인 식민 통치 방식이 아닌 굉장한 유순한 통치 방식이었단는 근거
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5&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
연 장수 진개의 침략이후 세형동검 분포도
https://mrpage.tistory.com/392

그리고 연에 소속시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연나라 영토에 속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때는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이후고 상식적  생각을 해도 만약에 반대로 조선이 요동지방에 군사를 보내  그 땅을 조선에 소속시켰다고 적혀져 있으면 말 그대로 조선이 요동을 점령했다고 해석하듯이.
                         
포테이토칩 19-04-04 20:32
   
한대의 문헌과 금석문이 郡을 '邦' 또는 '國' 으로 표기한 예는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楊鴻年(1985),「漢人視郡如邦國」, 『漢魏制度叢考』, 武漢大學出版社, 275~276쪽은 한대인들이 郡을 邦國으로 인식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삼국사기』중 낙랑군을 '國' 으로 표기한 예로 낙랑국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주장은 찬성하기 어렵다.
-------------------------------------------
???

제가 그 사례를 모르니까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거 아닙니까, 그러면 군을 국으로
칭했다는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패수의 위치는 아직 논쟁이 분분한데요, 심지어 최근 강단주류는 고조선 당시
패수를 혼하로 보는 학설도 있습니다.
                         
yj12 19-04-04 20:41
   
이성규 학자가 군을 국이라 방이라 표시한건 1985년도에 나온 저 책에 나온 사례를 예시로 든것 같은데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올린겁니다
뭐 그리고 저도 저 무조건 낙랑군=낙랑국 이라 생각하지 않으니 그냥 너무 진지하게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습니다(그냥 그런  의견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시는게)
그리고 전세계 정식학계에서도 낙랑군을 평양에 있다고 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고 있습니다(다만 의견이 분분하건 한사군이 평양에 있지않고 요서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류들은 당연히 패수를 요서에 있는 강이라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세종실록 지리지 보아도 패수를 평양에 있는 강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죠
                         
포테이토칩 19-04-04 20:58
   
조선시대 사서들은 광개토대왕릉비를 금황제묘비라 주장하는 등 상당히 오류가 많은
기록들이 보입니다. 즉, 세종실록시리지의 기록을 마냥 신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낙랑군 낙랑국 별개설은 일단 저는 거의 100% 별개라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님도 별개설의 가능성에 동의하셨으니 긴 말 않도록 하죠.

그리고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는 패수의 동쪽에 진나라의 상하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의 영역이 진나라 대보다 더욱 커졌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한나라 때에는 패수가 국경이니까)
                         
yj12 19-04-04 21:25
   
기록 자세히 보면 위만이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땅인 상하장에 머물렸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럼 한반도를 기준으로 상하장이 패수보다 더 동쪽에 있단걸 알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말은 진나라가 평양까지 점령했다는 말인데 여기서 생각할수 있는건 정상적으로 2가지 경우죠
1 상하장은 진나라가 진승 오광의 난때 진나라인들 수백명이 피난간 곳인데 진나라인들이 이주한 것을 정복한 것처럼 기록을 조작했다
2 패수가 단순히 대동강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강의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화기 때문에 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할때 있었는 패수는 대동강을 말하는 거지만 그 전에 패수는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있는 강을 가리켰다
근데 전 2번째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조선이 진개에게 밀린이후 일시적으로 잠시 요동이나 요서지역을 되찾았 더라고 하더라도 잠시일 뿐이고 무제에게 망할때는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한정이 되었을 겁니다( 연의 진개에 침략이후 세형동검이 요서나 요동보다는 한반도 북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낙랑군 유물이 평양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한이 요동의 옛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기준으로 삼아 연에 소속시켰다는 말은 그때당시 패수가 중국지역이 아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말이니)
3패수는 무조건 요서지역에 있었던 강이다( 근데 이 주장은 당연히 조선이 망할
 때까지 요동과 요서지방을 정복했고 따라서 낙랑군 역시 요서에 줄기차게 낙랑군=요서를 주장하는 유사학자들 주장인데
그 분들 주장은 한이 요동의 옛 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아 그 땅을 연에 소속시켰다는 기록과 그 밖에 세형동검 분포도 평양에 있는 각종 낙랑군 유물들 기록과
 유물에도 모순되는 주장이라서 신뢰성은 당연히 없음)
3번째 주장은 신뢰성은 당연히 없으니 패스하면 전 첫번째와 두번째 경우 둘중 하나인데 어느 한쪽이 맞다고 하더라도 무제에게 조선이 망할때 패수는 대동강이라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첫번째 조작설보다 두번째 더 신뢰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살수, 패수같은 옛날에 있던 강 이름이 지금에 없는 것처럼 강의 이름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건
전혀 이상할게 없기 때문에)
                         
