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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0일 (토)

[한국사] 고려와 명의 철령위 분쟁

감방친구 조회 :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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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고증은 현 강단사학계 통설
* 내용의 포인트
ㅡ 철령과 철령 이북은 본래 고려 땅으로 원나라와도 오해를 풀어서 고려 땅으로 되돌렸고, 쌍성총관부 관할도 아님
ㅡ 명나라에게 그 사실을 표문으로서 고지
ㅡ 우왕의 요동 공략은 이성계의 쿠테타로 실패했지만 명나라의 철령위를 지금의 요동 개원으로 철수시키는 역할을 함
ㅡ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의 함경도ㆍ강원도로 비정된 지명들이 많이 이상함
ㅡ그리고 요동 및 남만주는 본래 고려 방계 심양왕의 관할구역으로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
ㅡ 개성~지금의 철령 300 여리, 개성~평양 400여리

ㅡㅡㅡㅡㅡㅡㅡ


설장수(楔長壽)가 명나라로부터 귀국해 황제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태세와 전함 건조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 :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동남부지역)·심양(瀋陽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신주(信州 : 지금의 중국 장시성 상라오시)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29)를 설치하려 하자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중지를 요청하게 했다.
“넓고 큰 하늘이 만물을 빠짐없이 덮어서 키우듯이 제왕이 흥기하면 반드시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하게 마련이오니 이에 간곡한 하소의 말씀을 황제폐하께 올리려 합니다. 저희 나라는 먼 변방에 자리잡고 있어 얼굴에 난 사마귀처럼[墨誌]30) 땅이 좁으며 돌밭과 다름없이 지세가 험준한데다 동쪽 귀퉁이로부터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산과 바다에 끼어 지리적 조건이 매우 열악합니다. 이미 조상대로부터 영토가 획정되어 있는 바, 따져보면 철령(鐵嶺) 이북의 문주(文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고주(高州 :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 : 지금의 함경남·북도에 있는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 내지 함흥시 대덕리산성·상대리산성에 위치)에 이르는 지역은 계속해서 본국의 영토에 속해 왔습니다.
요나라 건통(乾統 : 요나라 天祚帝의 연호) 7년(1107)에 동여진(東女鎭)31) 등이 난을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했으나 우리 예왕(睿王(睿宗))이 토벌에 나선다는 것을 요나라에 통보한 다음 군대를 파견해 영토를 수복하고 나아가 함주와 공험진 등에 성곽을 수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원나라 초기 무오년(고종 45년, 1258)에 몽고의 산지대왕[散吉大王]32)과 부지르노얀[普只官人] 등이 군사를 지휘해 여진을 복속시킬 당시 본국 정주(定州)의 반민(叛民)인 탁청(卓靑)33)과 용진현(龍津縣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북성) 사람 조휘(趙暉)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투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자들이 금나라 때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근처 심주(瀋州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쌍성현(雙城縣)이 위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본국 함주 근처 화주에 있는 오래 전 수축한 작은 성 두 개소가 쌍성이라고 모호하게 일러주자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화주에다가 아무렇게나 쌍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조휘를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각각 임명해 그 지역 백성들을 관할하였습니다.
지정(至正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6년(1356), 본국에서는 원나라 조정에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서 소위 쌍성의 총관과 천호 등의 관직을 폐지해 버리는 한편 화북·이북지역을 본국에 다시 소속시켜 현재까지 주현(州縣)의 관원을 임명해 지역 백성들을 관할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은 반적들에 의해 침탈당했다가 우리가 원나라에 알려 다시 우리 영토로 귀속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내려온 폐하의 지시에는,
‘철령(鐵嶺) 이북과 이동과 이서 지역은 애당초 개원로(開元路)에 속했던 것이니 그 관할하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도 요동(遼東)에 소속시키도록 하라.’
고 되어 있습니다. 철령은 우리 수도인 개경과 불과 3백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공험진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닙니다. 제 부친 때 다행히 현명하신 황제의 치세를 만나 제후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우리 땅도 상국의 판도에 편입된 바 있습니다.
이제 미천한 이 몸에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주심으로써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도타운 덕으로 어루만져주시어 앞에 든 몇 주(州)의 땅을 저희 나라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늘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40)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두 명에게 군사 1천여 명을 딸려보내 강계부(江界府 : 지금의 자강도 강계시)에 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는 진작 철령위에 진무(鎭撫) 등의 관직을 두어 이들이 모두 요동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요동에서 철령까지 일흔 개소에 참(站)을 설치했으며 각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
라는 보고를 올렸다. 동강(東江)에서 돌아오던 왕이 이 보고를 듣자 말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신하들이 요동을 정벌하려는 나의 전략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고려사 우왕 14년(1388) 무진년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407&cid=49629&categoryId=49629

비좀와라 17-10-29 15:29
철령의 위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 입니다.