포테이토칩 19-04-04 22:20
   
강의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화기 때문에 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할때 있었는 패수는 대동강을 말하는 거지만 그 전에 패수는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있는 강을 가리켰다
근데 전 2번째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조선이 진개에게 밀린이후 일시적으로 잠시 요동이나 요서지역을 되찾았 더라고 하더라도 잠시일 뿐이고 무제에게 망할때는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한정이 되었을 겁니다( 연의 진개에 침략이후 세형동검이 요서나 요동보다는 한반도 북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낙랑군 유물이 평양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한이 요동의 옛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기준으로 삼아 연에 소속시켰다는 말은 그때당시 패수가 중국지역이 아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말이니)
-----------------------------------------------------------------------------
낙랑군 유물?
북한학계는 소위 그것을 낙랑국 유물로 봅니다만,

고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요, 평양의 중국계 유물유적이라는 것도 솔직히
뭘 이르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제 딴에서 반박을 드리자면요.

중국계 유물은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도 상당히 많이 발굴됩니다. 그러면 당시 서울까지
한의 영역이였는가?

백제 무령왕릉 역시 중국 형식의 고분인데, 이것은 당시 백제가 중원의 똘마니였단
건가??

진고구려솔선백장 역시 마찬가지일까??

당연히 아닙니다.

즉, 당시 평양지역에 자리잡던 세력(낙랑국/마한 북부 세력 등)이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했다고 해석할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연나라 침입 이후 고조선계열의 유물이 한반도 북부에 많이 나타나므로
아마 다시 축소되었을 것이다??

'연나라 침입 이후' 고조선 계열 유물이 북한지역에 많이 나온다는 자료를 제시해 보세여.

글고 제가 인용한건 비단 <사기> 만이 아니라 <한서>도 있는데요??

그리고 한이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는 말이 왜 패수가 현 북한에
있다는 근거가 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yj12 19-04-04 22:36
   
포테이토칩님
제가 위에 올린 세형동검 분포도를 보시죠(실제 교과세에도 실려있는 사진임)
그리고 낙랑군 유물같은 경우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도 평양 정백동 1호등 손쉽게
알수가 있고  국내 중앙박물관에만 있는 것만 해도 수천점에 달합니다
그리고 국내 중앙 박물관에 있는 것만 해도 수천점이라는건 다른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일본에 있는 낙랑군 유물 그리고 전체
 낙랑군 유물 중 거의 상당부분이 있는 북한에 있는 유물까지 합치면 최소한 수만점은 넘는 다는 건데 무역한것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죠
http://egloos.zum.com/roks821/v/800278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0008
그리고 북한 학계는 정상이 아니에요(그쪽 동네는 김일성 우상으로 인해서 독립활동도 과장 왜곡 때리고 그냥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시키는 동네여서)
그리고 한이 요동의 엿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그곳이 연에 소속시켰다는 말을 요동까지 한나라 영토가 되므로 그럼 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지역이 되고 무제가 패수를 건너 수도 왕검성을 친 패수가 한반도 북부지여에 흐르는 강인걸 알수가 있죠
                         
포테이토칩 19-04-04 22:42
   
이런............. 제가 사서 원문을 올리죠.
<사기> 몽염열전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戎狄)을 내쫓고, 하남(河南)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34372&cid=62144&categoryId=62250

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요동에 닿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의
기점은 요서 지역인데 말이죠. 이는 당시 요동이 현 요하 동쪽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형 동검은 조선뿐 아니라 삼한 세력의 유물이기도 합니다.
(부가적으로 설명드리자면, 후한서/삼국지 모두 준왕이 위만에게 떠밀리고 마한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단 기록이 있으니, 고조선의 유물계통과 마한의 유물계통은
서로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솔직히 일제때 발굴된 유물은 신뢰성에 의심가는 바가 크기도 하고요.
                         
yj12 19-04-04 23:07
   
만리장성은 요서의 끝에만 닿는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문제가 된게 중국이 만리장성이 무슨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확대하고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딱히 그때당시 요동이 진나라의 영토가 아니였다는게 아니 라)
https://ko.wikipedia.org/?title=%ED%86%A0%EB%A1%A0:%EB%A7%8C%EB%A6%AC%EC%9E%A5%EC%84%B1#%EC%9A%94%EB%8F%99%EB%B0%98%EB%8F%84%EA%B9%8C%EC%A7%80_%EB%A7%8C%EB%A6%AC%EC%9E%A5%EC%84%B1%EC%9D%B4_%EC%9D%B4%EB%A5%B4%EB%A0%80%EB%8B%A4?
특히 라요닝성 일대의 만리장성은 수십년전부터 고고학적으로 공인되어 있던 것이고
그리고 요동지역은 수천년 역사에서도 지금 현재 랴오둥 반도를 가리켰고
그리고 세형동검은 단순히 조선뿐만이 아니라 삼한 세력이 유물이란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런 조선이 그 이후에도 계속 요동과 요하를 장기간 지배했으면 단순히 요동과 요서지역에도 한반도만큼 집중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깐 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요동과 요서 지역을 빼았긴 이후에는 그후 잠시 탈환을 하더라도 그 전만큼 장기간 통치를 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처음 발견된 낙랑군 유물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아무련 관련도 없습니다.
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5&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
그리고 사실 낙랑군 관련 고분들중 북한에서도 발견된 것도 상당부분 있고 (대표적으로 평양 정백동 1호나 신천 새날리 1호등) 그리고 낙랑군 고분은 지하식 구조라서 그걸 조작할려면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서 장기간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안 걸릴수가 없습니다.
                         
yj12 19-04-04 23:18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한반도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지나치게 꺼려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게 바로 낙랑군을 무슨 영국의 식민통치인 인도제국이나 일본의 조선총독부 같이 생각하니깐 그런겁니다
그때당시 한나라인들은 지배자 우리는 저들의 지배를 받는 노예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실 낙랑군이 말이 통치기관이지 그중에서 지배자 상당부분은 조선인이였고 절대로 한족의 지배를 받은 노예가 아니니
(즉 낙랑군은 그런식의 식민통치가 아닌 서로 협력해서 운영하는 체제였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그게 그렇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도 절대로 아니죠)
                         
포테이토칩 19-04-04 23:21
   
특히 라요닝성 일대의 만리장성은 수십년전부터 고고학적으로 공인되어 있던 것이고
>>님이 고고학적 자료를 들어보세요. 정설은 산해관 일대가 만리장성의 기점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발굴되지 않은 유물들이 존재할수도 있습니다. 단정적으로 해석하시는군요.

그리고 식민사관이란 단어는 꺼낸적이 없는데 갑자기 왜요??

누가 낙랑군 평양설 밀면 다 식민이래요??

일단 일제시절 발굴된 유물들은 조작의혹들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북한은 낙랑군 유물 대다수를 낙랑국의 유물로 봅니다.
직접 발굴한 측은 결국엔 북한인데, 어떻게 거짓말이라 단정합니까??
                         
포테이토칩 19-04-04 23:27
   
그리고 지금 낙랑군의 위치 논쟁을 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통치방식을 언급하시는지요?
                         
yj12 19-04-04 23:46
   
네 그 점에 대해서 제가 잘못 알았네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거짓임을 알수긴 있나면 북한이 낙랑국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낙랑군 유물의 형태가 한나라 양식을 띄는 것이죠( 그 점에 대해서 한나라에서 수입했다고 변명도 궁색한게 그런 것 치고는 한나라식 낙랑군 유물이 너무 많음)
그런  유물들과 세형동검 분포도를 통해 낙랑군=평양인걸 알수가 있는거죠
그리고 일본학자가 자기 이름 알릴려고 몇개는 날조했지만 그건 정말로 소수에 불과합니다(만약 거의 대부분을 날조했다면 그게 들키지 않을 리가) 특히 북한때 발견된 낙랑군 유물도 상당한데
그리고 낙랑군 통치체제에 대한 말한건 사람들이 그렇게 낙랑군=평양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일제의 그런 식민통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크고 혹시 님도 그중에 하나일수도 있어서 그걸 말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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