이 철령의 위치를 어디로 할 것 인지로 고려와 조선의 영토가 완전히 바뀌게 된단 말이죠.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이성계 휘하의 여진족속으로 당연히 그 후의 조선국왕에 복속되는 존재죠. 그런데 주류사학에서는 이성계의 고향을 함경도로 설정해서 누르하치의 여진족도 역시 함경도에 있어야 합니다.

후일 조선은 함경도를 완전히 병합 햇으니 당연히 여진족도 완전히 조선에 병합 된 것이죠.

그리고 누르하치 집안은 명나라의 간섭도 받던 관계 입니다. 그럼 주류학계의 주장을 따르면 명나라 영토는 함경도 북부와 만주 전지역이 되는 것인데 이게 사료기록과 맞지 않죠.

이 모든 것이 철령의 위치 설정에서 어긋난 것 입니다.

주류사학의 주장이 너무 모순점이 많단 말이죠.
감방친구 17-10-29 15:42
일단 저 역시 이곳의 여러 유저와 마찬가지로 역사애호가이니 전문적인 내용, 혹은 과학적 논박능력은 갖추질 못 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 독해력ㆍ사리분별력에 근거하여 공부하고 따져볼 뿐이지요

일단은
ㆍ철령
ㅡ 우왕 때의 철령은 지금의 철령이 사리상 맞아보입니다
ㅡ 명나라는 그곳이 원래 원나라 땅이었으니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는데
ㅡ 고려가 군사적 충돌을 불사하며 강하게 저항하고
ㅡ 또 그곳이 원나라 관할도 아니었고
ㅡ 요나라 이래로 공험진 이남이 고려 땅이었음을 사실 근거로 내세워서
ㅡ 지금의 요동 개원으로 명나라로하여금 철령위를 물리게 만듭니다
ㅡ 여기서 우리 후손의 쟁점은 공험진의 위치 문제가 되겠군요

다음으로
ㅡ 이왕 요나라를 언급할 것이면 요동의 요하 중류까지 연고권을 주장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구요
ㅡ 어쨌든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공험진, 선춘령 이남까지 조선의 연고권을 인정하지요
ㅡ 조선초기에 이를 근거로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과 계속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ㅡ 그리고 명나라는 나라가 개쪽 날 때까지 요동의 일부만 겨우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으로
ㅡ 여진족은 참말로 이성계 시절에 확실히 경계를 긋고 저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동화했다면 조선의 영토는 만주를 아우를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ㅡ 여진족은 계속 옮겨 다니며 살았잖아요
촐라롱콘 17-10-29 15:31
[[우왕의 요동 공략은 이성계의 쿠테타로 실패했지만 명나라의 철령위를
지금의 요동 개원으로 철수시키는 역할을 함]]
.
.
오히려 정 반대 논리가 맞지 않나요...??

오히려 위화도회군 이전의 고려는 북원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명나라 입장에서 우리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토문제에서도 트집을 잡아 강경하게 나갔던 것이고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친명 노선을 견지하는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이상 명나라 입장에서는
쥐꼬리만한 영토가지고 우리나라와 굳이 분쟁거리를 만드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쳘령위를 후퇴시킨 것이구요~~~

그리고 위화도회군 전후시기 고려인들이 인식했던 철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위의 본문글에서도 명확히 나타나 있네요!
개경에서 300리 떨어진 거리라면 강원도~함경도 접경의 쳘령이 정확히 맞는 것이지
어림잡아도 1,000리 이상 떨어진 요동의 철령은 절대 아님을 쉽게 알수 있는데...

그리고 아랫글에서 분명히 위 본문내용에 해당하는 글을 제가 댓글에서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분이 또다시 제 댓글에 철령의 위치가 그래서 정확히 어디냐고 다시 묻고 앉아있으니....
쇠귀에 경읽기도 아니고... -.-
비좀와라 17-10-29 15:36
그래서 철령의 위치가 강원도 지역이라는 것이 님의 주장 이잖아요.

다시 한번 확인한것 가지고 이상한 소릴 하기는...

그럼 이성계가 개성에서 강원도로 출병 했다가 회군 했다는 소리에요?
촐라롱콘 17-10-29 15:44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니락까먹는 소리인지....???

위화도 회군....!!! 위화도 어딘지 모르세요...???

압록강하구 다시말해 오늘날 중국단동과 북한의 의주 사이의
압록강 한 가운데 있는 섬이 위화도잖아요...!!!

요동정벌하러 가던 중에 당시 우리영토의 맨 북단인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고...

철령은 강원도-함경도 접경지역이니 개경을 기준으로는 동북방에 위치하고
위화도-요동 방면은 개경을 기준으로는 서북방에 위치하고...
비좀와라 17-10-29 15:47
철령이 강원도에 있다면서요?

이성계가 정벌하려고 한 지역이 철령이 있는 지역 인데요?

그러니깐 강원도에 있는 철령지역을 치러 가는데 왜 지금의 압록강으로 가냐고요?
감방친구 17-10-29 15:51
그게 아니라
철령에 설치하겠다는 게 철령위
님은 철령과 철령위를 혼동하는 듯

철령
ㅡ 고려 우왕 때 철령 = 지금의 철령

철령위
ㅡ 명나라가 철령에 설치하고 그 위쪽 땅 다 가져가려했다가 고려의 반발에 부딪혀 요동 개원에 설치

철령ㅡ지금의 철령
철령위ㅡ지금의 요동 개원
촐라롱콘 17-10-29 15:55
철령이북에서부터 적어도 오늘날의 함경남도일대까지는 이미
고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명나라가 철령이북은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땅이니
원나라를 계승한 우리 명나라에게 다시 토해 놓으라고 강짜를 부린 것이고

이에 우왕과 최영이 반발하여 만주-한반도 일부를 관할하는 명나라 요충지에
해당하는 요동을 점령하여.. 위기를 정면돌파하려고 시도한 것이구요....

철령과 그 이북의 상당한 지역은 이미 고려땅인데 왜 철령일대를 치러가요....??
감방친구 17-10-29 15:46
오히려 정 반대 논리가 맞지 않나요...??

오히려 위화도회군 이전의 고려는 북원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명나라 입장에서 우리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토문제에서도 트집을 잡아 강경하게 나갔던 것이고

ㅡㅡㅡ 이거는 님 얘기도 옳다 볼 수 있겠네요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친명 노선을 견지하는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이상 명나라 입장에서는

ㅡㅡㅡ 여기까지는 끄덕끄덕

쥐꼬리만한 영토가지고 우리나라와 굳이 분쟁거리를 만드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쳘령위를 후퇴시킨 것이구요~~~

ㅡㅡㅡㅡ 그런데 이거는 뭡니까? 고려가 강하게 나가고, 또 사실 근거에 맞으니 후퇴를 시킨 것이죠 명분이 없으니까요  명분으로 내세운 원래 원나라땅 근거가 사실이 아니니까요
비좀와라 17-10-29 15:50
심양왕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도 고려영토 입니다.

심양왕과 고려와의 영토분쟁이 사실 심양왕이 반란을 일으킨거죠.

심양왕이 몽골왕실에 복속을 청하자 몽골왕실이 거기는 우리 땅이 아니니 거부한다고 했죠.

몽골왕실이 자신들의 땅이 아님을 확인 했는데 왜 몽골 땅이란 말이죠?
감방친구 17-10-29 15:53
원래는 고려영토였죠
그러다 금에게 빼앗기고
원에 행정편입되었죠

원나라 시대의 심양왕 관리지역은 요동ㆍ남만주인데
여기는 원나라 땅이었어요
도배시러 17-10-30 04:04
ㅡ 개성~지금의 철령 300 여리, 개성~평양 400여리 => 요거는 어페가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가 里를 측정 할 수 있었나요 ?
里를 측정하는 기리고차는 세종대왕의 작품입니다.  고려시대에 있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조선 사관이 임의로 위치를 정하고 기록한 수치라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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